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육중한 수장고의 문.
문고리(?) 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힘이 있어야 돌려 열 수 있을 것 같은,
어쩌면 비밀스런 장소로 들어가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는 이 손잡이를
꼭 돌려보고 싶지 않은가
10 명씩만 입장시킨다기에 10등 안에 꼭 들고 싶어서 15분 전부터 기다렸다
덕분에 1등으로 들어갔다
1등 엄청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10명만 들어가니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인데도 동선 서로 겹치지 않게 감상할 수 있었다
드로잉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드로잉 자체만으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작품을 위한 단순한 밑그림이나 스케치이 개념을 넘어 새로운 미학적 가치를 담아내는 영역으로 말이다
해외 유명작가의 작품전에 제법 비싼 입장료를 내고 갔는데
보고 싶은 완성작품 수보다 드로잉이 더 많은 듯한 전시를 보다보면
좀 속은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우고 또 새로 수정하고 덧그리고 한 작가의 고뇌가 담긴
드로잉을 자주 대하다보면
아주 소중한 작가의 시간을 만난 것 같은 생각에
어느 순간 깨달음 처럼 와 닿은 적이 있다
그래서 완성작품도 좋지만 작가의 낙서같은 드로잉 작품도 아주 소중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이 곳 역시 수장고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다
사진 그림 드로잉 등을 보관하는 방법이 다 다름을 볼 수 있다
이 수장고는 수장고의 역할을 하고 전시방은 따로 있기 때문에
수많은 작품 사이를 걷는 호사는 누릴 수 없게 바리게이트가 있다
대신
전시방을 둘러보며 흥미로운 작품들을 많이 만난다
밑그림으로 사용된 드로잉도 있지만
드로잉 작품을 주로 하는 작가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드로잉을 보관하는 철제 캐비닛에 수많은 작품들이 들어있다
칸칸마다 모두 열어보고 싶었지만
작품을 눈으로만 보세요 라는 글귀에 너무 익숙해져서 아무 제재가 없는데도 손대지 않게 된다
혹여나
균형이 깨져 작품이 넘어질세라 혹은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게 하려는지
온갖 장치를 몸에 감고 있는 귀하신 몸도 있다
작가의 스케치북 자체를 전시해 놓고
디지털 작업으로 한장한장 넘기며 볼 수 있게 한 코너도 흥미로웠다
나달나달해진 작가의 스케치북을 손으로 직접 넘기는 듯한 기분은
작가와 동시대를 지나가고 있는 동질감이 갖게 한다
권진규 님의 스케치북, 반가웠다
이 드로잉으로 탄생했을 수많은 조각작품들이 눈에 그려진다
원석연님의 <개미>
오직 연필만으로만 작업하는 작가 원석연님의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드로잉이 회화의 부차적인 작업만이 아니란 걸 보여준다
드로잉의 날것이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미학임을 증명해 냈다고나 할까
연필로만 하니 얼마나 섬세하겠는가
이 개미떼를 그리기 위해 개미의 온갖 포즈를 관찰했을 작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 전시관에서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를 뻔 한 코너가 있었다
유명작가의 드로잉을 한 데 모아놓은 코너
너무나 익숙한 김환기 작가의 그림 속 새들
그렸다가 다시 수정하고
크기를 좀 키워보거나 지웠던 흔적들이 다 담겨있다
어느 작품에 사용할 것인지 작가가 주로 사용한 작품명 번호까지 적혀있다
일본에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무수히 쓰고 또 썼던 이중섭 님의 편지
편지지 여백을 빼곡하게 채웠던 그림들이 이렇게 작품으로 소중히 남았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모습도 웃음가득한 모습으로 그렸고
그리워하며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까지 해맑게 그렸다
고통을 감추느라 더 밝게 그렸을 작가의 모습에 마음 한켠이 짠하다
박수근 작가의 드로잉도 많이 볼 수 있어 좋았다
그의 작품 속 이웃들의 모습.
어쩜 수많은 그림에 이리저리 사용되었을 나목 드로잉도 아주 친숙한 듯 만났다
유영국 작가의 <산> 시리즈에 등장했을 드로잉.
이 단순한 드로잉에 그리도 강렬한 색상을 입히고 또 입혔을
작가의 독특한 그림들이 떠 올라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지도처럼 보이는 컬러인쇄물에 어떤 작품을 구상했는지
색까지 입힌 드로잉작품이 인상적이다
이 드로잉으로 탄생한 작가의 거대한 미디어 작품을 상상해 본다
그야말로 종이 위에 단순한 선으로 그리는 행위를 넘어
자르고 붙이고 덧그리는 작업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니 이제 드로잉은 하나의 명백한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드로잉작품이 어떻게 확장되어갈지 궁금하다
이제 3층에 마련된 회화작품 전시장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