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死靈)
김수영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아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아라.
이 황혼(黃昏)도 저 돌벽 아래 잡초(雜草)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行動)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시집 『달나라의 장난』, 1959)
[작품해설]
이 시는 ‘죽은 영혼’이라는 뜻의 제목이 암시하듯 자유와 정의가 활자로만 존재하는 부도덕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항거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시인 자신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자유와 정의가 실제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 사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민주 사회라 할 수 없으며, 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진리도 참된 진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화자는 ‘예언적 지성’으로 불리는 시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소시민적 지식인으로 전락해 버린 자신의 영혼을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여긴다.
화자가 파악하는 현실은 자유와 정의가 상실된, 책으로반 위장되어 있는 거짓된 세계이다. 이러한 현실 세계의 부도덕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생동화하지 못하고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자책과 분노는 결국 현실과 자기 자신 모두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거짓된 현실 세계 속으로 뛰어 들어 자유와 정의를 부르짖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그 행동은 필연적으로 죽음ㅇ르 수반하는 것임을 화자는 안다. 그러한 화자는 다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라며 절망할 뿐이다. 그러므로 화자는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솔직한 자기반성의 모습을 반복, 강조함으로써 자신을 포함한 지식인 모두의 타협적 행동을 준엄하게 추궁하고 그들의 실천적 행동을 촉구한다.
[작가소개]
김수영(金洙暎)
1921년 서울 출생
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 토쿄(東京)상대 전문부에 입학했다가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
1947년 『예술부락』에서 시 「묘정(廟廷)의 노래」를 발표하여 등단
1958년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59년 시집 『달나라의 장난』 발간
1968년 사망
1981년 김수영문학상 제정
시집 : 『새로운 도시의 시민들의 합창』(공저, 1949), 『달나라의 장난』(1959), 『거대한 뿌리』(1974),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9), 『김수영전집』(1981),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1984),『사람의 변주곡』(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