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담여행 ⑧] 충남 보령 신경섭가옥 꽃담
오마이뉴스 2022.11.19
장난치듯 쌓은 꽃담, 그래도 의미는 있습니다
신경섭가옥은 보령시 청라면에 있다. 청라고을은 오서산과 성주산 품에 포근히 안겼다. 2022년 10월, 청라의 거리는 세상일에 동떨어져 있는 양 한가롭고 평화롭다. 청라하늘은 왜 이리 푸르고 부신지. 그래서 더 가슴이 시리다.
낙향사족이 많은 청라고을
청라의 복판에 청라초등학교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읍이나 면에 갈 때마다 해오던 버릇이 생겼다. 청라초등학교에 들렀다. 100년쯤 되었을까, 학생 수는 50여명, 정갈하고 아담하여 우리나라에서 제일 예쁜 초등학교가 아닌가 싶다. 한갓지고 평화로운 청라에 어울리지 않은 돌비석이 보인다. '먼저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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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라초등학교 제주 더럭초등학교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청라초가 더 예쁘다. ‘먼저 사람이 되자’, 돌비석이 눈길을 끈다. 너무나 평화로운 청라이기에 이 문구는 청라에 어울리지 않은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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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세상,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되었더라면 미소를 띠며 지나쳤겠지만 쓴웃음이 나오는 것은 왠지 모르겠다.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아닌 세상에서 아이들에게 '먼저 사람이 되자'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말, 공허한 메아리로 들린다.
바다에서, 거리에서, 지하에서, 작업장에서 사람이 허망하게 죽어가는 사회, '먼저 사람이 되자'고 외치기에 앞서 사람 사는 세상, 사람이 먼저인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먼저 사람이 되자'는 오히려 사람 되기를 포기한 어른에게 경고하는 말로 들린다. 과연 당신은 사람구실을 하고 있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된다면 이 돌비석을 보고 자문하기 바란다.
청라(靑蘿)는 푸른 담쟁이가 우거진 데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은상의 <동무생각>,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에 나오는 청라와 같은 뜻이다. 청라언덕이 어떤 언덕인가 궁금해 하면서도 알아볼 생각도, 여유도 없이 4-50년 세월을 흘러버린 뒤, 이제야 알게 되었다.
도참설에 따르면 내포 땅은 북쪽에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와 남쪽에 만년영화지지(萬年榮華之地)가 있다고 한다. 이 중 북쪽은 흥선대원군이 차지하였고 남쪽은 청라라 하면서 아직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였다. 이 때문인지 청라에는 낙향사족이 많다.
양반 많고 돌 많고 말이 많다하여 삼다향(三多鄕)이라 불리는 청라인데 이중에 양반 많은 것은 이런 까닭이다. 능성구씨, 광산김씨, 경주김씨, 무주김씨, 보성오씨, 전주이씨, 한산이씨, 평산신씨 등은 저마다 이런저런 사유를 달고 낙향을 결심하였다.
평산신씨 청라 입향기
청라에 낙향한 사족 중의 하나가 평산신씨다. 보령에 정착한 평산신씨 대부분은 한성윤공파 신정의 후손들로 400여 년 전 오서산 서쪽 오천면 오포리에 들어왔다. 나머지는 사간공파 후손들로 18세기 중후반경 오삼전면(吾三田面) 사가리(현 청라면 황룡리)에 입촌하였다. 신경섭가옥 집안사람들이다. 입향조는 신위의 아들 신광태(1756-1788)다.
후손들은 오삼전면 사가리와 장현리에서 솔밭을 개간하여 농토를 일구고 세거하기 시작했다. 신광태의 아들은 신재진이고 신재진의 삼남 신석붕(1819~1864)은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다. 형, 신석룡은 1848년 사마시에 급제했다. 한편 신광태의 사위는 안동김씨 청라 입향조, 김이철(1782-1855)이다. 신경섭가옥 위쪽에 있는 가소정은 1830년경 김이철이 지은 것이다.
