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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18주일 [겸손 : 구속받은 자의 표]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엡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가 이루시려는 전 우주적 사역의 임하게 하신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요구하시는 첫째 의무는 바로 겸손함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우리를 겸손으로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은 겸손을 명하시므로, 더 건전한 인긴성을 향상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는 중요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필요한 이유가 있다.
[죄인의 흔적인 교만]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서 분명한 증거가 있다.
그중 하나가 교만이다.
인간들은 거의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신을 남보다 낫게 보이기 위해, 자꾸 자기를 드러내고, 자랑하려고 하는 것과 동시에 남을 깎아 내려서, 나보다 낮게 보이게 하려는 마음의 끌림이 있다.
이런 성질은 어디서든 본다.
이런 성품을 나타내는 자는 열등감을 많이 느끼는 사람도 그렇겠지만, 굳이 열등감으로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다 갖고 있다.
사실 항상 우리는 나 자신을 남과 비교하고 있다.
사람을 볼 때마다 순간적으로 이미 저울질을 하고 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어떻하든 나를 좋게 보이려고 말을 이어나간다.
이것은 세상에 늘 있는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모든 갈등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누군가의 교만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디서든지 싸움이 있고, 불화가 있는 것은 누군가 교만으로 시작하고, 교만으로 되받아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교만이 너무 많아서, 우리는 상처를 너무 많이 받는다.
인생이 매우 힘겹게만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교만 때문이다.
남의 교만으로 인해 가해지는 피해 때문이다.
세상은 원래 오염되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교회 안에서도 그런 성질이 남아있다면, 혹은 제어되지 않는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다.
왜냐하면, 교만은 복음과 전혀 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만이 있는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치상 받아들일 수도 없고, 설령 받아들였어도, 복음으로 인한 구속을 유지할 수 없다.
이렇듯 교만은 죄의 온상으로서, 가장 극명한 역할을 하는 마음속의 성질이다.
누구든지 자기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알면, 그것을 버려야 하는데, 버리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 자체가 교만이다.
그런데, 우리는 교만이라고 하면, 자기는 해당이 안된다고 신경을 끈다.
교만이라는 단어 자체가 굉장히 부정적이기 때문에, 되게 나쁜 자를 가르키는 것 같다.
그래서, 자기는 아니라고 한다.
교만이라는 정도의 차이가 많이 있다.
우리 속의 교만은 적재적소에서 강력한 역할을 한다.
이것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된다.
뻔뻔스럽게 교만한 사람도 있겠지만, 약간 중간지점인 사람도 있다.
속히 교만은 긍지, 자긍심, 자기만족과 무관하지 않다.
영어 단어에도 그 사이에 속한 단어들이 있다.
가장 극단은 교만이라는 단어에 해당된다.
남이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저 어떻하든 나를 올려볼까 그런 것에 관심이 있는 것, 항상 그런 생각에 지배되고 있어서, 모든 인간관계나 대화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특별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체로 다 그런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교만은 복음의 반대성질이다.
[복음의 약속은 겸손을 전제함]
복음은 겸손을 요구한다.
겸손한 심령을 구원한다는 것이 복음의 약속이다.
겸손한 자는 구원하되, 교만한 자는 죄 중에 놔둘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음성이다.
우리가 복음안에 들어와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지라도, 겸손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으로서 진전이 안된다.
교회는 출석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겉사람만 교회를 다니고 있을 뿐, 진정한 영적인 발전은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교만을 극복한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을 때, 강력한 신앙체험을 가지고, 자기를 지배하던 교만을 단번에 끝장내버린 사람도 있다.
다시는 교만의 삶을 살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강직하게 그 길을 가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은 드라마틱한 변화를 갖지는 않고, 교만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훈련을 통해 이겨간다.
교만은 단번에 버리기 어렵다.
교만은 훈련에 의해, 점차 제어하고, 제거해 나간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겸손이 깃들게 한다.
