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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1979년 10월 26일, 청와대 인근 궁정동 안가, 박정희 대통령과 경호실장 차지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비서실장 김계원이 참석하는 연회가 열렸다. 그리고 저녁 7시 40분, 궁정동 안가를 뒤흔드는 총성이 울렸다. 탕~탕~탕~, 방송: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아 향년 62세를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10.26 박정희 대통령 피살--------------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보신 것처럼 오늘의 주제는 10.26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서 저격을 당하면서 현대사의 흐름이 확 바뀐 거잖아요.
오제연/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맞습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박정희 정권의 끝이 찾아왔고요. 그날 이후의 역사도 우리가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전개가 됩니다. 이날 김재규에 의해서 저격을 당해 살해당한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만이 아니라 차지철 경호실장도 피살당하게 돼죠. 당시 현장검증 조사에 따르면 방바닥에는 피가 응어리진 채로 말라 붙어있었고 출혈이 특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허진모/작가: 저는 이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 소식이 전해 졌을 때 부모님부터 우셨어요.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다 울고 그리고 학교에 등교를 했는데 선생님이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서 나타나고, 교장 선생님은 억~억~거의 소리를 내서 울었어요. 진짜 나라가 망하나 이런 생각을 했었죠.
오제연: 그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9일 동안 진행이 됩니다. 그래서 이 장례행열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렸다고 하구요. 그 중에는 부모를 잃은 것처럼 이 죽음을 슬퍼하고 통곡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저는 좀 의아한게요. 1972년 유신선포 이후로는 대통령 욕만해도 끌려가고 남산에서 고문당하고 심지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았잖아요. 근데 이제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 엄청 울고 일반 국민들이 슬퍼했다는 게 개인적으로 모순 같기도 하고,
오제연: 그래서 10월 26일 그날은 이해하고 해석하고 평가하기가 참 어려운 날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직 대통령이 총에 맞아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라고 하는 어떤 사안의 중대성이 있구요 또 그 총을 쏜 사람이 현직 중앙정보부장이라고 하는 사안의 민감성이 있습니다. 여기에 결국 이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 18년이 막을 내렸다 라는 의미에서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박정희 정권 18년을 어떻게 평가해야 될 것인가 이러한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사실 어렵고 당혹스러운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최원정: 그래서 오늘 그 사건을 제대로 파헤치기 위해서 저희가 10.26 현장 모형을 만들었는데요. 여기가 사건 현장이에요.
오제연: 궁정동 50번지, 우리가 흔히 안가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여러분, 안가라고 하는 곳이 뭔지 아세요?
다니엘: 안전가옥 safe house~ 이런 뜻인거 같은데~ 일반 주택이나 아파트에서 보안장치를 해둔 그런 곳이고, 해외에서도 신변 보호가 필요한 정치인들도 이용했다고 하고 영화에서도 많이 다루었다고 해서~
허진모: 작전에서도 이용되기도 하고~
오제연: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여러 곳에 이런 안가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궁정동 안가는 그중에서도 청와대에서 가깝고 그 내부가 넓었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자주 이용했던 안가라고 할 수 있구요. 안가의 존재에 대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외에 경호실이나 비서실, 중앙정보부의 관계자 일부만이 알 수 있는 아주 극비 보안시설이었다.
최원정: 혹시 이 안가가 지금도 존재하나요?
오제연: 그거는 모르죠, 현재 어떻게 하고 있는지~ 우리 같은 일반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
허진모: 그런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공개가 되었는데 그 안에 시설이 일반인이 보기에는 심상치 않았던 거죠. 넓은 침실에 아주 고급스러운 가구가 있었고 그래서 대중의 이목을 끌었죠. 박정희 대통령은 굉장히 서민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면서 통치를 했었는데 이런 호화스러운 시설에 유희를 빈번하게 즐겼다는 자체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배신감을 느끼게 했었죠.
이시원/배우: 하긴 빈농의 아들 그런 이미지로 농촌에서도 인기가 많았잖아요. 그런데 여기 살펴보면은 안주들에 느낌이나요. 전복도 있고 송이 버섯 요리도 있구요.
다니엘: 외국인들이 흔히 가는 한정식이네요. 술도 시바스 리갈~
이시원: 시바스 리갈이 지금 가성비 좋은 양주로 그냥 알려져 있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에 양주가 많이 들어오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성인들한테는 굉장히 고급스러운 술로 인정이 됐고~ 또 이게 박 대통령이 좋아했던 술로 굉장히 인기를 끌었다고 해요. 또 보니까 여기 주전자가 있는데 이건 막걸리죠?
오제연: 그건 막걸리입니다. 근데 박정희 대통령은 시바스 리갈 양주도 주전자에다 따라 가지고 거기서 마셨다고 그래요. 그게 더 술맛이 난다 라고 생각이 났던 것 같애요. 또 한마디 더 하면 술담당 역할은 김재규가 했다고 합니다.
허진모: 영화에도 그렇게 나오죠.
--------(동영상) 영화 <남산의 부장들>中에서, 박정희役: 역시 김부장이 해야 술맛이 있어, 김재규役: 저야 바텐더 노릇은 잘 하죠, 차지철役: 김부장, 다른 건 몰라도 술은 잘 맙니다----------
최원정: 얼음 타서 옆에서 올리고 하는 김재규가 제조상궁 같은 것~
오제연: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사실은 안가를 관리하는 주체가 바로 중앙정보부였어요. 중앙정보부장이 호스트 같은 역할은 하는 거죠. 대통령의 은밀한 공간, 궁정동 안가에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그 다음에 김계원 비서실장 그리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이렇게 네 사람이 모여서 술자리를 갖습니다.
허진모: 유신체제의 권력의 최정점이 모였죠. 1위부터 4위까지 여기 모였는데 중정요원들은 이 모임을 별도의 은어로 불렀습니다. 대행사~
최원정: 큰행사~
허진모: 그렇죠, 그렇다면 소행사도 있었겠죠. 소행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여성과 은밀하게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것을 소행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매우 빈번하게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보부가 하는 일이 본연의 업무외에 진짜 이것이 굉장히 큰 주된 업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유신체제 말기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모습이었죠. 일명 측근 정치라고 할 수 있는 그 모습을 그냥 보여주고 있는 거죠. 측근을 통해서만 컴뮤니케이션을 하고 공개적인 반대에 대해서는 혐오적인 태도를 갖는 건데 박정희 대통령은 이 세명을 주로 상대하고 소통을 했던 거죠. 그러니까 친위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제연: 6시 5분부터 시작한 연회에서 6시 40분쯤 됐을 때 두명의 여성이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가수 심수봉과 모델 신재순입니다. 두 사람이 대통령 양 옆에 앉게 되는 거죠.
다니엘: 심수봉씨는 그 당시 당대 최고의 가수였잖아요. 그 노래~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이시원: 오~이제 독일 사람이 트로트도 부르고, 근데 어떻게 보면 이때 분위기는 참 좋았겠어요.
허진모: 진짜 그랬을 거로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심수봉씨의 기타반주에 맞추어서~ 사랑해 당신을~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하니 분위기는 좋았죠.
오제연: 처음 분위기는 좋았는데~ 갈수록 대화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합니다. 김계원의 증언에 따르면 본인이 애써 화제를 자꾸 바꿀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이야기가 부산에서 벌어진 부마항쟁이죠. 그 이야기와 김영삼 이야기로 자꾸 되돌아갔다고 해요. 박정희 대통령이 부산데모만 해도 그렇지 신민당이 계획해서 뒤에서 하는 짓인데 중정은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야겠어,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하면서 김재규를 질책했다는 거예요.
최원정: 부산데모란게 1주일전에 있었던 부마항쟁을 말하는 거죠 (부마민주항쟁(1979.10.)-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며 부산-마산을 중심으로 벌어진 시위사건),
오제연: 박정희 대통령은 부마항쟁을 시민들이 일으킨 항쟁이 아니라 김영삼이 배후에서 조종한 사건이라고 생각을 했구요. 이것을 옆에 있던 차지철이 부추깁니다.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간에 전차로 싹 깔아 뭉개버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서 중앙정보부는 뭐하냐 라면서 김재규를 비난했던 거죠.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이 맞장구를 치고~ 이러니까 시간이 갈수록 김재규는 더 위축되고~ 이런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최원정: 술자리 진짜 애매했겠다~
이시원: 그런데 김재규가 차지철은 나이 차이도 그렇고 군 계급도 그렇고 경호실장이 말을 막해도 되는 건가요?
