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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풍노도의 시대 - 1848년의 유럽혁명기 동안의 사상사
- 들어가는 말
문명은 농민을 자기 짐을 나르는 말이나 소로 취급해왔다. 거시적으로 보면 부르주아 계급은 농민이 지는 짐의 형태만 바꾸었을 뿐이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농민은 기본적으로 과학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경계 밖에 놓여있다. 무대 장면을 바꾸어 하늘과 땅의 배경 그림을 등에 진 채 나르고 분장실을 걸레로 청소하는 잿빛의 사람들에게 연극 비평가는 거의 관심이 없다. 이와 똑같이 역사학자 역시 궂은 일이나 말없이 하는 농민에게 거의 관심이 없다. 역사상의 혁명들에서 농민이 수행한 역할은 아직까지도 거의 해명되지 않고 있다.
-마르크스의 혁명관
맑스는 1848년에 이렇게 적었다: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은 농민을 해방시키면서 혁명을 시작했다. 농민의 도움으로 이들은 유럽을 정복했다. 프로이센의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협소한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자기의 동맹 세력인 농민을 놓쳐버렸다. 이 결과 농민은 봉건 반혁명 세력의 무기가 되었다." 독일 부르주아 계급과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을 대조하는 그의 서술은 올바르다. 그러나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은 농민을 해방시키면서 혁명을 시작했다"는 주장은 당시 프랑스 공식 역사학계의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맑스는 이 신화에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부르주아 계급은 모든 힘을 다해 농민 혁명을 반대했다. 1789년 농촌에 대한 정책을 조정한다는 미명 하에 제 3 신분(부르주아 계급)의 지역 책임자들은 농민의 가장 강렬하고 대담한 요구들을 제외시켰다. 농촌에서 혁명의 불길이 밤하늘을 밝히는 가운데 국민의회가 내린 8월 4일의 그 유명한 결정은 내용이 전혀 없는 한심한 정식으로 오랫동안 남았다. 이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려는 농민들을 제헌의회는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주어진 의무를 다하기 위해 본업에 복귀하고 봉건 소유제도를 제대로 존중하라"고 꾸짖었다. 그리고 시민 근위대는 여러 차례 농민을 진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시 노동자들은 봉기에 나선 농민의 편을 들어 부르주아 토벌대에 돌과 깨진 기와로 맞섰다.
5년의 혁명기간 내내 프랑스 농민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들고일어나 봉건 소유주와 부르주아 소유주 사이의 합의를 막았다. 혁명 공화국을 위해 피를 쏟았던 파리의 평민들은 봉건제의 사슬에서 농민을 해방시켰다. 1918년의 독일 공화국은 왕정이 빠진 구체제에 불과했다. 이것과 1931년 스페인 공화국과는 근본적으로 달리 1792년의 프랑스 공화국은 새로운 사회체제의 시작을 알렸다. 근본적 차이가 농업문제에 있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프랑스 농민은 곧바로 공화국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주의 억압을 벗어 던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파리의 부르주아 공화파는 대체로 농촌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지주에 대한 농민의 투쟁이야말로 봉건적 쓰레기를 청소하면서 공화국의 수립을 보장했다. 이 점을 그 유명한 마키아벨리는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에버트가 독일 공화국 대통령이 되기 400년이나 전에 그는 피렌체에 망명하여 어느 푸줏간 주인과 개똥지빠귀 사냥이며 주사위 놀이를 즐겼다. 그리고 시간 틈틈이 민주주의 혁명의 경험을 일반화시키는 저술을 했다. "귀족이 많은 나라에서는 이들을 전멸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공화국을 건설할 수 있다." 러시아 농민도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의견이었다. 이들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알지 못한 채 이 사상의 실체를 공공연히 보여주었다.
- 러시아의 혁명기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가 노동자와 병사들의 운동 중심이었던 반면 농민운동의 중심은 후진적인 대(大)러시아 농업 지역과 볼가강 중부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봉건 농노제의 잔재는 특히 뿌리가 깊었다. 귀족계급의 토지 소유는 농민을 철저히 착취하여 대단히 기생적이었다. 농민의 분화는 훨씬 늦어 있었고 농촌의 빈곤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미 3월에 이 지역에서 터져 나온 운동은 처음부터 폭력으로 얼룩졌다. 그러나 지배 정당들의 노력으로 이 운동은 화해주의 정치노선의 통로로 유도되었다.
공업이 발전하지 않은 우크라이나의 경우 수출을 위한 농업 생산은 훨씬 진보적이고 따라서 자본주의적이었다. 이 지역에서 농민의 계층 분화는 대러시아 농업지역보다 훨씬 진전되어 있었다. 더욱이 대러시아인에 저항하는 민족해방투쟁이 당분간 다른 형태의 사회투쟁을 불가피하게 지연시켰다. 그러나 지역적 민족적 조건의 다양성 때문에 시간 차이가 있었지만 농민투쟁은 모든 곳에서 폭발했다. 가을이 되자 농민투쟁은 거의 전국으로 이미 확대되어 있었다. 구 러시아 624개 군의 77%인 482개 군이 이 운동에 끌려 들어갔다. 러시아 북부, 트랜스코커서스, 대평원, 시베리아 등 러시아 변방지역은 농업의 조건이 특수했다. 이 지역들을 제외하면 481개 군의 91%인 439개 군이 농민반란에 휩쓸려 들어갔다.
경작지, 삼림, 목초지, 임대 농지, 임 노동 등의 다양한 조건 그리고 혁명의 다양한 단계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방식이 달랐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불가피하게 지연되었을 뿐 농촌의 운동은 도시의 운동과 같이 크게 두 단계를 거쳤다. 첫 단계에서 농민들은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면서 이를 통해 새로 도입된 제도들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실제적인 이익보다 형식을 따졌다. 혁명 이전에는 인민주의 색채를 띠고 있었던 러시아의 자유주의 신문들은 1917년 여름에 지주들의 심리상태를 대단히 정확하게 표현했다. "농민은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전혀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주위의 토지는 전부 우리 것이다." 4월 톰보프의 어느 마을이 임시정부에 보낸 전보에는 농민들이 이렇게 "평화"를 유지한 이유가 완벽한 드러나 있다: "획득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 평화를 유지하겠다. 대신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지주의 토지 매매를 금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피를 흘리는 한이 있어도 아무도 토지를 경작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농민은 정중한 위협의 어조를 유지하기가 쉬웠다. 왜냐하면 자신의 역사적 권리인 토지를 점거하기 위해 지주에게 압박을 가해도 국가기구와 직접 갈등할 필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방에서는 정부의 권력 기관들이 부족했다. 마을 위원회는 민병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법원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또한 지역 인민위원은 힘이 없었다. 농민은 이들에게 이렇게 고함지르곤 했다: "우리가 당신들을 선출했소. 그러니 우리는 당신들을 내쫓을 것이요."
여름 동안 농민은 지난 몇 개월 동안의 투쟁을 확대시키면서 내전의 상태에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이들의 좌파는 내전의 경계를 넘어 실제 전쟁을 일으켰다. 타간로그 지구의 지주 보고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농민들은 건초와 토지를 차지했으며 쟁기질을 방해하고 토지 임대료를 마음대로 정했을 뿐 아니라 지주와 토지관리인까지 제거했다. 니제고로드 정부위원(commissar)의 보고에 따르면 지방에서 폭력행위와 토지 및 삼림 점유의 건수는 크게 늘고 있었다. 군 정부위원은 농민이 자신을 대지주의 옹호자로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농촌 민병대는 믿을 수 없었다. "민병대 장교들이 군중과 함께 폭력행위에 가담한 경우들이 있었다." 슐뤼셀부르크 군에서는 지역 위원회가 지주의 산림 벌채를 막았다. 농민들의 생각은 간단했다: "제헌의회가 소집되어도 베어진 나무는 다시 살릴 수 없다." 법무부 정부위원은 농민들의 건초 점유를 불평한다: 법원의 말들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는 농민들로부터 건초를 구입해야한다! 쿠르스크 도에서 농민들은 외무장관 테레쉬첸코의 비료를 준 토지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 오를로프 도의 말 사육사 슈나이더에게 농민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농민들은 그의 토지에서 자라는 클로버를 수확할 뿐 아니라 그를 "군대로 보낼 수도 있다." 마을 위원회는 로지안코의 토지관리인에게 건초를 농민에게 넘기라고 지시했다: "토지 위원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귀하는 체포될 것이다...." 이 명령서는 서명되고 봉인되었다.
