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42편) *
*풀리지 않는 의문의 죽음* 소현세자(昭顯世子)
조선왕조에서 비운의 왕세자로 회자되는 인물인 소현세자 (1612~1645)는 사도세자와 함께 왕세자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요절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인조의 큰 아들 소현세자 (昭顯世子) 이왕은 청에 끌려가기 전부터 새로운 문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637년 (인조 15) 병자호란의
정축맹약에 따라 청에 볼모로 끌려간 후 서양의 화포와 망원경, 자명종 등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세자는 세상의 이치가 성리학이 아니라 '변화하는 문물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청에 도착한 소현세자는 청은 떠오르는 용이었고 명은 이미 종말을 맞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북경에 갔다가 중요한 인물 하나를 만나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독일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아담 샬로서 1622년 북경에 와서 해박한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역서와 대포를 제작하는 일을 맡아 명나라 (명 14대
신종) 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아담 샬은 역대 중국에서 외국인 으로는 가장 고위직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중국 포교 1세대인 마테오 리치의 뒤를 이어 1622년 중국으로 건너가
포교활동에 힘쓰며 천문 역법에도 밝아 월식(月蝕)을 예측하여 황제의 환심을 얻었다.
청 세조는 북경 점령 후 그의 과학 지식을 이용하기 위해 아담 샬을 지금의 천문대장격인 흠천감정으로 삼고 대청시헌력을 만들게 했다( 아담샬)
소현세자의 숙소가 아담 샬의 거주지와 가까워 둘은 자주 어울렸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로 부터 서양 문명과 천주교 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는 천주교 에도 관심이 많아 천주상을 받아왔고, 아담 샬과 함께 귀국하려 했었으나, 중국에도 신부가 모자라 동행하지 못한 대신 천주교 신자이자 전도사인 중국인 환관과 궁녀들 몇 명을 데리고 같이 귀국했다.
소현세자는 이들 외에도 많은 서양 서적과 물품을 가지고 귀국했다
26세의 나이로 볼모로 끌려간 지 8년 만에 34세의 헌헌장부(軒軒丈夫)의 모습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삼전도의 굴욕만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인조와는 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인조는 소현세자를 반기지 않았다.!
세자를 반가워 하기는 커녕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여 신하들의 진하를 못하게 할 정도였다
소현세자가 청에 볼모로 있으면서 청과 조선 사이의 외교적 갈등을 잘 처리해 청의 신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룬~ 권력에는 부모도, 자식도 다 소용없는겨?)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척화파의 대표 인사인 김상헌과 주화파의 대표 인사인 최명길도 같이 왔다
그들이 귀국한 후 벼슬아치들은 김상헌에게 벼슬을 내려야 한다고 주청했으나 인조는 차갑게 거절하고 만나 주지도 않았다
이때부터 인조는 반청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청파도 아닌 어정쩡한 입장을 취했다
청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심양에 심양관을 짓고 거주했는데 둘의 처신은 정반대였다.
봉림대군은 청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운 반면소현세자는 청에 등을 돌리기 보다 늘 청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청의 관리들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갖기 위해 진력했다.
당시 청과 조선은 항복 조건 이행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청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해 있었던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돌아가는 국제정세에 완전 장님 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부모의 나라로 모시던 명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해 항복조건의 이행을 고의로 지연시키고 있었고,
이를 눈치 챈 청에서는 다시 조선을 쳐야 한다는 논의가 불거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현세자(昭顯世子) 는 그간의 인맥을 바탕으로 뛰어난 조정능력을 발휘하여 갈등을 잠재웠다
이로써 그는 청으로 부터 외교 능력에 대한 칭송을 받으면서 청의 대조선 창구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소현세자가 조선의 대청 외교 전권을 가지고 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현세자의 능력이나 친청 자세는 가뜩이나 반청 분위기가 팽배해 있던 조선 조정에 반민족적 행위로 비쳐졌다
소현세자의 친청정책은 인조에게는 미움과 의심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왕 자리를 뺏길까 하는.
인조는 청에 다녀오는 역관들을 통해 소현세자의 동정을 파악했고
심양에 사람을 보내 소현세자와 청 관리들과의 관계를 염탐했다,
아들인 소현세자가 인조 자신의 정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거기다 기질이 드센 세자빈 강씨의 권력욕이 인조의 심기를 건드렸다
강씨는 장렬왕후와 인조가 총애하는 조귀인 과도 사이가 아주 나빴다.
1644년 청은 북경을 차지했고,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살했다
청나라는 명의 멸망으로 조선의 왕자들을 볼모로 잡아둘 필요가 없게 되자 1645년 1월 8년간의 볼모생활을 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귀국을 허락했다.