억지로라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훈련과제다.
그러는 동안, 그 속에서는 교만을 버리기 위해, 갈등의 훈련과정을 겪는다.
그래서, 겸손의 자세가 지배적으로 있게 되면,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정상적으로 갖게 된다.
즉 하나님의 정상적인 인도를 그 때부터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런 것은 무시하고, 나는 그런 것과 관계 없고, 자기는 겸손하다고 자신있어 한다.
그런데, 자기가 겸손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겸손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겸손의 자세로 복음을 지켜왔다.
그들이 겸손을 굉장히 중요한 필요조건으로 갖고 있던 것은 그들이 가졌던 놀라운 경험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나 겸손하신 예수님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 보고 하고 있는 내용중에 가장 큰 것은 그분이 겸손하시다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이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당시에는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다.
겸손.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교만과 완전히 결별했다.
그러면서, 겸손의 자세를 계속 훈련하면서, 우리에게 이 좋은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그들이 본 구주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자기를 새롭게 만들고,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복음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만을 계속 유지한다면, 일단 도리가 아니다.
우리에게 전달된 복음, 구원은 주님의 겸손으로 이룬 것이다.
복음의 소식은 겸손이 이겼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평생 훈련과제]
그런데, 우리가 세상과 마음의 생각이 똑같이 속에 탐욕이 가득하면 안될 것이다.
그런 것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세가 아니다.
그저 껍데기만 입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구속이 정말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러면 교회의 분열과 불행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교만과 겸손은 실제적인 영적 문제와 깊게 관련이 있다.
또, 우리에게 겸손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는 이유가 있다.
구속의 일과 실제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필요성으로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평생 훈련해야 한다.
지옥불에 떨어져야 할 망가진 인생이 건짐을 받고, 이기고 나가려면, 훈련으로 계속 무장해 나가야 한다.
오늘 예수 믿었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되는 것은 아니다.
겸손은 천국의 성품이다.
교만은 지옥의 성품이다.
[새 삶의 방식을 주심]
엡4장은 3장까지의 내용을 마무리하고, 새롭게 시작한다.
1-3장까지는 하나님이 주신 특권으로 우리의 높아진 지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4장부터는 이런 일이 있으니, 이제는 우리 정체에 맞게 행하도록 하늘로부터 명하신 명령이다.
이 명령은 특권에 맞게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이다.
합당하게 행할 때, 가장 먼저 요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서로 일치하고 연합하라]
교회는 그리스도로 충만하여져서, 하나가 되는, 전 우주적인 목적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교회가 먼저 주님으로 꽉 차야 한다.
그러므로, 온 우주의 통일이 다가온다.
그런 우리가 일치하고 연합하는 것은 당연하다.
서로 일치하고, 연합하라.
그 명령을 하고 있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 그런 요구를 하실까?
우리를 살리기 위한 구속사역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안하면 안될까? 안된다.
왜냐하면, 천국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새언약, 신약을 주셨는데, 신약은 궁극적으로 천국에 데려가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하지 않으면, 새언약에 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최종완결을 향해 우리는 달려가고 있다.
거절할 수 없고, 무시할 수 없는 부르심이 있다.
[겸손으로 모두 하나가 되라]
엡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겸손, 온유, 인내, 사랑, 용납함.
다섯가지 덕목이 나온다.
이중에서 가장 으뜸은 겸손이다.
왜냐하면, 겸손은 나머지 네가지 요소의 기초가 된다.
겸손이 되지 않으면, 나머지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발전되는 진행구조를 갖고 있다.
오늘 구원받았으면, 오늘부터 겸손을 훈련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 후 따르는 온유, 인내, 사랑, 용납을 갖게 된다.
[존재하지 않았던 단어 겸손]
원래 겸손이라는 단어는 있던 단어가 아니다. 합성어로 꾸며서 만들어진 단어다.
나 자신을 낮게 여기고, 남을 높게 여기는 자세를 가르키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다.
