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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작가, 철학자, 문학이론가.
블랑쇼는 평생을 운둔하며 살아갔으며, 그의 사진은 레비나스를 비롯한 친구들과 찍은 사진 몇 장과 80년대 파파라치가 멀리서 찍은 사진 등 얼마 남아있지 않을 정도다.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장 뤽-낭시와 같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블랑쇼는 1907년 9월 22일 프랑스 동부에 있는 브루고뉴의 켕(Quain)에서 태어났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으며 이 시기 에마뉘엘 레비나스와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된다.
1930년대, 그는 극우 신문들에 글을 투고했다. 이 점에 대해서 후대에 논란이 되었는데 블랑쇼 본인은 이런 극우파 노선을 보인 자신의 글들에 부정하거나 굳이 감추려 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사과를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블랑쇼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일화들이 전해진다. 강제 수용소로 이송될 뻔한 레비나스의 가족을 숨겨주었고,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와 만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또한 자신의 집 앞에서 독일군에게 붙잡혀 총살형을 당할 위기에 놓이기도 했는데 레지스탕스의 극적인 습격으로 목숨을 구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블랑쇼는 소설 집필과 문학 비평에 천착한다. 앙드레 지드와 사르트르가 편집을 맡은 '라르쉬'나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가 편집을 맡은 '현대', 바타유가 주도한 잡지인 '비평' 등 당대의 독립 매체들에 글을 쓰게 된다.
1947년, 블랑쇼는 파리를 떠나 니스와 몬테카를로 사이 지중해 해안에 있는 작은 마을인 에즈빌로 간다. 이 시기 '죽음의 선고', '지극히 높은 자'와 같은 소설들과 '불의 몫', '문학의 공간' 등의 이론서를 출간한다.
1953년에는 전쟁 막판에 폐간된 문예지 '누벨 르뷔 프랑세즈'(NRI)가 복간되었는데, 1968년까지 블랑쇼는 이 잡지에 매달 글을 싣는다. 블랑쇼의 문학비평 대부분이 여기서 나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프랑스 지성계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1957년, 블랑쇼는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전쟁이 끝나고 한동안 문학과 비평에 집중했던 것과 달리, 전쟁 이전과 같이 정치적 활동에 투신한다. 그렇지만 과거처럼 극우가 아닌 정반대인 급진 좌파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1950년대 드골 반대 운동에 동참하고, 사르트르, 로브그리예, 르네 샤르 등과 함께 알제리 전쟁 반대 '121인 선언'에 서명하여 투옥 위협을 받기도 했다.
1968년, 5월 혁명이 일어나자 블랑쇼는 '학생-작가 행동위원회'에 동참하는데 이 단체의 선언문 대다수는 그가 쓴 것이라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위원회가 반시오니즘 성향을 드러내자 이를 탈퇴한다. 이후 블랑쇼는 공적 활동을 완전히 중단하고, 발표되는 글도 줄어들었다.
2003년 2월 20일, 이블린의 르 메닐-생-드니에서 사망한다.
3. 주요 저서
3.1. 소설
토마 알 수 없는자 (Thomas l'Obscur) (1941)
아미나다브 (Aminadab) (1942)
죽음의 선고 (L'Arrêt de mort) (1948)
지극히 높은 자 (Le Très-Haut) (1949)
최후의 남자 (Le Dernier homme) (1957)
기다림 망각(L'Attente l'oubli) (1962)
저 너머로의 발걸음 (Le Pas au-delà) (1973)
대낮의 광기 (La Folie du jour) (1973)
나의 죽음의 순간 (L'Instant de ma mort) (1994)
3.2. 이론서 및 평론서
불의 몫 (La Part du feu) (1949)
문학의 공간 L'Espace littéraire (1955)
도래할 책 (Le Livre à venir) (1959)
무한한 대화 (L'Entretien infini) (1969)
우정 (L'Amitié) (1971)
재앙의 글쓰기 (L'Ecriture du désastre) (1980)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De Kafka à Kafka) (1981)
밝힐 수 없는 공동체 (La Communauté inavouable) (1983)
다른 곳에서 온 목소리 (Une voix venue d'ailleurs) (2002)
정치 평론 1953-1993 (2003)
ㅓ
모리스 블랑쇼 (1907∼2003)
"책을 읽는다는 건 결국 새로운 글을 쓰는 것"
'바깥의 사유'로 유럽 지성계 뒤흔든 비평의 사제
240184 기사의 0번째 이미지진작에 모리스 블랑쇼를 쓰고 싶었다. 몇 차례 시도를 하긴 했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주저했다.
