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손녀
외손녀를 보았다. 라일락 향기 그윽한 날에.
딸이 출산을 위해 입원한다는 소식이 왔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 딸은 평온한 모습으로 제왕절개를 하려고 마취의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애 때 자연 분만하려다가 고생 끝에 수술로 사내아이를 얻었기 때문이다. 임산부와 의사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나와 사위는 밖에서 기다렸다. 어찌나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수술실 쪽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시각이 여삼추다. 두 손을 모으고 “관세음보살 ”을 연호 하는 나를 발견한다. 사위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니 하나님을 열심히 불렀을 것이다.
“공주입니다 ”
삼십 오 분이 지나자 짧은 간호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순간 짜릿한 전율이 왔다. 아기는 이 세상에 나오기가 두려운지 눈을 꼭 감고 있다. 우리에게 잠깐 동안 선을 뵈고 첫 번째 목욕을 위하여 신생아 실로 들어갔다. 나는 남편에게 손녀출생을 알리고 사위는 자기 부모에게 전화로 소식을 전했다.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아이의 고모가 멀리 미국에서 전화를 걸어왔다. 한 시간쯤 더 지나서 무사히 산모가 나왔다. 답답하게 오므라들었던 내 가슴이 펴지는 듯하다. 회복실에서 눈을 뜬 딸에게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손을 잡아주었다. 생살을 찢는 산고를 겪은 딸을 보니 내 가슴이 아렸다. 그리고 대견스럽게 생각되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강보에 싸여 나온 외손녀를 내 품에 안았다. 어찌 이리도 묘하게 생겼을까. 동글동글한 머리통 까만 머리에 하얀 얼굴 오똑한 코, 꼭 다문 예쁜 입, 감은 눈의 쌍꺼풀까지...
이렇게 예쁜 신생아는 처음 본다. 간호사들도 일등미인이라고 감탄하였단다. 산모와 태아가 모두 건강하다.
‘삼신할머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예쁜 아기를 빚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
그저 고마운 생각만 든다.
삼십 삼 년 전 나는 사흘 동안의 모진 산고를 겪고 딸애를 낳았다. 그렇게 힘겹게 낳았는데 겨우 2.5kg으로 미숙아를 면한 정도였다. 목욕도 못 시키고 일주일동안 올리브유를 사용하였다. 뱃속에서 영양이 부족했던지 다리가 주글주글 주름이 졌다. 아기를 보러온 친척들마다 이렇게 작은아기는 처음 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는데 건강하게 자라 이렇게 두 아이의 어미가 되다니...
사위도 이제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딸에게 아기를 보여주었다. 뛰어난 미모를 타고 난 아이를 보고 흡족한 표정이다. 오랜 긴장과 고통을 이겨낸 내 딸이 자랑스럽다. 모정의 모습이 성스럽기까지 하다. 누워있는 산모 옆에서 여기저기 친지에게 전화로 기쁜 소식을 전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나는 아이의 외할머니다. 좋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 나의 외할머니처럼.
할머니! 벌써 오십 년 전의 이야기다. 나는 외갓집에 자주 갔다. 작은 산을 두 개 넘어 십리쯤 가야하는 동네였다.
“어이구 내 새끼, 어서 온! ”
추운 겨울이면 나의 고사리 같은 손을 호호 불어 녹여 주시며 반겨주시던 할머니... 키 작은 외할머니는 골방 쌀가마니위로 올라가서 외사촌들 몰래 천장에 감추어 두었던 곶감과 알사탕이나 쌀 튀밥을 꺼내다 주시곤 하였다. 외사촌언니와 동생보다도 더 나를 귀여워 해 주시던 외할머니 냄새가 나는 좋았다. 엄격하고 다정한 정을 주실 줄 모르던 어머니에 비해 자애로우신 외할머니는 비단이불 속 같은 보드라운 분이었다. 그런 외할머니가 내가 스물 두 살 되던 해 칠십세로 돌아 가셨다. 삼십팔 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그때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부처님 같은 한없는 사랑으로 감싸주시던 외할머니가 하늘에서 할머니가 된 나를 내려다보시며 빙긋이 웃으시는 것 같다.
