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최고의 무장(武將)은 누구일까?
이 글은 유니텔 [[김재웅의 삼국지]] 이용자이신 신현경(ID :bcgsaint)님의 재미있는 요청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신현경 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장수들 중에서 무력(武力)만을 가지고 비교할 때 누가 가장 강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여포, 장비, 마초, 관우, 허저, 전위, 황충, 방덕, 장료, 조운, 장임, 엄안, 안량, 문추, 서황, 감녕 등이 일대일로 맞붙는 무력대결을 벌인다면 과연 누가 우승자가 될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필자는 상당히 재미있는 생각이라고 여겨, 이것을 글로 만들어 보로 한 것입니다.
삼국지 인물들 중 최고의 무력을 가진 장수가 누구일까 하는 신현경(ID: bcgsaint)님의 질문을 받고, 필자는 당황한 것이 사실입니다.
삼국지의 게임이 아니라, 삼국지의 글을 번역하고 평(評)을 하는 사람에게 그러한 질문은 당혹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도 제법 많은 삼국지 평전류의 책이 나왔지만, 아직까지 장수들의 무력을 직접 비교한 글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들의 무력을 비교할만한 평가기준을 마련하기가 쉽지가 않고,《삼국지연의》속에서 장수끼리 맞붙어 싸운 적이 있다고 해도 한 장수는 적은 병력을 가지고 쫓기는 상황에서 싸우는데 반해, 다른 장수는 이를 뒤쫓다가 맞서서 몇 합을 겨루게 되는 경우 누가 더 강하다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싸움이란 똑같은 조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실제 전투에서는 그런 조건이 주어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의 실제 싸움은 세월의 흐름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뛰어난 무력을 가진 장수라고 해도 이미 전성기를 한참 지난 나이에 펄펄 나는 젊은 장수와 맞붙었다면 이것 역시 누구의 손을 들어주기가 곤란하다.
또,《삼국지연의》나《정사삼국지》에는 이들의 무력을 비교할 만한 근거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삼국지를 연구한 많은 분들이 이런 유의 글을 쓰는 일을 주저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삼국지를 밤을 새워가며 읽은 적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과연 누구의 무력이 가장 셀까 하는 궁금증을 한번쯤은 가져봤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유의 글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한번 정리해보기로 한다.
우선 삼국지 장수들의 무력을 비교한다고는 하지만, 이들을 실제 싸우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잣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 역시《연의》나《정사》를 통해 확인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이 두 책에서 나오는 이들의 무력대결 결과와 당시 사람들의 평가 등을 근거로 추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들의 나이 등은 모두 무시한 채 모든 장수가 전성기에 있다는 것으로 가정하고 이야기를 해야 하겠고,《연의》와《정사》의 내용이 약간의 차이가 있는 관계로 여기에서는 두 책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그 많은 인물들을 모두 비교하는 것도 무리이기 때문에, 이들 중 특히 뛰어났던 대표적인 인물들을 골라 그들의 무력만을 평가해보기로 하겠다.
아울러 조조나 유비, 그리고 조인, 조진, 여몽, 손책 등은 비교에서 제외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무력을 앞세운 장수로서보다는 지도자나 지휘관으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서두가 길어졌는데,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삼국지 최고의 무력을 지닌 장수로 여포(呂布)를 꼽는데 주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만전》의 기록에는 당시 사람들이 '사람 중의 여포요, 말 중에 적토가 있다'고 했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걸 보면 여포가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정원(丁原)이 소제(少帝)를 폐위하려던 동탁에게 대항할 때, 여포는 동탁 군을 단번에 몰아붙여 기세를 꺾어 놓았다. 더구나 그 일로 인해 동탁은 여포를 탐내게까지 되었다.
또 18로의 제후연합군이 동탁에게 대항하여 일어섰을 때, 여포는 호로 관에서 제후들의 숱한 장수들을 죽여 그의 솜씨를 뽐내고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그 부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여포는 철기 3천을 거느리고 달려나와 왕광(王匡)을 맞이했다. 왕광도 곧 군마를 정렬하고 진(陣)을 펼쳐 세를 과시했다. 전열 정비가 끝나자, 왕광이 말을 타고 진문(陣門) 앞에 나와 바라보니, 적진에서는 여포가 나와 시위를 하고 있는데 머리는 세 갈래로 묶어 그 위에 자주빛 금관을 얹었고, 짐승의 머리를 연이어 새겨넣은 갑옷에, 서천(西川)의 명물인 붉은 비단에 수백 가지 꽃무늬를 수놓은 화려한 전포(戰袍)를 걸치고 있었다. 허리는 영롱한 사자상이 새겨진 띠로 팽팽하게 조여맸고, 활을 비켜 맨 채 손에는 방천화극(方天畵戟)을 들고 적토마(赤兎馬) 위에 앉아 있는데, 과연 사람 중의 여포요, 말 중의 적토라는 말이 헛말은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화려한 자태를 한껏 뽐내며, 하내태수 왕광의 장수인 방열(方悅)을 5합만에 말 아래로 굴러 떨어뜨린 뒤 적진을 유린했다. 여포는 다시 상당태수 장양(張楊)의 부장 목순(穆順)을 단 1합만에 쓰러뜨렸고, 10합만에 북해태수 공융(孔融)의 부장 무안국(武安國)의
어깨를 잘라 버렸으며, 백마장군 공손찬(公孫瓚)을 단 몇 합만에 혼줄을 내주기도 했다.