소현세자가 8년여의 볼모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을 때 사헌부 에서는 성대한 연회를 열어 백관들이 하례 하도록 하자고 건의 했으나 인조는 이를 거부하고 간소하게 환영식을 치르라고 지시했다
궁궐은 환영 분위기는 커녕 썰렁했고 조정 대신들도 냉랭했다
아니, 무능한 아버지 때문에 힘들게 볼모생활을 한 아들을 어째서 질투한걸까(하튼 전쟁 이후에 지지리도 못나게 군 모습은 선조와 똑 같아요)
소현세자는 궁에 도착하자 바로 인조를 찾아뵙고 청에서 지낸 이야기와 청의 발전, 그리고 가져온 서양의 책과 기구들을 인조에게 보여주었다
이를 묵묵히 듣고 있던 인조는 화를 버럭 내며 곁에 있던 벼루를 들어 소현세자의 머리를 내리쳤다고 한다
아마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를 하면서 생긴 이마의 상처가 그때까지 아물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멀쩡하던 소현세자가 돌아온 지 70일 만에 학질에 걸려 침을 맞았으나 덜컥 죽고 말았다
인조는 장례를 서둘러 3일만에 입관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사대부의 예우라며 신하들이 반대했으나 인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입관할 때도 관례를 어기고 주변의 몇 사람만 참여 시켰다.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였다.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에 의해 독살 되었다는 주장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소현세자의 독살 정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조실록 에 나와 있는 시신의 상태이다.
세자는 병이 난지 3일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전부 새까맣고, 몸의 아홉 구멍 에서 선혈이 낭자했다"는 기록이다
소현세자의 공식적인 병명은 학질, 즉 말라리아였다.
학질은 대개 모기에 의해 발병이 되는 것으로 오한과 발열이 반복되고 땀과 갈증이 심해지며, 주기적인 발작 증세와 함께 심하면 사망에 이르기도 하는 병이다
온대지역 에도 말라리아가 유행하였기에 오래 전부터 한방 에서도 학질에 대한 치료로 침구와 약 처방이 있어왔다
그런데 온대 지역의 말라리아는 열대형과 달리 어린이나 노약자가
아니면 급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당시 종실이었던 진원군 이세완 (李世完)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시신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세완이 본 세자의 모습은 학질이 아닌 약물중독 으로 죽은 모습이었다
둘째, 왕이나 세자가 죽으면 그들을 치료하던 의원은 특별한 잘못이 없어도 국문을 받고 귀양을 가야했다.
그러나 소현세자에게 침을 놓았던 이형익은 아무런 조치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이형익을 국문할 것을 주장하던 대사헌 김광현이 유배를 당했다.
이형익은 소현세자가 죽기 직전인 3개월 전에 의관으로 특별 채용된 자로 소현세자 내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조의 애첩 조귀인의 친정에 출입하던 자였다
셋째,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뒤 장자상속의 관례를 무시하고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넘겼다.
당연히 소현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왕위를 계승했어야 했다
넷째,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을 역모로 몰아 사약을 내려 죽이고 그 집안 식구들을 모두 죽여 풍비박산을 냈으며, 소현세자의 아들 셋을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결국 소현세자의 아들 셋 중 둘은 풍토병 으로 유배지에서 죽고, 하나만 효종의 관용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아들은 효종에 의해 경안군에 봉해져 강화도에서 살았는데 경안군의 후손들은 강화도에서 살다가 18세기 이후 무신난 등 여러차례의 반란세력에 가담하여 조선 조정에 반기를 든 유일한 왕족이 되었다
인조는 큰 아들인 소현세자의 의문사에 한 점의 의혹도 표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혐의자 들을 두둔했다
무덤도 간소하게 꾸미라고 했으며, 세자빈 강씨에게 조문하는 의식도 치르지 못하게 했다
세손의 자리도 정해 주지 않았으며,
묘지 이름이 '원'이어야 하는데도
'묘'자를 붙이라고 지시했다.
게다가 소현세자가 묻힐 땅이 풍수지리적 으로 좋지 않은 곳이다'라고 수군거린 자를 잡아 곤장을 때렸다고 한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인조! 너 아버지 맞니?)
소현세자의 사인에 다른 주장도 있다. 소현세자는 심양에 있을 때부터 허약했다
그는 병력이 있었으며, 황제가 사냥을 갈 때도 몸이 아파 여러 번 빠진 적이 있었다.
온 몸이 새까만 채 죽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간암이나간경변일 수도 있다
또 임종 직전에 패혈병이 걸렸을 수도 있고, 성병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다.
임종시 간암이나 간경화는 식도 정맥이 터지는 수도 있어 이럴 경우 이목구비로 피를 토하게 된다고 한다
당시 세손을 후계자로 세우지 않고 봉림대군을 세운 것은, 원손이 당시 10세라 너무 미약 하고 인조 자신이 병이 있어 후사가 불안해 봉림대군 으로 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말들이 일리가 전혀 없는것은 아니나, 이 주장에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것은 소현세자가 죽은 후의 의심스러운 정황과, 또 인조라는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죽음은 청과 밀접한 외교관계의 성립과 또 그로 인해 조선이 청의 새로운 문물과 서양의 천주교 및 신문물을 도입하는 계기가 되어 세계의 일원으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던 기회를 앗아버린, 참으로 안타까운 조선사의 비극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