오제연: 일단 김재규와 차지철은 8살 차이예요. 김재규가 나이가 훨씬 많고 군에서의 경력을 봐도 김재규가 육사 2기입니다. 반면에 차지철은 육사 12기가 아니고 12기 시험을 봤다가 떨어진 다음에 포병간부시험을 봐가지고 장교로 들어와서 활동했던 경력을 갖고 있는 거죠. 김재규는 1973년까지 군생활을 했는데 쓰리스타(중장)로 예편을 해요. 반면에 차지철은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대위로 참여를 하고 그 직후에 확 계급을 올려서 중령으로 예편을 합니다. 그렇게 해도 결국은 중장계급하고는 바교하기가 어려운 거죠. 더 중요한 것은 차지철이 절대로 따라 올 수 없는 김재규와 박정희만의 끈끈한 관계가 있다는 거죠. 김재규가 육사 2기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사실은 박정희 대통령이 육사 2기 출신이에요. 두 사람이 육사 동기이구요. 게다가 고향도 경북 구미로 같습니다.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해서 박정희의 후원 속에서 승승장구하는 거죠. 육군방첩대장(1966년)도 하고 그 다음에 보안사령관(1969년)도 하고 그 다음에 건설부장관 (1974년)도 하고 그리고 마지막엔 중앙정보부장(1976년)까지 올라가는 거죠.
이시원: 그야말로 박정희 정권에서는 최고의 스펙이라고 볼 수 있는데~ 도대체 차지철은 뭐가 더 대단해서 김재규한테 막말을 하고 그랬을까요?
다니엘: 그런 자격이 있었나?
허진모: 차지철은 또 차지철 나름대로 각별했던 거죠. 자신들 말로는 혁명동지, 5.16 군사쿠데타를 같이 일으켰던 쿠데타 동지였던 거예요. 김재규는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차지철은 그거 하나만으로도 전부 다 만회할 수 있다고도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5.16 쿠데타 주동자 중에 차지철은 최연소였습니다. 당시 경호장교였는데 나이는 27살~
이시원: 어린 나이에 제가 지금 이러고 (두팔을 양 허리에) 있어 보니까 자신감이 샘솟는 것 같애요. 그런 것 아무나 할 수 있는 포즈가 아니거든요.
최원정: 인제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은 차지철이 저때 맺어진 거고, 이후에 경호실장이 되면서 권력의 최정점을 찍는 거잖아요. 근데 그 경호실장이 되기까지 아주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동영상) 1974년 8월 15일 제29주년 광복절 기념행사. 기자: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이 이 자리에 참석하고 계십니다. 박정희: 우리가 그 동안~ 탕~ 탕~ (육영수 여사 피살)--------
최원정: 정말 충격적인 장면인데~
허진모: 이때 육영수 여사 사망이란 책임을 지고 무려 13년 동안 경호책임자였던 박종규가 물러나고 그 후임으로 차지철이 발탁이 됩니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을 겨냥했던 총탄으로 영부인이 죽고 불안감과 상실감이 동시에 혼재했던 매우 불안전한 상태였을 수도 있죠. 그런데 그것을 차지철이 메웁니다.
이시원; 잘 파고드는 건가요?
허진모: 그렇죠, 차지철이 잘 파고 들었죠 뭘로? 절대적인 충성심, 자신의 집무실에 “각하를 지키는 것이 국가를 지키는 것이다.” 라는 표어를 딱 걸고 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통제를 함으로써 대통령을 독점했다 라고 할 수도 있죠.
최원정: 인의 장막을 쳤군요~ 대통령 앞에서~
허진모: 그래서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어떤 사람이든 간에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박대통령과 만날 수 없었을 뿐더러 중요한 업무보고를 갖고서도 대면하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시원: 대통령이 나라를 운영할려면 눈과 귀를 열고 민심을 듣고 국정운영 방향을 정해야 되는데 이렇게 한 사람이 문고리를 잡고 있어도 되는 건가요?
허진모: 차지철은 참 대단한 명분이 있었죠. 각하의 안전을 위해서 너네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 그러니 내가 판단을 하고 난 다음에 만나게 해주겠다 라는 것이 이 사람의 이유였는데 문제는 김재규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김재규가 직접 만나는 것도 단속을 했을뿐더러 문서로 보고하는 것도 다 차지철의 사전검토를 받았어야 하는 거죠. 차지철이 이때 내 걸었던 이유가 뭐였느냐면 종이에 독이 묻어있을지도 모른다~
다니엘: 김재규 입장에서는 대단한 모욕처럼 느꼈을 것 같애요. 본인이 훨씬 나이도 많고 위치도 더 높고 갑자기 경호실장이 나한테 너 다 내놔라 검토할꺼야 라고 하면 이게 정말 사이가 안좋아질 것 같애요. 박정희 대통령 본인은 어떻게 그걸 볼까요?
이시원: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 일 것 같애요. 박대통령은 2인자 끼리 서로 경쟁을 시켜서 견제시키게 만들었잖아요. 계속 얘기를 들어보니까 균형이 깨진 느낌이 들거든요. 도대체 무슨 생각이 었을까요?
최원정: 박정희 대통령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요? 우리가 궁금해지면 생각나는 사람, 이광용 아나운서 나와 주세요.
----------------이광용: 2주 동안 못나와서 짤린 줄 알았던 그 사람 이광용 2021년 첫 인사 드립니다. 차지철의 월권행위는 특히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자극하는 경우가 아주 아주 많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정치 관련된 문제는 중앙정보부 담당이었죠. 하지만 차지철은 정치와 관련해서 각종 공작을 직접 설계하고 심지어 중정에 지시까지 내렸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면 아니~ 그건 중정에서 한 거잖아 라고 책임을 중앙정보부에 떠넘기기 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시원: 와~ 너무 하네요. 김재규 입장에서는 참 섭섭했을 것 같애요.
이광용; 그렇겠죠, 그런데 김재규와 차지철이 둘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두가지 사안이 있었습니다. 첫번째 격돌 바로 유신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해 오는 김영삼의원 문제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영삼 의원을 진짜 싫어했어요. 정말 너무 너무 싫어했어요. 그런데 우리 대통령의 이런 마음을 헤아린 차지철이 정치공작으로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시켜 버린 겁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제명으로는 부족했는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김영삼 구속시켜~ 이렇게 지시를 내립니다. 그런데 김재규는 그런 강경책만 쓰는 게 싫었습니다. 설득도 하고~ 협상도 하고~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차지철은 신민당 너희들 까불고 나오면 전차로 다 쓸어버리겠어 (피의자 김재규 신문조서(1979.11.17)-차지철이 “X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간에 전차로 싹 깔아 뭉개버리겠습니다”고 하므로), 김재규는 훗날 진술하기를 차지철이 계속해서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정치 스타일을 고수하는게 못마땅했습니다.
이시원; 진짜 차지철은 각하가 다 맞습니다. 이거 같애요.
최원정: 돌격대장 같죠, 무식하게 저돌적인게 느껴져요.
오제연: 그런데 차지철에 대한 여러가지 일화들이 김재규가 재판과정에서 혼자서 이야기한 내용들이 많아서 두 사람의 갈등관계를 고려하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광용: 김재규와 차지철의 두번째 격돌 바로 부마항쟁입니다.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일어난 작은 시위가 곧 5만 군중이 합세하는 대규모 가두시위로 발전합니다. 부산에 내려가 부마항쟁을 직접 살펴본 김재규는 이 사태를 독재정권에 대한 민란으로 분석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심각성을 보고하게 됩니다.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이고 고물가에 대한 반발 그리고 조세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까지 겹친 민중봉기입니다. 불순세력은 없습니다 라고 말했죠.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답합니다.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동영상) 박대통령: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면 누가 나를 사형시킬 거야--------
이광용: 여기에 차지철은 한 술 더 뜹니다. 그 유명한 발언을 하죠.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정도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 200만 탱크로 밀어버린다고 큰일 나겠어요?
이시원: 정말 어이가 없네요. 어떻게 정치지도자 라는 사람이 그런 무서운 말을 할까요?
다니엘: 캄보디아는 그 사태가 정말 인류 역사상 끔찍한 학살 중의 하나 이잖아요. (캄보디아 킬링필드(1975년)-캄보디아의 폴 포트가 이끄는 공산주의 무장단체가 전체 인구의 25%인 약 200만명을 학살한 사건), 그걸 그냥 그 정도 우리도 할 수 있지 뭐 이게 정말 위에 있는 권력자들이 할 수 있는 소리인지~
허진모: 생각 자체가 도를 넘은 거죠~
최원정: 그런데 이런 중요한 싯점에서 항상 대통령은 차지철편만 들었다. 그게 문제예요~
이광용: 그렇게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을 밀어주고 밀어주니까~차지철의 위세가 날로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때 차지철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 있는데요. 바로 차지철이 지휘했던 국기 하기식입니다. 차지철은 1주일에 한번 정부 부처 장차관은 물론이고 군, 국회, 학계, 기업, 언론계 인사들을 저녁이나 한번 합시다 라고 초대를 합니다.