먼저 특유의 난해함이 발목을 잡았다. 책을 읽을 때는 뭔가 알 것 같았는데, 글로 옮기려니 막막했다. 이론으로 해석했다기보다는 몸으로 재현한 듯한 그의 글은 섬광처럼 위대했지만 칼럼으로 옮기기는 어려웠다.
필자의 발목을 잡은 또 하나의 이유는 '사진'이었다. 블랑쇼는 사진이 드물다. 그는 은둔자였다. 구글이나 관련 사이트를 뒤져보면 대학 시절 레비나스와 함께 찍은 뭉개진 사진과 먼 거리에서 파파라치가 찍은 흐릿한 말년 사진 정도가 전부였다. 인물 사진이 들어가는 칼럼이다 보니 이 또한 결격사유였다.
그래도 안 쓸 수는 없었다. 블랑쇼는 현대 비평의 사제(司祭)였다. 난다 긴다 하는 후학들도 결국은 고해성사를 하고 그의 영향권 아래 있었음을 시인했다.
블랑쇼의 철학은 '바깥의 사유'다. 문학 작품 안에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존재 자체를 사유한다. 블랑쇼는 문학 작품을 읽는 사람들에 의해 새롭게 탄생되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는 저서 '문학의 공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해하지만 옮겨본다.
"책은 그(독자)에게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기를 멈추면서 다시금 다른 가능성들 중 하나의 가능성이 되고, 아직은 할 일이 남은 불확실한 사물의 미결정 상태를 되찾는다."
그렇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하나의 가능성을 찾는 일이다. 고정돼 있던 개념을 불확실한 미결정 상태로 만들어주는 게 독서다.
독서는 결국 내 글을 쓰는 행위다. 블랑쇼의 말대로 책을 읽는다는 건 그 책을 새롭게 쓰는 일이다. 세상 모든 책은 독자를 만나면서 다른 책이 된다. 독자들이 처한 상황 등에 따라 각기 다른 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블랑쇼는 그 어떤 유파에도 참여한 적이 없지만 모든 유파에 영향을 미쳤다. 실존주의, 구조주의, 초현실주의, 해체주의는 블랑쇼의 사유에 빚진 바가 크다.
1907년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에서 태어난 블랑쇼는 스트라스부르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잠깐 정치저널리스트로 활약하다 20대 후반 철학으로 돌아온다. 유럽 지성계를 뒤흔든 뒤에도 그는 시골 마을 에즈에 숨어 죽을 때까지 글만 썼다.
블랑쇼가 시에 대해 말한 부분은 어떤 계시 같다.
"시구(詩句)를 파는 자는 모든 우상을 거절해야 하고, 모든 것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지평으로서의 진리도 체류할 미래도 갖지 말아야 한다. 희망에 대한 어떤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을 탄생시키는 자는 그것을 탄생시킨 즉시 작품으로부터 추방당한다. 탄생시킨 순간 내 것이 아니므로 거기에 어떤 희망도 만들어 놓을 수 없다. 설령 만들어 봐야 독자에게 가는 순간 다른 것이 된다.
블랑쇼에게 문학을 한다는 것은 고정적이고 정적인 것들은 위반하는 행위다. 블랑쇼 앞에서 문학의 유용성이나 교훈적 가치를 논하는 건 오류다. 그에게 문학은 쓰기와 읽기가 만들어 내는 '무한한 움직임'일 뿐이다.
바깥dehors은 이 현실의 세계로, 그리고 그보다 이상적이고 본래적인 또다른 세계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자가 추방당해 있는 공간이다. 바깥의 경험은 삶으로부터 추방되어, 경계선 바깥으로 내몰려, 추방 가운데 방황할 수 밖에 없게 된 채 존재하는 경험이다. 세계로부터 추방되어 존재하는 경험이다. 여기서 세계는 우리에게 열려있는 공간, 우리가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공간, 우리의 삶이 매 순간 펼쳐지고 있는 공간, 거기서 사물이 발견되는 공간이며, 세계와의 관계는 오로지 사물들을 적극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만 정립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세계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사물들을 규정할 수 있는 높이, 또는 이상적인 측면에서 어떤 궁극적인 가치의 높이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에 따라 열리게 된다. 즉 세계는 상징적 질서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상징체계로서의 언어를 바탕으로 의식과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 세계가 문화의 세계이자 공간이라면, 바깥의 공간은 문화의 세계 바깥이며 바깥의 경험은 문화 바깥의 경험이다. 바깥의 경험은 있을 수 없는 순백의 자연에 대한 경험이 아니며, 문화-상징적 질서-와 자연 사이의 균열,틈, 단절의 경험이다. 바깥의 경험은 세계가 시뮬라크르로 변형되는 사건에 따라 나오는 경험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깥의 경험은 또한 중성적인 것의 경험, 의미가 부재하는 이미지의 경험, 의미의 불가능성의 경험이다. 즉 의미 중심의 상실에 따른 경험이다.
