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근처를 생각한다
- 『시와산문』 삼십주년에 붙여
방민호 비평가, 시인
나의 과거는 눈부시게 밝았다고 느끼는 때가 한 시기도 없다. 사람의 유형 탓일 테다. 겉에서는 늘 웃는 편이지만 속은 우울증 상태다.
활짝 피어난 황모란 꽃송이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한껏 취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 아름다움도 오래 못 가 스러지고 말리라, 우울해 하는 사람도
있다.
1997년 2월에 일본 후쿠오카에서 도쿄까지 초청을 받아 여행을 갔었다. 그때 만난 일본 작가 시마다 마사히코가 내 짧디짧은 경력을 보고, 너는 관료다, 라고 비웃은 것이었다.
도쿄 외국어대 러시아과를 나와 소설을 쓰는 시마다에게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석사 졸업, 박사 수료, 창작과비평 제1회 신인평론상 수상 등단으로 이어지는, 당시에 비평집 한 권조차 없던 내 경력은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시마다는 1961년생, 나는 1965년생, 그는 1983년에 『부드러운 좌익을 위한 희유곡』으로 아쿠다카와상 후보에 올랐다. 나중에 나는 그의 장편소설 『피안선생의 사랑』(1996년 번역)을, 그가 패러디했다고 평가되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생각하며 읽은 적이 있다.
시마다의 농담에 나는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마다의 약력을 살펴보니 그후로 그는 숱한 소설 저작들을 남기고 있다. 작가는, 문학인은 과연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1994년 겨울에 등단한 후에 내 삶은 문학이 삼할 삼푼 삼리요, 나머지 육할 육푼 칠리는 방황이나 방랑 같은 것이었다.
오늘 누군가 문자를 보내와서 보니, 고은 시인이 『청』이라는 시집을 비매품으로 펴내셨다. 그 분량이 책으로 1,200쪽에 달한다고 하며, 그 대부분은 이미 그 사건을 겪기 전에 써놓았던 것이라 하며, 그 의미가 아주 난해해서 교정 보는 사람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고 한다.
고은은 “1950년대”에서 삶이 문학적인 사람은 정작 그 문학은 풍요롭지 못하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었다. 아마도 그런 문장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면 얼추 맞을 것 같다.
그 1994년 겨울에 만약 등단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등단이라는 특수한 형태의 한국적 제도를 아주 신뢰하지만은 않지만, 아마도 미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대학은,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지만. 별볼일 없고, ‘인찌끼’ 같은 인간들이 주제를 모르고 자기 현시에 들떠 돌아가는 판이다. 운이 몹시 좋아야 그런 우물안 꼴불견 개구리 신세를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칼날과 시선에 스치고 치여 하루라도 그 철대문 바깥을 벗어나지 않고는 미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소목’이 주제 넘게 무슨 학생운동이며, 노동운동이란 것도 모두 정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몸부림에 지나지 못하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암흑 속을, 사정없이 몰아치는 검은 눈보라를 헤치고 고개를 잔뜩 움츠리고 나아가듯, 1989년에서 1993년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고갯길을, 나침판도 없이, 마치 1985년 2월 겨울 설악산의 캄캄한 산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간신히 빠져나왔던 것처럼, 헤매고 있었다.
1990년부터 1994년까지 나는 풍향이 바뀐 세계의 가장 낡은 사람이었다. 《아비정전》과 《중경삼림》에 열광하는 후배들 사이에 끼인, 다른 먼 시대에서 튕겨져나온 못난 외계인이었다. 국문과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미련을 못 버리고 다시 옛날 조직의 재건위로 돌아갔고, 다시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으로 들어갔다. 이름하여 프랙션이라는 것이었다. 영화 연구하다 지금은 세상 떠나고 없는 이길성 같은 이가 거기에 있었다.
레닌은 『당조직과 당문학』에서 문학은 사회민주당 활동의 톱니바퀴와 나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옛날에 박영희는, 자기 소설을 향해 기둥도 서까래도 없이 지붕만 덜렁 얹어놓은 건물이 있느냐고 힐난을 퍼부은 김기진에게, 벌써 그럴 듯한 건축물을 요구하는 것은 시기상조라 했다.
