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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9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마르코 3,13-19
이것이 없다면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라는 이름으로 열둘을 지명하십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유다 이스카리옷이란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끝내 예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입장에서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왜 같이 출발했는데 어떤 이들은 진전이 있고 어떤 이들은 멸망에 이를까요?
당연히 목적지를 향해 달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달리기하다 넘어지는 사람처럼 목적 없이
달리다가는 주위에 있는 사람까지 끌어내리게 됩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자신을 보고 쫓아올 수 있도록 길을 내며 목적지를 향해 달려야 합니다.
유튜브 지식인사이드에 ‘40년째 운동하는 80세 할머니’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할머니는 남들이 먹는 혈압약이나 당뇨약, 고지혈약, 골다공증약 등의 성인병 약은 입에도 안 대는 것은 물론 “감기, 몸살 한번 없었어요!”라고 말합니다.
할머니는 어느 날 걷기 힘든 증상을 느꼈고 병원에 갔더니 협착증이란 진단을 받았습니다.
‘전동휠체어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상황까지 갔었습니다.
의사는 “근육이 감소해서 그러니까 근력운동을 좀 하세요.”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근력운동은 생각도 못 했었는데 한 달을 하니까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이 절실함이 보디빌딩 대회에서 시니어부 우승까지 하게 만들었습니다.
헬스클럽 관장님이 대회에 나가라고 했을 때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기는 했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도 도전하는 거 좋아하니 일흔다섯에 시작해도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엔 비키니를 입는 것도 창피했고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려고 마음먹고는 개인 트레이너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하루 세 시간 식당 알바를 하며
비용을 충당했습니다.
만약 이 할머니 보디빌더를 그분의 부모님이 보고 계시면 마음이 어떨까요? 기쁠 것입니다.
당신들이 준 몸을 끝까지 잘 가꾸고 누구보다 더 잘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도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좋아하실 리 없습니다.
혼다 자동차 주식회사의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는 자동차와 엔지니어링에 대한 열정을 바탕으로 꿈을 꾸었습니다.
성공을 향한 그의 여정에는 여러 가지 도전과 역경이 있었지만 그는 인내와 혁신, 끊임없는 비전 추구를 통해 이를 극복했습니다.
그는 회복력과 미래 지향적 사고방식으로 역경에 맞서 혼다를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이끌었습니다.
혼다는 “꿈을 가질 것, 끊임없이 도전할 것,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꿈을 단념하지 말 것”을 권고합니다.
그는 “도전하고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라.” 라고 충고합니다.
성공이 있기까지는 99%가 실패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인간의 능력에는 큰 차이가 없고, 있다면 그건 근성의 차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실행력입니다.
해 보려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소명을 사는 삶이 아닙니다.
소명이 나를 창조한 이가 있고 불러준 분이 계심을 믿는 증거입니다.
누구나 다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유다는 장기적인 목표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노력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도 오르지 않고 타인도 끌어내리려 했습니다.
소명 의식이란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 특별히 나의 삶에 책임을 지려는 노력입니다.
신학생 때 같은 반 학생에 저에게 “형, 다른 사람들은 쓰러지는데 형만 혼자 1등으로 도달하면 예수님이 기뻐하실까? ‘다른 친구들하고 왜 함께 오지 않았니?’라고 하지 않으실까?”
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내가 올라야 나를 보고 다른 이들도 오릅니다.
예수님께로 가는 길은 절벽을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빠르게 오르는 신앙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장 아랫부분에서 서로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자신도 오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진보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영성의 발전으로 나아가는 일은 우리 사명입니다.
무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최고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때 그 부르심을 주신 분께 대한 사랑의
보답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1코린 9,24).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19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마르코 3장 13-19절
"그 무렵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들이 예수께 가까이 왔을 때에 예수께서는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근사한 설렁탕집
몇몇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했습니다.
점심을 한끼 하려고 했었는데, 아무리 뺑뺑 돌아다녀도 문을 연 음식점이 없더군요.
아이들은 보채고, 큰 마음먹고 한번 쏠려고 했었는데...
"이를 어쩌나? 집에 돌아가서 라면이나 끓여야 하나?"하고 고민하던 중에 아이 하나가 연중무휴, 24시간 영업하는 근사한 설렁탕집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너무나 기뻤던 우리는 로또복권에 당첨이라도 된듯이 크게 떠들었습니다.