바깥의 공간은 완전히 빈 공간이 아니다. 바깥은 존재자가 부재하는 진공의 공간도 아니고, 존재자들에 대한 일상적, 과학적 또는 철학적 이해가 단순히 부정되는 장소도 아니다. 바깥은 한계, 유한성의 경험으로 인해 존재자들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선행되고 전제되어야 할 탈존 그 자체가 불가능성에 다가가는 공간이다. 바깥 모든 세계에 대한 타자는 세계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세계가 한계에서 전환되어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블랑쇼의 죽음
블랑쇼에게 죽음은 물리적 죽음, 유기체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블랑쇼가 말하는 죽음은 언제나 종말이 아니며 언제나 죽음으로의 접근이다. 즉 나라는 주체가그 앞에서 자신의 자기성을 잃어리게 되는 것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반추를 가리킨다. 또한 죽음으로의 접근은 자아의 불가능성,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의 불가능성, 그리고 세계와의 관계의 불가능성과 마주하는 시련이다. 다시말해 죽음으로의 접근은 모든 바깥의 경험과 연관된 바깥과의 조우이자 마주침이다.
정리해보자면 불량쇼에게 죽음은 죽음으로 접근하는 실재 경험을 가리키는 것을 넘어서 그 자체 세계와 자아의 불가능성이 가져오는 시련과 다르지 않다. 이 죽음이야 말로 기반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반의 상실과 부재로서의 죽음이자 심연으로 향한 죽음이다.
블량쇼에게 죽음은 궁극적 가능성이 아니라 극단적 수동성(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죽음을 수동성 또는 불가능성으로 정의하면서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사유에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블량쇼가 가능한 죽음,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을 말할 때 이는 하이데거의 죽 음에 대한 사유를 염두해두고 있는 것이다. 블량쇼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하이데거에서 죽음은 삶과 육체의 종말이 아니다. 죽음으로 앞서 달려가봄은 어떤 사물과 동일화하고 소유하는 행위와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주위세계로부터, 세계성으로부터, 즉 사물들의 친숙한 유의미성의 지시 전체로부터 분리된 무의 현상 앞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이데거에게서 죽음의 문제가 결국 나의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다. 결국 하이데거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 가운데 놓인 자아의 궁극적 내재성의 가능성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블량쇼는 하이데거와는 반대로 죽음이 자아의 내재성이 파열되는 사건이 이라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 죽음의 경험은 자아에게 고유한 것으로 여겨졌을 그 모든 것이 무너지는 사건에 대한 경험이다.(하이데거의 죽음-나의 본래성이 완성될 미래가 현재에 무한히 다가오는 사건, 블랑쇼의 죽음 - 나의 본래성이 성취될 미래가 현재로부터 무한히 멀어져 가는 사건)
죽음 안에 죽음 보다 더 강한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죽어감 자체이다. 죽음은 힘이며 역능이기도 하다. 죽음은 끝날을 결정하지만, 결정되지 않은 어느 날로 연기되면서 우연적이자 필연적인 주어진 날을 다시 결정하는 의미에 서 미루어진다. 그러나 죽어감은 무력에 처한다는 것이며, 언제나 문턱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죽음은 현재의 심연, 나와는 관계가 없는, 그것을 향해 내 가 나아갈 수 없는 현재 없는 시간이다. 죽음에서 나는 죽지 않고, 나는 죽는다는 능력을 상실했으며, 죽음에서 그 누구가 죽고, 그 누구는 죽기를 멈추지 않고 죽기를 끝내지 않는다.
죽음은 나의 힘이 무로 돌아가는 사건이며, 자신과의 관 계가 궁극적으로 파기되는 사건이다. 그러나 죽음으로의 접근에서 자아의 내재성의 파열이 인간의 모든 실존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파열이 발생하는 곳에서 죽음은 외재성을, 내가 자신 너머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결국 내가 죽는다는 사실은 나의 존재가 타자에게 맡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죽음에 주어지는 무한히 미끄러지는 현재는 내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막힌 시간이지만 또한 타자의 시간으로 열릴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즉 무한히 지연된 현재는 미래의 타자의 시간으로 향해서만 열릴 수 있다. 나의 죽음 앞에서 자신 너머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또한 타인을 향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실존이 내재성 너머에서, 타자와의 관계(외재성) 내에서만 완전하고 무한할 수 있다.
