운전 면허증 / 서순희
학교에 근무하면서 주로 시내버스, 택시로 출퇴근했다. 직장 생활이 끝나자 가장 고맙게 여겼던 것은 23년간 이용했던 대중교통이었다. 90년부터 2007년까지 택시를 타고 출근하면, 같은 차도 여러 번 탔고, 때론 기억을 못 하는데 기사님은 알은 체 하셨다. ‘선생님 택시비가 많이 들겠어요 자가용으로 출근 해 보세요’ 라고 인정어린 말도 들었다
97년 아이엠에프( IMF)가 터졌고 매스컴에서 심각한 한국 경제 소식을 접했다. 공장 폐쇄, 파산, 노숙자, 실업자, 가출, 이런 말이 끊임없이 우리 곁에 있었고, 남편 실직으로 아이를 가진 엄마는 ‘배속 아이를 지워 버린다’고도 했다. 큰애는 고3이었는데 저녁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올 때, 마지막 차를 타는데 3명 정도 사람이 있다고 한다. 엄마 자가용 사서 데리러 오면 안 되냐고 하길래, 지금은 외환위기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아야 하고, 너는 고등학생이기 때문에 마땅히 시내버스로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거절했다.
애기 아빠도 시외버스로 학교를 오갔다. 아침 6시에 집에서 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다시 시외버스로 바꿔 타고, 성전에서 내려 2km 걸어가야 학교에 도착했다. 시골이라 시내버스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도 자가용을 사면 안 되겠냐고 하길래 지금은 아이엠에프(IMF)라 그대로 다니라고 하니 아침에 출발한 시외버스는 손님 2명이 타면 성전까지 아무도 안타서 버스 기사님께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나를 쳐다볼 때 지금은 때가 아니니 이해하라고 자가용은 사지 않았다.
외환위기를 마치자 남편과 나는 운전면허증을 따려고 학원에 다녔는데 , 남편은 1회에 합격했고, 나는 도로 주행에서 재시험을 보고 통과했다. 새천년이 되자 교직원은 103명이 되었고, 100명은 자가용, 3명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출퇴근했다. 3명은 나, 공익요원, 행정실 직원이었다. 자가용을 가진 사람들은 학교 급식이 안 되는 날 대부분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남편은 나에게 자가용을 사서 출퇴근하라고 했지만, 중고차지만 남편 차가 있는데 내키지 않아, 영업용 택시와 계약하여 출근했고 , 학교를 그만둘 때까지 이용했다. 직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남편차를 새 차로 바꿔 주고, 작은아들도 상근 예비역이 되었다, 매일 늦잠을 자고, 아침에 배치된 동사무소에 가는 것이 힘든지 아빠에게 자가용 태워 주라고 사정하는 것을 보고 군인으로서 돼먹지 못한 행동이라고 꾸짖고, 남편에게도 도와주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운전 면허증은 끝내 장롱에서 나오지 못했다. 2번 갱신했지만 작년에 경찰서에 반납했다. 운전대 잡는 것을 포기했지만, 후회는 없다, 아들들에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라고 한 것이 인내심을 갖게 했다고 작은아들은 말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학교도 못 가고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식당에서 온종일 채소 다듬고, 씻고. 설거지를 하고 마지막에는 쓰레기를 치웠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했던 다른 친구들은 도망갔다고 한다.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1년을 일했다. 나중에는 식당 사장님께서 같이 일해 보자며 많이 아쉬워했다.
남편은 학교 출퇴근을 자가용으로 한다. 힘차게 인사하며 집을 나갈 때 하느님께 기도 드린다. “ 운전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첫댓글 제가 컴퓨터에 미숙해서 고친글을 답글에 올려야 하는데 잘못 올렸습니다.
이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