더구나 당대 최고급의 무장인 관우와 장비, 그리고 유비의 협공을 받으면서도 지칠 줄을 모르고 싸웠던 것을 보면, 여포를 삼국지 최고의 무예를 지닌 장수였다고 평가해 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여포의 무예솜씨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동탁이 장안(長安)으로 달아날 때, 이를 뒤쫓던 조조를 형양(滎陽)에서 맞아 그의 맹장 하후돈(夏侯惇)을 물리치고 조조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물론 그 뒤에 있었던 복양(僕陽) 싸움에서 다시 하후돈과 혈전을 벌였지만, 갑자기 내린 큰비로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그 뒤, 복양에서 또다시 조조군을 상대한 여포는 허저(許?)와 20여 합을 싸웠는데, 조조가 "여포는 허저 한 사람만으로는 당해 낼 수 없다"고 하여 전위, 하후돈, 하후연, 이전, 악진 등이 한꺼번에 달려들게 하자 그제야 달아나고 있다.
여포는 활솜씨에도 뛰어났다. 유비와 원술이 싸울 때, 150보밖에 방천화극을 세워놓고 단 번에 쏘아 맞추어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도 했다.
이런 모든 전적들을 볼 때, 삼국지 최고의 무장으로는 역시 여포를 꼽지 않을 수 없다.
2위로는 아무래도 관우를 들어야할 것 같다.
사실 관우를 두 번째 무장으로 꼽는데 조금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연의》가 그의 실제 모습보다 조금 부풀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18로의 제후연합군이 동탁에 반기를 들고 일어섰을 때 관우가 그의 장수 화웅(華雄)을 죽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 화웅은 손견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조조에게 투항해 있던 관우가 유비의 소식을 듣고 떠나가면서 조조의 여섯 장수를 베었다고 하는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이야기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원소의 장수 문추(文醜) 역시 그의 손이 아닌 조조에 의해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우가 원소의 자랑이던 하북의 맹장 안량(顔良)을 죽인 일과, 형주(荊州)를 지키고 있으면서 조조의 장수 우금(于禁)을 사로잡아 중원을 떨게 한 일을 결코 가볍게 볼 수는 없다.
물론 당시 무명에 가깝던 방덕(龐德)과 150여 합을 겨뤄 승부를 가리지 못했지만, 당시에는 그가 이미 전성기를 한참 지난 58세의 나이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진정하게 자신의 무예를 드러낸 싸움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를 조조 같은 인물이 탐을 냈고, 손권 또한 관우를 사로잡은 뒤 투항을 권유했을 만큼 당시 영웅들에게 인정받고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에게 여포 다음가는 랭킹 2위의 자리를 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포와 관우 다음가는 장수로는 장료(張遼)를 들고 싶은데, 아마 이 부분에서 독자들은 상당히 의아해 할 것이다.
그 많은 삼국지의 장수들 중에서 하필이면 장료를 3위로 꼽느냐는 것일 테지만, 사실 장료는 유비가 아니라 조조의 수하에 있었기 때문에《연의》에서 적지 않게 손해를 보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장료는 처음 정원(丁原)을 섬기다 하진(何進)의 수하로 들어갔다. 하진이 십상시에 의해 암살되자 동탁을 섬기게 되었고, 다시 동탁이 죽고나자 여포를 섬기게 되었으니 자주 섬기는 주인을 바꿨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여포를 섬기고 있을 때 장료의 됨됨이를 알아본 관우는 '공(公)과 같은 인재가 왜 여포 같은 역적을 섬기느냐'라고 했는데, 인물은 인물이 알아본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여포가 소패(小沛)에 주둔하고 있던 유비를 공격할 때, 장비가 장료를 맞아 싸우려 하자 관우가 나서서 이를 제지했다.
"저 사람의 무예가 너와 나에 비해 못하지 않으니…."
관우가 아우 장비를 말린 것은 그만큼 장료의 무예가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장료는 원소의 두 아들 원희와 원담을 토벌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의 뛰어난 실력을 뽐낸 것은 바로 <합비대전( 肥大戰)>에서였다. 《정사》의 기록을 보면, 당시 조조는 장료에게 병사 7천 명으로 악진(樂進)과 이전(李典) 두 장수와 함께 합비
를 지키도록 했다. 그런데 손권은 10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포위해 버렸다. 이때 조조는 '적이 올 때 뜯어보라'고 하며 편지를 써주었는데, 장료가 장수들과 함께 뜯어보니, "손권이 오거든 장료와 이전은 나가서 싸우고, 악진은 성을 지키라"는 내용이었다. 그 뜻을
파악한 장료는 정예병 8백을 뽑아 적진으로 돌진해 들어가, 순식간에 수십 명의 적을 죽이고 장수 둘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렇게 적진을 돌파한 장료는 손권이 머물고 있는 오군의 본진 까지 치고 들어갔다. 그러자 처음에는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몰라하던 손권은 장료의 군사가 많지 않은 것을 보고 주위를 겹겹으로 포위하게 했지만, 그는 좌충우돌하며 포위망을 뚫었다. 그런데 뒤를 보니 부하 수십 명이 아직 포위를 뚫지 못해 구원을 요청하자, 장료는 다시 들어가 부하들을 모두 구출해냈다.