사돈 내외분이 이십 개월 된 손자를 데리고 오후 늦은 시각에야 도착했다. 이미 소식을 듣고, 또한 둘째라 그런지 첫 손자 때보다 감동이 덜 한 듯하다. 녀석은 제 동생을 보고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다. 몸이 불편한 어미 곁에서 끙끙대다가 요구대로 안 해주니 아비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아기는 눈도 떴다 감고 하품도 한다. 젖을 찼는지 입을 벌렸다 오므렸다 한다. 얼굴표정이 바뀔 때마다 양쪽 볼에 보조개가 핀다. 산모는 볼우물과 쌍꺼풀진 눈을 보고 아주 좋아한다. 조물주는 재주도 좋으시지, 어떻게 요렇게 묘하고 예쁘게 아기를 만드셨을까. 사돈이 손자를 데리고 간 후, 나는 신생아 실로 아기를 데려다주며 기념 발도장과 손도장을 부탁했다. 외할머니가 손녀에게 주는 첫 번째 선물이 될 기념품을 만들기 위해서다.
첫 손자는 사돈이 이름을 지었다. 이번 아이는 딸 내외가 짓는다며 인터넷에서 좋은 이름을 여러 가지 찾아 나열해 놓았다. 사위는 예나(睿娜)라고 하고 싶다고 했다. 참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되었다. 대여섯 살 된 영리한 꼬마아가씨와 지적이며 아름다운 숙녀가 연상된다. 이름과 같이 깊고 밝게 통찰할 수 있는 예지를 갖춘 아리따운 여성이 되라고 기원한다. 내가 팔십이면 이 손녀가 누구나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볼 풋풋한 멋쟁이 대학생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나의 분신의 싹이 자라는 모습과 아름답게 꽃피게 될 때를 상상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외손녀가 좋아하고 자랑스러워 할 할머니가 되어야지! ’
속으로 다짐을 한다. 주름살이 늘어가는 나를 생각하면 서글프지만 멋진 손녀와 함께 할 날들을 그려보니 가슴이 설렌다.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심정으로 오는 세월을 기쁘게 맞이하겠다. (2003.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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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하늘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처럼 깊고 높아 그 사이를 부는 바람 또한 싱그럽다. 햅쌀로 지은 밥맛은 입맛을 돋우어 비쩍 마른 사람도 절로 통통해 질 것만 같다. 그 뿐인가 온갖 과일은 또 향내를 풍기며 익어가니 과연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할 만 하다.
이토록 풍요로운 계절에 나는 어떤 결실이 있었던가.
“춘약불경(春若不耕)이면 추무소망(秋無所望)이니라 ” 라고 한 공자님 말씀처럼 내 인생의 봄과 가을을 생각해본다. 부지런한 농부의 곳간에는 풍요로움이 가득할 이 계절에 뜻밖에도 남편으로부터 가슴 벅찬 고백을 들었다.
자식 자랑은 반병신이고 자기 자랑은 온 병신, 마누라 자랑은 배내 병신이라고 하는데 굳이 팔불출을 자처하고 나선 남편의 말은 그래도 싫지 않았다. 앞으로 열흘만 있으면 환갑을 맞게 되는 남편은 “여보 ! 나 당신을 사랑 합니다 ”를 제1장으로 시작하여 이제까지 살아온 날들이 다 그러하듯이 앞으로도 아내를 마음으로 의지하며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 같이 살아 가겠다 ”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내용은 매사를 고맙다는 말로 일관하면서 제 4장까지 끌다가 말미에는 “여보! 마누라, 고맙습니다 ”로 마무리 지었다. 남편은 한 술 더 떠서 이런 내용의 글을 우리부부가 자주 드나드는 홈페이지에 올려서 공개적으로 팔불출임을 선언하고야 말았다.