청라은행마을 복판에 들어선 신경섭가옥
청라면소재지에서 야트막한 구릉 몇 굽이 넘으면 청라면 장현이다. 오서산과 성주산 골짜기 아래에 들어선 동네, 밭이 길고 아득하게 있는 마을이라 장밭(전), 장현이다. 3000그루의 은행나무가 들어서 청라은행마을로 불린다. 신경섭가옥은 긴 땅 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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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라 장현리 풍경 청라면 장현리는 오서산 골짜기기 아래 들어선 평화로운 동네다. 논밭이 길고 아득하여 장밭, 장현이라 불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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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마을에 가을의 전설처럼 전설 하나가 떠돈다. 마을 뒷산인 오서산 아래 작은 연못에 살던 누런 구렁이가 천년을 기다린 끝에 황룡이 되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였다 한다. 까마귀가 이 광경을 보고 있다 노란 은행 알을 발견하고 황룡이 물고 가던 여의주라 여겨 산 아랫마을로 물고와 정성껏 키웠더니 은행나무가 번식하기 시작하여 은행마을이 되었다 한다.
신경섭가옥 앞에 자라는 300년 된 느티나무는 왜 천년나무로 불리는지 알 수 없다 하는데 천년 묵은 누런 구렁이에서 온 것 아닌가 싶다. 또 장현리 북쪽에 황룡리가 자리하고 있고 이름 말마따나 오서산(烏棲山)은 예로부터 까마귀가 많이 살아 까마귀 산으로 불렸다하니 이래저래 전설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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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섭가옥 앞마당 청라은행마을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가옥이 생기기 한참 전부터 있던 500년 은행나무를 비롯하여 100여년 된 은행나무가 여럿 있어 가을이 되면 가옥앞마당은 노랗게 물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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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우진각지붕대문에는 붉은색바탕에 흰 글씨가 새겨진 신석붕의 효자정려 편액이 걸려있다. 편액이라기보다는 대문에 덧댄 정려문이다. 정려가 내려진 해는 1868년, 신석붕이 사망한지 4년 뒤다. 부모 병환에 밤낮으로 하늘에 빌어 자신이 대신하기를 기원했고, 의대를 풀지 않고 탕약을 맛보고 받들었다하여 유생들이 공론으로 청원했다 한다.
상량문에 따르면 가옥은 1843년 신석붕 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넓은 사랑마당을 갖고 있으며 'ㄱ'자형으로 생겼다. 서쪽에 집 앞의 밭과 논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누마루가 있다. 누마루 밑은 홍성 사운고택처럼 본래 터져 있었으나 나중에 누마루의 기능이 약해지면서 화방벽으로 둘러쌓아 부엌을 넓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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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섭가옥 사랑채 동쪽에서 북쪽과 서쪽으로 꺾인 ‘ㄱ’자형 구조로 남향집이다. 서쪽에 누마루가 있고 누마루 밑은 화방벽으로 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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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북측 꽃담과 후원 사랑채 남쪽에서 모정문 협문을 통해 나오면 사랑채 후원이다. 눈에 잘 띄지 않은 사랑채북쪽 벽체를 꽃담으로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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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마당은 'ㄱ'자 사랑채와 '一'자형 안채, 곳간채로 이루어져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마당 가운데에 둥그렇게 화단이 조성되어 있고 우물이 하나 있다. 안채 후원은 다른 고택과 달리 평평하며 비교적 너른 터에 밤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한편에 장독대가 있다.