이시원: 그 당시에 이름 좀 알려진 사람들은 다 불렀던 거예요.
이광용: 저녁을 먹기 전인 매주 토요일 저녁 5시 경복궁 경내 수경사 30단 연병장에서 경호원과 청와대를 지키는 작전 부대 장병들을 대상으로 도열을 시켜놓고 자신만의 행사를 차지철이 연겁니다. 차지철은 군악대의 우렁찬 연주에 맞추어서 지휘봉을 들고 초청인사들과 함께 입장을 한 뒤에 가운데 단상에 거만하게 앉아 국기 하기식을 지켜 봤습니다.
다니엘: 아니~ 장병들 세워놓고 본인이 단상에 섰는데 이게 대통령 흉내~ 대통령 놀이~?
오제연: 맞죠, 이게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국군의 날 같은 때에 군대를 사열하는 위용을 본인이 벤치 마킹해 가지고 자신의 권력을 확대시키는 그런 수단으로 삼은 거죠. 그러니까 결국에는 높은 사람들도 차지철이 하는 이런 퍼포먼스에 같이 장단을 맞출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거죠.
이광용: 시간이 흐를수록 김재규와 차지철 둘 간의 균형은 차지철 쪽으로 급격하게 쏠리게 됩니다. 차지철은 군장성 인사에 관여하는 것은 물론 국회 상임위원장까지 지명합니다.
허진모: 차지철의 저런 전횡에 공화당 의원들도 차지철 때문에 우리 이러다가 망할 수 있겠다 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이광용: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을 중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육영수 여사였는데요. 육영수 여사는 이 사람 고지식한 인물이니까 함께 한번 일해 보세요 라고 추천을 했다는데요. 고지식했다는 게 어떤 의미냐 차지철이 독실한 기독교신자고 술도 모르고 여자도 몰랐다는 거예요.
이시원: 진짜 반전인데요.
이광용: 반면 김재규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간경변을 앓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그런데 박정희대통령은 그 좋은 권세는 차지철에게 쫙 몰아주고 김재규 부장에게는 독한 술만 계속 먹였으니까 술도 적당히 줄 때 좋은 겁니다.
최원정: 간경변이 걸릴 정도로 대통령이 계속 술을 따라주니~
오제연: 10.26 요때쯤 되면은 김재규가 몸이 너무 안좋아서 술을 잘 못마셨다고 합니다.
이시원: 그렇다면 오랫동안 싸여왔던 분노가 폭발해서 우발적으로 총을 쐈다고 볼 수도 있는 건가요?
다니엘: 근데 그래도 본인은 명색이 중앙정보부장이잖아요. 그러면 사실 아마추어도 아닌데 그냥 욱해서 대통령을 쏘는게 말이 될까?
오제연: 일단 김재규와 차지철 사이가 너무 안좋았기 때문에 사건 직후에 많은 사람들은 차지철과 김재규가 암투를 벌이다가 순간적으로 욱해 가지고 결국에는 차지철을 쏘고 곧 바로 박정희 대통령까지 쐈다 이렇게 보는 거죠.
허진모: 차지철은 김재규를 대놓고 김부장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에 대한민국에서 김재규를 김부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사실은 대통령 밖에 없었죠. 명백하게 차지철이 김재규를 하대를 한 거죠. 김재규는 정말 화날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차지철 해치워버리겠다 라는 말을 입버릇 처럼 했다고 합니다. 지근 거리에서 그걸 지켜보았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말에 따르면 우군 끼리의 싸움이 얼마나 심했는지 김일성과의 싸움 보다 더 심하게 느꼈다 이렇게 얘기를 한 적도 있습니다.
이시원: 그렇다면 진짜 둘의 기싸움 때문에 우발적으로 10.26이 벌어졌을까요?
오제연: 그렇게 생각하세요?
최원정: 우발적이었을까 계획적이었을까 정말 이 부분이 제일 궁굼해요.
오제연: 이 부분을 따져보기 위해서 우리는 10월 26일 그날로 다시 한번 돌아갈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아침 10시 30분에 박정희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 그 다음 비서실장 김계원과 함께 헬기를 타고 당진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에 참석을 합니다. 이어서 헬기에서 당진 송신소로 이동해가지고 완공식을 치하하는 행사를 갖게 됩니다.
이시원: 일정을 들어보면 여느날과 다를 것 없는 대통령의 평범한 정무일정 같은데요~
오제연: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함께 하지 않았다는 거죠. KBS 당진 송신소 같은 경우는 대북방송을 주로 하는 곳이기 때문에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곳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중앙정보부장이 가는게 자연스러운데 빠진 거죠. 알려지기로는 그날 아침에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가지고 비서실장까지 자리를 비우는데 중앙정보부장이라도 자리를 지켜야 되지 않겠느냐 서울에나 있어라 이런 식으로 전화를 했다는 거예요.
다니엘: 아니, 그런데 이렇게 명령 내리는 것도 말이 안되지만 김재규 입장에서는 그 중앙정보부장에서 당연히 가야하는 자리 아닐까요?
허진모: 그런데 이것이 정말 대통령의 뜻이었는지 아니면 차지철이 독단적으로 막은 것인지는 그것을 알 수가 없지요. 그런데 당시는 이미 대통령의 뜻이 차지철의 뜻이었고 (以心傳心) 차지철의 뜻이 대통령의 뜻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오제연: 이제 오후 4시 10분이 되었습니다.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전화를 받습니다. 저녁 6시에 대행사를 준비하라고 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가 있으니까 궁정동 안가로 와라. 참석자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이다. 그런데 이때 김재규가 뜻밖에 행동을 하게 됩니다. 바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에게 전화를 걸어서 궁정동에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약속을 잡은 거죠.
이시원: 그 중 약속을 잡은 거네요.
최원정: 그렇죠, 싫어하는 더블 약속~
오제연: 그렇게 하고나서 시간을 맞추어서 정승화가 궁정동으로 오게됩니다. 그러니까 김재규가 정승화 한테가서 갑자기 대통령과의 저녁 식사가 잡혀가지고 식사를 같이 하기 어려운데 당신은 옆 건물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그럼 내가 적당히 저녁 먹고 합류하겠다라고 정승화한테 말을 합니다.
이시원: 이거 뭔가 군에서 가장 높은 육군참모총장과 약속을 잡고 대기를 시켰던 거잖아요. 도움을 받으려고 했던게 아닐까
최원정: 사전공모가 있었던 건 아니죠?
오제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김재규가 나름의 계획을 세워서 이 사건을 일으켰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결정적인 큰 증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인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치면은 결국 가장 먼저 해야될 것은 바로 군대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거예요. 당시 군사정권에서 권력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대를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죠.
허진모: 게다가 정승화는 개인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김재규 하고 굉장히 친밀도가 높았습니다. 김재규는 정승화가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하는데 1등 공신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감사인사를 드린 사람이 김재규였던 겁니다.
최원정: 그러니까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신뢰관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허진모: 김재규는 정승화를 측근까지는 몰라도 정말 든든한 우군 정도로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라고 추정할 수는 있죠.
오제연: 그런데 정승화를 대기를 시켜놓은 상태에서 김재규는 2층 집무실로 올라가서 권총을 꺼내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전과장이었던 박선호와 수행비서였던 박흥주를 불러서 시국이 위험하다. 오늘 저녁에 해치우겠다 (피의자 김재규 신문조서(1979.11.)-오늘 저녁에 해치올 테니 너희들은 방안에서 총소리가 나면(---) 나를 도와 경호원들을 처치하라고 하면서), 그래서 총소리가 들리면 너희들은 밖에서 경호원들을 제압해라. 불응하면 발포해도 괜찮다 이러니까 깜짝 놀란 두 사람이 각하까지 입니까? 라고 물으니까 김재규가 그렇다고 하는 거죠.
이시원: 얼마나 놀랐을까요? 갑자기 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하겠다고 하니까~
최원정: 이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몇 달에 걸쳐서 손발 맞추어 보고 해야 되는 거 아니예요? 당일 직전에 심복들한테 얘기했다는 게 난 이해가 안가는 데~
허진모: 김재규는 정보부장으로서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던게 있었습니다. 뭔가하면 그 어떤 말이든 한번 나오면 어떤 과정을 통해서든 박정희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게 되어있다. 그도 그럴 것이 뭐냐하면 차지철이 경호실 내에서 직속으로 정보기관을 운영을 하고 있었구요. 사설로 정보부대를 돌렸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만큼 대통령의 눈과 귀가 많이 있기 때문에 심복들한테 까지도 감추었어야 할 정도로 보안을 생각했었어야 하는 거죠.