삼십일 년 전에 남편을 만난 나는 삼남매를 두었다. 작은아들은 홀 어머님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아이 없는 맏동서한테 입양시켰다. 남편의 형님이니 집안 항 열로는 장손이 되는 셈이다. 그때 나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지만 다행히 삼남매 모두 잘 자라 주었다. 아들이 없는 형님을 안타깝게 여기시던 시어머님께도 효도한 셈이 되고 형님과는 누구보다도 끈끈한 우애로 연결될 수 있어서 좋았다. 남편은 속칭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 할 정도로 어질고 착한 사람이다.
이러한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어른들이 입을 모아 앞으로 잘 살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만 믿고 사랑의 씨앗을 묻었다. 결혼 비용을 결산한 후 나에게는 일만 원이란 돈이 남았다. 앞으로 삼십년 후에는 남편이 환갑을 맞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 때를 대비해서 삼십년짜리 장기저축에 들었다. 그 당시 일 만원이면 쌀 한 가마 값이었는데 그것을 삼십년 동안 저축해 놓으면 그 돈으로 근사한 환갑잔치를 치르고도 남을 것 같았다. 나는 이 금전 신탁 증서와 도장을 가보 1호쯤으로 생각하고 잘 보관해 두었다.
그런데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그 동안 은행 이름이 자꾸 바뀌었다. 즉 한국신탁은행에서 서울신탁은행으로 바뀌더니 다시 서울은행으로 변신했다. 그러던 중에 삼십년 만기가 되고 2001년 9월26일,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은행을 찾아갔다. 소득세와 주민세를 공제하고 나니 일금 삼십팔만 삼천 일백팔십 원이 손에 들어왔다. 계산상으로야 틀림이 없겠지만 왜 그런지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삼십년 전에 맡긴 쌀 한 가마니 값이 채 두 가마니도 안 된다니... 그래서 장기간 은행예금을 하는 사람은 바보라고 하는 말이 생겨 난지도 모르겠다. 일 만원이 사십 배가 되었다면 많이 증식된 것은 사실이지만 쌀값에 대비하니 너무 보잘 것이 없었다. 그리고 보면 내가 결혼 첫 걸음으로 내어 디뎠던 재테크는 완전히 실패하고 만 셈이다. 은행대리가 삼십년 동안의 정성에 감동했다면서 차 한 잔을 대접하겠단다. 차를 마시면서 그간의 비화(秘話)를 듣고 난 그는 귀빈용 선물세트 한 상자를 주면서 위로해 주었다.
남편을 위해 근사한 환갑잔치를 해 주겠다던 꿈은 날아갔지만 나는 이 소중한 돈을 의미 없이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 대학원에 다니면서 만학의 꿈을 불태우고 있는 남편에게 좋은 책을 사보라고 신권으로 바꾸어 봉투 채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는 그 어떤 진수성찬을 먹은 것 보다 좋다면서 감동하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남편은 평소 사랑에 대한 표현이 인색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공개적으로 마누라 자랑 이야기를 쓴 “팔불출의 변 ”을 인터넷에 공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환갑날엔 신혼시절 어설픈 솜씨로 담가 놓았던 결혼 1주년 기념 포도주와 2주년 기념 딸기 주, 그리고 3주년 기념 복숭아 주를 개봉하여 사랑의 열매인 자식들과 함께 행복의 축배를 들고 싶다.
지금 반세기만에 대풍을 맞게 된 우리나라는 가는 곳마다 풍년가가 메아리치고 있다. 이 뜻 깊은 21세기의 첫 가을, 나는 삼십년 동안 감추어 두었던 남편의 사랑을 이렇게 행복의 결실로 거두게 되었음을 못내 고마워하고 있다.
(2001.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