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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호명을 통한 허기虛飢의 진단과 극복
-한고석 시인론
신익선
1. 시의 부름
한고석의 시, 그리고 한고석의 첫 시집이 되는 한권의 시집. 이 한 권의 시집을 내는 일은 시의 부름 없이는 안 된다. 시를 쓰는 주체의 기원은 우주에 편만한 신비로운 운동체인 어떤 울림, 즉 시의 부름을 듣고 그에 응답하여 ‘시를 쓰는 일’이다. 삶이라는 전쟁터의 아비규환이나 천지간에 홀로 아득한 고독, 고뇌, 그리고 달마조사의 면벽 칠년에 이르는 명상이나 사소한 일상에서의 번쩍거리는 영감靈感, 혹은 관음觀音, 그리고 어린 아이의 동심처럼 순전무후純全無垢 함은 모두 시가 부르는 유일무이한 시의 이름이다. 시가 시인을 불러, 모여진 시들로 시집을 형성하면서 자리를 잡는 일이 시집 출간이다. 시집을 펴냄으로써 시는 독특하고 유일한 자신만의 거처인 제 집을 찾는다. ‘갖는 일’ 일이 아닌 ‘찾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시 쓰기의 이력을 일러 시의 집을 찾는 시인이라 명명할 수 있다면 이는 시의 부름, 즉 시의 호명에 다름 아니다.
한고석의 첫 시집 상재는 이러한 시의 부름에 있다고 보아진다.
간난艱難의 역경들이 왜 없었으랴. 단장斷腸의 절망이 왜 없었으랴. 경사지傾斜地를 겨우 버티고 올라와 흘린 눈물이 왜 없었으랴. 폭풍한설을 견딘 소나무처럼 푸르른 시맥詩脈을 찾아서 푸르른 청춘의 계절인 청, 장년기를 지나쳐 이순耳順이라는 노년에 맞닿아 부르는 한고석만의 고유한 음절들, 그 음절들의 꺾어진 탄성과 잦혀진 한숨들의 집합체가 바로 이 시편들이다. 시집의 묶음은 이렇게 집요하고 줄기찬 시의 부름으로부터 출발한다. 논리적인 개념이나 정신의 능동적인 힘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 의식을 초월한 어떤 의식의 부름, 이를 일러 한고석에게 시의 힘이 찾아오는 지경이라 한다면, 이는 부박한 세태의 경박한 풍조가 인간본연의 아름다운 정신을 훼손하는 이 어지러운 지경에서 만나는 삶의 오아시스다. 또, 현실이라는 사막을 통과하면서 노년에 이르러서야 음미하는 한고석 시의 이름이다. 동시에 시인의 길에 들어서서야 사소한 것에서 소재를 택하는 한고석 시가 부르는 시인 한고석에의 호명이기도 하다.
2. 허기의 인식에서 출발
한고석의 여러 시편 곳곳에서 가장 빈번하게 접하는 대상은 ‘허기’ 이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생명현상들은 일제히 향일성向日性, 혹은 주광성走光性의 성질이 있다. 햇살을 향하여 맹렬하게 가지나 줄기, 잎을 뻗어나간다. 심지어 인삼이나 더덕 등과 같이 음지를 선호하는 식물들도 햇살의 살갗으로 스스로를 키워간다. 햇살이 있어야만 영양을 만들어 내는 광합성 작용은 비단 동식물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선사시대 이래로 인간들 역시 햇살 좋은 남향바지에 터 잡아 살아왔다.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칙칙하고 어두운 곳보다는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밝고 따스한 곳을 선호해 온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터널은 반드시 양지만을 인간에게 주는 법이 없다. 특히 시인은 역류, 또는 탁류에 근접한 혼탁한 황톳물이 넘치는 척박하고 음습한 동네에 짐을 내려놓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온 몸에 흙탕물 튀기며 넘어진 채로 신음하면서도 모함의 돌팔매질 당하기 십상이다. 자주 그 자리에서 자신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는 원수와 한 밥상을 마주하며 숙식을 하는 일도 흔하다. 언어를 상실하는 실어증의 상태에 이르길 무수히 반복하는 속울음들, 가히 백치白痴에 가장 근접한 어리석음의 우듬지가 시인의 성장점이다.