농민의 투쟁으로 재산상의 손해를 본 자, 지역 당국, 고상한 사고를 가진 관찰자들의 불평과 우는소리가 전국의 구석구석에서 쏟아졌다. 지주들의 전보는 조야한 계급투쟁 이론을 아주 뛰어나게 반박했다: 작위를 가진 귀족, 대토지 소유주, 종교 지도자, 행정 당국 등은 공공의 행복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다. 이들의 적은 농민이 아니라 볼세비키들이며 때로는 무정부주의자들이기도 하다. 지주들의 재산은 나라의 복지라는 관점에서만 관심거리이다. 체르니고프 도의 입헌민주당원 300명은 볼세비키 선동에 넘어간 농민들이 강제 노동을 하는 전쟁포로들을 풀어주고 자신들이 직접 추수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 때문에 "세금을 낼 수 없는" 지경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이들은 외친다. 이 자유주의 지주들은 오직 국가 재정을 지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국립은행의 포돌스크 지점은 마을 위원회들의 자의적인 행위를 불평한다. "위원회 의장들은 종종 오스트리아 출신 전쟁포로들이다." 이것은 상처 입은 애국심의 표현이다. 블라디미르 도에 위치한 토지문서 등록국장 오딘트소프의 장원에서 농민들은 "자선단체들을 위해 준비된" 건축 자재들을 자기 용도를 위해 마구 실어갔다. 관리들은 오직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 같다! 포돌스크 도의 어느 주교는 대주교 저택에 딸린 삼림을 농민이 자의적으로 점거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러시아 주교회의 의장은 알렉산드로-네프스키 수도원의 목초지를 농민들이 점거했다고 불평한다. 키즐리아르스크 수녀원 원장은 지역 위원회에 신이 천둥과 번개를 내릴 것을 주문하고 있다: 지역 위원회는 수녀원의 일에 간섭하면서 자기들이 사용하기 위해 토지 임대료를 수녀원으로부터 몰수하고 있다. 또한 "상급자들에게 대항하도록 수녀들을 선동하고 있다." 이 모든 경우에 교회의 정신적 이해는 직접 영향 받고 있다. 레프 톨스토이의 아들 톨스토이 백작은 우핌스크 도의 농업경영자동맹의 이름으로 이렇게 보고한다: "제헌의회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은 채" 지역 위원회로 토지가 이전되면서 "20만 명이 넘는 도내 토지 소유주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 세습 귀족은 지주들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다. 트베르 도의 지주인 상원의원 벨가르트는 노인들이 삼림을 벌채하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이들이 "부르주아 정부에 복종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와 분노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탐보프 도의 지주 벨리아미노프는 "군대의 필요에 부응하는" 두 장원을 농민들의 손에서 구출해 줄 것을 요구한다. 우연히도 이 두 장원은 그의 소유이다. 관념주의 철학자에게 1917년 지주들이 보낸 전보들은 진짜 보물이다. 다만 유물론자는 이것들 속에서 온갖 냉소적 행위의 모범들을 볼뿐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거대한 혁명들은 유산자들로부터 품위 있는 위선을 보일 특권조차 박탈한다.
농민들의 투쟁사
농민의 투쟁으로 재산상 피해를 본 자들은 군과 도 당국, 내무장관, 정부 수상 등에게 호소했으나 일반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을 것인가? 의회 의장 로지안코가 있다! 7월 시기부터 코르닐로프 반란 때까지 짜르의 시종장이었던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가 전화만 하면 많은 일이 해결되었다.
내무부의 관리들은 지역으로 회보를 보내 소유권을 침해하는 농민들을 재판에 회부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사마라 도의 퉁명스러운 지주들은 전보로 이렇게 답했다: "사회주의 장관의 서명이 없는 회보는 강제력이 없다." 이것으로 사회주의의 기능이 드러났다. 체레텔리는 자신의 수줍음을 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18일 그는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들"을 취하라고 장황하게 지시했다. 지주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군대와 국가에 대해서만 걱정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가 지주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농민을 진정시키는 정부의 방법이 갑자기 변했다. 7월까지는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이 지배적인 방식이었다. 군대가 지역에 파견되는 경우에도 정부에서 보낸 연설자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승리한 후에는 농민을 설득하는 자를 대동하지 않은 채 기병대가 바로 지주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젊은 역사학자 유고프의 말에 따르면 가장 소란스러운 지역인 카잔 도에서는 "체포를 하고 토벌대를 마을에 보내고 심지어 채찍질 관습을 부활시키고 나서야...농민들을 복종시키는데" 성공했다. 다른 곳에서도 이 탄압 조치들은 효과가 없지 않았다. 7월에 지주의 재산 피해 건수는 516건에서 503건으로 줄어들었다. 8월에 정부는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불만이 있는 군의 숫자는 325개에서 288개로 떨어지면서 11% 하락했다. 농민의 투쟁에 의해 피해를 본 재산의 건수도 33%나 줄어들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가장 소요가 심했던 일부 지구들은 잠잠해 졌거나 부차적인 소요지역이 되었다. 반면에 어제는 믿을만했던 지구들이 이제 투쟁을 시작했다. 한달 전만 해도 펜자 도의 정부위원은 위안이 될만한 얘기를 했다: "농촌은 수확에 바쁘다....마을 젬스트보 선거 준비가 진행 중이다. 정부의 위기는 조용히 지나갔다. 새 정부를 큰 만족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8월이 되자 이 목가적 분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과수원들은 대대적으로 약탈되었고 산림들이 벌채되고 있다....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군대에 의존해야했다."
- 러시아의 혁명전야
1917년 3월과 11월(러시아력에서는 2월과 10월)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두 혁명을 통칭하여 러시아 혁명이라고 한다. 이 혁명을 통하여 세계 최초의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1917년 3월 12일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일어난 혁명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거듭된 패전과 물자 부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전제정치에 대한 불만 등 차르 전제정부의 내외정책이 실패하자 진보주의자들이 주동이 된 일종의 민주주의적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는 전복되고 뤼보프공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같은 해 7월에 온건파 자유주의자인 케렌스키 내각이 수립되어 볼셰비키 혁명의 전주곡이 되었다. 2월 혁명으로 성립된 정부가 약체여서 소비에트와의 이중 권력 구조상태가 지속되었다. 이에 망명처로부터 귀국한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민중의 지지를 넓혀, 11월 7일 무장봉기를 일으켜 볼셰비키(다수파, 레닌이 대표)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일반적으로 여름의 농민운동은 "평화"기에 속했다. 그러나 허약하기는 하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급진화 증상들이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2월 혁명 후 첫 4개월 동안 지주의 장원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 전에 비해 감소했으나 7월부터는 증가하기 시작했다. 7월의 분쟁에 대해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흔한 사소한 분쟁에서 큰 분쟁의 순서로 다음과 같이 농민의 투쟁을 구분했다: 목초지, 농작물, 식량과 꼴, 경작지, 농기구 등의 점거; 고용 조건에 대한 분쟁; 장원의 파괴. 8월에는 순서가 다음과 같았다: 농작물, 예비 식량과 꼴, 목초지와 건초, 토지와 삼림 등의 점거; 농업 테러.
9월초 최고사령관으로서 케렌스키는 농민의 "폭력행위"에 대해 전임자 코르닐로프의 주장과 위협을 반복하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이로부터 며칠 뒤 레닌은 이렇게 적었다: "지주와 자본가들이 모든 토지를 농민에게 즉시 넘기지 않으면 결국에는 끝없이 격렬한 농민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후 몇 개월에 걸쳐 그의 말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8월에 비해 9월에 피해 재산의 건수는 30%나 증가했다. 그리고 10월에는 9월에 비해 43%나 증가했다. 9월과 10월 첫 3주일간의 피해 재산 건수는 3월 이후의 건수보다 3분의 1이 더 많았다. 그러나 분쟁의 강도는 빈도보다 훨씬 빨리 증가했다. 혁명 후 첫 몇 개월 동안에는 장원의 각종 부속 시설과 기물들을 직접 점거하는 것조차 화해주의 기관들에 의해 완화되고 위장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합법적인 외양도 필요 없었다. 운동의 모든 부분들은 더욱 대담한 성격을 띠었다. 다양한 형태와 강도로 압박을 가하다가 이제 농민들은 지주의 다양한 사업 부분들을 폭력적으로 점거했다. 귀족들의 소굴은 전멸되었고 장원은 불탔으며 지주와 관리인이 살해되는 경우도 생겼다.
토지 임대 조건의 개선 투쟁은 6월에는 폭력행위보다 건수가 더 많았다. 그러나 10월에는 폭력행위의 40분의 1로 빈도가 떨어졌다. 더욱이 이 투쟁도 지주를 몰아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토지와 삼림 매매 저지 투쟁이 직접 점거 투쟁으로 바뀌었다. 지주의 재산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삼림이 벌채되고 가축이 방목되었다. 9월에 공개적인 재산 파괴는 279건 발생했으나 이제는 모든 분쟁의 8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2월부터 10월까지 농촌 민병대가 자행한 파괴행위의 42% 이상이 10월에 일어났다.
삼림을 둘러싼 투쟁은 특히 격렬했다. 마을 전체가 전부 불태워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목재는 엄중한 감시를 받았으며 높은 가격에 팔렸다. 농민은 목재에 굶주리고 있었다. 더욱이 겨울용 땔감을 재어놓을 때가 왔다. 모스크바, 니제고로드, 뻬쩨르부르그, 오렐, 볼린 도 등 전국 곳곳에서 삼림이 파괴되고 끈으로 묶은 비축 땔나무가 몰수되고 있다는 등의 불평이 올라왔다. "농민들이 자기 멋대로 그리고 가차없이 벌채를 하고 있다. 지주 소유 삼림 200 데시아틴이 농민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클리모비체프스키와 체리코프스키 군의 농민들이 삼림을 파괴하고 겨울 밀을 파헤치고 있다...." 삼림 경비원들이 달아나고 있었다. 지주의 삼림은 신음하고 있었다. 전국에 걸쳐 나무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가을 내내 농민의 도끼가 혁명의 박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곡물 수입 지역의 경우 농촌의 식량 사정은 도시보다 더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식량 뿐 아니라 종자가 부족했다. 곡물 수출 지역의 경우 식량 자원이 평소의 두 배로 반출되면서 식량 사정이 다른 지역과 다를 것이 없었다. 곡물의 고정가격을 인상하자 빈민들이 타격을 받았다. 기근으로 인한 폭동, 곡물창고 습격, 식량 당국에 대한 공격 등이 다수의 도에서 발생했다. 인민은 빵 대용품에 의존했다. 괴혈병, 티푸스, 절망으로 인한 자살 등이 보고되었다. 기근이 퍼지면서 풍요와 사치를 누리던 부자 동네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 빈곤한 부위들이 투쟁의 선두에 섰다.