어느 때든 박영희 같은 원리주의적 태도, 교조적 원리로부터 현재를 위한 지침을 연역해 내려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나중에 박영희는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며, 잃은 것은 예술 자신”이라고 했다. 이 말에는 쓰디쓴 반성이 담겨 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전반기에 걸쳐 가열화된 마르크시즘과 주체사상에 입각한 사상운동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 운동의 담당자들은 카프 운동이 펼쳐치던 1920~30년대로부터 줄잡아 50~60년 이상 지난 시점에서 그 옛날의 이론서들을 붙들고 씨름을 벌였다. 이를 현재에 적용해도 아무 이상이 없을 것으로 여겼다. 서구에서 그 사이에 이루어진 모든 철학적, 사회과학적 진보에 무지했을 뿐 아니라,그 모든 것을, 수정주의니, 종파주의니 하고 배척하는 안하무인의 위엄과 아집까지 내장하고 있었다.
‘노문연’의 소수파로서 나는 어쩌면 나의 노선이 저 옛날 임화와 김남천이 주장하던 볼세비키화를 흉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일단 당대의 낡은 마르크시즘을 떠받들고 있는 한 『당조직과 당문학』의 절대적 지침에서 벗어나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카노 시게하루와 코레히토 구라하라, 임화와 김남천의 아우라의 포로가 되어 지적 무능력과 태만을 애써 올바름으로 도호하려 했다.
그 시간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어느 사이에 이제는 정말 대학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느꼈다. 1993년 가을, 「전후소설에 나타난 알레고리 연구」로 겨우 석사학위를 마치고 1994년 3월에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1994년 겨울,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현실을 바라보는 세 개의 논리」로 이른바 등단이라는 것을 했다. 최인훈, 이청준, 이문열 등 3인의 당시 발표작, 「화두」, 「흰옷」, 「아우와의 만남」이 논의 대상이었다.
낡은 과거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에 어떻게 의지해서 나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뉴레프트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저작들에 의지해서 리오타르와 보드리야르, 알튀세와 들뢰즈를 상대하려 했다. 그러나 포스트 담론들은 결코 간단하게 건너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들뢰즈, 네그리, 에드워드 사이드, 강상중, 니체를 읽고, 당파성 대신에 모든 경계를 허물라는 불교에 입문했다. 귄터 보른캄과 『금강경』과 길희성을 읽었다.
문단은 한국문학의 ‘1994년 체제’라는 것에 들어서 있었다. 『창작과비평』, 『문학과사회』, 『실천문학』의 삼정립 구도는 『문학동네』가 『실천문학』을 대신하는 새로운 트라이앵글 구조로 변했다. 『문학사상』, 『세계의문학』, 『현대문학』과 같은 잡지들은 이 삼각형 구도를 보조하는 책들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다르게 생각한다. 최근의 젊은 연구자들은 1970년대 문학을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의 양대 잡지 구도로 읽는다. 나는 여기에 『문학사상』을 합쳐 새로운 삼정립 구도로 읽는다. 다른 잡지들도 저마다의 몫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1995년부터 1997년 혹은 1998년 사이에 나는 문학을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숙고하게 된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에 비추어, ‘나’라는 존재에 통과시켜 문학을 사유하는 것이다. ‘지금 문학 A가 필요하다’, ‘문학 A를 해야 한다’가 아니라, ‘나는 문학 A를 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문학 A일 뿐이라’라는 식이라고나 할까.
그때쯤 나는 도덕과 모럴을 달리 구분지었다. 도덕이란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규범이나 준칙을 말한다. 모럴이란 행위의 옳고 그름의 구분에 관한 태도, 인생이나 사회에 대한 정신적 태도 등을 가리킨다. 대개 우리말로 도덕, 윤리 정도로 번역된다. 이 둘을 구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민적 규범은 도둑질한 자를 응징해야 한다고 한다. 도둑을 보면 신고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도둑이 나의 아버지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앞의 것이 도덕에 속한다면 뒤의 것은 모럴에 속한다.