이날 새벽부터 시작한 싸움이 낮까지 이어졌지만, 장료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한 손권의 군대는 곧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날 장료가 거둔 승리는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일로, 7천명 중에서 가려뽑은 8백 명의 군사로 무려 10만에 이르는 오나라의 대군을 물리친 것이다. 더구나 이 일은 장료라는 한 인물의 무예 때문에 거둔 승리였으니, 오죽하면 이날 이후 오나라에서는 '장료의 이름만 들으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말이 나오게 됐을까.
<합비대전>은 장료를 삼국지의 장수 중 무력순위 3위에 매김 하는 충분한 근거가 되고 있다.
다음의 4위로는 역시 장비(張飛)를 들어야 할 것 같다.
지략보다는 괴력으로 더 알려져 있는 장비는, 천하무적 여포와 호로관 싸움에서 맞붙어 50여 합을 겨루면서도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당양의 장판파에서는 (이것은 사실과는 조금 차이가 있긴 하지만) 조조의 대군을 호통 하나로 물리쳤으니 그 괴력을 알만 하다.
이때의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조조의 모사 정욱(程昱)은 '관우와 장비는 만인지적(萬人之敵)할만한 맹장들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장비였지만, 파군태수 엄안(嚴顔)을 사로잡을 때와 와구관(瓦口關)에서 위군의 장합(張합)을 격파할 때는 지략까지 동원하는 면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글은 단순히 무예만을 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은 생략한다.
어쨌거나 장비를 관우보다 아래의 서열에 놓는 이유는 진수와 제갈량의 평가 때문이다.
진수는《정사》<장비전>에서 '장비의 굳센 기상과 용맹은 관우에 버금간다(亞)'고 했고, 제갈량은 마초를 놓고 평하기를 '문무를 겸비한데다 용맹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당대의 걸물이며, 경포(?布), 팽월(彭越)과 같은 유의 인물로 익덕(益德:장비의 자)과는 견줄 수 있지만 미염공(美髥公:관우)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버금간다(亞)는 뜻은 거의 엇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보다는 한 수 아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진수나 제갈량 역시 장비의 무예를 관우보다는 한 수 아래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5위에는 하후돈(夏侯惇)을 들고 싶다.
역시 조자룡과 같은 인물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
그러면 왜 수많은 인물들을 제치고 하후돈이어야 하는가를 설명해보기로 한다.
사실《연의》에서는 하후돈의 활약상에 대해 이렇다할 내용이 없다.
다만 눈에 띌만한 것으로는, 조조가 장안으로 달아나던 동탁을 추격하다가 여포에게 패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도 조조를 괴롭히던 형양태수 서영(徐榮)을 단 몇 합만에 죽인 일이 있었다. 물론 이 싸움 이전에 하후돈은 여포와 맞붙었지만 이기지 못하고 달아났다.
그러나 이 싸움은 조조의 군대가 여포 군에 의해 여기저기서 돌파 당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달아난 하후돈을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 뒤 하후돈은 복양(僕陽) 싸움에서 여포와 다시 맞붙어 수십 합을 겨뤘지만, 갑자기 퍼붓기 시작한 비 때문에 승부를 내지 못했다.
소패성 근처에서 조조가 여포와 싸울 때 하후돈은 여포의 부하 장수 고순(高順)과 맞붙었는데, 하후돈을 당해내지 못한 고순은 곧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 버렸다.
이를 추격하던 하후돈은 조성이 쏜 화살에 맞아 왼쪽 눈을 실명하는 불행을 겪기도 했지만,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하후돈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평(評)일 것이다. 하후돈을 수하에 두고 있던 조조는 그를 가리켜 <천하의 기재(奇才)>라고 했고, 조조의 사람들에 대해 혹평을 서슴지 않았던 예형(?衡)조차도 하후돈을 가리켜 <완체장군(完體將軍)>이라고 했다.
예형은 순욱(荀彧)과 같은 모사를 상가(喪家)에나 드나들 인물로 평가했는데, 그런 그가 하후돈만은 깎아 내리지 못한 것을 보면 하후돈이 어떤 장수였는지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6위에는 역시 조자룡(趙子龍)을 들고 싶다.
조자룡의 무예는《연의》에 너무나도 잘 묘사되어 있어 새삼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다.
그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된 장수는 장무, 여광, 형도영, 진응, 포룡, 모용렬, 한영, 한경, 한덕, 주찬, 한기 등등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하후연(夏侯淵)이 황충에게 죽은 뒤, 조조가 한중(漢中)을 되찾기 위해 대군을 몰고 쳐들어 왔을 때 조자룡이 보여준 솜씨는 탁월한 것이었다.