- 질풍노도의 시대
이 분노의 물결과 함께 사회 밑바닥의 인간 쓰레기들도 같이 올라왔다. 코스트로마 도에서 "흑백인조와 반(反)유태인 선동이 목격되고 있다. 범죄율이 높아가고 있다....정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 뚜렷이 눈에 띤다." 정부위원이 쓴 이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은 교육받은 유산계급들이 혁명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포돌스크 도에서는 갑자기 흑백인조들이 짜르의 복귀를 주장했다: 데미도프카의 마을 위원회는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짜르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러시아 인민의 가장 충직한 지도자로 간주한다. 만약 임시정부가 물러나지 않으면 우리는 독일과 연합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대담한 선언은 특이한 경우였다. 농민들 사이의 왕당파들은 오래 전에 색깔을 바꾸고 지주와 행보를 같이 하고 있다. 지금 언급했던 포돌스크 도와 같은 여러 곳에서는 농민과 합세한 군대가 포도주 저장소를 습격했다. 정부위원은 무정부 상태를 보고하고 있다. "마을과 인민은 사라지고 있다; 혁명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혁명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은 채 더 깊은 골을 파고 있었다. 노도처럼 밀려드는 혁명의 물결은 혁명의 문턱 직전에 다다르고 있었다.
-로마노프의 몰락
9월 8일경 밤에 톰보프 도의 시체프카 마을의 농민들은 곤봉과 쇠스랑으로 무장한 채 남녀노소 없이 전부 지주 로마노프를 습격하자고 선동했다. 마을 집회에서 어느 그룹은 장원을 질서 있게 점거하여 재산을 서로 나누고 대신 건물은 문화적 용도로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빈민들은 장원을 불태우고 건물을 하나도 남기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들이 다수파였다. 같은 때에 거대한 불길이 읍 전체를 삼켰다. 농업 개선을 위한 실험용 농토를 포함해 불에 탈 수 있는 것은 모두 불탔다. 종자 소들도 도살되었다. "이들은 술에 취해 미치광이가 되었다." 불길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번졌다. 농민 투사들은 이제 가부장적인 낫과 쇠스랑으로 더 이상 만족하지 않았다. 어느 도의 정부위원이 이렇게 전보를 쳤다: "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농민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라넨부르크와 리아쥐스키 군의 장원들을 습격하고 있다." 농민 반란에 이 고급 기술을 도입시킨 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지주동맹은 3일 동안 24개의 장원이 불탔다고 보고했다. "지역 당국은 질서를 회복시킬 힘이 전혀 없다." 시간이 흐른 후 군관 사령관이 보낸 군대가 도착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집회는 금지되었으며 선동 주도자들은 체포되었다. 골짜기는 지주의 소유물로 가득했으며 약탈한 물건의 다수는 강 밑으로 가라앉았다.
펜자 도의 농민 베지쉐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9월에 우리는 모두 탈것에 올라 1905년에도 습격 당했던 로그빈을 습격했다. 사람의 무리들과 마차들이 떼를 지어 그의 장원과 그 뒤로 물결쳤다. 수백 명의 농민과 부녀자들은 소, 곡식 등을 가지고 나가기 시작했다." 토지 당국이 부른 군대가 약탈물의 일부를 다시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농민과 부녀자들이 마을에 500명이나 모여 있었기 때문에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지주의 짓밟힌 권리를 회복시킬 의욕이 병사들에게는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농민 가포넨코의 기억에 따르면 타우리데 도에서는 9월말부터 시작하여 "농민들이 건물을 습격하고 관리인들을 내쫓고 말과 소, 농기구, 곡물 등을 창고에서 꺼내가기 시작했다....심지어 이들은 창문의 블라인드, 문짝, 마루바닥, 양철 지붕 등도 뜯어갔다...." 민스크 출신의 농민 그룬코는 이렇게 말한다: "맨 처음 이들은 걸어와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모두 꺼내서 끌고 갔다....그러나 나중에는 말을 끌고 와서 마차에 맨 후 누구의 것이든 짐을 가득히 실어갔다. 사람이 지나다닐 틈이 없었다. 정오에 시작하여 두 날과 두 밤을 멈추지 않고 농민들은 물건들을 끌고 갔다. 48시간동안 이들은 모든 것을 깨끗이 청소했다." 모스크바의 농민 쿠즈미체프에 의하면 재산 몰수는 이렇게 정당화되었다: "지주의 물건은 우리 것이다. 우리는 그를 위해 일했으므로 그의 재산은 우리만의 재산이다." 옛날에 지주들은 농노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너희들은 내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 것도 내 것이다." 이제 농민들은 이 말에 응답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지주였고 그의 물건은 전부 우리 것이다."
민스크의 또 다른 농민 노비코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여러 곳에서 농민들은 밤에 지주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더욱 자주 이들은 지주의 장원을 불태우곤 했다." 한때 최고사령관이었던 니콜라이 니콜라이에비치 대공의 장원이 다음 차례였다.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다 가지고 간 후 이들은 난로를 해체하여 화관을 제거하고 마루와 판자까지 뜯은 후 모두 끌고 나갔다...."
이 파괴행위 뒤에는 수백 수천 년이나 오래된 농민 전쟁의 전략이 버티고 있었다: 적의 요새들을 완전히 불태운다. 적이 머리를 둘 곳을 남겨놓지 말아라. 쿠르스크의 농민 티간코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좀더 합리적인 농민들은 이렇게 말했다: '건물은 불태우지 말자. 학교와 병원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대다수는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모든 것을 파괴하여 적들이 숨을 곳이 없게 만들어야한다.'" 오렐의 농민 사브첸코는 이렇게 말한다: "농민들은 지주의 재산을 모두 가지고 갔으며 이들을 장원에서 내쫓고 지주 저택의 창문, 문짝, 천장, 마루 등을 두들겨 부수었다....병사들이 말했다: '늑대의 소굴을 파괴할 것이면 늑대도 목 졸라 죽여야한다.' 이런 위협들 때문에 최대 지주들은 몸을 숨겼고 이 때문에 이들은 살해되지 않았다."
비테프스크 도 잘레시에 마을에 소재한 프랑스인 바르나르의 장원에 저장되어 있던 곡식 및 건초 창고가 불에 탔다. 농민들은 지주들의 국적을 조사할 생각이 없었다. 다수의 지주들이 서둘러서 특권을 누리는 외국인들에게 토지 소유권을 이전시켰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대사관이 정부의 조치를 요청했다...." 10월 중순 전선 지역에서는 프랑스 대사관을 위해서라도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웠다.
리아잔 근처에서는 대규모 장원들이 4일간 계속 파괴되었다. "어린이들도 약탈에 가담했다." 지주동맹은 장관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린치 법, 기근, 내전이 터질 것이다." 지주들이 내전을 미래시제로 말한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현상들은 현실로 이미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9월초 협동조합 대회에서 강력한 농민 지도자이자 상인인 베르컨하임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전부가 정신병동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는 대도시 사람들만이 정신이 나갔다고 나는 확신한다." 농민의 강력하고 보수적인 부위의 이 자기만족의 목소리는 가망 없이 시간에 뒤져 있었다. 농촌의 마을들은 이성의 모든 올가미에서 완전히 풀려나 날뛰었다. 바로 9월에 이들이 보인 투쟁의 격렬한 정도는 도시의 "정신병동"을 훨씬 앞질렀다.
4월에 레닌은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애국주의 협동조합 지도자들과 부농들이 대다수 농민을 부르주아 계급 및 지주들과 화해시킬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농업 노동자 특별 소비에트의 수립과 빈농의 독자적 조직 건설을 지치지 않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 달 한 달이 지나면서 이 정책이 뿌리내릴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발트해 국가를 제외하고 농업노동자 소비에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빈농들 역시 독자적인 조직 형태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 현상을 단순히 농업 노동자와 빈농의 후진성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주요한 이유는 민주적 농업혁명이라는 역사적 과제 자체에 있었다.
농노제의 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일반적 이해 때문에 빈농과 농업 노동자는 독립적 정책을 가질 수 없다. 토지 임대료와 농업 노동자라는 두 가지 주요 문제에서 이 점은 대단히 명확하게 드러난다. 유럽 러시아에서 농민은 지주로부터 2,700만 데시아틴 즉 개인 소유 토지 전체의 약 60%를 임대했다. 그리고 매년 4억 루블의 임대료를 지불했다. 임대료 때문에 지주에게 종속되는 현실에 대한 투쟁은 2월 혁명 후 농민운동의 주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농업 노동자의 투쟁도 비중은 적었지만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농업 노동자는 지주 뿐 아니라 농민 착취자와도 이해가 충돌했다. 임대 농민은 임대 조건의 개선을 위해 농업 노동자는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전자는 지주를 소유주로 후자는 지주를 고용주로 인식하면서 투쟁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여 토지를 차지할 가능성이 열리자마자 빈농은 임대료 문제에 대해 노동조합은 농업 노동자에 대해 관심을 잃어버렸다. 둘 다 자영 농민이 될 전망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임대 빈농과 농업 노동자가 농민 운동 일반에 참여하여 농민 전쟁을 통해 이 운동의 궁극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해결책을 찾았다.
