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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구조와 시창작 방법론(심상적 구조와 영상조립시점을 중심으로)
조동범 시인
1970년, 경기 안양시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졸업
2002 문학동네 신인상 등
1. 서론
시의 언어는 기존의 언어 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새로운 감각과 상상력 제시한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제시되는 시적 표현 양상은 묘사이며, 그것은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제시된다. 이때 이미지는 '일상적으로 보아 온 낯익은 사물에 난생 처음 본 듯 신선감'1) 을 부여함으로써 시적 대상에 '신선감, 강렬성, 환기력'2) 등을 제시하게 된다. 또한 이렇게 제시된 감각과 상상력은 기존 언어가 제시하기 힘든 시적 사유와 감정을 전달한다. 시적 언술로서의 묘사는 크게 서경적 구조와 심상적 구조, 서사적 구조로 분류된다. 이때 서경적 구조는 가시적 세계를 재현하는 언어 문법을 차용하게 된다. 반면 심상적 구조는 비가시적 세계를 이미지화함으로써 비현실적인 세계를 제시한다. 본고는 심상적 구조가 어떤 시적 구조를 통해 심상화된 세계를 구축하는 지를 체계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아울러 조각난 영상을 조립하여 낯선 세계를 구축하는 영상조립시점을 파악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방법론을 통해 시에 나타나는 주관적 표현 양상의 원리를 체계화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심상적 구조와 영상조립시점의 구성 원리를 파악함으로써, 이천년대 이후 한국 시에 나타난 환상성과 전위적인 시적 경향 역시 설명 가능한 구조적 체계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이천년대 이후, 시의 언술 양상과 상징 체계의 난해함은 더욱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이천년대 이전에도 전위를 지향하는 다양한 방식의 작품이 있었다. 하지만, 이천년대 이후에 나타난 전위의 양상은 이전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작품이 시인의 내면을 탐문하는 양상이 더욱 강조되었기 때문에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다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화된 언술 양상과 상징 체계는 전위에 국한되지 않고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시단 전반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심상적 구조와 영상조립시점에 대한 이해는 이천년대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적 경향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창작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심상적 구조와 영상조립시점은 이천년대 이후의 전위적인 작품에만 적용되는 한정적인 개념이 아니다. 당연히 심상적 구조와 영상조립시점은 단순하게 언어를 전위적으로 다루는 방법이 아니다. 이러한 창작 방법론은 서경적 구조만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시인의 내면을 제시할 수 있다거나, 시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낯설게 하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모든 시 장르에 적용 가능한 것이다. 심상적 구조는 가시적 이미지 이외의 모든 비가시적 표현의 구성 원리를 설명하는 개념이고, 영상조립시점은 파편화되어 분절되어버린 이미지가 하나의 세계로 구축되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그럼으로써 서경적 구조 이외의 시에 드러난, 낯설게 구축되는 창작 방법론에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게 된다.
2. 묘사의 시적 구조와 구성 원리
시적 언술은 크게 묘사와 진술로 나뉜다. 그중에서 시적 구조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은 묘사이다. 진술은 시인의 내면을 가청화하여 들려주는 방식이기 때문에 구조적인 면이 묘사보다 약하게 제시된다. 반면, 묘사는 감각화된 세계를 이미지화하는 가시화의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구조적인 층위에서의 논의에 더욱 적합한 방법론이다. 묘사는 서경적 구조, 심상적 구조, 서사적 구조로 세분화되는데, 서경적 구조와 심상적 구조는 다시 고정시점, 회전시점, 이동시점, 영상조립시점으로 구분된다3).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서경적 고정시점
┌ 서경적 구조 ─서경적 회전시점
─서경적 이동시점
└ 서경적 영상조립시점
묘사 ── ┌ 심상적 고정시점
─ 심상적 구조 ─심상적 회전시점
─심상적 이동시점
└ 심상적 영상조립시점
└ 서사적 구조
서경적 구조는 가시적 세계를 재현하는 방법론이다. 가시적 세계이므로 당연히 직접 볼 수 있는 대상을 묘사한다. 이때 가시적 세계는 시야 안에 들어오는 가시권의 사물과 시야 밖에 있는 비가시권의 사물 모두를 수용한다. 심상적 구조는 마음으로 그리는 이미지이다. 당연히 눈으로 파악하는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에 시인의 주관적 양상이 제시되는 방법론이다. 따라서 심상적 구조는 환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장면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사적 구조는 시에 이야기의 구조가 제시되는 방법론이다. 그러나 서사적 구조는 시적 구조의 지점에서 파악하기보다 시적 정황과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 대한 포괄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언어가 구축되고 해체되는 언어의 구조적 문제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서사적 구조는 언어의 구조적 관계를 통해 이미지와 사유를 재현하는 것이라기보다, 시적 정황의 개연성과 시 전체의 전개 방식과 긴밀한 관계에 놓인다. 따라서 시 언어의 구조와 시적 체계를 중심으로 한 창작 방법론에 대한 논의로는 적절치 않다.