블랑쇼에게 죽음으로의 접근의 경험은 바깥의 경험과 동 일한 것이다. 다시말해 죽음의 경험과 바깥의 경험은 유한성의 경험 전체를 가리킨다. 이를테면 죽음은 정확히 말해서 진리라는 것이 그 근원을 갖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관계이고, 죽음은 진리의 길이다. 이러한 죽음으로의 접근에서 타자와 조우하여 외재성의 완전하고 무한한 경험이 생성된다. 결국 죽음은 나와 타자의 관계 바깥에 기입되어 있으며 바깥의 일부분을 이룬다. 한마디로 죽음으로의 접근의 경험은 문화와 자연 사이의 균열에 대한 경험이며, 문화와 자연 사이의 찢긴 존재가 되는 경험이다.
문학은 우리에게 바깥에 다가갈 기회를 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언어를 언어로서 경험하지 못한다. 언어가 사유에 종속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사유는 언어 를 보편적인 의미로 환원해버리지만 문학 작품은 언어를 언어로 경험하게 해주므로 문학만이 유일한 언어 경험이다. 따라서 문학은 언어를 정의하지 않으며 모든 작품은 언어를 다시 한번 재창조하려고 애쓴다.
문학을 읽을때 각각의 작품마다 다른 경험을 겪는 일은 그 누구도 말하지 못하는 언어의 익명성, 블랑쇼에 따르면 중성적인 것의 체험이다. 언어의 중성성은 사유의 객관성과 같지 않다. 주체는 권위라는 익명의 목소리로 말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나오는 힘을 발휘해 보편적 진리의 대변자가 된다. 이런 것은 중성성이 아니다. 중성성은 의미 바깥에 있는 언어 그 자체의 표현이며, 말이든 글이든 그 어떤 언어의 담론보다 앞서 존재한다. 이렇게 블랑쇼는 언어의 바깥을 중성성neutrality이라고 칭한다. 즉 블랑쇼에게는 중성성은 우월한 주체가 지배하지 못하는 언어를 묘사해주는 말이다. 또한 중성성은 이원론의 대립요소가 고유한 대립관계를 상실하고 서로 긴장과 차이 속에서 역동적인 관계에놓여있는 상황을 뜻하기도 한다. 이는 하이데거의 존재와는 다른 것이며, 세계의 빛남 자체이며 장소이자 풍경이고 평화이다.
책 바깥에서(주요 문장 발췌)
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49739864
블랑쇼가 염두에 두는 것은 자아의 불가능성, 언어의 불가능성, 의미의 불가능성이다. 그 불가능성의 근원이 '바깥'이며, 익명적 '그'이고, '중성'이고, '목소리'이다
그 불가능성에서 글쓰기는 시작된다.
인류사에 남는 명작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인가? 베토벤은 운명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그 곡이 클래식을 대표하게 될 것을 상상했을까? 세르반테스는 그의 책 『돈키호테』가 대중적으로 인기 있으면서도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으로 남았으면 하는 욕망이 있었을까? 당대에는 명망 있는 인기 작가로 이름을 날리지만 시간의 공격 앞에서 허물어지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생존했을 때에는 인정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세상과 불화하다가 후대에 이르러서 재조명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인간이 있다. 물론 피카소처럼 당대에도 인기 있고 향후 300년 동안은 잊히지 않을 인간도 있지만.
베토벤이든 세르반테스든 피카소든 그들은 예술 작품을 창작했다. 그것도 '새로운' 예술을 했다. 예술의 진보적인 가치는 단연 '새로움'이다. 보들레르가 서양문학사에서 그토록 칭송 받는 이유도 그로부터 '새로움'이, 중세와 결별하는 문학적 근대성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 예술가들은 의식적으로 새로움을 추구했을까? 블랑쇼라면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작품의 중심에 다가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아닌 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우선은 그 목소리를 '영감'이라고 해두자. 영감은 내가 간절히 원한다고 즉시 응답하지 않는다. 또, 부르지도 않았는데 불현듯 찾아와 창작자를 자극한다. 영감의 작용은 주체의 의지를 벗어나 있다. 시인들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그들은 시를 노력으로 쓸 때도 있지만 대개는 갑자기 '그 분'이 오셔서 받아적었더니 시가 되더라는 증언을 하곤 한다. 일상인이 들었을 때는 무당이 신을 영접하는 것같은 주술과 영매의 세계같다.