오제연: 또 박선호와 박흥주는 오랜 기간 동안 김재규와 여러가지 비밀스런 임무들을 수행했기 때문에 또 이런 부분에서 서로 손발이 맞게 되는 거죠. 그래서 육군참모총장이 와있다라고 한 김재규의 말에 박선호는 아~ 사전에 준비가 다 되어 있구나 라고 생각을 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김재규의 지시대로 30분만에 모든 준비를 마치게됩니다.
다니엘: 김재규가 혹시 걱정 안했을까 부하들이 나랑 협조 안하면 어떡하지?
허진모: 그렇게 생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관계는 상상이상으로 끈끈했던 것 같은데요. 이것은 재판과정에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김재규는 자기는 죽더라도 부하를 살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선처를 호소했구요 (김재규 최후 진술 (1980.12.18)-모든 원천은 나에게~내게는 극형을 내려주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 부하들은 단 한번도 김재규를 원망하거나 책망하거나 한 적은 없구요. 오히려 존경의 뜻을 표하기도 했었습니다.
오제연: 자, 이제 운명의 시간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0분이 됩니다. 오후 7시 40분에 술자리에서 대화를 이어가던 김재규가 갑자기 월터 PPK 권총을 뽑아듭니다. 그리고 먼저 차지철에게 그 총을 겨누어요. 그래서 첫번째 총알은 차지철의 팔에 맞게 돼요. 그리고 곧 바로 이어서 김재규는 그 총구를 돌려서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 가슴에다 총을 쏘게 됩니다. 그리고 화장실로 긴급히 도망가던 차지철을 쫓아서 김재규가 다시 한번 총을 쏠려고 하는데 그때 탄피가 총신에 끼어가지고 불발되게 됩니다.
이시원: PPK, 총 제가 찾아보았거든요. 근데 되게 작고요. 가벼워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스파이들이 암살할 때 많이 사용했다고 그래요.
오제연: 007에 쓰이는 총이 월터PPK 총이죠.
다니엘: 그런데 와중에도 희한한게 차지철이 도망갔잖아요. 경호실장이잖아요.
최원정: 몸을 던져서 막았어야지~
허진모: 잠시 총이 고장난 사이에 뭔가 조치를 취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는데~ 참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죠.
오제연: 두발의 총소리를 신호로 김재규의 부하들도 밖에서 청와대 경호원들을 제압하면서 저격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상자가 나오게 되고요. 김재규는 박선호로부터 새총을 가져와서 다시 한번 들어가서 차지철의 복부를 쏘고 결국 차지철은 이걸로 사망을 하는 거죠. 김재규는 다시 한번 박정희 대통령 한테 가서 이번에는 머리에다 다시 한번 총을 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김계원은 남아 있잖아요.
최원정: 김계원 한테는 총구를 안겨누었나요?
오제연: 김계원과 김재규는 사실 차지철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라는 면에서는 둘이 통하는 면이 있었고 술자리 가기 전에도 둘이 먼저 와서 차지철에 대한 불만을 서로 나누면서 김재규는 오늘 해치워 버릴까요? 이런 식으로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김계원은 거기에 대해서 평소에 차지철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던 그 정도 수준의 이야기, 우리 기분 안좋고 그러면 없애버릴까 이런 얘기하잖아요.
최원정: 교수님, 그런 성격이셨어요?
이시원: 조심해야 되겠네요.
오제연: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김재규는 김계원을 죽일 생각은 없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김재규가 나간 다음에 결국 김계원이 남아서 박정희 대통령을 황급히 병원으로 옮깁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숨진 상태였어요.
최원정: 지금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진 거죠. 빠~빠~빠~ 끝,
오제연: 약 5분 새에 다 벌어진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원정: 이제 뒷수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역사가 바뀌는 건데~그게 중요한 건데~
오제연: 이 술자리에서 일을 다 버리고 밖으로 나간 김재규는 옆 건물에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한테 달려갑니다. 근데 그때 그 모습이 피묻은 셔츠 차림에 신발도 안신고 황급하게 갔다고 그래요. 그리고는 정승화에게 큰일 났다. 차타고 가면서 이야기하자 하고 하면서 전용차에 함께 올라탑니다. 그런데 이때의 선택이 김재규의 운명을 가르게 됐다.
-----------------(동영상) 정승화役: (차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김재규役: 각하가 저격당하셨습니다, 정승화役: 어떻게 하다가요? 김재규役: (사탕을 입에 넣고 먹는다. 그리고) 사탕 하나를 정승화에게 준다, 정승화役: (사탕을 받고 바닥에 그냥 떨어뜨린다) 김부장, 육본으로 갑시다. 남산에 가서 뭐합니까 육본에 가서 계엄령도 선포하고 북한의 동향도 파악하고~, 수행비서役: 부장님 어디로 갑니까? 남산입니까? 육본입니까? (육군본부를 향해 U턴)-----------------
최원정: 중앙정보부장이면 남산으로 가서 진두지휘를 했어야지, 왜 저런 선택을 했을까요?
다니엘: 그리고 왜 차에 타서야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요? 미리 생각해 놓았으면 좀 운명이 달라졌을텐데~
이시원: 남산에 가서 수사는 중정이 맡겠다 했으면 솔직히 대통령도 없고 차지철도 없는 상황에서는 자기가 최고 권력이잖아요. 그러면 수사를 좀 다르게 할 수도 있고 그걸 잘 빠져 나올 수도 있었을텐데~
최원정: 판단력이 흐려졌다? 너무 흥분해서~
허진모: 대통령 암살소식이 처음 전해 졌을 때는 고위층들이 대부분 차지철을 범인이라고 지목했다고 합니다. “그 놈의 X끼가 기고만장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다.” 라고 분노를 했는데 이때 그 놈은 차지철이었던 거죠. 만약 김재규가 남산으로 갔다면 차지철이 권력에 집착하더니 대통령까지도 죽였다 그리고 나는 그 차지철을 처단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공작을 할 수도 있었죠.
최원정: 그렇죠, 현장을 잘 보전해서 차지철한테 누명을 다 씌우면 되는 거잖아요.
허진모: 중앙정보부가 공작이라면 뭔 못합니까.
이시원: 북한의 간첩이 와가지고 그런 적도 있으니까 사건을 꾸밀 수도 있었을텐데요.
오제연: 그래서 당시 김재규의 행동을 두고 계획했다 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술하고 그렇다고 허술하다 하기에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던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다 라고 많이들 얘기하는데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함께 차에 올라탄 그 순간부터 뒷수습에는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최원정: 차를 타는 것 자체가~ 여기 현장을 지켰어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거 아닌가요?
오제연: 거기서 눈여겨 볼게 사탕인데요, 김재규가 정승화한테 사탕을 건네 주잖아요. 그 사탕을 정승화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슬그머니 버려요. 정승화도 사실은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떠한 언질도 사전에 받지 못합니다. 상황파악을 전혀 못하고 있는 상태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김재규가 건네준 이 사탕 속에 혹시 약물이 들어있다면 어떡하나 (정승화 공소장中(1980.3.)-김재규가 사탕 1개를 주어서 먹으려다가 혹시 약물이 있어 김재규에게 이용당하지나 않을까 의심, 사탕을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여기에 약물이 있을 경우 내가 잘못하면 김재규에게 조종 이용당할 수도 있다 라고 의심을 했던 거죠. 김재규는 정승화를 믿을만하다 라고 판단해서 이 사건에 끌어들였지만 정승화의 생각은 달랐다는 거죠. 상황을 굉장히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고 거기서 굉장히 많은 의심들을 이미 하고 있는 상태였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함께 차에 올라탄 거 부터가 사실은 뒷처리에서 김재규 본인이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 거죠. 후일 김재규가 재판과정에서 진술한 내용에 따르면 김재규는 정승화가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던 걸로 보입니다.
허진모: 그래서 차를 U턴 하는게 우발적으로 자기가 생각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정승화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사실은 볼 수도 있는 겁니다. 김재규는 당시 정승화와 함께 육본으로 가서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주둔시켜 가지고 정부 부처 각 기관을 장악을 하고 난 다음에 정권을 교체하려고 생각을 했던 것이죠.
오제연: 요게 사실은 합리성도 있는거에요. 권력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결국 군대의 힘을 누가 장악하느냐가 중요한데 군대의 힘을 장악하는데 있어서는 사실 중앙정보부 보다 육군본부가 더 직접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아마도 김재규는 정승화를 믿고 U턴을 해서 육군본부를 장악할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조금은 성급했던 게 아닌가~
이시원: 이제 다들 얘기를 들어보니까 웬지 김재규의 계획은 무계획이 계획이다 이러지 않았을까 싶어요. 일단 한번 저질러보자. 박정희 대통령만 죽이면 뭐 어떻게든 되겠지 이런 거 아닐까요?