심상적 구조는 비가시적인 이미지를 통해 시적 정황을 구축하는 방법론이다. 이때 비가시적인 이미지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이미지를 의미한다. 또한 심상적 구조는 비가시적인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문장의 구조가 서경적 구조와 같은 보편적인 문법적 양상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심상적 구조는 시어의 위치를 변주하거나 구성 성분을 낯설게 적용하는 문장 구성법을 통해 설명할 수도 있다.
영상조립시점은 서경적 구조와 심상적 구조에 포함된 하위 개념이며, 각기 다른 파편화된 이미지를 일관된 감각으로 수용하여 하나의 시적 세계를 만들어내는 방법론이다. 영상조립시점의 경우, 서로 어울리지 않는 낯선 정황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관통하는 일관된 정서와 감각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 그것은 파편화되어 흩어진 감각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상조립시점은 파편화되기만 한 조각의 합이 아니다. 이때 제시된 여러 영상은 단순히 파편화 되어 있는 이미지만을 제시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이미지는 일관된 정서와 감각 안에서 하나의 중심축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영상조립시점은 제시된 영상 너머의 감각을 소환하기도 한다. 즉, 제시된 영상과 전혀 다른 이미지와 감각으로 전이되기도 하는 것이다.
심상적 구조와 영상조립시점은 문장의 구조와 시적 구조라는, 체계화된 층위에서 설명 가능한 것이다. 시의 구조는 단순히 시인의 감각과 사유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의 구조가 시 전체 구조뿐만 아니라, 개별 문장과 언어의 구성 원리에 따라 미적 세계를 구축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심상적 구조와 영상조립시점은 단순한 수사나 표현 기법의 문제를 넘어선다. 각각의 표현 기법은 문장 수준을 넘어선, 작품의 전체 구조와 의미에도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심상적 구조와 영상조립시점의 구성 원리를 파악하는 것은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힘들었던 시창작 방법론을 이해하는 것이며, 동시에 창작 원리와 관련한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심상적 구조와 시적 감각의 새로움
심상적 구조는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마음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 이미지를 묘사하는 방법이다. 이때 심상적 구조는 현실 속에서 파악할 수 없는 이미지를 재현하기 때문에 비현실적이거나 환상적인 세계를 제시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그것을 쓴 시인의 개성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주관적 묘사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심상적 구조는 시인의 시적 개성으로 제시되며, 주관적인 묘사를 통해 낯설게 하기를 수행한다. 그 이유는 심상적 구조가 '가시적인 물리적 공간에서 감지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심리적이라는 비가시적 공간인 탓이다'4). 심상적 구조는 눈으로 파악할 수 없는 비가시적 이미지를 통해 재현되므로, 가시적 이미지가 곧 바로 사유와 감각을 환기하는 서경적 구조와는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즉 시인의 내면에 자리잡은 비가시적 이미지는, 가시적 이미지와 진술로는 설명하기 힘든 감각과 감정까지 형상화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시인의 의식의 흐름과 내적 세계의 미묘한 파동이나 정서의 울림과 같은 감각을 효과적으로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직접적으로 ‘토끼가 풀밭에 앉아 눈물을 흘린다’라고 표현했을 때, 우리는 토끼가 눈물을 흘리는 객관적인 사실 이상의 감각을 느끼기 쉽지 않다. 하지만 ‘토끼가 붉은 바다 밑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처럼 심상적 구조의 문장으로 표현했을 때에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근원적인 토끼의 슬픔까지도 드러낼 수 있다. 이처럼 심상적 구조는 비가시적 정황과 이미지를 통해 서경적 구조와는 다른, 낯선 감각을 제시하게 된다.
심상적 구조는 시적 대상을 비가시적 이미지로 바라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서경적 구조인 가시적 이미지의 경우에도 얼마든지 비가시적 이미지인 심상적 구조로 바꿀 수 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심상적 구조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이다. 따라서 서경적 구조의 이미지에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감각을 더하는 것만으로도 서경적 구조의 가시적 이미지는 심상적 구조의 비가시적 이미지로 전환될 수 있다.
⓵ 소가 들판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다.
⓶ 몸통을 잃어버린 소가 풀의 어둠을 뜯어 먹고 있다.
⓷ 머리 잘린 소의 더러운 혀는 풀의 뿌리를 천천히 더듬기 시작한다.