그러나 지주에 대한 투쟁은 농촌의 양극단 부위를 완전히 투쟁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공공연한 반란으로 발전하지 않는 한도까지 농민의 상층부는 운동에서 상당한 역할 그리고 가끔은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가을이 되자 부농은 농민 전쟁이 확산되는 것을 더욱더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들은 전쟁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 지 알 수 없었다. 잃을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투쟁에서 물러섰다. 그러나 이들은 농민 전쟁을 전적으로 저지하지는 못했다. 농촌이 이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부농보다 농민 전쟁을 더 유보적으로 그리고 더 적대적으로 바라 본 부위는 농촌 공동체 밖에 존재하는 소규모 자영 농민들이었다. 50 데시아틴까지 소유한 자영 농민의 농지는 전국에 60만개 있었다. 다수의 지역에서 이들은 협동조합의 중추가 되었고 특히 남부지방에서는 보수적인 농민연합을 지지했다. 농민연합은 입헌민주당으로 가는 교량 역할을 이미 하고 있었다. 민스크의 농민 굴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영 농민과 부농은 지주를 지지하면서 농민들을 진정시키려했다." 지역의 특수성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농민 내부의 투쟁이 10월 혁명 이전에도 격렬했다. 이 투쟁에서 자영 농민들은 가장 잔인하게 고통을 겪었다. 니제고로드의 농민 쿠즈미체프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의 농장은 거의 모두 불에 탔다. 이들의 재산은 일부는 파괴되고 일부는 농민들에 의해 몰수되었다." 자영 농민들은 "지주의 삼림 일부를 맡아서 지주의 하인이 되었다; 그는 경찰, 헌병, 지배자들의 친구가 되었다." 니제고로드 군의 여러 마을에 사는 아주 부유한 농민과 상인들은 가을에 모습을 감추었다. 이들은 2, 3년 후에야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러나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농민 내부의 관계가 이렇게 가혹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부농은 외교적으로 행동했고 투쟁을 저지시키고 저항했으나 "농민 모두"에게 너무 적대시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편 빈농들은 부농을 시기하면서 감시하여 이들이 지주와 연합하지 못하게 막았다. 부농에 영향을 미치려는 귀족과 빈농 사이의 투쟁은 "우호적인" 압력에서부터 격렬한 테러행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띠면서 1917년 내내 계속되었다.
대지주들은 아양을 떨면서 자영 농민들에게 귀족 사회에 들어오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그러나 소규모 자영 농민들은 귀족과 함께 망하지 않으려고 보라는 듯이 이들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이것은 정치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었다: 혁명 전에 극우정당에 속했던 지주들은 자유주의의 보호색으로 자신을 위장했으며 입헌민주당을 종종 지지했던 자영 농민들은 이제 좌로 이동했다.
9월에 열린 페름 도의 소규모 자영 농민 대회는 "백작, 공작, 자작"등을 지도자로 한 모스크바의 지주 대회와 자신을 뚜렷이 구별시켰다. 50 데시아틴을 소유한 자영 농민은 이렇게 말했다: "입헌민주당원들은 집에서 만든 양모 외투를 걸치고 나무껍질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우리의 이익을 결코 방어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자들과 거리를 둔 자영 농민은 자신의 소유권을 지킬 "사회주의자들"을 찾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대의원 하나가 나서서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다. 그러자 자영 농민은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 그에게 토지를 주면 그는 농촌에 와서 만족하여 과격한 말을 토해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결코 토지를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는 멘세비키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우리의 토지를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쉽게 토지를 넘기는 자는 쉽게 이것을 가진 지주들이다. 그러나 농민은 토지를 얻느라 엄청나게 고생했다."
가을에 농촌은 부농과 투쟁했다. 그를 내쫓지는 않고 다만 그가 농민 운동 일반을 따르고 우익의 공격으로부터 운동을 방어하도록 강제했다. 장원 습격을 거부하는 부농은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부농은 할 수 있는 한 술수를 부렸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뒤통수를 다시 한번 긁으면서 잘 먹인 말을 쇠테로 두른 마차에 매고 자기 몫을 갖기 위해 장원 습격에 참가했다. 그는 종종 가장 많은 몫을 차지하고는 했다. 펜자의 농민 베지쉐프가 말한다: "말과 일꾼을 가진 부농들이 가장 많은 몫을 가지고 갔다." 오렐 출신의 사브첸코도 거의 같은 말을 했다: "부농은 잘 먹었을 뿐 아니라 나무를 끌고 갈 마차가 있어서 이익을 제일 많이 보았다."
베르메니체프의 계산에 의하면 2월에서 10월까지 지주와의 분쟁은 4,954건이 발생했다. 이 가운데 농민 부르주아와의 분쟁은 324건에 불과했다. 대단히 명확한 상호관계가 아닐 수 없다! 1917년의 농민운동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농노제의 잔재에 과녁을 맞추고 있었다. 부농과의 투쟁은 지주가 결정적으로 청산된 후인 1918년에 전개되었다.
농민운동의 순수한 민주적 성격은 공식 민주주의 진영에 정복당할 수 없는 힘을 부여해야만 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 이 운동은 민주주의 진영의 정치적 파산을 완전히 드러냈다. 상층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농민들은 사회혁명당에 의해 완전히 주도되었으며 이들을 소비에트 대의원으로 선출했고 이들을 따랐고 거의 이들과 합쳐졌다. 5월 농민 소비에트 대회의 집행위원회 선거에서 체르노프는 810표, 케렌스키는 804표를 얻은 반면 레닌은 기껏해야 20표 밖에 얻지 못했다. 체르노프가 자신을 농촌 장관이라고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농촌의 전략이 체르노프의 전략과 퉁명스럽게 결별한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실제 지주와의 투쟁에 너무 전심한 나머지 농민은 산업적 측면에서는 고립 분산되어 국가기구로 구현된 일반적 지주 앞에서는 무력했다. 이 때문에 진짜 국가에 대비되는 전설상의 국가에 농민들은 천성적으로 기댈 필요가 있었다. 옛날에 이들은 상상 속에 존재하는 짜르의 황금 칙령, 정의로운 세계의 전설 등을 구심점으로 삼아 이 주위로 단결했다. 2월 혁명 후에는 "토지와 자유"라는 사회혁명당 깃발 주위로 단결했다. 이를 통해 정부의 장관이 된 자유주의 지주들에 대항하려했다. 농민은 상상의 짜르 칙령을 따랐으나 진짜 짜르에는 대항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상의 인민주의 강령을 따랐으나 진짜 인민주의자 케렌스키에게는 대항했다.
- 사회혁명당의 강령(1905)
1905년 사회혁명당(SR)은 목표를 개략적으로 설명한 정치 선언문을 초안했다.
"러시아 사회혁명당은 자신의 임무를 인간 존엄성의 착취에 대항하는 보편적 노동 투쟁의 유기적 구성 부분으로 보고, 사회적 형태로의 발전을 방해하는 모든 장벽에 대항하며, 러시아 현실의 구체적 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방식으로 그 투쟁의 일반적 이익의 정신에 따라 이를 수행한다.
러시아의 변혁 과정은 비사회주의 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으므로, 사회혁명당은 위의 원칙에 기초하여 혁명투쟁을 통해 다음과 같은 개혁을 옹호하고, 옹호하고, 추구할 것이다.
- 정치 문제에 있어서:도시와 농촌을 포함한 주와 지방 자치단체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는 민주 공화국을 수립합니다.
다양한 국적 간의 관계에서 연방 원칙의 수용이 확대되어, 국적자에게 무조건적인 자결권이 부여되었다.
20세 이상의 모든 시민은 성별, 종교, 국적에 관계없이 직접적, 비밀적, 평등하고 보편적으로 투표할 권리가 있다. 비례대표제, 국민투표와 이니셔티브를 통한 직접 입법, 선거, 언제나 해임 가능, 모든 공무원의 책임.
양심, 언론, 출판, 집회, 파업 및 노동조합의 완전한 자유… 완전하고 일반적인 시민적 평등, 개인과 가정의 불가침…
-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 및 종교는 모든 개인의 사적인 일이라는 선언.정부 비용으로 의무적인 일반 국민 교육을 도입하고 언어의 평등을 실현합니다.
상비군을 폐지하고 인민 민병대로 대체합니다.
- 경제 문제에서:잉여 노동력을 해소하기 위한 노동시간 단축.
건강 상태에 따라 결정된 기준에 따라 법적 최대 근무 시간 설정(대부분 산업 분야에서는 가능한 한 빨리 8시간 근무 기준을 적용하고, 건강에 위험하거나 해로운 작업에 대해서는 더 낮은 기준을 적용).
행정부와 노동조합의 합의에 따른 최저임금 결정.
완전한 정부 보험(사고, 실업, 질병, 노령 등)으로, 보험에 가입한 사람이 국가와 고용주의 비용으로 관리한다.
공장 검사 위원회가 노동자들에 의해 선출한 감독 하에 건강 조건에 따라 모든 산업과 무역 분야에서 노동에 대한 입법적 보호(정상적인 근무 조건, 건물의 위생 조건, 16세 미만 청소년의 노동 금지, 청소년의 노동 제한, 일부 산업 분야와 특정 기간 동안 여성 및 아동 노동 금지, 적절하고 중단 없는 일요일 휴식 등).
노동자들의 전문적 조직화와 산업 기업 내부 규칙 결정에서의 노동자 참여 증가.
- 농업 정책 문제에서:모든 사유지의 사회화, 즉 개인 소유주의 사유재산에서 민주적으로 조직된 공동체와 공동체의 영토 연합에 의한 평등한 이용에 기초한 공공 영역으로의 이전과 관리이다.”