최원정: 중요한 김계원이나 정승화 한테는 얘기도 할만한데 이게 누설될까봐 안했어요. 왜냐면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김재규는 마음이 순수하다할까~
이시원: 안일한 것 같기도 하고~
최원정: 설마 나를 배신하겠어~
오제연: 김재규에 대한 인물평 중에서 부하직원들의 평인데 사람도 좋고 다 좋은데 치밀하지 못하다는 평이 있어요. 그런 김재규의 캐릭터가 이 사건에 투영된 면이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녁 8시에 육군본부 벙커에는 최규하 국무총리 그리고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 등이 모입니다. 근데 이 자리에서 김재규가 계속 지금 대통령이 유고상태다. 그래서 빨리 계엄령을 선포해야 된다 라는 주장을 해요. 하지만 거기 모인 각료들이 김재규의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김재규 한테 다구치는 거죠. 도대체 계엄선포의 사유가 뭐냐? 그리고 대통령이 유고라고 하는데 누가 대통령을 죽였느냐 자꾸 따지고 드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상황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뒤늦게 달려온 김계원이 정승화를 따로 불러가지고 누가 대통령을 죽였느냐 바로 김재규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알리게 되고 이에 정승화는 은밀히 군을 동원해서 김재규를 체포하게 됩니다.
이시원: 보안을 지키려다 보니까 오히려 계획이 허술해졌던 거예요.
최원정: 적어도 김계원한테는 대통령의 시신은 여기에 잘 간직하고 있으라든지~
오제연: 김재규가 떠나면서 김계원한테 분명히 얘기는 합니다. 이 자리를 그대로 보존해라.
최원정: 얘기를 해요?
오제연: 시신을 옮기지 말라고~ 그런데 문제는 김계원이 말을 들어야할 이유가 없는 거죠. 비서실장 입장에서 자기가 모시던 상전이 지금 죽게 생겼는데~ 그걸 병원으로 옮겨야지 그대로 놔둘 수가 없는 거잖아요.
최원정: 대통령 주치의가 있는 곳으로 옮긴 거잖아요 국군서울병원으로 옮겼는데 거기는 사실 보안사 관내 라면서요.
오제연: 보안사에서 그래서 일찍 이 상황을 체크를 하게 됩니다.
허진모: 거사 이후에는 정말 계획이 없었던 게 확실합니다.
---------------(동영상) 김재규: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면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이죠. 결코 저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혁명을 하지 않았습니다(김재규 최후진술 中)----------------
최원정: 김재규가 이제 최후 진술에서 혁명을 얘기하잖아요.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 행한 거라고 근데 이게 진심이고 사실일까요?
오제연: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단 김재규는 박정희 정권 내내 여러 요직들을 두루 맡으면서 이 정권을 유지하는데 앞장 섰구요. 김영삼 의원문제로 차지철과 대립했다고 하지만 YH사건 당시에 강경진압을 지휘한 사람도 김재규고 그리고 결국 김영삼 의원이 의원직에서 제명되는 과정에도 개입했던 사람이 바로 김재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재규의 행위는 복합적으로 섞여있는 면들을 우리가 함께 봐야되지 않을까~
다니엘: 저는 개인적으로 아직도 머리 속에서 맴도는 거는 만약에 정말 차지철이 제안했던대로 부마항쟁을 탱크를 동원해서 딱 쓸어버리겠다는 자기 말을 뱉은대로 행동했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까. 끔찍한 상상도 하게 되는 거잖아요.
최원정: 5.18을 미리 보는 거죠.
이시원: 정말 많은 국민들이 희생이 있었을 것 같아요.
허진모: 아마 두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1979년 10월 18일에 박정희 대통령은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폭력적으로 진압을 해서 잠잠해 지는 성과도 봤습니다. 그 사실은 유신체제가 이때 시스템적으로 한계를 보였죠. 강압적으로 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유지가 힘들었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이 살아있었다면 정말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라는 주장은 충분히 저는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최원정: 왜 박정희 대통령은 그렇게 차지철한테 의존했을까요? 그 전까지만 해도 국가 지도자로서의 판단력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간신의 말에 놀아났다는 느낌이 있어요.
허진모: 그렇지요, 박정희의 노쇠현상이라고 밖에 볼 수 없죠. 이 시스템 자체가 절대권력에 의존하다보니 절대자가 흔들리면 시스템 자체가 흔들리는 취약성을 갖고 있는 거죠. 노쇠현상이라는 거 자체가 생각하는 걸 귀찮아 하는 그런 것을 말하잖아요. 그러니 누군가가 쉽게 생각해주고 쉽게 결정해 주는 것에 의존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원정: 그런데 오늘 사실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이유, 오늘 정리를 해볼까 얘기를 시작했는데 더 어려워진 것 같애요. 명확한 이유가 설명되지가 않아요.
이시원: 하나를 꼭 집어서 말하기가 딱 그래요. 차지철만 딱 집기도 그렇고~
오제연: 그러니까 재판에서 진술을 한 걸 토대로 해서 이런 일을 벌린 이유를 한 두가지 정도로 우리가 압축해서 살펴본다면 결국에는 직접적으로는 부마항쟁이 트리거가 되는 거죠. 처음부터 김재규는 어쨌던 박정희의 독단적인 체제에 대해서 뭔가 불편함이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 더 자유민주주의 라고 하는 방식에 맞춰서 조금은 개선해 보고 싶은 욕망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정도가 어느 정도냐 그것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했느냐는 논란 거리겠지만 그런 의지가 결국 부마항쟁을 겪으면서 폭발한 것이다. 두번째는 결국에는 이 사건을 일으킨데 있어서 김재규가 미국을 의식한 부분이 있지 않은가 현재까지 김재규 배후에 미국이 있다 라고 하는 어떠한 증거도 나오고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이 박정희 정부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고 더 나아가서 한국 내에서 평화적인 정권교체 라고 하는 것을 희망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거든요. 근데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미국측과 많이 접촉을 했고 그런 미국의 의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는 거죠. 그래서 미국의 의도를 자기 나름의 아전인수로 이해하면서 자기가 어떤 일을 벌였을 때 미국이 힘을 실어줄 것이다 라는 자기만의 생각을 했을 가능성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도 그런 오판의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어요.
이시원: 미국이 박정희 대통령한테 등을 돌렸다 그 말은 내 뒤에 미국이 있다 이런 식으로 오판했을 가능성이 있다 라는 말씀이네요.
오제연: 그러니까 한 마디로 김재규가 미국의 속 마음을 잘못 읽은 거죠.
다니엘: 그러니까 부마항쟁의 민심의 속 마음은 제대로 읽었지만 미국의 속 마음은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말씀이신 것 같애요.
-------(동영상) 기자: 10.26 사건을 일으킨 김재규를 조사하고 결과를 발표한 사람은 바로 전두환이었다. 전두환/당시 합동수사본부장: 대통령은 차 실장만을 편애하고 자신을 불신한다는 생각에서 불만이 누적되었으며 특히 부산 마산 소요사태와 관련, 자신에 대한 인책 해임설이 파다하여 불안하던 차에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허욕이 빚은 내란 목적의 살인사건이다---------
허진모: 이 참 대단한 사건이 역사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불행한 결말로 끝난 이유는 그것을 수습했던 사람이 너무나 사심 가득한 쿠데타 세력이었다는 것이죠 (10.26을 수습했던 사람-쿠데타 세력 전두환), 전두환은 모든 것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던 그 지휘를 이용해서 권력의 공백기 동안에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릅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12.12라는 사태를 일으켜서 모든 권력을 쥐게 되었고요. 김재규로서는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렸죠. 김재규의 재판은 1980년 5월 20일에 대법원에서 사형확정이 떨어지고 난 뒤에 불과 나흘만에 사형이 집행됩니다 (1980년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집행), 이건 사실은 너무나 빠른 거였죠. 웬만한 사건 아니고서는 이렇게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때가 광주 민주항쟁이 한창 때였는데 신군부 쿠데타 세력으로서는 이런 국민적 저항이 김재규라는 존재하고 어떤 효과를 일으킬 줄 몰랐기 때문에 빨리 김재규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던 거죠.
오제연; 오늘날 까지도 이 10.26 사건에 대한 엄청난 많은 설들이 난무하고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가 이 사건에 대한 실체적 진실을 파악 할 수 있는 근거들이 너무나 희박하다는 거죠. 대부분이 사실은 김재규의 입에서 나온 재판과정에서 잠깐 나온 그런 이야기들 밖에 없는데 사실 그것이 어느 정도 진실인지 또 그것이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할려면 더 많은 조사가 필요했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런 것들을 우리는 가질 시간을 갖지 못한 겁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재판을 이런 식으로 진행한 군부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 수가 있는 거죠. 최근에 김재규의 유족들이 40년만에 이 재판에 대해서 재심을 청구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 재심이 자신이 갖고 있는 선입견이 아니라 정말로 사실에 입각해서 이 사건 자체를 하나씩 다시 한번 짚어볼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을 하고 이 재심의 귀추가 주목된다 라고 말씀드립니다. (‘박정희 암살’ 김재규 유족 40년만에 재심청구).