어찌 세세히 그를 논한단 말인가.
시인의 삶은 원래 고달프고 원래 어려운 이름이다.
시인은 가난과 벗하면서도 그를 탓하지 않는 아둔한 자의 이름이다. 더 나아가 가난을 묵묵히 즐기면서 한 편으론 기꺼이 고독을 마주하길 즐기는 무모한 자의 명칭이다. 지상에서 외로움을 사랑하는 외로운 짐승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것이 천지창조의 태초부터 이어내려 오는 시인의 숙명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일생이란 원래가 가장 뜨겁고 가장 강렬한 우주의 에너지원인 햇살에서 멀리 비껴서 있다. 햇살의 현란한 불빛은 모두 세상과 세상 사람들의 몫, 시인의 시어들은 햇살에서 오히려 추위를 느낀다. 한고석은 시의 호명을 듣는 시인의 출발을 ‘허기’로 규정한다. 조금만 데 세밀하게 현미경을 대보면 시인의 삶은 기실 추위로 얽혀있다. 누가 시인을 일러 천형의 길을 간다하였는가. 시인의 일대기는 춥디추운 오동지 섣달의 한지寒地보다 더 혹한인 것이다. 시인들이 탄생 이상으로 죽음을 고대하는 경우라든가 삶의 허기를 맞이하는 일에 익숙한 것은 시인의 태생지에 근거한 시인들의 별 볼 일 없는 일상사이다.
일상에서 그러한 허기, 그 허기의 근원은 먼저 경제적 결핍에서 온다. 경제적으로 시달림을 받는다는 것은 개체의 위계에 심각한 정체성 훼손을 가져 온다. 생존을 위협받는 일, 생계를 잃는 일은 그야말로 막막 지경이다. 처참지경은 이때를 일러 하는 말이다. 시인들의 고독은 가제 무거운 등짐인데 그 위에 입에 풀칠하며 사는 삶의 걱정이라니! 하늘 아래 홀로 울음 우는 절대 고독자로서의 무수한, 그러면서도 희귀한 시인들의 외침들은 그래서 존재한다. 불세출의 조선조 최대 시인이었던 손곡蓀谷(이달李達의 아호)이 있다. 그는 실토하길, ‘백방으로 먹고 살길을 찾았으나 도저히 먹고살 길이 없었다.’면서 탁월한 시인이었으나 목숨 줄을 연명해야만 하는 삶의 지난함을 탄식하곤 하였다. 험난한 세상에서 시인이 ??한 몸 살아가는 일도 만만치 않은데, 가족 건사까지 더하면 이의 중압감은 필설로 형용키 어려운 면이 내재한다. 세계경제를 장악한 유태인의 탈무드에 이르길 ‘돈주머니가 비면 행복은 창문 너머로 도망간다’ 쓰여 있다. 대부분의 시인들에게 있어, 경제적 소용에 반하는 일이 시인들의 시 쓰는 일이다. 시를 써서는 생계를 꾸릴 수 없다는 이 익숙한 절망감, 이 친근한 모멸감, 이 현란한 죽음에의 동경을 뭐한 설명할 것인가.
대저, 먹고사는 방편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대개의 시인들에게 있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대개의 시인들을 그 가족들의 관점으로 평한다면 시인들의 시 쓰기는 가족들이 시인 대신마시는 독약과 동일하다. 시인의 허기, 는 가족들의 허기로 이어진다. 천상과 지상에서 허기를 덧 치는 삶이 시인의 삶이다. 그도 모자라 허기는 시인의 육체를 갉아먹는 격한 통증과 함께 절망이라는 팻말을 던지기 일쑤다. 운명의 표상일까, 시 쓰기는 시인의 운명에 긴 슬픔의 긴 메아리를 남면서 주광성의 햇살에서조차 허기지지만 그러나 정신은 한층 더 빛을 발한다. 시어를 윤택하게 하고 시인의 영혼을 빛나게 한다. 이것이 시인, 시 쓰기에 있어서의 '허기'의 비밀이다. 한고석은 바로 이 면을 주시한다.