신경섭가옥의 연꽃 꽃담
황토담과 연노랑 은행나무는 찬란한 가을햇살에 채도를 높여 서로 물들어 간다. 게으른 햇발은 우진각대문채에 그림자를 새기고 해묵은 은행나무는 앞마당을 노랗게 물들였다. 꽃담의 연꽃은 지난밤 어둠에 잔뜩 오므렸지만 어둠을 뚫고 하늘로 솟구친 꽃봉오리는 아침햇살에 서서히 꽃잎을 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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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문채 꽃담과 정려편액 대문에 신석붕의 정려편액이 걸려있다. 이를 베풀 듯 대문채에 꽃담을 연출하였다. 누구의 눈치 보지 않고 집안을 마음껏 자랑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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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옥의 꽃담은 대문채와 사랑채 남측과 북측에 나타난다. 세 개 꽃담은 배경만 다르고 두 송이 연화문이 있는 꽃담으로 비슷하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으로 여겨지나 유교에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맑은 향기를 내뿜는다 하여 군자의 청빈과 고고함을 나타낸다.
대문채 꽃담은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룬다. 다만 꽃송이는 오른쪽 꽃봉오리가 약간 더 핀 모양으로 벌어져 있다. 황토와 호박돌로 흙돌담을 쌓고 황토 칠을 한 후, 한 가운데에 연꽃무늬를 내었다. 상단은 가로줄문으로 장식하였다.
집밖 대문채에 꽃담을 쌓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오래된 마을의 집성촌의 경우는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한적한 산골이나 변방, 마을이 짜임새 있게 들어서지 않은 고택에 제한적으로 나타난다. 신경섭가옥의 연화문 꽃담은 청라의 산골마을에서 누구의 눈치 보지 않고 홀로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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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 꽃담 누마루 밑을 감싼 화방벽 꽃담이다. 하나는 오므리고 하나는 활짝 핀 연꽃 두 송이를 새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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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 꽃담 세부 총총한 줄무늬를 배경으로 하늘을 향해 살짝 잎을 벌린 연꽃을 새겨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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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남쪽꽃담은 자잘한 돌을 사용하여 벽체 반을 채우고 그 위 반은 별이 총총히 빛나는 하늘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깨진 와편으로 빼곡히 수놓았다. 가운데 연꽃 하나는 잎을 반쯤 벌리고 다른 하나는 하늘을 향해 꽃망울을 활짝 터트렸다. 대문채와 사랑채 꽃담은 햇살의 양에 따라 연꽃잎의 벌린 정도를 달리하는 다채로운 변화과정을 연출한 것이다.
사랑채 북쪽꽃담은 동그라미에서 태극문, 연화문까지 무늬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화방벽 아래 반은 아무렇게 생긴 돌을 무질서하게 배열하여 장난치듯 쌓았다. 그 자체로 추상화를 보는 듯 재미있다. 그 위에 태극무늬를 배열하고 크기가 비슷한 돌로 아래위 경계를 구획했다. 이어 와편조각으로 줄무늬를 내고 네 개의 동그라미 무늬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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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북측 꽃담 대문채와 사랑채남쪽 꽃담과 비슷하나 이 꽃담은 동그라미와 태극문이 더해져 다채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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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는 우주, 태양을 의미한다. 태극은 우주만물의 가장 근원이 되는 본체로 우주가 생길 때 둘로 나뉘어 하나는 음이 되고 양이 된다. 음양의 조화로 천지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만물은 생성하고 변화하며 발전한다. 꽃담에서 태극문 아래는 무질서한 혼돈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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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북측 꽃담 세부 진흙에 뿌리를 내린 연꽃은 어둠을 가르듯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른 꽃대에 연꽃봉오리를 피워 올렸다. 지하와 지상, 하늘의 3세계를 상징하는 연꽃은 혼돈의 세계에서 시작하여 태극과 경계선을 뚫고 하늘에 닿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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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세계에서 진흙과 같은 혼돈의 세계에 뿌리를 내린 연꽃은 어둠을 가르듯 꽃대를 세우고 하늘을 향해 꽃을 피워, 온 세상을 청향(淸香)으로 덮는다. 꽃담 아래가 혼돈, 어둠의 세계라면 연꽃봉오리와 태극 위의 세계는 태양과 달이 떠있는 질서 있는 우주, 맑은 향기가 가득한 세계다. 이 집안은 그 세계를 꿈꿨다. 현실세계에서는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