‘박정희 암살’ 김재규 유족 40년만에 재심청구
“그가 세상을 떠난지 꼭 40년이 되는 올해, 10.26판결에 대한 재심을 청구합니다. 유족이 재심을 통해 궁극적으로 구하고자 하는 바는 ‘판결’이기 보다는 ‘역사’입니다. (중략) 재심과정에서 10.26과 김재규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논의의 수준이 진화하고 도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김재규 前중앙정보부장 유족대표 김성신씨).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10.26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김재규 전중앙정보부장 유족이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김재규 유족과 김재규 재심 변호인단은 26일 오전 서울 서초동 민변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법원에 재심을 청구한다고 밝혔다.
재심청구는 김재규가 사망한지 40녀난에 이뤄졌다.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한 혐의(내란목적살인)로 군법회의(군사재판을 관할하기 위하여 설치된 특별법원)에 넘겨졌다. 김재규는 기소된지 6개월만인 1980년 5월 24일 사형에 처해졌다.
최근 언론을 통해 공개된, 재판전 과정이 녹음된 테이프가 재심의 계기가 됐다. 유족과 변호인단은 해당 보도를 한 JTBC 기자로부터 녹음 테이프를 입수-분석해 재심 근거를 마련했다. 이 녹음테이프는 보안사령부가 재판부 몰래 불법 녹음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변호인단이 공개한 1심공판 녹취록에 따르면, 재판부는 김재규측의 녹음신청을 기각했기 때문이다. 유족대표로 나선 조카 김성신씨는 “당시 보도는 철저히 통제됐고 10.26의 진실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나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며 새로 발굴된 자료를 바탕으로 10.26을 역사로 해석할 수 있는 매우 의미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허진모: 사실 10.26사건은 박정희 라는 거대한 거인이 쓰러지면서 한 시대가 바뀐 것이거든요. 그래서 결국에는 집중해야 될 인물은 박정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사후의 기준이 박정희일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박정희 라는 인물에 대해서 제대로 잘 모른다는 겁니다. 당시에 박정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도 많이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미지일뿐 당시에 언론이 너무나 통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박정희 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은 40년이 지난 지금이 더 많이 알 수도 있습니다. 누구는 칭송을 하고 누구는 비난을 하겠지만 그것도 이 사람을 좀 더 제대로 알고 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사실 역사에서 가장 큰 상도 가장 큰 벌도 실제로는 그 사람을 가장 잘 아는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오제연: 10.26 사건에 대한 평가는 정말 극과 극으로 갈리죠. 패륜적 사건 아니면 의거~ 이런 극과 극의 평가가 있는데 저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평가가 가릴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내 평가는 맞고 상대방의 평가는 틀렸다 라는 식으로 우리가 계속 인식을 하게 되면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도 줄 수 없습니다. 다시는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다양성을 서로 인정해 주면서 서로 소통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원정: 1979년 10월 26일 이후 벌어질 12.12 군사반란이 언급이 되었잖아요. 다음 회에는 12.12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297회에서 정리).
① 1979년 10월 26일, 청와대 인근 궁정동 안가, 박정희 대통령과 경호실장 차지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비서실장 김계원이 참석하는 연회가 열렸다. 저녁 7시 40분, 궁정동 안가를 뒤흔드는 총성이 울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탄에 맞아 향년 62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박정희 정권의 끝이 찾아왔다. 그날 이후 우리의 역사도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전개가 되었다. 김재규에 의해서 저격당해 살해당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만이 아니라 차지철 경호실장도 피살당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 졌을 때 모두가 울었다. 동네 사람들이 다 울고 학교에 선생님들, 교장 선생님도 소리를 내서 울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은 9일 국장으로 진행이 되었다. 이 장례행열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렸다. 그 중에는 부모를 잃은 것처럼 이 죽음을 슬퍼하고 통곡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의아한게 있다. 1972년 유신선포 이후 대통령 욕만해도 끌려가고 남산에서 고문당하고 심지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 엄청 울고 일반 국민들이 슬퍼했다는 게 모순 같기도 하다, 10월 26일 사건은 이해하고 해석하고 평가하기가 참 어렵다. 현직 대통령이 총에 맞아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고 하는 사안의 중대성이 있고 또 그 총을 쏜 사람이 현직 중앙정보부장이라고 하는 사안의 민감성이 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 18년은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박정희 정권 18년을 어떻게 평가해야 될 것인가 사실 어렵고 당혹스럽다.
② 궁정동 안가 안에 시설이 일반인이 보기에는 심상치 않았던 넓은 침실에 아주 고급스러운 가구가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굉장히 서민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면서 통치를 했었는데 이런 호화스러운 시설에 유희를 빈번하게 즐겼다는 자체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유신체제의 권력의 최정점이 1위부터 4위까지 모였는데 이 모임을 중정요원들은 별도의 은어로 불렀다. 대행사~ 즉 큰행사~ 그렇다면 소행사도 있었다. 소행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여성과 은밀하게 만나는 자리라고 한다. 매우 빈번하게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보부가 하는 일이 본연의 업무외에 이것이 큰 주된 업무였다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유신체제 말기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일명 측근 정치라고 할 수 있는 모습, 측근을 통해서만 컴뮤니케이션을 하고 공개적인 반대에 대해서는 혐오적인 태도를 갖는 박정희 대통령은 이 세명을 주로 상대하고 소통을 했고 친위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③ 처음 분위기는 좋았는데 김계원의 증언에 따르면 화제가 자꾸 부마항쟁 이야기와 김영삼 이야기로 되돌아갔다고, 박정희 대통령은 1주일전 부산항쟁을 신민당이 뒤에서 하는 짓인데 중정이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김재규를 질책했다고, 실제는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며 부산-마산을 중심으로 벌어진 시위사건, 박정희 대통령은 부마항쟁을 김영삼이 배후에서 조종한 사건이라고 생각을 했다. 여기에 차지철이 부추겼다.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간에 전차로 싹 깔아 뭉개버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서 중앙정보부는 뭐하냐 라면서 차지철은 김재규를 비난했다. 여기에 박대통령은 맞장구를 치고 시간이 갈수록 김재규는 더 소원해졌다. 김재규와 차지철은 나이 차이도 8살 차이로 김재규가 나이가 훨씬 많고 군에서의 경력을 봐도 김재규가 육사 2기에 1973년 중장예편 출신인데 차지철은 육사 12기가 아니고 12기 시험을 봤다가 떨어진 다음에 포병간부 출신 장교다. 차지철은 1961년 5.16 쿠데타 당시 대위였고 그 직후에 확 계급을 올려서 중령 예편, 중장계급하고는 비교가 어렵다. 더 중요한 것은 차지철이 절대로 따라 올 수 없는 김재규와 박정희만의 끈끈한 관계 육사2기에 고향도 경북 구미로 같다. 이런 인연으로 박정희의 후원 속에 김재규는 승승장구 육군방첩대장(1966년)도 하고 보안사령관(1969년)도 하고 건설부장관 (1974년)도 하고 마지막엔 중앙정보부장(1976년)까지 올라갔다.