①분주히 날아다니는 나비야
배고파도 참아
봄 오면
꽃동산 가자꾸나
-<가을나비> 전문
②동지섣달 긴긴 밤
등잔불 심지 돋워
양말 깁던 어머니
놋 화롯불
온기 잃어가고
동치미 한사발로 허기달래며
봉당 안 달빛 가득한데
툇마루에 걸터앉아
마실 간 지아비
밤새 기다리는 겨울밤
-<겨울밤> 전문
①의 시편은 ‘추위’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처연하다. ‘꽃’이 지는 가을이니 나비의 날개 짓은 고단하다. ‘분주히 날아다니’는 것은 나비이기도 하지만 시적화자이기도 하고, 모든 물상들이기도 하다. ‘분주히’ 살아가지만 ‘배고픈’ 삶의 극한에 견뎌야 하는 고단함을 뒤로한 채, 내뱉는 말인, ‘배고파도 참아/ 봄 오면/ 꽃동산 가자꾸나’ 타이르는 모습이 흡사 보리 고개를 넘던 시절에 이 땅의 어머니들이 배곯는 이 땅의 아들들에게 들려주시던 자장가와 유사하지 않은가.
‘나비’에게 있어 갈 겨울 지나고 맞이하는 ‘새봄의 꽃동산’은 격려가 아닌 ‘죽음’에 대한 성찰이다. 나비는 가을을 날고는 겨울에 죽을 것이다. ‘배고파도 참으며’ 가을을 버틴대서 나비가 장차 다가올 ‘새봄’을 맞이하는 일은 없다. 시인은 시인이면서 인간이고, 인간이면서 고통을 섭취하는 영혼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하고 섬세한 감수성이 그들의 무기이다. 무기래야 고작 연약함, 스스로 탄창에 장전하는 것은 스스로를 관통시킬 치명적인 연약함이다. 시인은 스스로에게 고독함이라는 총신을 마주하길 즐긴다. 한고석의 ‘가을나비’는 ‘가을나비’를 빙자하여 스스로에게 발사하는 고독의 통증이다. ‘나비’ 을 통하여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가을, 겨울을 목전에 둔 가을이라는 삶의 현장을 제시하면서 ‘배고픈’ 스스로에게 발사하는 힘겨운 사투의 한 단면이자 한 현장이다. ‘나비’가 오는 봄을 말하나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죽듯이 시인 역시 자신이 써가는 시구 ‘나비의 봄’처럼 시, 시인들이 잘 사는 이상향을 목도치 못하고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②의 시편에 들면 ①의 시편을 심화시킨 흔적이 역력하다. ‘가을나비’ 는 ‘어머니’로 환치된다. ‘가을나비’가 날아간 뒤의 계절은 ‘동지섣달’이다. 일 년 중 가장 춥고 긴 밤이 이때의 특징이다. 서정이 넘치는 ‘등잔불 심지’는 근래 들어 이미 사어死語, 오래된 고어다. 그러나 ‘등잔불 심지’가 주는 이미지는 간단치 않다.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지새운 것은 등잔불이다. 그나마도 석유를 아끼려는 어머니들의 근검절약은 이마저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자꾸만 불끄기 일쑤였다. 우리 어머니들은 사시사철 등잔불 아래 자식이 신다 헤진 양발을 수선하는 일을 하셨다. 눈 내리는 겨울밤은 길다. 먹거리도 변변치 않았다. 긴 긴 겨울밤에 등잔불을 밝히고 놋 화롯불 식어갈 즈음이면 으레 ‘동치미 한 사발’을 퍼 먹으며 겨울을 나던 그 옛날의 정경을 그려낸 작품인 ‘겨울밤’은 ‘허기’의 극한상태를 서정적으로 묘사한 시편이다. ‘봉당 안 달빛 가득한데/ 툇마루 걸터앉아/ 마실 간 지아비/ 밤새 기다리는 겨울밤’은 이미 고어로 변한 ‘봉당’, ‘툇마루’, ‘마실, 등등의 유정한 언어를 앞세워 겨울철의 육체적 허기를 그리고 있으나, 실은 따사롭고 도타운 정을 노래하는 시편이다. 일종의 퇴행의 관점으로도 보아지는 회상에 기대어 한고석이 풀어 낸 것은 ‘허기’ 이기면 동시에 ‘허기’ 로 인하여 더욱 친밀해지고 따뜻해진 ‘가족애’인 것이다.