'그 분'의 존재까지 믿든 믿지 않든, 중요한 것은 의식적인 주체로서의 '나'와 무관한 그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아주 피상적으로 프로이트 식의 '무의식'만 하더라도 나의 통제 바깥에 있지 않은가? 밤 중에 꾸는 꿈, 사소한 말실수는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표현된다. '무의식'과 꼭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블랑쇼는 '그' 혹은 '그 누구'의 목소리를 말한다. 예술가가 '그 누구'의 목소리에 끌릴 때, 그는 예술 작품의 중심에 다가가고, 손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글을 쓰기 시작하고, 언어가 사물을 재현, 모방하는 도구이기를 멈춰 그 자체로 자율적인 사물, 존재가 되어 버린다. 기존 예술 양식의 한계지점, 언어의 한계 지점에 도달하면서 그 전까지의 공식 언어로는 포착할 수 없었던 무언가가 이미지로 생성되기 시작한다. 카프카의 '벌레'가, 릴케의 '장미'가 그렇게 탄생한다. 그 알레고리와 상징은 타자이며, 타자와 만난 언어는 낯설다. 그것이 새로움이다.
명작은 명작을 만들려는 작가의 의지만으로 결코 탄생하지 않는다. 작가가 작품을 완성하려는 노력, 거의 노동에 가까운 시련에 투신하는 가운데 자기 의지와 상관 없이 죽음에 가까운 타자성에 접근할 때, '바깥'에 다다르면서 겨우 이루어진다. 그러나 죽음의 공간에 접근한 예술가에게 쓰고 있는 작품이 명작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바깥에 도달하려는 작가는 이미 자신을 현실에서 추방당한 자, 사회 적응에 무능한 자로 인식한다. 카프카가 그랬고 고흐가 그랬다. 그는 자기가 쓰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혹은 그가 완성한 작품은 그가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바깥' 때문이다.
'바깥'은 블랑쇼의 사유를 이해하려면 거쳐야 할 절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바깥'을 명확히 정의내리기란 쉽지 않다. 블랑쇼를 해설한 박준상은 '바깥'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말하자면 바깥의 경험은 불행의 경험, 어떤 불행이 -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 세계와의 관계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비현상적인 것으로 다시 번역되는 데에서 오는 경험이다. 즉 그것은 어떤 육체적·사회적 고통(블랑쇼의 소설화된 작품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과 같이, 가령 '나'의 죽음으로의 접근, 타인의 죽음의 체험, 병의 체험, 사회로부터 배제와 추방이 가져오는 고통)이 존재(세계에서 존재함)의 불가능성의 자각에 따르는 고통으로 덧나는 체험이다. 그것은 세계와의 관계의, 즉 유의미성에 의해, 의미의 친숙함에 의해 보장되는 관계의 결렬을 가져온다. 그 결렬은 어떤 고통과 함께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 결렬은 또 다른 결렬, 자아와 자신 사이의 결렬, 즉 자아(le moi)의 파기를 야기한다."(32쪽)
블랑쇼는 바깥을 탐색하면서 사유의 심층을 파내려간다. 그는 하이데거보다도 더 깊이 들어가고, 레비나스보다도 더 깊이 들어간다.
(하이데거-죽음은 불가능성의 가능성, 블랑쇼-하이데거를 뒤집어 죽음은 가능성의 불가능성)
하이데거는 죽음을 주체의 자유로 전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죽음을 망각한 채 비본래적인 일상성에 매몰되어 있는 존재자가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으로부터 존재를 자각할 때, 그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타자성을 자유의 표현으로 전환시키는 본래적 삶을 회복하게 된다. 실존을 자각한 현존재는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형상이기도 하거니와, 세계에 유일한 단독자로서 자기를 끊임없이 초월하는 자유를 소유한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은 죽음도 초월하는 인간의 자신감이다.
블랑쇼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뒤집어서 가능성 속에서 불가능성을 본다. 죽음을 초월해 자유를 구가했다고 믿는 인간, 자신있게 미래를 향해 자기를 기투하는 현존재는 기투하는 순간에도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끊임없이 자기를 초극하는 순간은 죽음의 토대 위에 있다. 그 죽음은 언제든 현존재를 엄습할 수 있다. 블랑쇼는 죽어감을 본다. 가능성의 불가능성. 블랑쇼는 허무주의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가져오지만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바라본다.
*하이데거는 평균성, 애매성, 잡담에 빠져 비본래덕 삶을
살고 있는 다스만(세인)이 어느날 불안이 찾아오면 죽음을 앞당겨 달려가 고민하고 사유하면서 본래적 삶을 살게 된다고 하였으나 블랑쇼는 본래적 삶을 부정한다.