사회혁명당의 강령에는 언제나 유토피아적인 요소가 많았다. 이들은 소규모 상거래 경제에 기초하여 사회주의를 창조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고 있는 강령의 토대는 엄밀히 말하면 (사회)민주주의 혁명이었다. 즉 지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것이었다. 자신의 강령을 실현시킬 필요성에 직면하자 사회혁명당은 연립정부와 뒤엉켰다. 지주들과 입헌민주당 은행가들은 토지 몰수에 반대해 들고일어났다. 은행은 토지를 담보로 40억 루블 이상을 대출해주었다. 이 상황에서 사회혁명당은 토지 가격을 제헌의회에서 흥정하되 화기애애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토지에 대한 농민의 열망을 열성적으로 저버렸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 식 사회주의의 유토피아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비(非)일관성 때문에 망했다. 이들의 유토피아를 현실에 비추어 시험하는 데에는 수년이 걸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농업 민주주의를 배신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는 데에는 몇 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농민들은 사회혁명당 강령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사회혁명당 정부에 대항해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사회혁명당 정부가 농촌을 탄압하던 7월에 농민들은 급히 도망하여 같은 사회혁명당에 몸을 숨기려했다. 젊은 빌라도에게 쫓긴 이들은 늙은 빌라도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볼세비키당이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이 달에 사회혁명당은 농촌에서 가장 크게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특히 혁명의 시대에는 흔히 그렇듯이 최대한의 조직적 팽창은 정치적 쇠퇴의 시작을 의미했다. 사회혁명당 정부의 공격에 대해 사회혁명당 등뒤에 숨은 농민들은 정부와 당에 대한 신뢰를 꾸준히 거두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농촌에서 사회혁명당 조직은 팽창했지만 이 자체는 이 잡동사니 정당에게는 치명타가 되었다. 당의 상층부는 질서를 회복시키려한 반면 당의 하부는 이에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7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군사조직 회의에서 사회혁명당원인 전선의 병사 대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농민들이 아직도 스스로를 사회혁명당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들과 당은 틈이 생겼다. 병사들도 이것을 확인해 주었다: 사회혁명당의 선동 때문에 농민들은 볼세비키당을 아직도 적대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은 토지와 권력의 문제를 볼세비키당의 방식으로 결정하고 있다. 볼가강 지역에서 활동하던 볼세비키 포볼쥐스키는 1905년 혁명에 참여했던 가장 존경받는 사회혁명당원들의 인기가 더욱더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농민들은 이들을 '사부님'이라고 부르면서 겉으로는 존경했지만 자기 방식대로 투표했다." 혁명적 노동자들은 모든 곳에 침투하여 계속해서 소규모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이 농민들에게 미친 영향력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상당수의 공장들이 농촌에 있었기 때문에 상호 침투는 더 쉬웠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적인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조차 고향인 농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름 몇 개월 간 증대하고 있던 실업과 고용주들의 직장폐쇄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농촌으로 되돌아갔다. 이들의 대다수는 선동가와 지도자가 되었다.
5월부터 6월까지 뻬쩨르부르그에는 도, 군, 마을 단위로 귀향단이 조직되었다. 노동자 신문의 칼럼들이 전부 귀향단 모임을 알리는데 할애되었다. 이 회의에서 귀향 여행에 대한 보고들이 있었고 대의원들에 대한 지시사항들이 작성되었다. 또한 고향의 선동활동을 위해 모금활동이 진행되었다. 봉기가 일어나기 조금 전에 이 귀향단들은 볼세비키당의 지도 하에 특별 중앙사무국으로 통일되었다. 이 귀향단 운동은 곧 모스크바, 트베르는 물론 다수의 기타 공업도시로 곧 확산되었다.
그러나 농촌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데에는 노동자보다는 병사가 더 중요했다. 젊은 농민들이 어느 정도 고립을 극복하고 전국적 문제들에 직면한 곳은 바로 전선이나 도시라는 인위적 조건 속에서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이들의 정치적 의존성이 드러났다. 애국주의 보수적 지식인들에게 계속 장악되어온 농민들은 이들로부터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또 한편 이들은 다른 사회 집단들로부터 독립하여 군대에서 조직을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군 당국은 이 경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전쟁부는 반대했으며 사회혁명당은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민 소비에트는 군대에서 뿌리가 허약했다. 가장 유리한 조건 속에서도 농민은 양의 압도적 우위에 상응하는 정치적 질로 자신을 전화시킬 수 없다! 노동자들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는 혁명의 거대 중심부에서만 농민 병사 소비에트는 중요한 작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1917년 4월부터 1918년 1월 1일까지 뻬쩨르부르그 농민 소비에트는 특별 위임장을 주어 1,395명의 선동가들을 농촌으로 보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수의 선동가들은 위임장이 없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65개 도를 포괄했다. 크론슈타트에서는 노동자들의 예를 따라 귀향단이 병사와 수병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이들의 대표들은 철도와 기선에서 무임 승차할 "권리"를 부여하는 위임장을 받았다. 민영 철도와 기선은 이 위임장을 군소리 없이 인정했으나 정부가 운영하는 경우에는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조직의 공식 대표들은 농민의 거대한 바다에서는 물방울에 지나지 않았다. 대중 집회의 연설에서 울려나오는 강력한 구호들을 기억하면서 스스로 전선과 후방 주둔군 병영에서 탈출한 수십만 수백만의 병사들은 이들보다 훨씬 더 거대한 일을 했다.
전선에서 말없이 앉아있던 병사들은 농촌의 고향으로 돌아오면 말이 많았다. 이들의 말을 게걸스럽게 듣는 청중은 얼마든지 있었다. 모스크바의 볼세비키 무랄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모스크바를 둘러싸고 있던 농민의 엄청난 수가 좌경화되었다....모스크바 도의 농촌과 도시는 전선에서 돌아온 탈주병들로 넘쳐 났다. 또한 이들은 농촌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도시 노동자들의 방문을 받았다." 농민 나움첸코프에 따르면 칼루가 도의 따분하고 후진적인 마을들은 "6월과 7월에 다양한 이유로 전선에서 돌아온 병사들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다." 니제고로드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범법 및 무법 행위는 도에 출현한 탈주병, 휴가병, 연대 위원회의 대표 등과 모두 관련되어 있다." 8월에 졸로토노쉬즈키 군에 위치한 바리아틴스키 공주의 장원 관리인이 토지 위원회의 자의적인 행동을 불평한다. 이 위원회의 의장은 크론슈타트 수병인 가트란이었다. 부굴민스크 군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휴가 중인 병사와 수병들이 무정부 상태와 유태인 학살의 분위기를 조성할 목적으로 선동을 하면서 돌아다닌다." "므글린스키 군의 비엘로고쉬 마을에 도착한 어느 수병이 삼림에서 장작과 철도용 침목을 만들거나 수출하는 것을 자기 멋대로 금지시켰다." 그리고 병사들은 투쟁을 시작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투쟁을 마무리했다.
니제고로드 군에서 농민들은 수녀원을 약탈하고 초원의 풀을 잘랐으며 울타리를 부수고 수녀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수녀원장은 굴복하지 않으려 했고 민병대는 농민들을 끌고 가서 벌을 주었다. 농민 아르베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태가 이렇게 질질 끌다가 마침내 병사들이 도착했다. 이들은 작당하여 즉시 일을 벌렸다...." 수녀원은 깨끗이 약탈되었다. 농민 보브코프에 의하면 모길리에프 도에서는 "전선에서 귀향한 병사들이 위원회의 첫 지도자들이었고 지주의 추방을 지휘했다."
소총과 총검으로 동료 병사들을 익숙하게 다루는데 필요한 무거운 결심으로 전선의 병사들은 일을 해치웠다. 병사들의 부인들조차 남편으로부터 투쟁 정신을 배웠다. 펜자의 농민 베지쉐프는 이렇게 말한다: "9월 집회에서 장원 습격에 대한 지지 연설을 하는 병사 부인들의 강력한 운동이 일어났다." 다른 도에서도 같은 일이 관찰되었다. 도시에서도 병사의 부인들은 종종 투쟁을 부채질했다.
베르메니체프의 계산에 따르면 병사들이 농민의 투쟁을 주도한 비율은 3월에는 1%, 4월에는 8%, 9월에는 12%, 10월에는 17% 이었다. 이 수치들은 정확하다고 허세를 부릴 수는 없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일반적 경향을 보여준다. 사회혁명당 교사, 읍 서기, 관리들의 지도력은 죽어간 반면 못 말리는 병사들의 지도력은 상승했다.
당시 독일의 유명한 맑스주의 저술가 파르부스는 전쟁 기간에 재물은 축적했지만 운동의 원칙과 통찰력은 잃어버렸다. 그는 러시아 병사들을 중세의 용병, 도적, 노상강도 등과 비교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을 가지려면 러시아 병사들의 무법행위가 역사상 가장 거대한 농민 혁명의 집행기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무시해야한다.
이 운동이 합법성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벌대의 농촌 파견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토벌대로 사용될 수 있는 부대는 카자흐 기병뿐이었다. 자유주의 신문 루스코에 셀로(러시아의 농촌) 지는 10월 11일 이렇게 말한다: "4백 명의 카자흐 기병이 세르도브스키 군에 파견되었다...이 조치는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효과가 있었다; 농민들은 제헌의회 소집을 기다리겠다고 선언했다." 4백 명의 카자흐 기병은 확실히 제헌의회 소집을 지지하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카자흐 기병은 숫자가 충분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이들 자체가 동요하고 있었다. 한편 정부는 더욱더 "단호한 조치들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2월 혁명 후 첫 4개월 동안 군대가 농민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건수는 17번, 7월과 8월에는 39번, 9월과 10월은 105번이었다고 베르메니체프는 계산한다.