스스로를 마르크시스트라고 생각하는 한 그는 ‘노동자주의’,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과제를 이행해야 한다는 윤리 관념에 스스로를 복종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학출’이라면, 부르조아의 가계를 타고 났다면, 과연 존재를 뛰어넘어 의식상의 노동자, 노동자주의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남성이라면 과연 페미니스트를 자처할 수 있는가? “재일이라는 근거”를 쓴 다케다 세지가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비평가 X는 문학 A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명제가 진리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모든 문학은 운명의 형식이며, 운명의 형식으로서의 문학이 아니고는 문제적인 문학이 될 수 없었다. 문학은 궁극적으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요 운명이 허용하고 가능케 하는 사유, 곧 내용을 드러내는 그것에 합당한 형식일 뿐이었다.
그러고도 최인훈이 『화두』에서 말한 마르크시즘의 주박, 공리적 마르크시즘의 교리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내 생각의 변화는 내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요, 그 무렵 나의 삶을 바꾸어 놓은 만남에서 얻은 것이요, 그 타인의 원조를 통해서만 겨우, 외부로부터 나의 내부로 스며들어 올 수 있었다. 그만큼 우둔하고 지적으로 태만했다. 오로지 좋은 운으로써만, 운명적 만남으로써만, 다른 모든 공리주의자들과 다른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채만식, 이태준, 이효석, 김남천, 이상, 박태원, 이광수, 최인훈, 박완서는 이 새로운 길의 동반자들이었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공리주의의 주박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했다. 평범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계와 출생과 성장, 시마다 마사히코가 『너는 관료』라고 비웃을 수 있었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력에 얽매인 채, 무엇이 운명인지 묻는 행위를 계속해 갈 수밖에 없다.
대학생 때는, 감히, 문학을 한다, 하고 싶다고 언명할 수 없었다. 평범한 모범생, 관료적 기질을 가진 자는 ‘나의 길은 오로지 A’라고 떳떳하게 밝히기 어려운 때였다. 그러나 그런 자는 어느 때도 자기를 명쾌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그 시절에 나는 완성된 아무 것도 갖지 못했다. 대학원생으로 ‘노문연’에 들어가 마산, 거제를 왕래할 무렵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 시들을 완성했다. 조직에서 나와 이제 정말로 패배한 자'로써,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운명적인 만남에 직면했을 때 단편소설 몇 편을 쓰고 한두 편의 장편소설을 미완성으로 남겼다. 방향과 작법을 달리해서 써나가던 시들은 2001년에야, 소설은 2015년에야 비로소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게 된다. 그 사이에 나는 마르크시스트 비평가에서 한국문학의 전통과 가치를 ‘믿는’, 식민주의를 멀리하는, 모든 지배와 폭력은 잘못된 것이며, 한국인들, 한국어는 머나먼 곳에서 오랜 역사 시간을 거쳐 여기에 이르렀음을 생각하는 국문학자로 변했다. 나의 모럴 감각은 나는 국수주의자가 아니라거나 국제주의자라거나 노동자의 편이라거나 페미니스트라거나 하는 주장을 불가능하게 한다. 수덕사와 남연군 묘가 가까운 예산 하고도 덕산에서 출생해, 공주를 거쳐 대전에서 성장하여, 같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같은 곳에서 현대소설을 가르치는, 나의 유일한 언어는 한국이이며, 나는 그 굴레 속에서 역설적인 자유를 찾는다. 정체성은 자유이자 구속이며 구속이자 자유다. 탈북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그들의 창작에 관심을 갖는다. 1980년대 세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시와산문』이 이 봄으로 출간된 지 꼭 삼십 년이 된다고 한다. 그 사이에 120호나 냈다니, 대단하다. 숱한 방황과 고민으로 점철된 나의 삼십 년을 되돌아보며, 『시와산문』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랴 생각한다.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해, 『실천문학』의 편집위원을 하고, 『문학수첩』 편집위원을 거쳐 『문학의오늘』과 『맥』의 편집을 하기까지, 힘든 도정이었다. 제대로 된 것을 잡았다고, 맞는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었기에 무척이나 지치기도 한 길이었다. 『시와산문』이 바로 그러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믿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문단에 처음 나오면서부터 나는 ‘주류’인 적이 없었다. ‘1994년 체제’의 가장자리에서 ‘수처작주’ 네 글자를 생각할 뿐이었다. 『시와산문』이 그와 같이 지난 삼십 년의 주인, 주역이었을 것이라 믿는다.
삶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며 길은 누구의 것이라도 귀하다. 누구나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한 그는 옳다. 스스로 자기를 소외시키지 않는 한 아무도 그를 외롭게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