원래 헬라, 로마 문화권에서 겸손이라는 것은 굽신거리고, 복종하는 노예의 모습이었다.
로마인들은 겸손을 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굉장히 한심하고, 꼴불견이고, 비굴한 모습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도 없었다.
굉장히 나쁜 것으로 생각했다.
로마인들은 자신만만한 것을 좋게 생각했다.
나는 해낼 것이다. 이런 것.
성경의 겸손은 원래 있던 단어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것이다.
추측컨데, 바울 자신이 만든 것 같다.
당시 사회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부심이 없는 것을 나약함, 무능으로 봤다.
그러나, 다시 말하면, 겸손은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기본덕목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나타내는 것은 겸손이다.
로마 사람이 보기에 비굴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인을 나타내는 표였다.
그렇게 보면, 당시 예수께서 겸손을 가르치셨던 것이 얼마나 혁명적인지 알 수 있다.
오늘날은 겸손을 아름다운 덕목으로 인정한다.
[세상에서 지배적인 인간의 성질]
그러나, 사실 이 세상에서 지금도 겸손은 맞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는 그런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는 자신의 훌륭함을 발견하라고 한다.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 널리 퍼진 정신운동이다.
인간성은 원래 겸손이라는 덕목을 피해왔다.
그렇게 하면, 비굴하다, 없는 사람 같다고 했다.
오히려 교만이 발전되기 좋은 삶 속에서 우리는 달려 왔다.
이것은 사단의 성질이다.
사단이 우리를 지배하면서, 교만을 넣어주고, 인간이라는 도우미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좀 다르다.
우리는 유교사상에 찌들어서 좀 익숙하다.
성경을 볼 때도 그런면에서 이해가 잘되지만, 서양인들에게는 이해가 잘되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서양도 그 개념은 이해하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광범위하게 인정하지는 않는다.
한국사회에서도 겸손이라고 하면서, 다 겸손하게 살지는 않는다.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정도이지, 한꺼풀만 벗기면 이기심이 가득하다.
물론 서양보다 겸손의 자세를 좀 더 갖는 편이긴 하다.
서양인들에게 피아노 칠 수 있느냐고 물으면, 잘친다고 하면서, 띵띵띵 누르고 있다.
그러나, 한국사람은 피아노 못친다고 하면서, 아예 연주를 한다.
몸에 배인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사람은 겸손을 배우기 보다, 교만에 너무 익숙하다.
길에 두사람이 있으면,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소리를 계속 하고 있다.
성경에도 자기들끼리 비교하는 것은 지혜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교회에서도 이런 교만이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놔둔다면, 세상의 생각이 자꾸 들어올 것이다.
자기는 높이고, 남을 낮추는 것은 교회의 신앙을 죽이는 행위다.
그런 사람은 껍데기만 있고, 속은 교만으로 가득한 것이다.
이렇게 교만을 놔두면, 복음의 힘은 굉장히 제한이 된다.
왜냐하면, 남을 낮추고, 자기를 높이려는 성질이 계속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겸손으로 부르신다.
하나님의 기업은 신자들의 겸손한 자세를 통해서만 성취된다.
《왜 겸손해야 할까.》
[1. 겸손은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세]
첫째, 겸손은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는 하나님의 모습을 완전히 확인했다.
하나님은 모든 면에 너무 의로우시다.
너무 정의로우시고, 인자하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죄는 없으시고, 죄의 속성도 없이 거룩하시다.
하나님과 상종하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의로우심, 인자하심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사6:1,3,5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 세상의 교만은 사단이 가져왔다.
루시퍼는 자기를 높이는 자였다.
자만이 가득하다.
늘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는 행위로 자신을 나타냈다.
이렇게 주장을 계속 하니까, 하나님은 그를 그의 산에서 쫓아내셨다.
아담과 하와는 그의 성질을 물려받았다.
오늘도 사단은 똑같이 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했던 전략을 우리를 향해서도 한다.