그러나 군대로 농민을 진압하는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대다수의 경우 토벌에 나선 군대의 병사들이 농민 편이 되었다. 포돌스크 도의 어느 군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군대 조직 그리고 심지어는 개별 부대들이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을 결정하고 있으며 농민들이 지주 재산을 몰수하고 삼림을 벌채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이들이 직접 약탈에 가담하고 있다....지역의 부대들은 폭력행위를 진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농민 반란은 군대의 마지막 빗장을 풀어버렸다. 노동자들이 농민 전쟁을 주도했기 때문에 농민 군대가 도시의 봉기를 진압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 레닌주의의 농촌침투
농민들은 노동자와 병사들로부터 우선 사회혁명당이 말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 즉 볼세비키당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레닌의 구호와 그의 이름이 농촌에 침투했다. 사실 볼세비키당에 대해 꾸준히 증대한 불평은 대부분의 경우 조작이거나 과장이었다. 이를 통해 확실한 이익이 될 것이라고 지주들이 생각했을 뿐이었다. "오스트로프스키 군은 볼세비키의 선동 때문에 완전한 무정부 상태에 돌입했다." 우파 도에서는 이런 소식이 들린다: "마을 위원회의 바실리에프는 볼세비키당의 강령을 배포하면서 지주들이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강도 행위로부터 보호"를 구하면서 노브고로드의 지주 폴로니크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집행위원회에 볼세비키들이 득실거린다." 이것은 볼세비키들이 지주들을 적대시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심비르스크의 농민 주모린은 회상한다: "8월에 노동자들은 농촌의 마을을 돌면서 볼세비키당을 선동하고 볼세비키당 강령을 말하기 시작했다." 세베즈 군을 연구한 어떤 사람은 뻬쩨르부르그에서 26세의 직조공 타티아나 미하일로바가 도착한 사건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고향 농민들에게 임시정부를 타도하라고 촉구하면서 레닌의 전술을 칭송했다." 농민 코토프의 말에 의하면 8월말 경에 "우리는 레닌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을 젬스트보에서는 아직도 사회혁명당원들이 절대 다수였다.
볼세비키당은 농민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9월 10일 네프스키는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의 농민 신문 발행을 요구했다: "농민이 파리 노동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파리 노동자들이 농민을 이해하지 못한 파리 코뮌의 경험을 반복하지 않도록 개선책이 나와야 한다." 비예드노타(빈민) 지가 곧 발행되었다. 그러나 농민들 사이에서 순수한 당 활동은 미미했다. 볼세비키당의 힘은 실무적인 자원이나 기구가 아니라 올바른 정책에 있었다. 공기가 들풀의 씨를 퍼뜨리듯이 혁명의 회오리바람은 레닌의 사상을 퍼뜨렸다.
트베르의 농민 보로비예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9월이 되면 병사들 뿐 아니라 빈농 자신들이 더욱 자주 그리고 더 대담하게 볼세비키당을 옹호하기 위해 집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심비르스크의 농민 주모린도 이 점을 확인해주고 있다: "빈농 대다수와 중농 일부는 너나 할 것 없이 레닌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대화는 오직 레닌에 대한 것뿐이었다." 노브고로드의 농민 그리고리에프는 농촌의 사회혁명당원 한 명이 볼세비키들을 "정권 찬탈자" "배신자"로 부르자 농민들이 "그 개 같은 놈을 처단하라! 그를 돌로 쳐죽이자! 더 이상 우리에게 동화같은 얘기는 하지도 말아라. 토지는 어디 있나? 그만 좀 떠들어라! 볼세비키들이 얘기하게 하자!" 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전국의 다수 지역에서 일어난 이 같은 일들은 10월 혁명 이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농민의 기억 속에는 사실은 강하게 남아있으나 일어난 시간은 흐릿하다.
병사 치네노프는 트렁크 하나 가득히 볼세비키당의 간행물을 가지고 자기 고향 오렐 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농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선전물들은 아마 독일의 돈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러나 10월에는 "마을의 중핵은 700명에 달했고 다수의 소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하고 나선다." 볼세비키 브라체프는 농업만 존재하는 보로네즈 도의 농민들이 "사회혁명당의 매연으로부터 깨어나 볼세비키당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덕분에 우리는 이미 마을과 읍의 다수에 지부를 건설하고 신문 정기 구독자들을 확보했으며 우리 위원회의 아주 작은 본부에 다수의 좋은 동지들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바노프의 기억에 따르면 스몰렌스크 도에서 "볼세비키들은 마을에 아주 귀했다. 군대에는 거의 없었다. 볼세비키당 신문은 발행되지 않았으며 유인물은 아주 드물게 배포되었다....그러나 10월이 가까워 오자 더 많은 마을들이 볼세비키당 편으로 넘어왔다."
이바노프는 다시 이렇게 적고 있다: "10월 이전에 소비에트에서 볼세비키당이 영향력을 행사한 군에서는 지주의 장원은 공격을 받지 않거나 소규모로만 공격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곳에서 동일한 현상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타데우쉬는 이렇게 말한다: "농민에게 토지를 넘기라는 볼세비키의 요구는 모길레프 군의 농민 대중에게 대단히 빠르게 접수되어 이들은 장원을 파괴했으며 어떤 경우는 불까지 질렀다. 이들은 수확물과 삼림도 접수했다." 근본적으로 이 두 증언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볼세비키당의 일반 선동은 의심의 여지없이 전국에서 내전을 키웠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이 확고한 뿌리를 내린 곳은 어디든지 농민의 투쟁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공격의 형태를 규제하고 파괴의 정도를 줄였다.
토지 문제만이 현안은 아니었다. 특히 전쟁의 마지막 시기에 농민은 판매자와 구매자로 손해를 입었다. 곡물은 고정 가격에 징발되었지만 공산품은 더욱 얻기가 어려웠다. 농촌과 도시의 경제적 상호관계의 문제는 곧 "협상 가격(가위 가격)"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 경제의 중심적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미 이 문제는 벌써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볼세비키들은 농민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소비에트는 권력을 장악해 여러분에게 토지를 주고 전쟁을 끝낼 것이다; 또한 공업에 대한 규제를 해제하고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를 확립하며 공산품과 농산품의 가격 관계를 통제해야한다. 이 대답은 대단히 간단했으나 가야할 길은 제시되었다. 10월 10일 트로츠키는 공장위원회 협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브크센티에프의 덩치 작은 고문들이 우리와 농촌 사이에 장벽을 쌓고 있다. 우리는 이 장벽을 깨야한다. 농기구를 제공하면서 이렇게 설명해야한다: 농민을 돕는 노동자의 모든 노력도 노동자들이 생산을 조직적으로 통제할 때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협의회는 이런 의미를 담은 선언문을 발행하여 농민들에게 배포했다.
당시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특별 위원회를 수립하여 금속, 손상된 부품, 조각난 물건 등을 조립하여 "노동자가 농민에게"라는 특별 센터가 운영되도록 했다. 이 고철은 아주 단순한 농기구와 예비 부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었다. 아주 작은 규모이고 경제에 대한 선동을 목표로 했지만 이 최초로 계획된 노동자에 의한 생산은 가까운 미래의 전망을 열어주었다. 농촌이라는 금지된 영역에 볼세비키당이 들어온 곳을 보고 겁에 질린 채 농민 집행위원회는 이 새로운 사업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낡아빠진 화해주의자들은 농촌에서 지지 기반이 이미 유실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 지역에서 볼세비키당과 경쟁할 처지가 전혀 아니었다.
트베르의 농민 보로비에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볼세비키당의 선동 메아리는 "빈농을 너무 들쑤셔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확실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혁명이 10월에 오지 않았으면 11월에는 확실히 왔을 것이다." 볼세비키당의 정치적 힘에 대한 이 다채로운 묘사는 당의 조직적 허약성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렇게 뚜렷한 불일치를 통해서만 혁명은 전진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혁명 운동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 속으로 강제될 수가 없다. 10월이든 11월이든 농업혁명을 성취하기 위해 농민은 해체되고 있던 사회혁명당을 활용해야했다. 이 정당의 좌파는 농민 반란의 압력 하에 서둘러 비체계적으로 그룹을 형성하여 볼세비키당을 따르고 당과 경쟁도 했다. 앞으로 몇 개월 동안 농민들은 사회혁명당 좌파의 번쩍거리는 깃발 밑에서 정치적 변화를 주로 겪게 될 것이다. 이 하루살이 정당은 농촌 볼세비키당을 반영하는 불안정한 형태로 농민 전쟁에서 노동계급 혁명으로 가는 일시적인 교량 역할을 할 것이다.
농업 혁명은 나름의 지역 기관들을 가지고 있어야했다. 이 기관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가? 농촌에는 여러 유형의 조직들이 있었다. 읍 집행위원회 같은 국가기관, 토지 및 식량 위원회, 소비에트와 같은 사회적 기관, 당과 같은 순전히 정치적 기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읍 젬스트보로 대표되는 자치기관들이 있었다. 아직까지 농민 소비에트는 도 또는 어느 정도 군의 규모로만 발전했다. 읍 소비에트는 거의 없었다. 읍 젬스트보는 뿌리를 내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반면 토지 및 집행위원회는 목적 상으로는 국가기관이었다. 그러나 언뜻 이상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나중에는 농업 혁명의 기관이 되었다.