(레비나스-타자는 타인으로 현현, 블랑쇼-타자의 현전이 자아에서 이미 발생)
블랑쇼가 레비나스의 타자론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타자에 대한 관점이 미묘하게 다르다. 레비나스는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향유하는 존재를 '자아'로 정의내린다. '자아'는 주거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 사물을 도구화하여 욕구를 충족시킨다. 자아를 움직이는 동력은 에고이즘이다. 그러나 그 앞에 타자가 현전한다. 타자의 존재는 자아를 주체로 탈바꿈시킨다. 타자의 현전은 이기주의만으로 내 삶을 영위할 수 없다는 표식이다. 연약한 타자의 얼굴 앞에서 나는 타자를 위해 살아가라는 명령을 듣는다. 레비나스의 논의에서 타자는 타인으로 현현한다. 그러나 블랑쇼는 타자의 현전이 '자아'에서 이미 발생한다고 본다. 인간에게는 '즐김의 욕구'뿐만 아니라 '즐김이 배제된 욕구'도 있는 것이다. '자아'의 향유를 가로막는 타자성이 타인뿐만 아니라 자아에게도 내재해 있다. 예를 들자면, 평소에 맛있게 먹던 사과가 어느 날 이유 없이 맛 없게 느껴지는 순간, 아니 오히려 사과가 혐오스러운 순간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블랑쇼가 염두에 두는 것은 자아의 불가능성, 언어의 불가능성, 의미의 불가능성이다. 그 불가능성의 근원이 '바깥'이며, 익명적 '그'이고, '중성'이고, '목소리'이다. 그러나 불가능성으로 인해 타자와 소통하는 공간이 열리고 문학을 통한 소통이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목소리는 어떠한 '말하여진 것'도 남기지 않지만, 침묵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비참함과 인간의 영광을 보게 한다(그 인간의 비참함과 영광은 어떠한 특정 개인의 것이 아니기에 전혀 특별하지 않은 것이지만, 바로 우리 모두의 것이기에 특별한 것이다).
인간의 비참함, 왜냐하면 목소리는 한계의 언어로서 언어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을, 인간을 자유의 존재로 만드는 이 최고의 인간적 힘이 무력화되는 지점, 따라서 인간 세계에서의 거주가 불가능해지고 인간 자신의 동일성(정체성)이 불가능해지는 지점, 한마디로 죽음의 지점·시점을 명료하게 지시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광, 왜냐하면 목소리는 그 모든 불가능성 속에서 언어에서 파생된 모든 권력(동일성을 규정하는 권력, 넓은 의미에서의 법의 권력)을 부정하고 오직 '나'와 타인의 관계의 끈을 드러내면서 불가능성과 죽음을 딛고, 최후의 공동의 영역을, 외존만이 인간 존재를 정당화하는 영역을, 그에 따라 인간 안에 있는 '우리'의 가능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256쪽)
박준상은 '바깥'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이데거, 레비나스, 플라톤, 메를로-퐁티, 헤겔(코제브) 등의 철학과 블랑쇼의 담론을 비교하여 그 섬세한 차이를 밝혀준다. 이 책의 강점이다. 그러나 블랑쇼의 책을 한 권이라도 본격적으로 읽어본 사람에게 적합하다. 게다가 블랑쇼의 원전을 근거로 자신의 해석을 매우 조심스럽게 펼치고 있어서 블랑쇼에 대한 해석은 믿음직하지만, 너무 안전한 길로만 간다는 인상을 준다. 블랑쇼의 논의에 어울리는 예시와 비유를 제시했다면 '해설서'라는 기능에 더 충실했을 것 같은데 아쉽다. 어쩌면 2판의 머리말처럼 이 책이 "어떤 개인적 경험", "'개인적' 독서의 경험"을 말하고 싶었다는 고백에 매우 충실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이 개인의 경험에 머물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다. 블랑쇼에 매우 충실한 서술 방식 아닌가. 문체도 블랑쇼의 글과 닮아 있는 듯하다. 여러모로 블랑쇼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듬뿍 담겨 있는 저서임은 확실하다.
블랑쇼의 '바깥'은 말하기보다 체험해야 할 것에 가까워 보인다. 바깥에 대한 백 마디의 철학 담론보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한 번 읽는 것이,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으로 작곡한 음악을 들어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진정한 예술과 명성만 쫓는 예술을 가려내고, 정전이 되지 못했지만 정전 이상의 값어치를 지닌 예술을 발견하는 안목을 어떻게 기를 수 있는지가 늘 고민이었다. 그런데, 블랑쇼가 고민에 한 줄기 빛을 던져주는 것 같다.