④ 차지철은 자신들 말로는 혁명동지, 5.16 군사쿠데타를 같이 일으켰던 쿠데타 동지였다. 김재규는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차지철은 그거 하나만으로도 다 만회할 수 있다고도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5.16 쿠데타 주동자 중에 차지철은 최연소였다. 당시 나이 27살 경호장교였다. 차지철의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은 5.16 쿠데타 때 맺어진 거고, 경호실장이 되기까지 아주 중요한 사건 하나, 1974년 8월 15일 제29주년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노린 총탄이 빗나가서 육영수 여사가 피살, 충격적인 장면이다. 이때 육영수 여사 사망이란 책임을 지고 13년 경호책임자 박종규가 물러나고 그 후임으로 차지철이 발탁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육 여사를 잃고 불안감과 상실감으로 매우 불안전한 상태였을 수도 있다. 그것을 차지철이 메웠다. 절대적인 충성심으로, 자신의 집무실에 “각하를 지키는 것이 국가를 지키는 것이다.” 라는 표어를 딱 걸고 일했다고, 그리고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통제함으로써 대통령을 독점했다, 장관이든~ 국회의원이든~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허락없이 박대통령과 만날 수 없었다. 중요한 업무보고를 갖고서도 대면하기가 힘들었다고, 대통령이 나라를 운영할려면 눈과 귀를 열고 민심을 듣고 국정운영 방향을 정해야 되는데 한 사람이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차지철의 명분은 각하의 안전을 위해서 너네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판단을 하고 난 다음에 만나게 해주겠다, 이건 김재규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재규가 직접 만나는 것도 단속을 했고 문서로 보고하는 것도 다 차지철의 사전검토를 받았어야 했다. 차지철이 이때 내 걸었던 이유는 종이에 독이 묻어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⑤ 차지철의 월권행위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자극하는 경우가 아주 아주 많았다. 박정희 정권에서 정치 관련된 문제는 중앙정보부 담당, 하지만 차지철은 정치와 관련해서 각종 공작을 직접 설계하고 심지어 중정에 지시,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중정에 떠넘겼다. 둘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두가지 사안은, 첫번째가 유신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해 오는 김영삼의원 문제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영삼 의원을 진짜 싫어했다. 정말 너무 너무 싫어했다. 이런 대통령의 마음을 헤아린 차지철이 정치공작으로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시켜 버린다. 박 대통령은 제명으로는 부족했는지 김재규 중정부장에게 김영삼 구속 지시를 내린다. 김재규는 강경책만 쓰는 게 싫었다. 설득도 하고 협상도 하고 정치를 대국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 하지만 차지철은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까불고 나오면 전차로 싹 깔아 뭉개버리겠다”고 했다고, 차지철이 계속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정치 스타일을 고수하는게 싫었다.
⑥ 김재규와 차지철의 두번째 격돌 부마항쟁,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일어난 작은 시위가 곧 5만 군중이 합세하는 대규모 가두시위로 발전, 부산에 내려가 부마항쟁을 직접 살펴본 김재규는 이 사태를 독재정권에 대한 민란으로 분석하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심각성을 보고한다.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이고 고물가에 대한 반발 조세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까지 겹친 민중봉기다. 불순세력은 없다. 여기에 박정희 대통령은,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여기에 차지철은 한 술 더 떠서,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정도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 200만 탱크로 밀어버린다고, 이런 중요한 싯점에서 대통령은 항상 차지철편만 든게 문제였다, 그렇게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을 밀어주고 밀어주니까, 차지철의 위세가 날로 하늘을 찔렀다. 그걸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이 국기 하기식이다. 차지철은 1주일에 한번 정부 부처 장차관은 물론이고 군, 국회, 학계, 기업, 언론계 인사들을 저녁이나 한번 합시다 라고 초대, 매주 토요일 저녁 5시 경복궁 경내 수경사 30단 연병장에서 경호원과 청와대를 지키는 작전 부대 장병들을 도열 시켜놓고 자신만의 행사를 열었다. 차지철은 군악대의 우렁찬 연주에 맞추어서 지휘봉을 들고 초청인사들과 함께 입장을 한 뒤에 가운데 단상에 거만하게 앉아 국기 하기식을 지켜 봤다.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국군의 날 같은 때에 군대를 사열하는 위용을 본인이 벤치 마킹해 가지고 자신의 권력을 확대시키는 그런 수단으로 삼았다. 결국 높은 사람들도 차지철이 하는 이런 퍼포먼스에 장단을 맞출 수 밖에 없었다고,
⑦ 시간이 흐를수록 김재규와 차지철 둘 간의 균형은 차지철 쪽으로 급격하게 쏠렸다. 차지철은 군장성 인사 관여는 물론 국회 상임위원장까지 지명하였다. 차지철의 이런 전횡에 공화당 의원들도 차지철 때문에 우리가 망할 수 있겠다 라는 말까지 나왔다고,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을 중용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육영수 여사다. 육영수 여사는 이 사람 고지식하니까 함께 한번 일해 보라고 추천을 했다고, 고지식했다는 게 어떤 의미냐 차지철이 독실한 기독교신자고 술도 모르고 여자도 몰랐다고, 반면 김재규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간경변을 앓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좋은 권세는 차지철에게 몰아주고 김재규 부장에게는 독한 술만 계속 먹였다. 10.26 때쯤 김재규는 몸이 너무 안좋아서 술을 잘 못마셨다고, 차지철은 김재규를 대놓고 김부장 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에 대한민국에서 김재규를 김부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사실은 대통령 밖에 없었다. 명백하게 차지철은 김재규를 하대하였다. 그래서 김재규는 차지철 해치워버리겠다 라고 입버릇 처럼 했다고,
⑧ 1979년 10월 26일 아침 10시 30분 박정희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과 함께 헬기를 타고 당진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에 참석한다. 이어 헬기로 당진 송신소로 이동 완공 치하 행사, 한가지 이상한 점은 KBS 당진 송신소는 대북방송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중앙정보부가 관리하기 때문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참석해야한다. 알려지기로는 그날 아침에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서 비서실장까지 자리를 비우는데 중앙정보부장은 자리를 지켜야 되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전화를 했다고, 그런데 이것이 대통령의 뜻이었는지 차지철이 독단적으로 막은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당시는 이미 대통령의 뜻이 차지철의 뜻이었고 차지철의 뜻이 대통령의 뜻이었던 시절, 오후 4시 10분이 되었다.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전화로 저녁 6시에 대행사를 준비하라는 박 대통령의 지시니까 궁정동 안가로 와라. 참석자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이다. 이때 김재규가 뜻밖에 행동을 한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에게 전화를 걸어서 궁정동에서 저녁을 같이 먹자고 약속을 잡은 거다.
⑨ 정승화가 궁정동으로 온다. 김재규가 정승화 한테가서 갑자기 대통령과의 저녁 식사가 잡혀서 같이 하기 어려우니 당신은 옆 건물에서 기다리라. 내가 적당히 저녁 먹고 합류하겠다라고, 정승화 육참총장은 김재규가 나름의 계획을 세워서 사건을 일으켰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가 있다.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인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치면은 결국 가장 먼저 해야될 것은 바로 군대의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거다. 당시 군사정권에서 권력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대를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정승화는 개인적 인간적으로 김재규와 친밀도가 높았다. 김재규는 정승화가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하는데 1등 공신 역할을 하였다.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자마자 가장 먼저 감사인사를 드린 사람이 김재규였다. 김재규는 정승화를 측근까지는 몰라도 든든한 우군 정도로는 생각을 했을 것으로 추정, 정승화를 대기시켜놓은 상태에서 김재규는 2층 집무실로 올라가서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의전과장 박선호와 수행비서 박흥주를 불러서 시국이 위험하다. 오늘 저녁에 해치우겠다. 총소리가 들리면 너희들은 밖에서 경호원들을 제압해라. 불응하면 발포해도 괜찮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이 각하까지 입니까? 물으니까 김재규가 그렇다고,
⑩ 박선호와 박흥주는 오랜 기간 김재규와 여러 비밀스런 임무들을 수행했기 때문에 이런 부분에서 손발이 맞았다. 육군참모총장이 와있다는 김재규의 말에 박선호는 사전에 준비가 다 되어 있구나 생각을 했다고, 김재규의 지시대로 모든 준비는 30분만에 마치게 되었다. 이제 운명의 시간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0분 술자리에서 대화를 이어가던 김재규가 갑자기 월터 PPK 권총을 뽑아든다. 먼저 차지철에게 총을 겨누고 첫번째 총알은 차지철의 팔에 맞았다. 곧 바로 김재규는 그 총구를 돌려서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 가슴에다 총을 쏘았다. 그리고 화장실로 긴급히 도망가던 차지철을 쫓아서 김재규가 다시 한번 총을 쏠려고 하는데 불발, 총이 고장난 사이에 뭔가 조치를 취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⑪ 두발의 총소리를 신호로 김재규의 부하들도 밖에서 청와대 경호원들을 제압저격, 많은 사상자가 나오게 되고, 김재규는 박선호로부터 새총을 가져와서 다시 한번 들어가서 차지철의 복부를 쏘고 차지철은 이걸로 사망, 김재규는 다시 한번 박정희 대통령 한테 가서 이번에는 머리에다 총을 쏘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계원은 남아 있었다. 김재규가 나간 다음에 결국 김계원이 남아서 박정희 대통령을 황급히 병원으로 옮긴다. 박정희 대통령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숨진 상태였다. 실로 약5분 새에 다 벌어진 사건이었다. 밖으로 나간 김재규는 옆 건물에 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한테 달려갔다. 피묻은 셔츠 차림에 신발도 안신고 황급하게 갔다. 정승화에게 큰일 났다. 차타고 가면서 이야기하자 하고 하면서 전용차에 함께 올라탔다. 이때의 선택이 김재규의 운명을 가르게 됐다. 차는 육군본부로 향하였다.
