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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9장 1절 ~ 10절
유다의 시드키야왕 제구면 열째 달에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왕과 그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치러 와서 성읍을 포위하였더니, 1)
In the ninth year of Zedekiah king of Judah, in the tenth month, came Nebuchadrezzar king of Babylon and all his army against Jerusalem, and they besieged it. 1)
시드키야 제십일년 넷째 달, 그 달 구일에 그 성읍이 뚫렸더라. 2)
And in the eleventh year of Zedekiah, in the fourth month, the ninth day of the month, the city was broken up. 2)
그러므로 바빌론 왕의 모든 고관들이 들어와서 가운데 문에 앉았으니 곧 네르갈사레셀과 삼갈네보와 살스킴과 랍사리스와 네르갈사레셀과 랍막과 바빌론 왕의 고관 중의 모든 잔류자들이더라. 3)
And all the princes of the king of Babylon came in, and sat in the middle gate, even Nergal-sharezer, Samgar-nebo, Sarsechim, Rab-saris, Nergal-sharezer, Rab-mag, with all the reside of the princes of the king of Babylon. 3)
성을 함락하고 바빌론 왕의 모든 고관들이 시드키야 앞에서 앉은 이유는 시드키야가 느부캇넷살이 임명한 왕이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느부캇넷살왕의 입장에서 보면 성을 비운사이에 반란을 한 왕이 되는 셈인데, 느부캇네살왕의 명령없이는 시드키야왕의 지위는 보장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O 유다 왕 시드키야와 모든 전사가 그들을 보고 도망하여 밤에 왕의 동산 길을 따라 두 담 사이의 문을 통하여 성읍을 빠져 나왔는데 그가 평지 길로 갔더라. 4)
And it came to pass, that when Zedekiah the king of Judah saw them, and all the men of war, then they fled, and went of the king's garden, by the gate betwixt the two walls: and he went out the way of the plain. 4)
위 이미지는 동래부 순절도로 극사실화에 속하는 기록화입니다. 동래성에 왜군들이 포위하여 공격하고 있고, 조선군은 화살공격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시간이 섞여있습니다. 즉 동래성이 함락되기 이전과 함락 이후 상황이 함께 묘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성벽에 보면 함락되기 이전에 조선군이 화살로 왜군을 방어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오른쪽위에 보면 성이 뚫려 왜군이 성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왜군이 들어와 성안에서도 싸우는 장면도 있습니다. 이것은 함락 전과 함락 후의 모습이 그림안에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는 동영상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왼쪽위에 보면 장수가 원군을 부르러 간다며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는 장면이 있고, 그리고 가운데 보면 빨간 옷과 파란옷의 사람들이 앉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성의 함락과 함께 죽음을 기다리는 고관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왼쪽 가운데 지붕위에 여인이 올라가있는 모습은 전해져 내려오는 대로 왜군을 피해 기왓장을 던지며 저항하다가 숨진 조선의 여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민족의 왕의 지배속에서 고통을 받았던 조선의 백성들의 고초가 느껴지는 비참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종합해본다면 싸우는 사람과 도망치는 사람들로 분열되어 성이 함락되는 모습이고, 인간적으로 보면 시드키야는 조선의 도망치는 장수보다는 나은사람입니다.
이 그림은 실제로는 더욱 잔인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어서 지하철 공사중 발견된 유적에서는 도망가는 어린아이를 일본도로 살육한 흔적과 몇번의 시도 끝에 참수를 당한 젊은 여성의 유골도 발견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선조와 그의 고관들로 인하여 이 성읍의 사람들이 몰살되어 참혹한 피를 흘리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발굴도 일본인들이 권력을 가진 한국에서는 자세히 밝히지 않고 그냥 지하철 공사장으로 묻어버렸습니다.
한국은 일본과 중국 그리고 미국에 의한 분할 점령상황이고, 기구한 조선의 역사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이한 상태의 이유는 부정선거에 있습니다. 중국이 우리나라 대통령을 뽑고, 일본이 우리나라 대통령을 뽑는 이러한 현실은 마치 청일전쟁상황과도 같습니다. 문재인이 중국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고, 윤석렬은 일본에 의하여 선출된 대통령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국민보다는 자기를 선출한 국가의 세력에 봉사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이러한 부정선거가 한국에서 시작하여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중이며, 이것이 점차 교묘하게 이제는 일루미나티가 정치권력을 뽑는데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사탄의 모습이 우리앞에 드러나는 것이며, 이는 우리 민족의 아픔뿐만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 그리고 미국에 있어서도 그들의 주권을 사탄의 종들에게 상납하고 그들의 노예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비참한 현실에서도 우리가 오늘을 분노하고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예루살렘의 남은 사람들처럼 반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영상을 보면 사람의 잔인함과 사람의 비겁함에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인간적인 마음이지만 올바른 것은 아닙니다.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장 39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렇게 해주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서니라.