조조군의 군량을 빼앗기 위해 나갔던 황충이 도리어 포위 당했을 때, 조자룡은 조조의 진영을 종횡무진하며 그를 구해냈다.
그러나 부하장수 장저(張著)가 부상을 입고 뒤에 처지자 다시 돌아가 구해냈으며, 장익(張翼)이 지키던 면양(沔陽)으로 들어가서는 성문을 활짝 열어 놓고 조조군을 맞는 대담함도 보였다.
그리고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군사를 물린 조조군을 향해 쇠뇌를 퍼부어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를 둘러본 유비는 "자룡의 몸은 담력 덩어리로구나!"라며 감탄했다 한다.
싸움을 잘하려면 무예솜씨도 뛰어나야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담함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그런 점을 볼 때, 조자룡의 한중 싸움은 그를 돋보이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그런 조자룡이 장료보다는 한수 아래로 평가되는 것은 바로 그의 대표적인 싸움인 당양전투 때문이다.
《연의》에서는 그가 조조의 80만 대군 사이를 뚫고 유선(劉禪)을 구해낸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이 내용은《연의》가 과장한 것이고, 실제 조조군은 기병 5천 뿐이었다.
그러므로 손권의 10만 대군 사이를 헤집고 다녔던 장료의 합비대전보다 더 낮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당양싸움에서는 조자룡의 활약 때문에 승패가 뒤바뀌는 일은 없었지만, 합비대전에서는 장료 한 사람의 활약으로 인해 승패가 뒤바뀌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장료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7위의 인물로는 마초(馬超)를 들고 싶다.
마초는 서량태수(西凉太守)이던 아버지 마등(馬騰)을 따라 이각과 곽사와 싸울 때, 나이 17세에 불과했지만 이각과 곽사의 장수 왕방을 단 몇 합만에 죽이고 이몽을 사로잡았다. 일찍부터 뛰어난 자질을 선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훗날 한수(韓遂)와 합세한 동관(潼關) 싸움에서는 조조를 수염 깎고 홍포(紅袍)마저 내던지며 달아나게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정사》에서는 확인이 안되는 사실이다. 그 싸움에서 마초는 조조의 장수 허저(許?)와 무려 230여 합을 겨루어 승부를 내지 못했고, 가맹관(?萌關)에서는 장비와 220여 합을 싸워 자웅을 가리지 못했다.
그만큼 무예가 뛰어나기도 했지만, 체력 또한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양부(楊阜)가 조조에게 마초를 평하면서 '한신(韓信)과 경포(?布)의 용맹을 지녔다'고 했고, 제갈량은 '경포(?布)나 팽월(彭越)같은 류의 인물로서, 익덕(益德:장비의 자)과 견줄 수 있다'고 했으니 그에게 무력 7위의 순위를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만, 장비와 자웅을 가리지 못할만큼 뛰어난 무예솜씨를 가지고 있었던 마초가 장비보다 한 단계 아래의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활약이 장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투로 비유하자면, 아무리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있는 선수가 있다고 해도, 이렇다할 전적이 없는데 그에게 높은 랭킹을 줄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다음 8위로는 하북의 맹장 안량(顔良) 쯤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안량은 다른 여타의 장수들과는 달리 이렇다할 활약을 보인 적이 없다. 백마(白馬) 싸움에 나서 관우에게 목숨을 잃은게 고작이다.
그러나 안량이 그토록 맥없이 죽을만큼 별볼일없는 장수였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다른 설(說)이 있다. 당시 관우와 의형제 사이인 유비가 원소의 진영에 있었기 때문에, 안량은 관우를 알아보고 손짓으로 부르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 관우는 안량이 미처 손을 쓰기 전에 달려들어 목을 날려버린 것이라는 견해이다.
평소 안량이 그렇게도 뛰어난 무예를 자랑했다고 하는 점과, 당시의 정황들을 볼 때 이것은 충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설(說)일 것이다.
어쨌거나 안량을 평가할 수밖에 없는 근거는 백마싸움에서 여포의 옛 장수로서 조조에게 투항해있던 송헌(宋憲)을 3합만에, 그리고 위속(魏續)을 단 1합만에 목을 베어버린 그의 뛰어난 무예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중원(中原)의 최대 강자로서 장합(張?)과 같은 맹장을 수하에 두고 있던 원소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장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는 충분히 8위로 꼽힐만한 장수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음 9위로는 장합(張?)을 들고 싶다.
《연의》에서는 장합을 지략이 형편없는 장수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실제 장합은 가정(街亭)에서 마속(馬謖)을 물리쳤고,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진영을 설치하는데 능해 제갈량과 촉의 장수들도 두려워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지략을 거론하지 않고 무예만을 따지기로 했으므로, 그에 관한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뭐니뭐니해도 장합의 용맹을 잘 드러내준 싸움은 무도(武都)와 음평(陰平)을 놓고 사마의와 제갈량이 대치했을 때였다.