첫댓글 나의 바깥/윤인미
달려오는 진눈깨비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오는 함박눈도
내리는 눈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한다
바라보는 방향이 같은 것들의 눈은
이파리보다 꽃을
바닥에 던져 놓은 가방 모서리
뾰족한 포크가 찌르는 곳
조급하게 앉은 자리에서
꽃만 본 적 있다
머무르고 부수어도
파괴된 적 없는 그 기억은
있는 듯 없는 것
여태 기억나지 않는다
눈발에 무너지는 풍경처럼
풍경이 꾸는 헛꿈처럼
물러날 수 없는 작별로
홀로 마주하는 무덤이다
바깥 / 김소연
얼굴은 어째서 사람의 바깥이 되어버렸을까
창문에 낀 성에 같은 표정을 짓고
당신은 당신의 얼굴에게 안부를 물었다
안에 있어도
바깥에 있는 것 같아 바깥으로 나와버릴 때마다
안쪽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 집에 가자며 누군가 손을 내밀 때
거긴 숙소야, 나는 집이 없어
당신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비바람에 우산들은 뒤집히고
상인들은 내다 걸은 물건들에 비닐을 덮어주고
행인들은 뛰거나 차양 아래에 멈춰 섰다
처마랄 것도 없는 처마 아래에서
잠자리 두 마리가 교미를 하고 있었다
꼬리를 바르르 떨었지만 고요함을 잃지 않았다
꼬리는 어째서 그들의 바깥이 될 수 있었을까
사나운 꿈은 어째서 이마를 열어젖히는가
낯선 짐승들이 한 마리씩 튀어나와 베개를 짓밟아서
꿈 바깥으로 당신은 자꾸 밀려났다
당신은 다시 잠이 들었다
얼굴을 벗어
창문 바깥에 어른대던 저 나뭇가지에다
걸어둔 채로
당신의 바깥은 이제 당신의 얼굴을 쓰고 있다
안으로 들어오겠다고 당신의 방을 밤새
부수고 있다
바깥의 사과/강혜빈
꿈이 나를 갉아먹을 때 엄마, 엄마를 부르지만
나와 나의 커다란
괘종시계만이 살아있는 이곳
시계추는 거실을 서성이며 살타는 냄새를 풍기고
발들이 반복되는 계단을 번복하는 소리
저녁의 목구멍이 팽팽하게 잠겨오는 소리
흑흑, 흑흑, 눈에 박힌 태엽이 잘 감기지 않는 소리
태연히 몸속을 건너가는 엄마, 엄마를 부르지만
나와 나의 투명한
팔다리가 상상한 모습이 아니어서 그랬니
문이 혼자서 열린다면 안녕, 너도 내가 보이니
물을 뚝뚝 흘리면서 널려 있는 이웃들
발바닥을 내놓고 말라가는 바지들
머리카락을 한 올 두 올 뜯어먹으며 커지는 개미들
아냐, 한눈에 알아보는 건 가짜 가족
우리는 늘 액자 속에서만 창백하고 검었는데
이불의 겉과 속은 덮는 사람이 정하는 것
썩은 껍질들처럼
자다가 울면 잠꼬대처럼 넘어갈 수 있으니까
그런 얼굴로 나를 기다리면 못써
누구라도 목소리를 따라할 수 있으니까
아냐, 우리는 아직 아무도 입지 않은 옷
밀려난 얼굴 위로 똑같은 얼굴이 겹쳐진다면
어젯밤 누군가 성냥 한 개비를 던졌기 때문에
잠 속에서 몸집이 커다래진 시간은 깨어나지 않아
그렇다고 아주 살아있는 것도 아닌
문고리는 곧 살금살금 돌아갈 테지만
우리 바깥의 우리 / 김소연
우리는 서로의 뒤쪽에 있으려 한다
등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은 아니고
다만 등을 보고 있으려고
표정은 숨기며
곁에는 있고 싶어서
옆자리는 비어 있고
뒤에 서서 동그랗고 까만 팔꿈치를 쳐다보면서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등 뒤에서 험담이 들려올 때
꼭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제대로 듣지 못하면서
⸺말하는 것 좀 봐
⸺말하지 못하는 것 좀 봐
단 하나의 사건에서
모두의 죄들이 한꺼번에 발각되는 순간이 온다
⸺이제 전부가 죄인이 되었는데 앞으로 벌은 누구에게 받나
추위 때문에 소름이 돋는 건지
소름이 돋기 때문에 춥다고 느끼는 건지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너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내가 알던 나에 대한)
우리 바깥에는 우리가
우리로부터 바깥으로 우리에게로
우리 바깥의 우리를
우리는 마주 보고 있지 않았다