마태복음 7장 12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
마태복음 11장 30절
사람을 사랑하는 것의 기준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바라는 바를 그들에게 해주면 되는 것이며, 그 이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거운 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라는 바를 해주는 것은 미워하는 것보다 가벼운 짐입니다. 말씀 그대로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곧 내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만 해주면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보다 이웃에게 더 많은 것을 베푸려고 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가벼운 멍에에 사람의 의라는 무게를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사람의 의가 더하여 지킬 수 없도록 되는 것이 바리새인의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상호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 안에서 홀로 벌어지는 일이며, 미워하는 상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내게 악하게 대하고 나쁘게 대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호적인 일이 아니며, 내안에서 일어나는 일일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외부의 상황과 관계없이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임진왜란과 같이 집단적인 관계의 일들은 결국 개인적인 관계들의 종합이 되며, 그 관계중에서 비겁하고, 불의한 사람들이 있고, 용감하고 의로운 모습의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동래성전투의 이야기를 들으면 인간의 잔인함과 교차되는 비겁함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이 땅에서 평안하고 행복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잔인하게 죽음당하는 것보다 불순종의 죄를 짓는 것이 더 잔인하고 비열한 일입니다.
사람의 비겁함과 잔인함에 분노하기 이전에 내 자신이 사람을 미워하는 더 비겁하고 더 잔인한 불순종을 짓고 있는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참한 죽음을 당한 조선 여인이나 잔인한 학살을 즐겼던 왜군이나 모두 죽었고, 하나님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칼데아인들의 군대가 그들을 쫓아 여리코 평지에서 시드키야를 따라잡았으니 그들이 그를 잡아서 하맛 땅에 있는 리블라로 바빌론의 느부캇넷살왕에게 데려오니 바빌론 왕이 그에게 판결을 내리더라. 5)
But the Chaldeans' army pursued after them, and overtook Zedekiah in the plains of Jericho: and when they had taken him, they brought him up to Nebuchadnezzar king of Babylon to Riblah in the land of Hamath, where he gave judgment upon him. 5)
시드키야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 평지로 도망가다가 잡혀서 하맛땅에 속한 느부캇넷살이 있는 리블라로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이런 일은 조선으로 치면 인조가 삼전도로 홍타이지에게 나아가는 것과 선조가 고니시나 가토에게 잡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드키야는 함락되는 성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선조는 내시 등에 업혀 미리 도망을 쳤습니다. 이러한 조선 왕조를 유지한 것은 그 자체로 수치입니다.
그때 리블라에서 바빌론 왕이 시드키야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고, 바빌론 왕이 유다의 모든 귀족들도 죽이니라. 6)
Then the king of Babylon slew the sons of Zedekiah in Riblah before his eyes: also the king of Babylon slew all the nobles of Judah. 6)
시드키야는 왕으로 정책에 대한 책임이 있는 그 자신과 그의 고관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패전의 책임이 있는 인조와 선조와 그의 고관들은 공신칭호를 받고 대신 백성들을 정복국에 약탈물로 바쳤습니다. 완전히 미친 조선왕조입니다. 만주족의 근성은 이처럼 더럽고 사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한국의 위정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북에는 김정은이 세계역사상 유래가 없는 3대 세습 독재를 하고 있고, 남한도 주권이 없는 국가 상태를 수십년째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모습을 직면하면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땅을 좋게 생각하는 마음이 곧 미워함을 만드는 것입니다. 조선과 한국은 매우 부조리한 나라입니다. 그것이 깨끗하고 공정한 주권국가로 위장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이 나라의 실체를 갑자기 알게 되면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알고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순종으로 이런 부조리한 나라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손해가 될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한국에서는 정부가 텔레비젼으로 시키는 것의 반대로 해야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세계가 북한과 남한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기만의 통제국가인 북한과 남한을 전세계가 따라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또 그는 시드키야의 눈을 빼고 사슬로 그를 묶어 바빌론으로 끌고 가니라. 7)
Moreover he put out Zedekiah's eyes, and bound him with chains, to carry him to Babylon. 7)
시드키야의 눈앞에서 그의 두 아들이 죽고, 시드키야의 눈이 뽑혀지고 바빌론으로 묶여서 끌려가는 장면입니다.
이런 결과는 원래의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시드키야의 망설임과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대한 생각으로 스스로 비극적인 파멸로 들어간 모습입니다.