정부 관료, 지주, 교수, 농업 과학자, 사회혁명당 정치꾼 그리고 의심스러운 농민 등이 결합된 토지 수석위원회는 핵심적으로 농민 혁명의 브레이크가 되었다. 도 위원회들은 정부 정책을 전달하는 역할을 결코 중지하지 않았다. 군 위원회들은 농민과 상층 관료들 사이에서 동요했다. 그러나 마을 농민들이 보는 바로 앞에서 선출되고 활동한 읍 위원회는 농민운동의 기구가 되었다. 이들 각종 위원회의 위원들이 사회혁명당원으로 등록되어 있었지만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들은 지주의 장원이 아니라 농민의 오두막집과 보조를 같이했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수립한 토지 위원회의 국가적 성격을 소중히 여기면서 이것을 내전을 벌이는 일종의 특허권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5월에 사란스키 군의 민병대장 한 명이 이렇게 불평한다: "농민들은 읍 위원회만 인정하겠다고 말한다. 군과 시 위원회들은 모두 지주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다." 니제고로드의 어느 정부위원은 이렇게 말한다: "농민의 독자적 행동을 반대하려는 일부 읍 위원회들의 시도는 거의 언제나 실패로 끝나고 결국 위원회의 구성이 바뀐다." 프스코프의 농민 데니소프에 따르면, "위원회들은 언제나 농민 운동의 편을 들었다. 왜냐하면 농민과 전선의 병사들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부위가 위원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었다."
군 위원회 특히 도 위원회는 행정 "지식인"이 주도했다. 이들은 지주와 평화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모스크바의 농민 유르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농민들은 이들이 옷의 속을 겉으로 뒤집어 입은 채 이름만 다를 뿐 똑같은 정부의 권력이라고 생각했다." 쿠르크스크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임시정부의 지시를 언제나 따르는 군 위원회를 선거를 통해 쇄신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농민이 군 위원회에 진입하는 것은 아주 힘들었다. 사회혁명당은 마을과 읍 사이의 정치적 끈이었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당을 통해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당의 역할은 오랜 외투의 속을 겉으로 뒤집는 속임수에 있었다.
3월에 농민들은 소비에트를 냉랭하게 대했다. 이 현상은 언뜻 놀라울지 몰라도 사실 아주 깊은 원인들을 가지고 있었다. 소비에트는 토지 위원회와 같은 특별 기관이 아니라 혁명의 보편적 기관이었다. 일반 정책의 영역에서 농민들은 지도부 없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유일한 문제는 이 지도부가 어디서 오느냐는 것이었다. 도 및 군 차원의 농민 소비에트는 협동조합 지도자들의 주도로 그리고 상당한 정도 이들의 비용으로 수립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농민 혁명의 기관이 아니라 농민에 대한 보수적 감시 기관이었다. 농민들은 사회 혁명당 우파가 건설한 이 소비에트가 정부 당국에 대항하는 방패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들은 토지 위원회를 더 좋아했다.
농촌의 마을이 "순전히 농민의 이익"의 범주 내에 갇히는 현상을 막기 위해 정부는 서둘러서 민주 젬스트보를 수립했다. 그런데 농민들은 정부의 이 시도에 대해서도 경계했다. 따라서 선거를 강제하는 것이 빈번하게 필요했다. 펜자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무법행위들이 발생하면서 선거가 중단되었다." 민스크 도에서 농민들은 읍의 선거위원회 의장 두르츠코이-리우베츠코이 공을 체포했다. 그가 선거인 명부를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오래된 갈등을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그와 농민들이 합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굴민스크 군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했다: "전체 군에서 읍 젬스트보 선거는 계획처럼 잘 되지 않았다....유권자는 전적으로 농민들이다. 이들과 지역 지식인 특히 지역 지주들과의 냉랭한 관계가 눈에 뚜렷했다." 그러나 형태로 보면 젬스트보는 위원회와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민스크 군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불평한다: "지식인 특히 지주에 대한 농민들의 태도는 적대적이다." 9월 23일자 모길레프 신문은 이렇게 보도한다: "토지를 농민에게 즉시 넘기는데 협조하겠다고 확실히 약속하지 않으면 농촌의 문화활동은 위험을 동반한다." 기본 계급들 사이의 합의나 교통이 불가능할 때 민주적 기관들의 토대는 사라진다. 읍 젬스트보의 사산(死産)은 제헌의회의 붕괴를 의심의 여지없이 미리 보여주었다.
니제고로드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지역 농민들은 다음과 같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민법은 효력을 잃었으며 모든 법적 규제조항들은 농민 조직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일부 지역에서 민병대를 장악하고 있던 읍 위원회는 지역 법을 공표하고 토지 임대료를 정했다. 또한 임금을 규제하고 장원에 자기들이 보낸 관리인을 앉혔다. 또한 토지, 농작물, 장작, 삼림, 연장 등을 차지하고 농기계를 지주로부터 빼앗았으며 수색과 체포를 실시했다. 수백 년 동안 말해온 목소리와 혁명의 신선한 경험은 모두 토지 문제는 곧 권력의 문제라고 농민에게 말했다. 농업 혁명은 농민 독재기구를 필요로 했다. 농민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독재라는 말을 몰랐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지주, 자유주의 정부위원, 화해주의 정치가 등이 불평했던 "무정부 상태"는 실제로는 농촌의 혁명적 독재의 첫 단계였다.
1905년 ~ 1906년 혁명기에 레닌은 토지 혁명을 위해 농민만으로 구성된 특별 기관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스톡홀름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농민 혁명위원회는 농민운동이 나아갈 유일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농민은 레닌의 생각을 읽지 못했지만 레닌은 농민의 생각을 읽는 법을 알고 있었다.
소비에트가 정치노선을 바꾼 가을이 되어서야 농민들은 소비에트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군과 도의 도시에서 볼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 좌파가 장악한 소비에트는 농민의 투쟁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부추겼다. 2월 혁명 후 첫 몇 개월 동안 농민들은 합법적 방패 막을 갖기 위해 화해주의 소비에트를 쳐다보았으나 나중에는 이것과 적대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혁명 소비에트에서 진짜 지도자를 찾을 수 있었다. 9월에 사라토프 농민들은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 전국의 권력은...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에게 이전되어야한다. 이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가을이 되어서야 농민들은 토지 강령을 소비에트 권력 구호와 결합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은 이 소비에트를 누가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 지를 몰랐다.
- 농민들의 투쟁
러시아의 농민 투쟁은 위대한 전통, 단순하지만 명확한 강령, 지역의 순교자와 영웅들을 가지고 있었다. 1905년의 거대한 경험은 농촌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수백만 농민들을 사로잡았던 종파들의 사상이 성취한 작업을 여기서 언급해야한다.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어느 저술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10월 혁명을 자신들의 종교적 희망이 직접 실현된 형태로 받아들인 다수의 농민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역사상 알려진 모든 농민 반란 가운데 1917년 러시아의 농민 운동은 의심의 여지없이 정치사상의 비료를 가장 풍부하게 공급받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독자적 지도부를 수립하여 권력을 스스로 장악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원인은 고립되고 소규모이며 일상이 반복되는 농업의 천성에서 찾아야한다. 농민의 비참한 경제적 지위는 농민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답으로 경험을 일반화하여 이론으로 정식화할 능력을 그에게 부여하지는 않았다.
농민의 정치적 자유는 실제로는 다양한 도시의 정당들을 취사 선택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선택조차 선험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농민은 반란을 통해 볼세비키당을 권력으로 밀어 올렸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후에야 볼세비키당은 농업 혁명을 노동자 국가의 법률로 전환시켜 농민을 획득할 수 있었다.
야코블레프의 지도 하에 있던 어느 연구 집단이 자료를 대단히 가치 있게 분류해왔다. 이를 통해 2월부터 10월까지 농업운동의 발전과정이 규명되었다. 매달 농민의 조직화되지 않은 투쟁을 100으로 지정하고 이들은 조직화된 투쟁을 4월에 33, 6월에 86, 7월에 120으로 추산했다. 7월에 사회혁명당의 조직은 절정에 도달했다. 8월에는 100의 비조직화된 투쟁에 비해 62의 조직화된 투쟁이 10월에는 14가 있었다. 비록 그 의의는 제한적이지만 대단히 유익한 이 수치들로부터 야코블레프는 전혀 예상 밖의 결론을 이끌어낸다: "8월까지 운동이 꾸준히 조직성을 증가시킨 것에 비해 가을에는 더욱더 '자연발생적' 성격을 띠었다." 또 다른 연구자인 베르메니체프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10월 이전의 투쟁의 물결에서 조직된 운동의 수치가 낮은 것은 이 시기 운동의 자연발생성을 증언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과 대비되듯이 자연발생성이 의식성과 대비되는 것이 유일한 과학적 대비이다. 그렇다면 농민운동의 의식성은 8월까지 상승했다가 급격하게 하락하여 10월 봉기의 순간에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결론 내려야한다. 그러나 우리 연구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생각이 확실히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반성적 태도를 취하면 예를 들어 이렇게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겉으로 보면 "조직적" 성격을 띠었음에도 불구하고 제헌의회 선거에서 농민이 보인 반응은 훨씬 더 "자연발생적"이었다. 즉 지주에 대항한 "비조직적" 투쟁에서 농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에 비해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농민은 생각이 얕고, 유순하며, 맹목적이었다.
8월 위기에서 농민은 의식성을 버리고 자연발생성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화해주의 지도부를 버리고 내전을 선택했다. 조직의 쇠퇴는 진짜 피상적인 특징이었다: 화해주의 조직은 사라졌으나 남은 것은 빈 공간이 결코 아니었다. 농민은 가장 혁명적인 병사, 수병, 노동자 분자들의 직접 지도를 받으며 새로운 투쟁의 길로 나섰다. 단호한 투쟁을 시작할 때 농민들은 대단히 자주 대중집회를 열었다. 또한 같은 마을에 사는 모든 농민들이 채택된 결의문에 서명하도록 노력하기조차 했다. 세 번째 연구자 쉐스타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지주의 장원을 공격한 8월에 가장 자주 등장한 장면은 '구 농민 집회...'이다. 집회를 통해 농민은 전유한 물품을 나누고 온갖 종류의 지주, 관리인, 군 정부위원, 토벌대 등과 협상을 한다."