사마의의 명을 받은 장합은 대릉(戴陵)과 함께 촉군의 배후를 급습하려다 제갈량의 계략에 걸려들어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촉군에 의해 겹겹히 포위되어 빗발치는 화살세례를 받으면서도, 촉군 사이를 좌충우돌하며 포위망을 뚫었다. 더구나 미처 포위를 뚫지 못한 대릉을 다시 돌아가 구해내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용맹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만 하다. 이것을 보고 있던 제갈량은
탄식을 하며 이렇게 결심하고 있다. "예전에 익덕(장비의 자)이 장합과 싸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놀라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는데, 오늘보니 과연 맹장임을 알겠구나. 만약 이 자를 살려둔다면, 촉에 해가 될 것이니 내가 반드시 제거해야겠구나."
결국 장합은 제갈량의 화살에 맞아 세상을 떠나게 되었지만, 제갈량으로 하여금 죽일 결심을 하게 한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용맹한 장수였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다음 10위로는 촉의 노장 황충(黃忠)을 들어야겠다.
유비가 장사(長沙)로 쳐들어오자, 태수 한현(韓玄)을 섬기고 있던 황충은 당시 60에 가까운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비 진영의 최고 맹장 관우를 맞아 180∼90여 합을 겨뤄 자웅을 가리지 못할만큼 대단한 무예를 뽐냈다.
그것만 가지고도 황충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의 뛰어난 용맹은 바로 조조의 장수 하후연(夏侯淵)의 목을 벤 일을 통해 확인된다. 황충은 정군산(定軍山)에서 적장 하후연의 목을 베어, 한중(漢中)을 놓고 유비와 조조가 겨룬 이 싸움의 승리가 유비편으로 기 울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사》기록에도, 황충을 '싸움에서는 항상 앞장서서 적진을 공략했고, 용감하고 강인함은 삼군의 으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황충을 진수는 '굳세고 극진하며, 또한 용맹스러워 조자룡과 함께 촉한(蜀漢)의 조아(爪牙:발톱과 송곳니라는 뜻으로 꼭 필요한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하는 말)였다'라고 하며, 관영(灌?:한고조 유방의 기병대장)·등공(?公:하후영-한고조 유방의 장수로서 하후돈의 조상이다)과 같은 인물에 비교하고 있다.
더구나 황충은 백보 밖에서 버들잎을 명중시키는 기막힌 활솜씨 마저 지니고 있었으니, 그에게 10위 자리를 주어도 괜찮을 듯 싶다.
다음 11위로는 문추(文醜)를 든다면 어떨까?
문추 역시 안량과 마찬가지로 이렇다할 활약을 보인 기록은 없다.
고작 백마(白馬) 전투에서 관우에게 목숨을 잃은 안량을 대신해 조조군과 맞섰으나, 그 역시 관우의 손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되어 있을 뿐이지만 실제 문추는 관우가 아닌 조조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원소가 반하(磐河)에서 공손찬과 대치했을 때 문추는 공손찬과 10여 합을 싸워 달아나게 했는데, 다급해진 공손찬이 네명의 장수를 한꺼번에 투입해 싸우게 했지만 문추 하나를 당해내지 못했다. 바로 그때 공손찬을 구원하러 온 조자룡과 50∼60여 합을 싸워 승부를 내지 못한 것만 봐도 그의 용맹이 어떠했는지는 짐작이 간다.
당시 조조의 수하에 있던 공융(孔融)은 안량과 문추를 '그 용맹은 삼군(三軍)에 비길만 하다'고 평하고 있다.
더구나 원소가 안량과 함께 자랑스럽게 여기던 인물이었음을 감안할 때, 문추는 11위에 들고도 남을만한 장수였을 것이다.
다만 그가 여타 장수들보다 랭킹이 뒤로 조금 밀린 것은 반하 싸움 이외에는 이렇다할 활약이 없었던 점 때문이다.
12위로는 허저(許?)를 꼽고 싶다.
단순히 힘만으로 따질 때는 허저는 전위와 함께 삼국지 최고급이란 평가를 들을 만하다. 《정사》의 기록에는 그의 힘을 짐작할 만한 글이 있어 소개하기로 한다.
그가 여남 땅 갈피(葛陂)에서 도적떼 1만 명을 맞아 싸울 때의 이야기이다. 이편의 화살이 떨어지자 허저는 돌을 날렸는데, 그가 던진 돌에 맞은 적진의 물건은 모두 부서져버렸다. 그러자 도적들은 더 이상 앞으로 나올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윽고 성안의 식량이 떨어지자, 허저는 도적들과 화친을 맺어 소와 도적들의 식량을 맞바꾸게 된다. 그런데 정작 도적들이 소를 가지러 오자, 놀란 소들은 모두 달아나버렸다. 그것을 본 허저가 소의 꼬리를 한손으로 잡고 백 보 가까이를 끌어당기자, 그 괴력에 기가 질린 도적들은 도망쳐 버렸다. 이 사실은 허저의 괴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싸움이란게 단순히 힘만 세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게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무예솜씨가 뛰어나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서 허저는 다른 장수들보다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1,500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 허저의 무예솜씨를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이각의 조카 이섬(李暹)과 이별(李別)을 단번에 죽인 일 등을 제외하면, 다른 장수들에 비해 무예실력을 뚜렷하게 드러낼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를 사로잡으려던 조조의 욕심 때문에 전위와 하루종일 싸워 승부를 보지 못했고, 서량의 마초와는 무려 230여 합을 싸워 자웅을 가리지 못했다.
