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시잡지.
< PO.> 2022년 겨울호
시 3편이. 번역 소개되었습니다
시. 김세영
번역. 한성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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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창세기
외 2편
김세영
검은 허물을 깨치고 나와
안개의 성내 미로를 탐색하는
갓 우화한 나비들
화차의 불화살 공격에
젖은 양모의 성벽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알파α 파로 첫 활공하는
나비의 파동을 헝클어뜨린다
뚫린 성벽 구멍사이로 화살이
천자 바늘처럼 파고든다
찔리지 않으려고
젖은 날개를 파닥이며
양수 속의 태아처럼
요리조리 피해 다닌다
애벌레 때 갉아 먹던
색과 향의 입자가 코딩된
미로의 지도를 기억해 두어야 한다
성벽이 다 녹아내리기 전에
날개의 문양으로 재현하기 위해
부전나비, 호랑나비, 팔랑나비들...
안개의 성벽 위에 워터스크린처럼
날개의 족보들을 펼쳐 보인다
성벽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면
망막의 잔상을 흉벽에 부조로 새겨
눈꺼풀에 빗장을 질러 잠그고
밤마다 나비의 창세기를,
내 몽상의 원전으로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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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디
절지동물보다 마디가 많다
그들보다 무게가 많아
아파서 못 쓰게 된 마디가 많다
직립으로 걸을 때부터
발가락 마디마디들
발목, 무릎, 고관절들이
크랭크축처럼 움직여 왔다
앞발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손가락 마디마디들
손목, 팔꿈치, 어깨 관절들이
삼단노선의 노잡이처럼 움직여 왔다
손가락 마디를 꺾으며
캐스터네츠 소리를 낸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팔을 들면 어깨마디에서
일어서면 무릎마디에서
뚝,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난다
꼬리뼈마디를 텔로미어*처럼 깎아내는
손목시계의 초침의 칼날이
매장된 기억의 무덤을 파헤쳐서
소리 뼈마디 하나를 보여준다
내 손목을 놓지 않으려던 굳은 마디의 손목이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부러지는 노송의 가지처럼
뚝, 꺾어지며 들렸던, 그 마지막 소리를
직립원인이 된지도 백만 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아직도 서툰 직립보행으로 발목이 잘 접질리고
등뼈마디마저 가끔 삐끗하여
유인원의 보행법이 그리울 때가 있다
짧고 마디 진 다리로 긴 몸통을 받쳐 들고
산악열차처럼 올라가는 절지동물의 보행법을
깔딱고개에서 흉내 내어 볼 때가 있다
절지동물보다 마디가 많다
그들보다 오래 살아
굳어서 못 쓰게 된 마디가 많다.
*세포 속에 있는 염색체의 양쪽 끝단에 있는 부분을 말하며, 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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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장미
적과 흑, 혼혈의 원적지는
빛과 어둠의 접경지역이다
그 곳은,
유프라테스의 붉은 강을 거슬러
강물이 점점 검어지는, 그 시원의 발원지
어둠의 고원으로 가야한다
분화되지 않은 어둠과 빛의 방울들이
팔레트 위에 쏟아놓은 물감처럼 뒤섞이어
동산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다
그 여명의 불씨에서 발화된,
적과 흑, 자웅동주의 양성화,
그 혼혈의 판막들이
기상 나팔소리를 내고 있다
선천성 심실중격결손증인 나는
검은 입술의 신생아 때부터
허기가 질 때마다 붉은 꽃잎을 따먹는다
움켜쥐는 주먹 속의 꽃물이
스톱워치처럼 숨 가쁘게 두근거리는
내 심장 속 피의 원액임을 알겠다.
첫댓글 멋집니다👍
공감주시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