그 와중에서 눈치 없는 한녀석이 "신부님!" 하고 크게 소리치다 보니 사장님이 제 신분을 눈치챈 것 같았습니다.
불쌍하게 생긴 아이들 얼굴과 그에 못지 않은 제 얼굴을 연신 바라보시던 사장님은 크게 선심을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저희 앞에 놓여진 음식을 보고 저희는 깜짝 놀랐습니다.
옆 식탁과는 완전히 비교가 되었습니다.
밥도 꾹꾹 눌러 담아주셨지만, 설렁탕 그릇 밑에 깔린 고기의 양이 벌써 달랐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큰 파전까지 하나 서비스로 주셨는가 하면 괜찮다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10000원이나 디스카운트를 해주셨습니다.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쳐 죄송했지만, 불쌍한 저희들을 위해 각별한 마음을 써주신 사장님의 따뜻한 마음, 측은지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 열심히 기도하신 다음, 당신의 구원사업을 협조해줄 열두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평소에 눈여겨 보아두셨던 사람들 명단을 몇배수로 뽑아 눈앞에 두고 예수님은 심사숙고를 거듭하십니다.
그것도 부족했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기 위해 산에 들어가셔서 열심히 기도하십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당신 구원사업에 잘 협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식별하기 위해 밤새워가며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의 구원사업 그 바탕에는 무엇보다도 가련한 인간들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 "측은지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측은지심은 덕중의 덕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측은지심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됩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덕 역시 측음지심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영육간의 고통들, 영육간의 배고픔과 목마름, 좌절과 한계, 너무도 무거운 십자가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십니다.
하루 온 종일, 당신 백성을 향한 구원사업에 매진하십니다.
밀물처럼 다가오는 그 많은 사람들을 단 한명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다 대면하십니다.
그들의 고통 앞에 눈물 흘리시고 잘 해결되도록 아버지께 간절히 청하십니다.
당신 홀로 힘으로는 중과부적임을 절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업의 협조자로 열두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의 능력과 자질을 똑같이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우리의 협조를 강력히 요청하고 계심을 저는 강하게 느낍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주님의 두손이 되어드리고, 두 발이 되어드리는 하루이길 빕니다.
주님의 목소리가 되어드리고, 주님 기적의 능력이 되어드릴 수 있도록 우리의 가진 바를 기꺼이 내어놓고 나누는 하루이길 빕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월19일 [연중 제2주간 금요일]
(마르 3,13-19)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3-15).”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기도하신 것은, 하느님의 뜻을 물으신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코복음의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이들”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열두 사도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특별히 뽑으신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에 관해서 말할 때에, 그들이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만 강조하고 그들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들이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리를 제대로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열두 사도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기준에서 하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열두 사도의 직업 같은 것을 먼저 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 열정, 사랑, 헌신 등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직업은 고려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추대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신앙인들이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어떤 지점을 ‘구원’이라고 정해 놓고서, 그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메시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 나라’ 라는 목적지를 향해서 나아가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마음대로 그 목적지를 변경하거나 폐지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내 마음대로 정해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이라는 말은, 제자들이 사도로 뽑힌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고 해서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셔야 하고, 예수님께서 그 자리를 주셔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직책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교회의 모든 일에는 언제나 항상 성령의 힘이 작용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본당의 어떤 직책을 맡을 사람을 정할 때, 본당신부가 마음대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언제나 항상 교회를 인도해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이라는 말은, 사도들이 하는 일은 사도들 자신들이 마음대로 정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위임해 주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고 해서 아무 일이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만 해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적 없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교회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고,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빈손’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신 일을(마르 6,8-9) 하나의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교회는 ‘돈의 힘’으로 운영하는 회사가 아니라,
‘믿음의 힘’으로 살아가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세속의 회사들처럼 돈벌이를 하고, 물질적인 부유함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하다가는 교회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일을 성령께서 도와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복음 말씀에서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라는 말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했음을 나타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사도들이 예수님 앞으로 왔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려면, 내가 있던 곳을 떠나야 하고, 내 삶을 떠나야 하고, 나를 떠나야 합니다.
사도 직무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가 원래 ‘버림’이고, ‘떠남’이고, ‘따름’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 떠나야 할 곳을 떠나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한 번에 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끊임없이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라는 말은,
사도들이 받은 특별한 은총과 임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은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배우고 익히고 깨달은 것들을 다시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특별한 임무가 되기도 합니다.
이 말은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구원’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표는 지금 이 세상에서부터 날마다 충실하게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만 달성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