⓵번 문장은 서경적 구조이며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 세개의 문장은 소가 풀을 뜯어 먹고 있다는, 본질적으로 같은 이미지이다. 하지만 그 장면을 가시적으로 보느냐 아니냐에 따라 시적 감각은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게 된다. ⓵번과 같은 가시적 이미지를 ⓶번이나 ⓷번의 문장처럼 변주하게 되면 비가시적 이미지인 심상적 구조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심상적으로 변주된 것은 평범한 소를 ‘몸통이 없는 소’와 ‘머리가 잘린 소’로 파악했다는 점과, 풀의 이파리를 뜯어 먹고 있는 장면을 ‘어둠’과 ‘뿌리’를 먹고 있는 장면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변주된 상상력은 서경적 구조를 개성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에 의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 문경시민신문
5)
침대 위에 한 여자가 앉아 있다. 무희로 추측할 수 있는 여자는 꽃이 수놓아진 드레스를 입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이 사진을 서경적으로 파악했을 때에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피곤해보이는 무희의 모습을 통해 미적 인식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장면을 심상적 구조로 파악하게 되면 서경적 구조로 파악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이를테면 드레스에 수놓아진 장미가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장미가 여자의 온몸을 휘어감으며 자라고 가시가 있는 장미의 가지가 여자의 심장을 움켜쥔다거나, 여자의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온 피가 장미의 가지를 적시고, 장미의 가지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여자의 심박을 끝도 없이 파고드는 식의 상상력이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심상적 구조의 문장과 상상력은 서경적 구조와 완전히 유리된 것이 아니며, 서경적 구조를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심상적 구조는 심상적 고정시점, 심상적 회전시점, 심상적 이동시점, 심상적 영상조립시점으로 구분한다. 심상적 고정시점은 고정된 대상의 비가시적 이미지를 파악하여 묘사하는 것이다. 심상적 회전시점은 화자가 놓인 지점에서 비가시적 주변 이미지를 돌아보는 방법이다. 또한 심상적 이동시점은 비가시적 세계의 공간을 이동하며 각각의 공간을 순차적으로 묘사하는 방법론이다. 심상적 영상조립시점은 조각난 비가시적 정황과 이미지들을 하나의 감각으로 수렴하는 방법론이다. 심상적 영상조립시점은 본고의 후반부에서 서경적 영상조립시점과 함께 자세하게 논의하기로 한다. 그러나 심상적 구조는 선택된 하나의 시점만을 선택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심상적 구조는 하나의 일관된 시점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두 개 이상의 시점이 혼재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 물론 심상적 구조와 함께 서경적 구조나 영상조립시점을 동반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실제로 심상적 구조는 서경적 구조를 기반으로 하여 심상화된 비가시적 세계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1) 심상적 고정시점
심상적 고정시점은 고정되어 있는 비가시적 대상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방법론이다. 이것은 고정된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서경적 고정시점과 동일한 시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서경적 구조가 시적 대상을 가시적으로 다루는데 반하여, 심상적 구조는 시적 대상을 비가시적으로 다룬다. 다음에 제시한, 고정시점으로 이루어진 문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⓵ 어느덧 비가 쏟아진다.
⓶ 어느덧 비가 쏟아지자 적막함은 밀려온다.
⓷ 어느덧 적막한 오전 9시는 쏟아지기 시작한다.6)
⓵번 문장은 서경적 구조의 문장으로,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는 모습을 사실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서경적 구조는 객관적인 묘사를 통해 문장의 감각을 전달한다. ⓶번 문장은 객관적인 이미지에 화자의 감정을 더하여 쓴 문장이다. 이와 같은 경우는 진술을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화자의 감정을 전달한다. ⓷번 문장은 가시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서경적 구조의 문장이 아니다. “적막한 오전 9시”가 쏟아진다고 표현함으로써 현실에서는 파악할 수 없는, 비가시적인 이미지를 구축한다. 그럼으로써 이 문장은 마음으로만 바라보고 파악할 수 있는 심상적 구조가 된다. 심상적 구조의 문장이 가지는 특징은 첫 번째로 시인의 내면에 있는, 직접적인 묘사나 진술만으로는 드러내기 힘든 모든 감각과 감정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심상적 구조를 형성하게 하는 시어의 성분과 위치가 낯설게 적용됨으로써 시인만의 주관적이고 낯선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심상적 구조의 문장은 서경적 구조의 문장과 유사한 구조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달하는 감정과 감각의 폭과 깊이에서 차이를 지닌다. 따라서 심상적 구조는 말로는 설명하거나 제시하기 힘든 시인의 예민한 내면까지 표현할 수 있다.
⓵ 저수지로부터 한 사람이 걸어나온다.
⓶ 저수지로부터 죽어버린 당신은 걸어나온다.