내전 때까지 농민을 지도한 읍 위원회가 내전과 함께 사라진 문제를 이 자료들은 직접 해명할 수 없다. 그러나 설명은 저절로 나온다. 혁명은 아주 빨리 자신의 기구와 도구들을 닭아 없앤다. 토지 위원회는 반(半)평화적 활동을 했기 때문에 지주를 직접 공격하는 데에는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일반적인 이유에 못지 않게 중요한 특별한 이유들이 보충된다. 지주와 공개적으로 전쟁을 시작하면서 농민들은 자기들이 패배할 경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패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토지 위원회는 케렌스키의 감옥에 갇혔다. 따라서 반란의 책임을 분산시키는 것이 전술상 필요했다. "농촌 공동체"는 이것을 위해 가장 편리한 형태였다. 늘 그렇듯이 농민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성향도 의심의 여지없이 같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이제 문제는 지주의 재물을 직접 점거하고 배분하는 것이었다. 각자는 자기 권리를 누구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이 과정에 참여하려 했다. 따라서 투쟁이 조성한 최고의 긴장 때문에 대표기구들은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이 대신 농민 집회와 공동체 포고령의 형태로 원시 농민 민주주의가 등장했다.
볼세비키 연구자들이 농민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조야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 유형의 볼세비키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한다. 사고가 관료화되면 상층부에서 농민에게 강요된 조직 형태들을 불가피하게 과대평가 한다. 대신 농민들이 수립한 조직 형태는 과소평가 한다. 교육받은 관리들은 자유주의 교수처럼 사회 현상을 행정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농업 인민위원(People's Commissar of Agriculture) 야코블레프는 이후 훨씬 더 광범위하고 책임이 더 무거운 영역에서 동일한 관료적 즉흥적 사고방식을 드러냈다. 즉 그는 "완벽한 집단화"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론적 피상성은 대규모로 실천될 때 잔인한 복수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완벽한 집단화의 오류로부터 13년이나 떨어져 있다. 이제 남은 유일한 문제는 지주의 장원을 몰수하는 것이다. 134,000명의 지주들이 천 8백만 데시아틴을 몰수당할까 덜덜 떨고 있다. 그러나 가장 위협을 받고 있는 층은 7천만 데시아틴을 소유하고 있는 3만 명의 구 러시아 대지주들이다. 이들은 일인당 2천 데시아틴이 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귀족인 보보리킨은 짜르의 시종장 로지안코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지주이다. 그런데 내 토지를 박탈당할 것이라는 현실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더욱이 사회주의 교리를 실험한다는 대단히 황당한 이유 때문이라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혁명의 임무는 지배계급의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지주들은 자기 장원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더 이상 장원을 유지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우리 토지를 빨리 처분할수록 더 좋다. 이들에게 제헌의회는 국가가 자기 토지를 배상할 뿐 아니라 토지에 대한 걱정까지 배상하는 거대한 어음교환소이다.
자영 농민들은 좌익 농민의 강령을 따랐다. 이들은 기생적 귀족들이 청산되는 것을 대환영했다. 그러나 토지 소유의 개념을 뒤흔드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했다. 이들은 자기들 집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국가는 120억 루블 정도를 지주들에게 지불할 돈이 있다. "농민"인 이들은 귀족의 토지가 유리한 가격으로 인민에 의해 지불되어 자기 것으로 이용될 전망에 기대었다.
토지 소유주들은 배상의 수준이 배상의 순간에 조성되는 역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정치적 문제라는 것을 이해했다. 코르닐로프 식 즉 반동적 방식으로 소집되는 제헌의회가 로지안코와 밀류코프가 각각 제시하는 노선의 중간인 개혁노선을 따를 것으로 8월말까지는 기대되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 반란이 실패하면서 유산계급들은 게임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9월과 10월에 유산계급들은 병이 나을 가망이 없는 환자가 죽음을 기다리듯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농민에게 가을은 정치의 계절이다. 들판의 농작물은 전부 추수되었으며 환상은 박살났고 참을성은 다했다. 끝장을 볼 때가 왔다! 이제 운동은 제방을 흘러 넘치고 모든 곳에 침투하면서 지역의 특수성을 전부 걷어가 버린다. 또한 마을의 모든 계층들을 끌어 모으고 법과 신중함과 관련된 모든 생각들을 쓸어버린다. 공격적이고 난폭하고 격렬하고 분노하는 존재가 되어 이 운동은 쇠, 불, 권총, 수류탄으로 무장한 채 장원을 파괴하고 불태운다. 또한 지주를 몰아내고 자신의 피로 땅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물을 붉게 물들인다.
- 자본가의 몰락
푸쉬킨, 투르게네프, 톨스토이가 칭송하던 귀족의 소굴들은 이 과정에서 전부 사라진다. 구 러시아는 연기 속으로 증발한다. 자유주의 언론은 영국식 정원, 농노의 붓으로 그린 유화, 유산으로 상속받은 서재, 톰보프의 파르테논 신전, 승마용 말, 고대의 판화, 씨 황소 등이 파괴되는 것에 대해 신음과 울부짖음을 가득 토해낸다. 부르주아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강변해왔다: 농민들이 상전의 "문화"에 앙갚음하는 "파괴적" 방식에 대한 책임은 볼세비키당에게 있다. 그러나 러시아 농민들은 볼세비키당이 세상에 등장하기 수백 년 전에 시작된 일을 지금 끝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손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통해 자신의 진보적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고 있었다. 혁명적 야만행위를 통해 그들은 중세의 야만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 이들의 선조 및 증선조는 자비나 너그러움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 자크리의 난
자크리의 난(Jacquerie)은 백년전쟁 와중이던 1358년 여름, 프랑스 북부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이다.[1] 난이 시작된 곳은 오늘날 파리 북쪽에 있는 우아즈 주 보베였으며 몇 주간의 폭력사태 이후 진압되었다. 귀족들이 농민들이 입은 누비 중백의를 "자크jacque"라고 불렀기 때문에 "자크리의 난"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2] 귀족 연대기작자 장 프로아사르는 반란 지도자 기욤 케일을 "자크 본옴Jacques Bonhomme"이라고 불렀다. "자크리"라는 말은 이후 영어와 불어에서 농민 반란을 가리키는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프랑스 농민들이 해방되기 450년 전에 봉건 지주들은 자크리의 난을 진압했다. 이 때 경건한 어느 수도승은 자신의 연대기에 이렇게 적었다: "지주들은 나라에 만행을 너무 많이 저질러서 왕국을 파괴하기 위해 영국인들이 올 필요가 없었다. 프랑스 귀족들이 자행했던 만행을 영국 귀족들은 자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1871년 5월 파리 코뮌 당시의 부르주아 계급만이 그 악랄함에 있어서 프랑스 봉건 귀족들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노동자의 지도력 덕분에 러시아 농민들은 그리고 농민들의 지지 덕분에 러시아 노동자들은 문화와 인류애의 옹호자들로부터 이 이중의 교훈 즉 반혁명은 혁명보다 몇 배나 잔인하다는 교훈을 배우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전체에서 기본 계급들이 가지고 있었던 상호관계는 농촌의 마을에서 재연되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부르주아 계급의 계획과는 반대로 왕정에 대항해 싸웠듯이 빈농들은 부농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고 지주에 대항해 가장 대담하게 일어섰다. 화해주의자들은 밀류코프가 인정하는 순간에만 혁명이 확고히 자기 발로 설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농은 좌우를 흘낏 보며 부농의 서명이 자신들의 토지 몰수를 합법화시킬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혁명에 적대적이어서 처음에는 지주 장원에 대한 습격에 저항했으나 부농은 습격의 과실을 즐기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것은 부르주아 계급이 화해주의자들이 자기들에게 넘긴 권력을 갖는데 주저하지 않은 것과 어느 정도 비슷했다. 같은 이유로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의 손에 오래 남아있지 못했으며 지주의 재산은 부농의 손에 오래 남아있지 못했다.
농촌의 계급 갈등을 당분간 극복했다는 사실에서 농업 민주주의 혁명 그리고 핵심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의 힘이 드러났다: 부농이 지주를 약탈하는 것을 농민이 도왔다. 러시아 역사의 17세기, 18세기, 19세기는 20세기의 어깨에 올라탔다. 그리고 20세기가 땅으로 몸을 굽히게 만들었다. 농민 전쟁은 부르주아 혁명가들이 전진하도록 재촉하기는커녕 이들이 반동의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뒤늦은 부르주아 혁명의 허약성이 드러났다. 어제의 중노동 죄수 체레텔리는 무정부 상태에 대항하여 봉건 귀족지주의 장원을 옹호했다! 이렇게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거부당한 농민 혁명은 공업 노동자들과 손을 잡았다. 이렇게 해서 20세기는 자기 목에 걸려 있는 수백 년의 과거를 걷어냈을 뿐 아니라 과거의 어깨에 올라서서 새로운 역사의 지평으로 나섰다. 농민이 자기 토지를 정리하고 울타리를 칠 수 있도록 노동계급은 나라의 선두에 서야했다. 바로 이것이 10월 혁명의 아주 단순한 공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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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글의 전체적인 내용은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written by Leon Trotsky 에서 발췌했으면
중간중간에 내가 인터넷에서 보충자료를 첨가하였다. - dhleepaul 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