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기독교 때문에 멸망했다 .................................... 마광수
로마는 어째서 멸망한 것일까. 사실 어떤 나라든 영원히 지속적으로 번영할 순 없으므로 로마의 멸망이 특별한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계속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로마가 왜 그리 ‘급격히’ 멸망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역사가의 입장에서 서기보다 문화인의 입장에 서서 살펴볼 때, 나는 로마 멸망의 근본적 원인이 ‘쾌락주의의 쇠퇴’ 내지는 ‘내세중심주의의 대두’에 있었다고 본다.
전성기의 로마는 쾌락지상주의를 국가이념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추구한 쾌락은 우선 귀족들 중심의 쾌락이었지만 일반인들도 상당한 쾌락을 보장받았다. 물론 노예는 예외였다. 하지만 노예제를 기본으로 하여 유지된 고대 경제사회에서는 범민중적 쾌락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귀족과 시민 중심의 문화를 비방할 수만은 없다.
초기 로마의 문화는 그리스의 정신주의 문화와는 달리 철저하게 육체주의적인 것이었다. 연극을 예로 들어봐도 로마의 연극은 그리스의 연극과는 달리 철저한 ‘오락물’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로마의 연극 가운데 지금껏 전해지는 것은 세네카의 작품이 대부분인데, 그의 희곡을 ‘복수극’이라고 부를 정도로 잔인한 사디즘이 연극 전체를 이끌어가고 있다. 사람을 산 채로 찢어죽인다든가 사람의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낸다든가 하는 식으로, 세네카의 복수극은 인간이 원초적으로 지니고 있는 사디즘적 욕구를 카타르시스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스 연극이 ‘마음의 고통’을 주제로 삼아 철학적 측면에 주력했던 데 비해, 로마 연극은 ‘육체적 고통’을 주제로 삼아 관객의 본능적 욕구를 대리배설시켜 줬던 것이다.
로마인들이 믿는 신(神)은 그리스인들이 믿는 신보다 한층 더 인간화된 신들이었고, 그들이 만든 예술작품들은 모두 다 에로틱한 선정성(煽情性)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 사람들은 죽은 다음에 찾아오는 내세의 문제라든가 형이상학적 문제 같은 것에 대해 별 관심을 쏟지 않았고, 오직 현실 안에서의 행복 및 쾌락 문제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시켰다.
전성기의 로마가 문(文)보다 무(武)를 숭상했던 것은 ‘힘의 원리’야말로 이 세상을 지탱해 나가는 기본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수많은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고, 식민지들로부터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313년을 전후로 해서 로마제국은 서서히 붕괴되어 가기 시작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결단은 종교적 신앙심에 의한 것이었다기보다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고 봄이 옳다.
스코틀랜드로부터 소아시아에 걸쳐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로마제국의 판도 안에서는, 여러 가지 종교가 잡다하게 퍼져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여러 민족들이 뒤섞여 있는 로마제국을 하나로 뭉치게 하려면 ‘종교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고, 통일된 종교로는 기독교가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하게 됐던 것이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처럼 되자 기독교는 곧바로 놀라운 조직력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정치적 행정단위와 비슷한 형태의 여러 교구(敎區)들로 구성된 교회조직은 로마제국의 잡다한 인종들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이 로마제국의 번영에 도움을 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기독교가 로마를 지배하게 되면서부터 중세기적 암흑시대의 전조(前兆)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교부(敎父)들은 우민정책(愚民政策)을 폈기 때문에 읽고 쓰는 일은 오직 귀족과 승려들의 전유물이 되었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전혀 교육을 베풀지 않았다.
또한 무엇을 읽고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순전히 교회의 결정에 따라 좌우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의 발전은 생각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체적 쾌락을 죄악시하며 오직 죽은 뒤에 내세에서 받을 하느님의 심판에만 목을 매달고 살아가는 인질의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더욱이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교도를 배척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전성기 로마인들이 가졌던 유연한 외교술과 융통성 있는 ‘혼혈 문화’를 상실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로마는 도량이 좁은 종교적 국수주의에 머물지 않으면 안 되었고, 결국은 어이없게도 졸지에 멸망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보면 로마의 멸망은 적은 숫자의 민족이 많은 숫자의 다수 민족을 통치하다가 결국 힘에 부쳐 손을 들게 된 것이 주된 원인이고, 싸움에 싫증을 느끼는 로마인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 용병을 쓰게 됐다는 것이 보조적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로마 사람들이 왜 그토록 멸망의 징조에 무심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진짜 이유가 도출된다.