⓷ 저수지로부터 죽어버린 미래는 걸어나온다.7)
세 개의 문장은 저수지에서 걸어나오는 객체를 바라보는 고정시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⓵번 문장은 남자가 걸어나오는 장면을 가시적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이 문장은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고 있으므로 특별한 시적 감각이 드러나지 않는다. 독자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저수지로부터 남자가 걸어나온다는 객관적인 이미지와 정보일 뿐이다. 그러나 ⓶번 문장의 경우는 '죽어버린 당신'이라는 문장을 통해 비가시적인 심상적 구조의 정황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 저수지로부터 걸어나오는 '죽어버린 당신'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시적 상징을 부여받게 되는 특별한 존재의 지위를 획득'8)하게 된다. ⓷번 문장의 경우는 ⓶번 문장과 다를 바 없는 심상적 구조이다. 그러나 '사람'이나 '당신'과 같은 주체로서의 대상이 아닌, 관념적 언어인 '미래'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미래'는 ⓷번 문장에서 어울리지 않는 지점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이지 않은 감각을 환기한다. 일반적으로 관념적이거나 비감정적인 단어는 시어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⓷번 문장의 경우에서는 '미래'라는 단어를 하나의 객체처럼 운용하여 ‘관념의 대상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관념적이고 비감정적인 감각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감각화된 '미래'는 그것이 원래 지니고 있는 관념적 의미를 문장 안에 투사시킴으로써 묘사에 시적 의미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럼으로써 ⓷번 문장은 묘사가 곧 의미를 드러내는 시적 입체감을 형성하게 된다.
2) 심상적 회전시점
심상적 회전시점은 시적 화자가 회전하며 주변에 있는 시적 대상을 파악하는 창작 방법론이다. 이때 회전하며 바라보는 대상은 심상적 구조이니만큼 비가시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주변의 사물과 배경을 비가시적인 측면에서 파악할 경우, 화자 주변부의 풍경은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시적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시 전반의 분위기는 시인의 내면을 더욱 농밀하게 제시할 수 있게 된다.
⓵ 날개가 잘린 채 날아가는 새
⓶ 새의 썩어버린 눈동자와 검은 구름의 석양
⓷ 나뭇가지마다 걸려있는 죽음들
⓸ 침몰하는 태양과 영원히 저물지 않는 저녁
⓹ 경악을 거듭하는 들판과 뿌리부터 자라는 나무들
위에 열거한 문장은 주변 풍경을 심상적 회전시점으로 파악한 시적 정황이다. 심상적 구조는 주관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시인의 개성을 드러내기에 적합한 창작 방법론이다. 따라서 심상적 구조는 시인만의 개성적인 표현력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예시로 제시한 장면은 심상적 구조를 통해 서경적 구조가 전달하기 힘든 특별한 감각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장면은 낯설게 하기의 특별한 감각이 되기도 하고, 시인의 의식을 형상화함으로써 형언하기 어려운 시인의 내면을 제시한다.
2) 심상적 이동시점
심상적 이동시점은 시적 배경이 되는 장소를 이동하며 제시하는 비가시적 표현 방법이다. 비가시적 심상으로 이루어진 문장과 정황이 각기 다른 장소로 이동하며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창작 방법론이다. 이것은 비가시적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기본적인 창작 방법은 서경적 이동시점과 동일하다. 심상적 이동시점은 심상적 고정시점이나 심상적 회전시점보다 더욱 확장된 심상적 세계를 제시한다. 그럼으로써 심상적 이동시점은 시적 외연을 확장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기도 하다.
사무실을 나서는 남자의 어깨 위로
늙은 개와 썩은 생선 통조림으로 가득한 죽은 나무의 거리가 피어오른다.
남자는 가방을 든 채,
하수구를 향해 맹렬히 쏟아지는 썩은 생선을 바라보고 있다.
뻥 뚫린 생선의 주둥이는 죽은 나무의 가지에 걸려 몸속의 내장을 게워내고 있다.
남자의 신발 속으로 생선의 내장이 비릿하게 들어선다.
남자의 가방은 썩은 생선의 대가리로 가득 찬다.
말라죽은 나무와 썩은 생선의 거리를 지나 남자는
검은 버스를 타고 검은 구두의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남자를 바라보며 늙은 개는 더러운 밤을 뒤적인다.
남자는 검은 전등을 켜고 검은 샤워를 하고 어둡고 오래된 냉장고의 식욕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남자의 식사가 검은 전등불 아래에서 검게 빛난다.
남자는 검은 커튼을 치고 검은 TV를 켠 채 오래되고 익숙한 검은 날의 밤을 맞이한다.
남자의 검은 밤이 무수히 지나간다.
남자는 여전히 늙은 개와 썩은 생선 통조림으로 가득한 거리를 지나
검은 구두의 집으로 돌아간다.
