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묵은 영화 한 편을 보았다. 2002년 개봉돼 뭉클한 감동을 안겨 주었던 영화 <집으로…>.
개구쟁이 7살과 엄청 연상녀인 할머니와 기막힌 동거 도시에 사는 엄마가 생활고 때문에 시골 친정에 어린 아들을 맡기면서 개구쟁이 7살은 엄청 연상녀인 할머니와 기막힌 동거를 시작한다.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읽는 외할머니가 혼자 살고 계신 시골 외딴 집에 남겨진 상우. 전자 오락기와 롤러 블레이드의 세상에서 살아온 아이답게 배터리도 팔지 않는 시골 가게와 사방이 돌 투성이인 시골 집 마당과 깜깜한 뒷간은 생애 최초의 시련이다.
하지만 영악한 도시 아이답게 상우는 자신의 욕구 불만을 외할머니에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외할머니가 그렇듯 짓궂은 상우를 외할머니는 단 한 번도 나무라지 않는다. 같이 보낸 시간이 늘어날수록 상우의 할머니 괴롭히기도 늘어만 간다.
배터리를 사기 위해 잠든 외할머니의 머리에서 비녀를 훔치고, 양말을 꿰매는 외할머니 옆에서 방구들이 꺼져라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그러던 어느 날 후라이드 치킨이 먹고 싶은 상우는 온갖 손짓 발짓으로 외할머니에게 닭을 설명하는 데 성공한다. 드디어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되는가 싶지만 할머니가 장에서 사온 닭으로 요리한 것은 물에 빠트린 닭 백숙이었다.
-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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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정향
출연 김을분,유승호
개봉 2002.04.05 한국, 8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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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7살 소년과 77세 외할머니의 기막힌 동거를 통해서 벌어지는 갈등과 교감을 차분한 톤으로 담아내고 있다.
결국 영화는 해피 엔딩이지만 현실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최선을 다해도 엄마나 아빠의 빈 자리를 채우기에는 한계가 있다. 주변의 정서적인 지지와 배려 부족으로 아이들은 자신감을 잃고 소극적으로 되거나 방황하기 쉽다.
이처럼 현재 시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가 함께 사는 조손 가정의 모습은 2002년 개봉돼 히트를 쳤던 영화 <집으로>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현실 속의 <집으로>는 그렇게 감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경제력이 달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려운 살림 살이에 허덕이고, 한창 예민한 시기의 아이는 정서적 교감과 대화 부족으로 풀이 죽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회 양극화에 따른 빈곤과 실직, 가족 해체로 조손 가정 늘다 최근 몇 년 새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는 사회 양극화에 따른 빈곤과 실직, 가족 해체로 이혼, 빈곤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아이들이 부모와 떨어져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고 있는 이른바 조손 가정이다.
조부모가 손자를 돌보는 가정의 상당수는 부모가 가출을 하거나 이혼을 한 경우지만 최근에는 가정사 외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아이를 맡기는 경우가 늘고 있어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일례로 도내 모 초등학교의 경우 전교생 33명 가운데 조손 가정 자녀가 전체의 24%인 8명이다. 엄마나 아빠 한 부모와 살고 있는 자녀도 4명이다.
때문에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도 조부모가 일을 하러 나가 홀로 지내게 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 때문에 오후 5시까지 학교에서 특기 적성과 보육 교실을 통하여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의 경우도 전교생의 20% 정도가 조손 가정 자녀이며, 경제적 능력이 없고, 지병을 앓고 있는 조부모가 많은 데다 경제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계속된 경기 불황으로 부모가 실직을 많이 하고, 가정 불화가 생기면서 양육을 포기하는 가정이 많아지지만 조부모의 형편도 넉넉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데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만으로 열악한 생활 여건이 다 극복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개 조손 가정의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떨어질 때 버림받았다는 느낌과 함께 나는 중요하지 않다는 자괴감을 갖기 쉬워 심할 경우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
범죄에 연루된 청소년들의 상당수는 부모와 떨어져 지냈거나 버림받았던 경험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요즘 아이들의 사고 방식이나 연령에 따른 발달 단계를 이해하지 못해 대화가 단절되는 경우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버림받았다는 자괴감 갖기 쉽다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할머니가 손자와 함께 사는 조손 가정에 있어 교육과 의료 부문에 대한 지원이 시급하며, 또한 아이들이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아이가 부모와 함께 살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소년 소녀 가장, 결손 가정, 결식 아동에게 집중된 사회적 관심을 조손 가정에도 기울여야 한다.
한 편으로는 경제적 사정으로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부모들을 무조건 비난만 할 게 아니라 정상적인 가정을 회복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원하는 대책이 필요하다.
또한 부모가 아이 양육을 포기할 경우 조부모·친척 등이 대신 맡아 키우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기존에 보육원이나 보호 시설로 가던 아이들이 가정에서 자랄 수 있도록 유도하는 등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의지할 곳 없이 쓸쓸한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전국의 조손 가정들. 적절한 제도적인 배려와 함께 주변 이웃들의 따뜻한 관심이 필요하다.
올해 들어 유난히 차가운 겨울 바람이 극성이다. 주위를 돌아 봐야 할 때다. 조손 가정 아이들에게 당장에 물질적인 배려가 절실하겠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따뜻한 관심이다.
지역 내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공부나 생활을 도와주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속 마음을 털어 놓고 상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더 이상 경제 문제로 가족이 해체되고 죄 없는 아이들에게까지 불똥이 튀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가정과 비슷한 곳으로 가야 하고, 버려진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집단 보육 시설 보다는 가정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아이들이 안주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배려가 뒤따라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선진국에서 시행하는 입양이나 친인척 또는 이웃 주민이 아이를 맡는 가정 위탁 보호나 서너 가정이 한 아이를 함께 돌보는 자활 꿈터(그룹 홈, Group Home) 제도를 한 번쯤 생각해 봄직하다.
오마이뉴스 박종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