전위나 마초는 모두 당대의 내로라하는 장수들이었으므로, 이들과 싸워 밀리지 않았던 허저의 용맹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13번째의 인물로는 전위(典韋)를 들어야겠다.
전위 역시 허저와 마찬가지로 괴력에 있어서는 삼국지 최고급이란 평가를 들을 만하다.
《정사》의 기록에 '전위의 외모는 우락부락하고 힘은 다른 사람들을 넘었다'고 말하고 있다. 외모까지도 장사처럼 생겼던 모양이다. 전위는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던 대장기(大將旗)를 일으켜 세울 정도의 장사였다. 그의 무기는 쌍극(雙戟)이었는데, 조조는 이런 전위를 보고 자신의 막하에 80근 짜리 쌍극을 드는 장사가 있다고 하며 자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전위는 조조의 호색(好色) 때문에 장수(張繡)에게 죽게 되었지만, 죽어가면서 보여준 그의 용맹은 인상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전위도 허저처럼 괴력이 아닌 무예실력을 이렇다하게 보여주지 못했고, 용장들을 맞아 접전을 벌였던 허저와는 달리, 조조의 수하에서 5년밖에 활약하지 못했던 까닭에 이렇다 할 맹장들과 자웅을 겨루어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것이 허저에게 순위에서 밀리는 이유이다.
14번째로는 감녕(甘寧)을 꼽아본다.
위나 촉의 인물들과는 달리, 오나라의 장수들은 이렇다하게 그들의 무예솜씨를 뽐낼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위나 촉의 장수들에 비해 실력이 뒤졌다기보다는, 양자강 남쪽에 위치한 오나라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육전(陸戰)보다는 주로 수전(水戰)을 많이 치러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는 이런 점을 감안해서 오나라의 수많은 장수 중 한 명을 순위 안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감녕이었다. 감녕은 오나라의 다른 장수들과는 달리 육전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감녕은 해적노릇을 하다가 유표의 부하 황조를 따르게 되었는데, 그때 오나라의 장수 능조(凌操)를 죽였다. 그러나 그는 황조가 자신을 대우해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동오(東吳)로 투항하여 손권을 섬기게 되었고, 도리어 황조를 쳐부수는데 수훈을 세웠다.
적벽대전에서는 오나라의 주력군을 이끌고 조조군을 대파하는데 공을 세웠고, 그 후 남군(南郡)을 지키던 조조의 장수 조인(曹仁)과 싸울 때에는 이릉(夷陵)을 지켜 조인을 물리치기도 했다. 또, 완성싸움에서는 화살과 돌이 비오듯 쏟아지는 것을 무릅쓰고 성벽을 기어올라 주광(朱光)을 한 주먹으로 때려눕힌 괴력도 과시했다.
더구나 유수구(濡須口)에서는 조조군의 본진을 기습하는 대담성으로 조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는데, 이때의 일은 손권이 합비에서 장료에게 당한 수모를 씻을만한 것이었다.
당시 이 싸움에서 그의 뛰어난 활약에 감탄한 손권은 '조조에게 장료가 있다면 나에게는 흥패(興覇:감녕의 자)가 있다'고 했다 하니, 감녕을 14번째의 순위에 자리매김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15위의 인물로는 하후연(夏侯淵)을 들고 싶다.
실제 하후연은 이렇다할 무력을 겨룬 적이 없어, 그 무예가 얼마나 되었는지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다만 그의 무예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처음 하후연이 조조를 섬기게 되면서 했던 일이 조조의 신변을 호위하는 친위대장격의 일이었다는 점이다. 원래 그런 역할은 대단한 힘과 무예가 없이는 맡기 힘든 자리인데, 그만큼 힘과 무예가 뛰어났으며 조조의 신임이 깊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후연은 전위와 허저가 조조의 진영에 가세하면서 비로소 그 역할을 물려주고 야전군의 지휘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후 그는 하후돈과 함께 조조군의 양날개와 같은 역할을 했는데, 굳이 유비 진영에 비유하자면 관우와 장비의 역할이었다고나 해야할까?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조조의 진영은 유비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뛰어난 장수들이 많았으니, 관우, 장비에 비해서는 비중이 좀 떨어진다고 해야할 것 같다.
적벽대전 후, 하후연은 수하에 장합과 같은 맹장을 거느리고 서량의 마초, 한중의 장로, 익주의 유비 등과 대치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하여 마초를 격퇴하고 방덕(龐德)을 사로잡기도 했다. 그러나 부하장수 장합이 궁지에 몰리자 자신의 군사를 반으로 갈라 그를 지원하다 황충의 손에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니, 그때의 패배는 순전히 그의 잘못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16위의 장수로는 서황(徐晃)을 들고 싶다.