저는 이부분을 읽으면서 우리 주변에 전도가 되지 않는 사람들의 마지막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자신의 죄를 끌어앉고 죽음으로 향해가는 것은 시드키야의 행보와 같은 매우 무모한 일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발견하고 설득하지만 시드키야처럼 듣지 않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가족도 해당되며, 그래서 더 마음이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왕을 설득하는데 실패하는 것과 우리가 같다고 느껴집니다. 즉 구원은 각자의 공으로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공으로 선물을 대신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도에 있어서는 예레미야나 저나 당신이나 모두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레미야나 저나 당신이나 모두 같으며, 그러므로 당신과 예레미야는 같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대단한 선지자이고 당신도 대단한 선지자로 볼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평가는 하나님앞에서 절대적인 평가로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앞에서 모두 귀하고 소중한 존재이기도 하며, 동시에 더러운 죄를 지은 죄인중의 죄인이기도 한것입니다.
하나님앞에서 비교 평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나 예레미야나 바울이나 당신이나 저나 모두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다윗과 예레미야 그리고 바울이 요구받았던 순종을 우리도 요구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순종에 있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복음은 이 세상의 어떤 무엇보다도 강한 것입니다. 이런 강함을 확신하고 보이는 상황에 현혹되지 않아야 비로소 다윗과 바울과 예레미야와 같은 순종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함으로 평안에 이르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과 조금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의 순종은 그에게 펼쳐진 상황에서 평안과 거리가 먼 큰 고통으로 발전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평안 즉 세상적인 평안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뜻에 순종한 예레미야에게 감옥은 육체의 감옥일뿐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얻게 되는 평안은 예레미야처럼 육체의 평안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함으로 거친상황에 내몰리는 것에 대해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백신에서 경험해본 것처럼 우리는 상황에서는 불편에 놓였지만 마음에서는 평안을 얻었습니다. 이런 일은 반드시 반복될 것이며, 그때에 이런 지혜로 진정한 마음의 평안이라는 순종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예레미야가 그의 말로 인하여 말키야의 지하 감옥에 들어가는데 지하 감옥이라는 것이 순종함의 댓가라고 생각하면 순종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물이 없는 지하감옥의 진창에 들어가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순종함으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불순종은 어색한 상황적 평안을 주지만 그의 마음은 한치앞으로 모르는 사람의 마음 불안으로 순종하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의 댓가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일루미나티들이 이 땅에서 부유와 명예와 육체적인 평안을 얻지만 그의 마음은 고통속에서 번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유함으로 이것저것을 채워보려 하지만 진정한 마음속의 평안은 그 어떤 세상의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과 거래하는 자는 또 다른 악인들에 의하여 시드키야의 결말로 이르게 될 것입니다.
O 칼데아인들이 왕궁과 백성들의 집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헐었으며, 8)
And the Chaldeans burned the king's house, and the house of the people, with fire, and brake down the walls of Jerusalem. 8)
경호대장 느부살아단이 성읍에 남은 백성과 자기에게 항복한 자들을, 남아 있는 백성들과 더불어 바빌론으로 끌고 갔더라. 9)
Then Nebuzar-adan the captain of the guard carried away captive into Babylon the remnant of the people that remained in the city, and those that fell away, that fell to him, with the rest of the people that remained. 9)
그러나 경호대장 느부살아단은 유다 땅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백성 중 가난한 자들을 남겨 두고, 그 날로 포도원과 밭들을 그들에게 주었더라. 10)
But Nebuzar-adan the captain of the guard left of the poor of the people, which had nothing, in the land of Judah, and gave them vineyards and fields at the same time. 10)
전세가 역전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일을 기대하는 것으로 우리가 소망의 인내함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재산도 명예도 지위도 권력도 건강도 없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해결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다시오심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는 것을 우리가 가늠할 수 없지만 가난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당연하게도 이 땅의 것을 사랑하는 것이 적을 수록 이 땅을 포기하고 말씀에 순종으로 나아가는데 유리한 것입니다.
또다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니라."고 하시더라.
And again I say unto you,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a rich man to enter into the kingdom of God.
마태복음 19장 24절
또다시 again으로 강조하신 말씀으로 부자가 천국에 이르는 것이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부자는 앞선 사람이며, 좋고 바람직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힘든 여건이 오히려 천국을 소망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 유리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느껴집니다.
우리 민족은 고려, 조선시대부터 부조리와 약탈로 고통을 받아온 민족입니다. 이런 우리민족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으로 반전됨이란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막강한 국력을 갖게된 일본이나 중국보다 고통속에 있는 우리민족이 복음에 더 많이 나아간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민족의 슬픈역사가 우리 시대에 이미 반전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슬프고 힘든 현실은 대역전을 위한 준비로 볼 수 있고, 그러한 일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귀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삶이 고통속에 있는 것은 그것으로 계속 끝날 일이 아니고 언젠가 기쁨으로 바뀌기 위한 과정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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