⑫ 김재규는 정승화와 차에 올라탄 그 순간부터 뒷수습에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남산에 가서 수사는 중정이 맡겠다 했으면 솔직히 대통령도 없고 차지철도 없는 상황에서 자기가 최고 권력자이고 수사를 좀 다르게 할 수도 있고 그걸 빠져 나올 수도 있었다, 대통령 암살소식이 처음 전해 졌을 때 고위층들이 대부분 차지철을 범인이라고 지목했다고, 만약 김재규가 남산으로 갔다면 차지철이 권력에 집착하더니 대통령까지도 죽였다 그리고 나는 그 차지철을 처단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공작을 할 수도 있었다. 현장을 잘 보전해서 차지철한테 누명을 다 씌우면 되었다. 그래서 당시 김재규의 행동을 두고 계획했다 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술하고 허술하다 하기에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던 애매모호하였다. 정승화도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떠한 언질도 사전에 받지 못했다. 김재규는 정승화를 믿을만하다 라고 판단해서 이 사건에 끌어들였지만 정승화의 생각은 달랐다. 상황을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고 거기서 많은 의심들을 이미 하고 있는 상태였다. 김재규 본인이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되었다.
⑬ 저녁 8시 육군본부 벙커에는 최규하 국무총리 내무부장관 법무부장관 등이 모인다. 근데 이 자리에서 김재규는 지금 대통령이 유고상태다. 빨리 계엄령을 선포해야 된다 라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거기 모인 각료들이 김재규의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김재규 한테 도대체 계엄선포의 사유가 뭐냐? 누가 대통령을 죽였느냐? 이런 식으로 상황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뒤늦게 달려온 김계원이 정승화한테 대통령을 죽인 범인은 김재규다 라고 사실을 알리게 되고 이에 정승화는 은밀히 군을 동원해서 김재규를 체포한다. 보안사에서 일찍 이 상황을 체크하게 된다. 거사 이후에는 정말 계획이 없었다. 김재규는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면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이다. 결코 저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혁명을 하지 않았다 라고 진술한다. 김재규는 박정희 정권 내내 여러 요직들을 두루 맡으면서 이 정권을 유지하는데 앞장 섰다. 김영삼 의원문제로 차지철과 대립했다고 하지만 YH사건 당시에 강경진압을 지휘한 사람도 김재규고 결국 김영삼 의원이 의원직에서 제명되는 과정에도 개입했다. 김재규의 행위는 복합적으로 섞여있다. 정말 차지철이 제안했던대로 부마항쟁에 탱크를 동원해 싹 쓸어버리겠다고 행동했다면 과연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까 끔찍한 상상도 하게 된다. 아마 5.18 같은 많은 국민들의 희생이~ 아마 두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
⑭. 실제로 1979년 10월 18일에 박정희 대통령은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상황이었다.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폭력적으로 진압을 해서 잠잠해진 성과도 봤다. 그 사실은 유신체제는 이때 시스템적으로 한계를 보였고 강압적으로 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유지가 힘들었다. 이 두 사람이 살아있었다면 정말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라는 주장은 충분한 일리가 있다. 박정희는 그 전까지만 해도 국가 지도자로서의 판단력이 이 정도는 아니었다. 왜 박대통령은 그렇게 차지철한테 의존했을까 박정희의 노쇠현상 때문이다. 유신체제 자체가 절대권력에 의존하다보니 절대자가 흔들리면 유신체제 자체가 흔들리는 취약성을 갖고 있다. 노쇠현상은 생각하는 걸 귀찮아 하고 누군가가 쉽게 생각해주고 쉽게 결정해 주는 것에 의존하게 만든다. 사실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 저격재판에서 진술한 걸 토대로 두가지 정도로 압축해서 살펴보면, 첫번째는 직접적으로는 부마항쟁이 트리거였다. 처음부터 김재규는 박정희의 독단적인 체제에 대해서 뭔가 불편함이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자유민주주의 라고 하는 방식에 맞춰서 개선해 보고 싶은 욕망은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의지가 결국 부마항쟁을 겪으면서 폭발한 것이다. 두번째는 현재까지 김재규 배후에 미국이 있다 라고 하는 어떠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당시 미국이 박정희 정부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고 더 나아가서 한국 내에서 평화적인 정권교체 라고 하는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근데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미국측과 많이 접촉을 했고 그런 미국의 의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의도를 자기 나름의 아전인수로 이해하면서 자기가 어떤 일을 벌였을 때 미국이 힘을 실어줄 것이다 라는 자기만의 생각을 했을 가능성은 있다.
⑮ 10.26 사건을 일으킨 김재규를 조사하고 결과를 발표한 사람은 바로 전두환, 전두환/당시 합동수사본부장: 대통령은 차 실장만을 편애하고 자신을 불신한다는 생각에서 불만이 누적되었으며 특히 부산 마산 소요사태와 관련, 자신에 대한 인책 해임설이 파다하여 불안하던 차에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허욕이 빚은 내란 목적의 살인사건이다. 참 대단한 사건이 역사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고 불행한 결말로 끝난 이유는 그것을 수습했던 사람이 너무나 사심 가득한 쿠데타 세력이었다. 10.26을 수습했던 사람 전두환, 전두환은 모든 것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던 그 지휘를 이용해서 권력의 공백기 동안에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른다. 실제로 자신이 12.12라는 사태를 일으켜서 모든 권력을 쥐었고, 김재규로서는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김재규의 재판은 1980년 5월 20일에 대법원에서 사형확정이 떨어지고 난 뒤에 불과 나흘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건 사실 너무나 빠른 거였다. 웬만한 사건 아니고서는 이렇게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때가 광주 민주항쟁이 한창 때였다. 신군부 쿠데타 세력은 국민적 저항이 김재규라는 존재하고 어떤 효과를 일으킬 걸 예상하여 빨리 김재규를 없애야 한다고 판단. 오늘날 까지도 이 10.26 사건에 대한 엄청난 많은 설들이 난무하고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는 재판을 이런 식으로 진행한 군부의 힘때문이다. 최근에 김재규의 유족들이 40년만에 이 재판에 대해서 재심을 청구했다.
ⓐ ‘박정희 암살’ 김재규 유족 40년만에 재심청구
“그가 세상을 떠난지 꼭 40년이 되는 올해, 10.26판결에 대한 재심을 청구합니다. 유족이 재심을 통해 궁극적으로 구하고자 하는 바는 ‘판결’이기 보다는 ‘역사’입니다. (중략) 재심과정에서 10.26과 김재규라는 인물에 대한 역사적 논의의 수준이 진화하고 도약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김재규 前중앙정보부장 유족대표 김성신씨).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10.26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김재규 前중앙정보부장 유족이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김재규 유족과 김재규 재심 변호인단은 26일 오전 서울 서초동 민변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법원에 재심을 청구한다고 밝혔다.
재심청구는 김재규가 사망한지 40년만에 이뤄졌다.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한 혐의(내란목적살인)로 군법회의(군사재판을 관할하기 위하여 설치된 특별법원)에 넘겨졌다. 김재규는 기소된지 6개월만인 1980년 5월 24일 사형에 처해졌다.
최근 언론을 통해 공개된, 재판전 과정이 녹음된 테이프가 재심의 계기가 됐다. 유족과 변호인단은 해당 보도를 한 JTBC 기자로부터 녹음 테이프를 입수-분석해 재심 근거를 마련했다. 이 녹음테이프는 보안사령부가 재판부 몰래 불법 녹음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변호인단이 공개한 1심공판 녹취록에 따르면, 재판부는 김재규측의 녹음신청을 기각했기 때문이다. 유족대표로 나선 조카 김성신씨는 “당시 보도는 철저히 통제됐고 10.26의 진실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나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다”며 새로 발굴된 자료를 바탕으로 10.26을 역사로 해석할 수 있는 매우 의미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 사실 10.26사건은 박정희 라는 거대한 거인이 쓰러지면서 한 시대가 바뀐 것이다. 결국에는 집중해야 될 인물은 박정희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사후의 기준이 박정희일 경우가 굉장히 많다. 문제는 박정희 라는 인물에 대해서 제대로 잘 모른다는 거다. 당시에 박정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도 많이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미지일뿐 당시에 언론이 너무나 통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박정희 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은 40년이 지난 지금이 더 많이 알 수도 있다. 누구는 칭송을 하고 누구는 비난을 하겠지만 그것도 이 사람을 좀 더 제대로 알고 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한다. 사실 역사에서 가장 큰 상도 가장 큰 벌도 실제로는 그 사람을 가장 잘 아는 것이다. 10.26 사건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다. 평가가 갈릴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 많다. 내 평가는 맞고 상대방의 평가는 틀렸다 라는 인식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도 줄 수 없다. 다시는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성을 인정해 주면서 소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