사실 서황이 양봉(楊奉)의 수하에 있을 때, 곽사의 장수 최용(崔勇)을 단 1합만에 죽인 것과 이낙(李樂)의 목을 벤 일, 그리고 면수에서 관우를 이긴 것 이외에는 두드러진 업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헌제(獻帝)를 모시게 된 조조가 낙양에서 허도(許都)로 천도하려 할 때, 이를 제지하려던 양봉의 장수로서 허저와 50여 합을 싸워 승부를 내지 못한 것으로 그의 무예를 대충 가늠할 수 있겠다.
서황은 조조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침착성과 신중함을 지녔고, 싸움에서는 항상 선두에서 용맹을 드날리고 있었던 점이 눈에 띈다.
싸움이란 용맹이나 힘 이외에도 침착성과 신중함이 있어야 적의 의표를 찌를 수가 있는데, 그런 점에서 서황은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이런 그를 정확히 꿰뚫어보았던 진수는 장료, 악진, 우금, 장합과 함께 서황을 당시 조조의 장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고 평가하고 있다.
17위의 장수로는 태사자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태사자는 북해(北海)의 공융(孔融)이 황건적의 잔당 관해(管亥)의 공격을 받고 위기에 빠졌을 때, <만천과해(瞞天過海: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넌다)>의 기발한 계략으로 포위망을 뚫어냈던 인물이다. 그 자세한 내용은 필자가 연재하고 있는 [삼국지 연의(연재)]코너에서 <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너다>라는 제목으로 다루어 놓을 예정이니,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그 후, 태사자는 곡아(曲阿)에서 강동의 소패왕 손책을 맞아 육탄전을 벌이는 싸움 끝에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양쪽 모두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적벽대전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손권은 합비(?肥)를 공격했는데, 이때 태사자는 조조의 맹장 장료를 맞아 무려 80여 합을 싸웠지만 자웅을 가리지 못했다.
그러나 장료와 같은 맹장과 대등한 싸움을 벌였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무예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8위의 장수로는 방덕(龐德)을 들어야겠다.
사실 지휘관으로서의 방덕은 그다지 뛰어난 인물이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글은 무예만을 논하기로 한 탓에 방덕을 꼽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방덕은 원래 마초(馬超)를 따랐는데, 조조가 한중을 치려할 때 조조 수하의 장합, 하후연, 서황, 허저 등의 맹장과 연이어 수십 합을 싸웠지만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조조의 계략에 빠져 사로잡히게 되었고, 항복하게 되었다.
방덕이 뛰어난 무예솜씨를 자랑한 것은 그의 마지막 싸움인 번성을 구하러 갈 때의 일이다.
그는 우금(于禁)의 선봉대장으로 출전을 했는데, 촉나라 최고의 장수 관우와 120여 합을 겨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방덕이 더 높은 순위를 얻지 못한 것은, 이때의 관우가 이미 전성기를 한참 지난 50대의 나이였다는 점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중 싸움에서 겨뤘던 하후연, 서황, 허저 등도 이미 한참 때의 전성기는 지난 나이였기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 방덕이 그들보다 뛰어났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19위로는 오나라의 장수 주태(周泰)를 꼽는다.
《연의》에서는 주태의 활약상에 대해 그리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리 대단치 않은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주태는 손권이 황조(黃祖)를 칠 때 공을 세웠고, 적벽대전에서는 조조의 장수 장남(張南)을 베었다. 그리고 남군(南郡) 싸움에서는 조조의 야전사령관 조인을 맞아 10여 합 끝에 달아나게도 했다.
또 유수(濡須) 싸움에서 주태는 한당(韓當)과 합세하여 조조의 장수 허저와 30여 합을 겨루기도 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주태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두 번에 걸쳐 손권을 구해낸 일일 것이다. 손책이 산월족을 토벌하고 있을 때, 손권은 병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선성에 있었다. 그런데 미처 방어벽을 만들기도 전에 도적들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당황한 손권이 말 위에 올라타자 도적들의 칼은 벌써 그의 말안장을 뚫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는데, 오직 주태만은 여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던져 손권을 지켰다. 그의 담력과 기세는 보통 사람들을 뛰어넘는 것으로, 적이 달아나고 난 뒤 주태의 몸에는 상처가 열두 군데나 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유수구(濡須口) 싸움에서 손권은 장료, 서황, 허저 등의 맹장에게 포위되었는데, 이때에도 주태는 자신의 몸을 던져 겹겹히 둘러싸인 포위망을 뚫었다. 그러나 한참을 가다 뒤를 돌아보니 손권이 보이지 않았다. 빗발치는 화살이 두려웠던 손권이 미처 따라오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주태는 다시 돌아가, 손권을 호위하여 방패와 창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막아내며 적진을 돌파했다. 이때에도 주태의 몸은 두군데나 창에 찔리고, 화살 10여 대가 갑옷을 뚫었다고 한다. 이런 주태였기에 손권은 그에게 자신을 호위하는 친위대장의 역할을 맡기고 있었는데, 마치 조조 진영의 전위나 허저와 같은 역할이었던 것이다.