남자의 식탁은 어둡고 오래된 냉장고의 식욕으로 빛났지만 누구도 검은 전등불 아래에서의 식사를 본 사람은 없었다.
남자의 검은 밤과 검은 낮이, 무수히 지나간다.
남자의 검은 TV는 언제나 켜 있고
검은 구두의 현관 앞은 검은 신문으로 넘쳐흐른다.
검은 신문에서 검은 활자가 쏟아졌지만 아무도 그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검은 현관이 열리는 것을 본 사람도 없었다. 썩은 생선이 담긴 남자의 가방이 검은 구두의 현관으로 들어서는 듯도 했지만 그것의 냄새를 맡은 사람 역시 없었다.
검은 구두의 현관 너머에선 언제나
검은 TV의
검은 노래와
검은 코미디와
검은 쇼가
쉬지 않고 새어나왔다.
검은 TV와 신문이 도래한 날들이 시작되었다.
-조동범, 「검은 TV와 신문의 날들」9) 전문
모든 대상이 '검은' 색상으로 이루어진 시의 정황은 출발부터 심상적 구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현실 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검은 것들의 집합체는 이 세계를 비현실적인 영역으로 끌고 가며 우리 삶의 비극성을 더욱 강조하게 된다. 이때 우리 삶이 더욱 강조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심상적 구조 때문이다. 심상적 구조는 시인이 인식하고 있는 시적 세계의 비극성을 더욱 강조하며 시인의 내면을 제시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이 시에 등장하는 검은 색상 이미지는 단순한 검은 색이 재현하는 비극성을 넘어서게 된다. 심상화된 검은 이미지들은 현실 너머의 세계를 제시함으로써 현실의 서경적 국면이 제시하지 못하는 비극의 모든 내면을 파헤칠 수 있도록 만든다. 이때 비극적 검은 색상 이미지들은 장소를 따라 이동하며 도시적 삶 도처에 널려 있는 비극을 제시한다. 그럼으로써 이 시의 배경이 되는 도시 공간은 모두 심상화된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하여 도시 공간은 심상화된 덩어리를 이루며 시적 정황 전체를 심상화된 이미지로 만들어버린다. 그럼으로써 서경적 장면마저도 심상화된 세계 속에서 심상적 감각으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4. 영상조립시점과 낯선 감각의 탄생
1) 영상조립시점의 종류와 구성 원리
영상 조립 시점은 어울리지 않는 낯선 정황들을 돌연히 내세우되, 그 안에 일관된 정서와 감각을 부여하는 창작 방법론이다. 영상조립시점을 구축하는 각각의 정황은 파편적 이미지들로 연결되는데, 이때 개별 이미지는 파편화되어 분절적이기만 하면 안 된다. 영상조립시점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의 조합이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것을 관통하는 정서와 감각, 의미 등이 필요하다. 서경적 구조의 경우는 가시적 사물과 비가시적 사물이 혼재될 경우 자연스럽지 않게 된다. 그러나 영상조립시점은 '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을 함께 묶어 재구성한 것이므로, 가시권 사물과 비가시권 사물이 섞여 있을 수 있다'10). 또한 가시적 사물과 비가시적 사물 역시 혼재되어 나타날 수 있다.11)
⓵ 시베리아의 유성우
⓶ 타오르는 숲
⓷ 남극의 혹등고래와 먼 바다의 음역
⓸ 적도의 적란운
⓹ 저수지에서 걸어나오는 죽은 물고기떼
시베리아로부터 유성우는 쏟아지지 않는다
숲은 타오르고
남극의 혹등고래가 먼 바다의 음역을 천천히 더듬고 있다
적도의 적란운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끊임없이 사라진다
그리하여 저수지로부터,
죽은 물고기떼는 성큼성큼 피어오르기 시작한다12)
어울리지 않는 다섯 개의 정황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하나의 작품에 ‘소멸’을 대입하여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조각난 것들의 합인 다섯 개의 정황이 하나의 시적 주제와 상징 안으로 수렴되고 있음”13)을 파악할 수 있다. 영상조립시점은 조각난 낯선 정황들을 내세워 그것들을 하나의 작품 안으로 수렴하는 창작 방법론이다. 하지만 이때 조각난 정황들은 파편화되기만 하여 그것을 관통하는 사유와 감각이 없으면 안 된다. 영상조립시점은 “조각의 모음이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지점을 필연적으로 갖춰야”14)하며, “만약 관통하는 지점이 없을 경우에 그것은 낯선 정황들의 조각으로 전락”15)할 뿐이다. 