누구든지 교만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마귀는 우리를 교만 속에 두기 위해, 쉬지 않고 움직인다.
우리는 교만과 전쟁중이다.
사단의 끄나풀로 일할 것인가, 죄의 약점을 버릴 것인가.
결단이 필요하다.
이 세상에는 사람을 교만으로 이끌 수 있는 자부심, 부, 명성, 좋은 직장, 훌륭한 자녀 등이 있다.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가 없다.
이런 일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길 때, 우리 마음은 자연히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된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과 교제가 안된다.
성령의 교통이 있을지어다.
왜 축도하는가. 성령이 이 영혼을 하나님의 전으로 삼고, 사귐이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만한 자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2. 겸손은 자신의 죄성을 아는 자의 자세]
누구든지 진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대부분 자기 삶을 살기 바쁘다고, 자기를 보지 않는다.
정직한 사람이 자기를 들여다 볼 때, 발견하는 것은 자기 속의 죄다.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누구든지 자기의 죄성을 발견해야 하고, 하나님의 공의의 정죄를 합당하게 여기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들여야 한다.
맞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겸손은 회개하는 자세와 같은 맥락이다.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는 생명이 다가오지 않는다.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 믿을 때, 다 구원받았다고 한다.
이제 구원의 삶이 시작되었는데, 그날 바로 정지해버린다.
그날부터는 역사하지 않는다.
요일1:8-9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그 자체가 자기가 죄인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봐야 한다.
겸손만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한다.
또한 우리 모습을 발견할 때, 겸손한 자가 된다.
그러므로, 매일 회개하는 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매일 기도하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옛날 배를 보면, 돛이 굉장히 높다.
30-40미터씩 솟아있다.
바람이 불면, 그냥 쓰러질 것 같은데, 쓰러지지 않는다.
아래에 무거운 추가 있다.
그게 겸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백프로 겸손한 자가 되리라가 기대하지 않으신다.
다만 훈련하여 견고한 기초를 두어, 원수에게 말려들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3. 겸손은 그리스도를 의식하는 자세]
그리스도가 계심을 아는 자들은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는 우리의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땅에서 아무 지위도 없으셨고, 가난하셨다.
그야말로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셨고, 옷한벌만 가지셨고, 남의 무덤에 묻히셨다.
빌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는 환경적으로 엄청 무시를 당할 수 밖에 없는 분이었다.
그는 매우 겸손하셨다.
우리의 왕, 우리의 하나님은 겸손하신 분이시다.
대충격이다.
그가 겸손해야 하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우리를 위해, 무시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을 이루실 수 있었다.
그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갖고, 낮추고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주가 겸손하지 않으셨다면, 아버지를 기쁘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뜻인 바, 인간구원을 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주께서 겸손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저 죄와 사망에 거하다가, 영원히 멸망했을 것이다.
우리가 겸손하지 않은 자세로 남아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삶 전체로 겸손을 행하신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주께서 겸손하기 때문에, 아프셨고,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히12:,2-4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본을 보인다고 하시면서, 발을 씻기셨다.
대표적인 겸손의 자세다.
요13:12-17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발을 씻기는 것, 그 자체가 충분한 명령이다.
눅6: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요일4:19-20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일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세.
하나님을 보지 않을 수 없는 우리들.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욥은 회개했다.
욥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은 자신을 죄인중의 괴수라고 했다.
눅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베드로도 주님의 의로우심을 보고,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했다.
[통일성에 대한 우리 임무]
우리는 온 우주적인 모델로서 임무가 있다.
겸손은 초라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다.
벧전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빌2:3-5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구약성경에도 사실 계속 경고하고 있었다.
잠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사2:11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말4: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복음으로 살리고 나머지는 멸한다.
겸손한 자는 살리고 나머지는 멸한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겸손한 자만 천국에 이른다.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를 도우신다.
복음의 핵심이다.
겸손한 심령으로 훈련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