마주: 이것은 바라보는 걸 뜻하지 않았다 언제 단념하게 될지 지켜보는 걸 뜻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말하는 자의
두려움을 보고 있다
분명히 맨 뒤에 서 있었는데
자꾸 맨 앞에 서 있다
우리는 등을 보이지 않으려다
곧 얼굴을 다 잃어버리겠다
바깥에 갇히다/정용화
우리 집 현관문에는 번호키가 달려있다 세 번,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면 가차 없이 문이 나를 거부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 제대로 바깥에 갇히고 말았다
안과 밖이 전도되는 순간
열리지 않는 문은 그대로 벽이 된다
계단에 앉아있는 30분 동안
겨울이 왔다
바람은 골목을 넓히려는 듯 세차게 불고
추위를 모르는 비둘기는
연신 모이를 쪼아댄다
내 것이면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어디 문뿐이겠는가
낡을 대로 낡아버린 현수막이
바깥에 갇힌 나를 반성도 없이 흔든다
걸터앉은 계단이
제멋대로 흩어지는 길 위의 낙엽이
새들이 자유롭게 풀어놓은 허공이
나를 구속하고 있는 바깥이라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는 지금 바깥이다
바깥에게/김근
너와 헤어지고 나는 다시 안이다 아니다
꽃도 피지 않고 죽은 나무나 무성한
무서운 경계로 간다 정거장도 없다
꽃다발처럼 다글다글 수십개 얼굴을 달고 거기
개들이 어슬렁거린다 그 얼굴 하날 꺾어
내 얼굴 반대편에 붙인다 안이 아니다
내 몸에서 뒤통수가 사라진다 얼굴과 얼굴의
앞과 앞의 무서운 경계가 내 몸에 그어진다
너와 헤어지고 나는 무서워진다
너를 죽이면 나는 네가 될 수 있는가
모든 안은 다시 바깥이 될 수 있는가
보라의 바깥/이혜미
눈 마주쳤을 때
너는 거기 없었다
물렁한 어둠을 헤집어 사라진 얼굴을 찾는 동안,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시선의 알갱이들이 쏟아진다 산산이 뿌려진 눈빛들이 나를 통과하여 사라져갔다
나는 도망친다
빛으로부터.
눈을 감는 순간 빛은 갇히고 눈동자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그건 서로에게로 건너가려는 시간들. 오늘 죽인 나비를 태어나기 전부터 기다리는 일 새로운 명명법을 익힐 때마다 공기의 농도가 진해져갔다 점점 맑아지며 밖을 향해 솟아오르는 행성의 온도
유리로 만든 베일을 쓰고 대기권을 바라본다 나는 이곳에 색(色)을 짊어지러 온 사람, 얼음조각 속에 우연히 들어간 공기방울처럼 스스로 찬란할 수 있을까 관여할 수 없고, 무엇과도 연관되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을 만져보는 순간, 세계는 투명하고 위태롭게 빛난다
이제야 나는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눈을 감고
몸 안을 떠다니는 흐린 점들을 바라본다
발밑으로 빛의 주검들이 흘러내렸다
나의 바깥 / 성은주
해변을 통과하는 자갈처럼
차가운 치아를 드러내며 견디는 소리
내가 모르는 너와 네가 모르는 나 사이
일방적으로 사라졌다 나타나는 아침을 닮았다
우린 종종 실내화를 바꿔 신었고
색깔 없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
수일을 뒤척였다
아주 낯설거나 혹은 아주 익숙하게
말끝을 올려 나와 멀어지는 연습을 하다가
모두 빠져나간 텅 빈 숙소에 앉아 울었다
경기장 바닥에 깔린
원(圓)을 따라 달리는 너와의 레이스
날 잃어버릴수록 내가 더 선명해지는 이유
떠밀린 속사람과 속사람에게서 나온 겉사람이
문밖에 서 있기 때문이다
문을 두드리는 건
정든 화음을 잊지 않으려는 예의
서로 다른 방향으로 목을 돌려봤지만
계절이 지워지는 속도가 달랐으니까
새들이 숲을 빠져나가려 할 때
나무 바깥의 기척을 이해하며 날아간다
내가 싫어지면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우리의 껍질이 이렇게 단단한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