예시한 다섯 개의 정황은 모두 ‘소멸’이라는 의미를 내재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어울리지 않는 다섯 개의 정황은 일관된 정서를 제시하며 하나의 작품으로 수렴된다. 영상조립시점을 구축할 때 주의해야 하는 점은 파편화되기만 해서 그것들이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상조립시점은 서경적 영상조립시점과 심상적 영상조립시점으로 나뉜다. 서경적 영상조립시점은 서경적 구조의 조각난 정황들로 이루어진 것이며, 심상적 영상조립시점은 심상적 구조의 정황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눈으로 직접 파악할 수 있는 이미지로 이루어진 서경적 영상조립시점과 마음으로 그릴 수 있는 심상적 영상조립시점은 모두 초현실적 감각을 제시한다. 이때 서경적 영상조립시점의 경우에도 심상화된 감각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서경적 영상과 심상적 영상을 하나의 작품 안에 섞어서 제시할 수 있다. 위에서 제시한 다섯 개의 정황의 경우에도 서경적 영상과 심상적 영상이 혼재되어 있다. 유성우가 쏟아지지 않는 시베리아(⓵번 정황)와 타오르는 숲(⓶번 정황), 그리고 적도에서 적란운이 피어오르고 사라지는(⓸번 정황) 장면은 서경적 국면이다. 그리고 “남극의 혹등 고래가 먼 바다의 음역을 천천히 더듬고” 있는 장면(⓷번 정황)과 죽은 물고기떼가 성큼성큼 피어오르는 장면(⓹번 정황)은 심상적 국면이다. 이때 서경적 영상은 그것끼리 결합할 수도 있고 심상적 영상 역시 그것만으로 구성할 수 있다. 또한 예제 작품에서처럼 서경적 영상과 심상적 영상을 혼재하여 구성할 수도 있다.
ⓒ 문경시민신문
캘리포니아행 비행기가 미지를 향해 아득하고
몸통을 잃어버린 셔츠가 허방을 딛고 있다.
수신되지 않는 음역이 과거를 흐느끼면
ⓒ 문경시민신문
거울 속의 여자는 거울 밖의 여자를 바라보며
되돌릴 수 없는 순간들을 호명한다.
ⓒ 문경시민신문
그리하여 제복은 눈물을 흘리는가.
아니면 닿을 수 없는 매트릭스를 떠올리는가.
ⓒ 문경시민신문
전화기 너머로부터 불온한 소식은 전해진다.
ⓒ 문경시민신문
유효기간을 넘긴 통조림처럼 모든 것은 되돌릴 수 없다고
제복은 중얼거린다.
ⓒ 문경시민신문
쓸모 없는 시간을 향해 킬러는 당신의 심장을 겨누고
선글라스 너머로 두 개의 태양과 단 하나의 침묵은 침몰을 거듭한다.
ⓒ 문경시민신문
킬러의 총구를 향해 세계의 모든 순간들은 불길하게 수렴된다.
그리하여 제복은 잠이 드는가.
제복의 곰인형은 눈물을 흘리는가.
캘리포니아행 비행기는 추락을 거듭하고,
허방을 딛고 매달린 거울 밖의 세계는
영원토록 거울 속의 세계를 참혹하게 흐느끼고 있다.16)
위의 이미지는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서 선정한 장면이다. 한 편의 영화에서 선택한 장면이지만 단편적으로 선택한 각각의 이미지는 분절된 정황으로 기능한다. 물론 각각의 정황이 분절적으로 인식되기는 하지만 한 편의 영화에서 가져온 이미지이기 때문에 정황의 연결 장치를 구조화하기에 수월하다. 이때 주의할 점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영상조립시점을 제시할 때 기존 영화의 줄거리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기존 영화의 내용과 주제 의식을 벗어나, 영화의 이미지를 모티프 삼아 정황을 새롭게 전개할 때 온전한 문학적 개성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동화적 상상력이나 신화적 상상력으로 창작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위의 장면을 연결하면 영화의 플롯과 무관한, 다음과 같은 영상조립시점의 시가 된다.
캘리포니아행 비행기가 미지를 향해 아득하고
몸통을 잃어버린 셔츠가 허방을 딛고 있다.
수신되지 않는 음역이 과거를 흐느끼면
거울 속의 여자는 거울 밖의 여자를 바라보며
되돌릴 수 없는 순간들을 호명한다.
그리하여 제복은 눈물을 흘리는가.
아니면 닿을 수 없는 매트릭스를 떠올리는가.
전화기 너머로부터 불온한 소식은 전해진다.
유효기간을 넘긴 통조림처럼 모든 것은 되돌릴 수 없다고
제복은 중얼거린다.
쓸모 없는 시간을 향해 킬러는 당신의 심장을 겨누고
선글라스 너머로 두 개의 태양과 단 하나의 침묵은 침몰을 거듭한다.
킬러의 총구를 향해 세계의 모든 순간들은 불길하게 수렴된다.
그리하여 제복은 잠이 드는가.
제복의 곰인형은 눈물을 흘리는가.