마지막 20위로는 조홍(曹洪)을 들어본다.
사실 조홍은 여느 장수들과는 달리 이렇다할 활약을 한게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장안으로 달아나던 동탁을 추격하던 조조가 형양태수 서영(徐榮)의 복병에 걸려 혼날때, 몸을 던져 조조를 구해낸 일이 두드러질 뿐이다. 그러나 조조가 서량의 맹장 마초에게 쫓겨 수염을 깎고 홍포(紅袍)마저 벗어던지고 달아나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조홍이 덤벼들어 조조를 구해주었던 일이 있었다. 《연의》에서는 조홍이 마초와 40여 합을 겨루면서 점점 손놀림이 바빠졌는데, 하후돈이 달려들자 마초가 물러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일은 사실이 아니고, 조조가 서주를 정벌할 때와 복양에서 여포를 칠 때 조홍이 세웠던 공 등으로 미루어 추측해보면 그의 무예솜씨가 그리 대수롭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화웅, 우금, 악진, 문빙, 왕쌍, 정보, 한당, 황개, 엄안, 장임, 위연, 주창 등등 수많은 장수들이 있지만, 실제 정사에서 이들의 뛰어난 무예가 확인이 안되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자면, 화웅의 경우《연의》에서는 18로의 제후들을 당황하게 만든 대단한 장수로서 관우의 손에 목이 잘린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정사》에서는 확인이 안되는 내용이며 실제 화웅은 손견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우금의 경우, 조조가 손꼽는 장수였다고는 하지만 관우에게 너무도 쉽게 사로잡힌 점과, 그의 무예를 선보인 이렇다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순위 안에 들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장수들도 위에서 언급한 맹장들에 비해 실력면에서 그리 뒤질 것 같지는 않아 보였지만, 이들의 활약상이 그리 상세하지 않은 점이 있어 순위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장수들의 무예실력에 서열을 매긴다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원래 고수들끼리의 싸움에서는 우열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데다, 싸움이란게 상대적인 것이어서 어떤 장수는 특정 인물에게 유독 약한 면을 보이는 등 곤란한 점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중시한 점은 순수하게 무예실력만으로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인 적이 얼마나 많았는가 하는 것과 당시 사람들의 평가에 가장 많은 비중을 두고 순위를 매겼다는 점을 밝혀둔다.
아울러 이렇게 순위를 매기고 보니 한가지 아쉬운 점이 남는다. 그것은 바로 오나라 장수들의 순위가 아래로 쳐진 듯한 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나라의 맹장들은 위나 촉의 장수들처럼 장수 한 명이 종횡무진하는 활약을 벌였다는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런 점 때문에 그들의 무예를 제대로 평가할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재가 많다는 오나라 땅의 무장들이 위나 촉의 장수들에 비해 실력이 모자랐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예로 따지면 지금 무인시대에 나오는 이의민과 경대승도 대단하죠... 이의민은 쌍놈출신인데 수박의 달인이어서 왕에게 스카웃 되었다죠...? 이의민이 주먹으로 기둥을 쳐니 써까래가 흔들렸다고 합니다. 이에 기선을 제압하고자 경대승이 벽을 치니 주먹이 벽을 뚫고 나갔다고 하는군요...
첫댓글 제가 방금 생각나는 우리의 장수로는 연개소문(칼 다섯자루)이나....견훤대왕(항우와 견줄만함)... 척준경(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대단한 장사인것으로 기억...) 등등입니다. 여러분들도 우리의 장수들 한번 적어보세요. 재미있을것 같네요.*^^*
무예로 따지면 지금 무인시대에 나오는 이의민과 경대승도 대단하죠... 이의민은 쌍놈출신인데 수박의 달인이어서 왕에게 스카웃 되었다죠...? 이의민이 주먹으로 기둥을 쳐니 써까래가 흔들렸다고 합니다. 이에 기선을 제압하고자 경대승이 벽을 치니 주먹이 벽을 뚫고 나갔다고 하는군요...
전 자룡이 잴루 좋아요 인간적으로 호감가는 장수 흠 관우는 용맹스럽기하지만 자만심이 강해서 .... 글고 관우 묘사를 넘 과장햇더요 화타에게 수술 받을때 뼈 긁어내도 바둑두면서 신음소리 하나 없덧다니 ..쯧 마취햇으면서 ^^
울 나라 장수중에는 이순신장군님이 젤루 좋아요 다 아~~ 좋아요 The Grate Repurblic of Korea~~~~~~
난 언제나 조조와 여포를 들네요.비록 조조가 악인이라고 다들 말하나 그의 총명과 무예는 정말 범인의 범주를 벗어난 일입니다.그리고 실력으로 보자면 여포를 들수밖에 없고요.만약인데 여포가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면 삼국지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삼국지 등장인물중에서 가장 따르고 싶은 인물은 관우이지요 주군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의리 때문에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의 인물은 장비 그 단순과격이 마음에 들어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