내 생각으로는, 현실적 쾌락 (또는 행복)을 선(善)으로 인정하지 않고 헛된 신기루로 보아 금욕생활로만 일관할 것을 주장한 당시의 기독교 교리가 로마 멸망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 말하자면 별 형이상학적 이념에 신경 쓰지 않고 실용주의로만 일관했던 로마가 기독교라는 거대한 이념에 잡아먹혀버린 셈이라고나 할까. 이런 원인진단에는 이견이 많겠지만, 어쨌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서양 문명이 발전의 속도를 급격히 늦추고 정체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 자체만을 놓고 생각해 봐도, 그때부터 기독교는 초기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순수한 신앙심과 사랑의 정신을 망각해 버리고 정치세력과 결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예수의 진의를 무시한 채 급격한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서양의 이런 기형적인 역사변화 추세와 비교해 볼 때, 동양(특히 중국)에서는 이렇다 할 ‘급격한 침체’ 같은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 동양에서는 기독교만한 획일적 이데올로기나 종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양은 서양과는 다르게 실용주의적 가치관을 견지해 나갈 수 있었고, 마녀사냥이나 종교재판, 또는 극단적인 성 억압 같은 것을 피해 나갈 수 있었다.
물론 르네상스 이후 화약을 발명하고 항해술을 익힌 서양인들은 ‘근대화’를 이루어가면서 동양을 능가하기 시작한다. 특히 근대 이후의 유럽 기독교는 ‘교리에 대한 광신적(狂信的) 집착’을 차츰 반성하게 되면서, 성적 쾌락이나 세속적 안락을 용인하게 되어 합리주의적 과학발달을 촉진시켰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조차 신(神)의 개념을 전제하고 있고, 공산주의를 주창한 마르크스의 ‘이상국가론’ 역기 기독교적 교조주의와 유토피아니즘을 흉내 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서구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슈펭글러가 『서양의 몰락』을 쓴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요즘도 상당수의 우리나라 지식인들은 정신우월주의에 빠져, 한국의 현실을 진단할 때 로마제국의 퇴폐적 사회풍조를 예로 들어가며 경종을 울리곤 한다. 이럴 때 우리는 한국의 대학교수나 지배 엘리트 대부분이 ‘미국 박사’들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한국의 학문풍토가 미국의 절대적 영향하에 놓여 있다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지나치게 결벽증적인 금욕주의 때문에 유럽에서 쫓겨난 청교도주의자들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지배 엘리트들은 겉으로는 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종교적 극우노선을 고집하고 있는 답답한 도덕만능주의자들이요 꽉 막힌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다. 1926년에 ‘금주법(禁酒法)’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1933년까지 유지시켰을 정도로, 그리고 지금도 주(州)에 따라서는 ‘진화론’이나 ‘빅 뱅(Big Bang) 이론’을 학교 교재에 넣지 못하도록 법제화시켜 놓고 있을 정도로, 여전히 중세기적 사고에 머물고 있는 나라가 바로 미국인 것이다.
한국의 지식인들 중에는 ‘도덕’에 대한 광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특히나 많다. 그래서 ‘퇴폐’, ‘향락’, ‘음란’, ‘사치’ 등의 애매모호한 개념을 적으로 모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런 것들을 ‘척결’하자는 말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써먹으며 스스로의 도덕적 인격을 과시(또는 위장)하는 고질적인 자기은폐 심리가, 그들을 일종의 마녀사냥꾼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쾌락’을 좀 더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가리켜 ‘퇴폐’라고 표현하는 경우를 나는 자주 발견하게 된다. ‘쾌락’은 ‘행복’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고, ‘향락’이란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이다. 그것이 어째서 나쁘단 말인가.
지금도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는 광신적 종교집회가 열리고, 그 집회에서는 말세를 외쳐대는 사람들이 ‘속세의 사람들’을 적개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저주를 퍼붓고 있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말세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다면, ‘집단무의식’이 갖고 있는 힘에 의해서라도 이 세상은 결국 망하고 말 것이다.
과연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 역시 답답한 마음으로, 소설 『쿠오바디스』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베드로가 하늘을 향해 비통하게 절규했던 것처럼 이렇게 외쳐보는 수밖에 없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