캘리포니아행 비행기는 추락을 거듭하고,
허방을 딛고 매달린 거울 밖의 세계는
영원토록 거울 속의 세계를 참혹하게 흐느끼고 있다.
2) 영상조립시점의 효과와 사례
영상조립시점의 효과는 첫 번째, 초현실적인 감각을 통해 표현하기 힘든 시인의 내면까지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효과는 심상적 구조에서도 나타나는데, 영상조립시점 역시 동일하다. 두 번째로는 각각의 조각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수렴되었을 때 기존 문장의 감각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감각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때 영상조립시점은 표면화된 언어의 일차적 의미의 층위에 머물지 않는다. 조각의 합은 기존 조각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세 번째로는 감각적인 정황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낯설게 결합되는 정황들은 기존의 상투적인 시적 구조를 탈피함으로써 언어의 새로운 감각과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럼으로써 영상조립시점으로 쓰인 시는 감각화된 세계를 적극적으로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네 번째는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영상조립시점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를 결합하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에 낯선 정황이 제시되기 마련이다. 이때 각각의 정황들 사이의 거리는 일반적인 구조의 글과 달리 멀기 마련이다. 따라서 영상조립시점은 일반적인 연상체계를 벗어나 극대화된 상상체계를 획득하게 된다. 다섯 번째로는 앞서 언급한, 시인의 의식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이다. 서경적 구조가 시인의 의식을 제시하기에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데 반해 심상적 구조는 시인의 의식을 적극적으로 재현한다. 영상조립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서경적 영상조립시점과 심상적 영상조립시점 모두에 해당된다.
씹던 바람을 벽에 붙여놓고
돌아서자 겨울이다
이른 눈이 내리자
취한 구름이 엉덩이를 내놓고 다녔다
잠들 때마다 아홉 가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날 버린 애인들을 하나씩 요리했다
그런 날이면 변기 위에 앉아서 오래 양치질을 했다
아침마다 가위로 잘라내도
상처 없이 머리카락은 바닥까지 자라나 있었다
휴일에는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검은 우산을 쓰고 지나갔다
동네 영화관에서 잠들었다
지루한 눈물이 반성도 없이 자꾸만 태어났다
종종 지붕 위에서 길을 잃었다
텅 빈 테라스에서 달과 체스를 두었다
흑백이었다 무성영화였다
다시 눈이 내렸다
턴테이블 위에 걸어둔 무의식이 입안에 독을 품고
벽장에서 뛰쳐나온 앨범이 칼을 들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숨죽이고 있던 어둠이 미끄러져내렸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음악이
남극의 해처럼 게으르게 얼음을 녹이려 애썼다
달력을 떼어 죽은 숫자들을 말아 피웠다
뿌연 햇빛이 자욱하게 피어올랐지만
아무것도 녹진 않았다
-강성은, 「12월」17) 전문
강성은의「12월」은 12월을 통해 떠올릴 수 있는 소멸, 종료, 파국 등을 하나의 작품 안에 배치하여 영상조립시점으로 표현했다. 강성은이「12월」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심상적 영상조립시점이다. 이 시에서 각각의 심상적 정황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지만 모두가 12월이라는 시간적 배경이 전달하는 정서와 부합한다. 이 시의 화자는 “동네 영화관에서 잠”이 드는가 하면 갑자기 “텅 빈 테라스에서 달과 체스를” 두기도 하고, “턴테이블 위에 걸어둔 무의식”이 “입안에 독을 품”는가 하면 “벽장에서 뛰쳐나온 앨범이 칼을 들고”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영상조립시점은 서경적 구조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문장과 구조를 자연스럽게 제시한다. 영상조립시점은 강성은의 「12월」에서처럼 파편화된 듯 어울리지 않는 정황을 제시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하나의 일관된 정서와 감각을 드러낸다.
택시를 잡으려는 여교수의 안경이 얼룩진다
축구를 할 수 없는 청년들은
친구 집 차고에 모여 마샬 앰프와 워시번 전기 기타와 타마 드럼을 가져다놓고 합주를 한다
유원지에는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가 울면서
혼자 회전목마를 타고 있다
폭력 조직의 두목들이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앉아
우중 도시의 전망을 보며 협상을 벌인다
브레이크를 밟다가 미끄러진 모터사이클 운전자는
깨진 헬멧과 함께 일어날 줄을 모른다
화교들이 모여 사는 거리의 삼층 다락방에서는
대마초 연기가 눈을 따갑게 하고
화창한 맑은 날에 리비도가 저하되는 성도착증 환자는
낡은 가죽 재킷을 맨몸 위에 걸치고
입주자들이 모두 떠난 폭파 예정인 아파트를 배회한다
밤새 벼락이 친다
-이승원,「근미래의 서울」18) 부분
이승원의「근미래의 서울」은 강성은의 「12월」과는 달리 서경적 영상조립시점을 이용하여 시적 정황을 전개한다. 서경적 영상조립시점이니만큼 각각의 정황은 모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승원의 「근미래의 서울」은 전적으로 서경적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영상조립시점을 통해 보다 감각화된 장면을 제시한다. 또한 서로 어울리지 않는 정황으로 이루어진 「근미래의 서울」 역시 작품을 관통하는 일관성을 통해 조각난 영상을 하나의 작품으로 수렴시킨다. 여기에서 각각의 정황의 중심축이 되는 것은 '근미래의 서울'이다. 가까운 미래의 서울을 작품의 중심축으로 삼음으로써 「근미래의 서울」은 현대문명사회의 비극이라는 일관된 주제 의식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5. 결론
현대시가 가시적 이미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자명하다. 또한 시의 언어가 일상 언어와 같이 정상적인 어순과 구조만으로 구축되지 않는다는 점 역시 당연한 것이다. 아울러 심상적 구조와 영상조립시점은 전위적인 작품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지도 않았다. 심상적 구조와 영상조립시점은 최근 새롭게 제시된 창작 방법론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이러한 창작 방법론은 시의 구조적 측면으로 파악되기보다는 난해함이나 환상성과 같은 내용적 측면으로 이해되고 파악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심상적 구조와 영상조립시점은 언어의 구조와 긴밀한 연관 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언어의 구조적 양상은 현대시의 상상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현대시의 상상력은 서경적 구조가 전달하는 일차적 이미지의 이면이나 시인의 의도 너머를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서경적 구조 역시 현대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은 자명하다. 하지만 서경적 구조는 시적 언어를 구축하는 기본적인 방법으로서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창작 방법론이다. 하지만 서경적 구조의 언어와 인식만으로는 현대의 세계 인식과 시적 감각을 표현하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의 감각과 사유, 세계를 구축하는 모든 사물은 보다 복잡한 층위를 이루게 되었는데, 그러한 것들을 기존 언어의 방식만으로 표현하는 것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심상적 구조와 영상조립시점이 현대시의 창작 방법론으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동범
200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가 있으며, 산문집 『보통의 식탁』,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비평집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창작 이론서 『묘사』,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연구서『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등을 펴냈다. 청마문학연구상, 딩아돌하작품상, 미네르바작품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1) 김준오, 『시론』, 삼지원, 2002(4판), 163쪽.
2) 위의 책, 같은 쪽.
3) 오규원은 브룩스(C. Brooks)와 워렌(R.P. Warren)의 저작(Modern Rhetoric(Harcourt Brace, Jovanovich, New York, 1979))과 문덕수의 저작(『문장강의』, (시문학사, 1985))을 참조하여 서경적 구조와 심상적 구조에 대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오규원, 『현대시작법』, 문학과지성사, 1993(재판), 94-119쪽.) 오규원은 시적 언술로서의 묘사를 서경적 구조, 심상적 구조, 서사적 구조로 분류한다. 서경적 구조와 심상적 구조는 각각 고정시점, 회전시점, 이동시점, 영상조립시점으로 구분되는데, 이때 영상조립시점은 초현실적인 감각이 강하게 제시된다. 그것은 심상적 영상조립시점뿐만 아니라, 대상의 객관적인 이미지를 조립하는 서경적 영상조립시점 역시 동일하다. -조동범, 「새로운 시쓰기의 방법; 그리하여 낯선 세계로의 여정」, 『포지션』 통권12호, 포지션, 2015, 31쪽 참조.
4) 오규원, 『현대시작법』, 문학과지성사, 1993(재판), 107쪽.
5) 낸 골딘의 사진 <침대 위의 트릭시>(1979).
6) 조동범, 앞의 글, 34쪽. 참조.
7) 위의 글, 같은 쪽.
8) 위의 글, 같은 쪽.
9) 조동범, 『카니발』, 문학동네, 2011, 14-15쪽.
10) 오규원, 앞의 책, 105쪽.
11) 서경적 시점은 가시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인데, 이때 가시적 이미지는 가시권의 사물과 비가시권의 사물을 모두 포함한다. 이에 반해 심상적 구조의 경우는 비가시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즉 서경적 구조와 심상적 구조의 차이는 시적 대상을 사실적으로 파악하느냐 심리적인 측면(비현실적)으로 파악하느냐이다.
12) 조동범, 앞의 글, 36쪽.
13) 위의 글, 같은 쪽.
14) 위의 글, 같은 쪽.
15) 위의 글, 37쪽.
16) 사진.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1994).
17) 강성은,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 2009, 58-59쪽.
18) 이승원, 『어둠과 설탕』, 문학과지성사, 2006, 29-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