이 밖에도 ‘해당화 곱게 핀 갯벌자락/ 바지락 소라 잡으며/ 배 고파온 허리띠 졸라매고 (<고파도 사람들> 일부)’에서와 같이 ‘허기’는 한고석 시의 중심부를 강타하는 메타포다. 의지할 곳 없이 육체적으로 고단하고 심리적으로 고달픈 탓일까, 이들 시편들에게서 허기의 냄새가 너무도 짙게 풍겨난다. 여기에는 풍요로웠던 어머니의 젖가슴을 떠난 유랑민으로 떠돌다가 일생을 마치는 현대인들의 모성성 상실에의 쓸쓸함과 외로움이 깊이 삽입되어 있다. 시란 원래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내기 좋은 그릇 이어서일까, 그리움에의 줄거리들, 시편 곳곳에 ‘그리움’이라는 물꼬가 한고석 시의 대지를 관통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다시 ‘외로움’, ‘고적함’ 이기도 하다. 농밀한 고적감이 전체 시편에 촘촘히 배어있어 흡사 당대唐代 최고의 시인이었지만 실의와 좌절로 평생을 산 두보杜甫의 시편들 중 한 편인, 수극본빙시견흥 ( 愁極本憑詩遣興 근심이 많아 시에 의탁하여 흥을 풀어) 시성음영전처량 (詩成吟咏轉淒涼시가 지어져 읊으니 더욱 쓸쓸하고 슬퍼진다)라는 두보의 겨울시편인“지후(至後)”의 끝 두 소절에 연달아 이어진 시편들이 아닌지 회의감이 들 정도이다. 즉 ‘허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풍요로움 속에서 ‘배고픔’을 느끼는 슬픈 종족인 것이다. 유정한 ‘과거’에의 회상으로 ‘오늘’을 상실하는 ‘배고픔’이 슬픈 현대인들의 상처로 보면서 시편 곳곳에서 한고석은 만물을 약동시키는 힘의 원천인 햇살에서 오히려 허기를 느끼는 것이다. 이른바 허기는 이렇게 ‘겨울밤’에 살고 있는 시적화자의 쓸쓸한 자화상의 다른 표현이라 보아지지만 이는 허기야말로 찬란한 정신 영역의 명징성을 더해 주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라는 인식이 저변에 깔려있다 하겠다.
3. 고향상실의 갈증
①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멀게만 느껴지는 고향길
그리운 이는
떠오르는 달빛에 비추이고
외로운 내 마음은 호수에 잠긴다
반겨줄 이 없는 고향이건만
이제나 저제나 눈물뿐
마음은 고향 산천을 향하고
-<고향갈 차표가 없다> 일부
②맑고 푸른 고향 하늘아
조각구름 안고 어디로 가느냐
하늘 높이 나는 연에
별빛 담아 꿈을 엮어가며
두둥실 내 마음에 얼레를 돌리던
아름다운 고향 하늘아
어언 어버이 떠난 그 자리에
먼 길 돌아와 내가 있는데
이순의 나를 안고 어디로 가느냐
-<고향하늘> 전문
③고향은 있건만 반겨주는 사람 없고
정 전해주지 못하는 곳
아스라한 기억들이 전설처럼 들려오고
숨바꼭질하며 지내던 동무들은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고향은 있건만 왠지 낯 설은 타향
가슴에 품어 주시던 어버이
내 손으로 흙에 묻어두고
그리움에 눈물 흘립니다.
고향은 있건만 빈 가슴속에 머무르고
흐르는 세월에 아쉬움만 더해 갑니다.
-< 고향은 있건만> 전문
‘허기’에 수반하는 생체 특성 중 하나는 ‘갈증’이다. 설령 ‘허기’가 사라졌다하여도 목마름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갈증 증상을 심화시키는 것이 허기가 가져다주는 일례다. 목마름, 혹은 갈증의 시편인 위 ①은 일테면 고향상실의 애가哀歌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멀게만 느껴지는 고향길’은 ‘고향’ 이라는 이상향을 상실하였다는 갈증의 표식이다. 허나 ‘반겨줄 이’ 가 사라진 고향을 그리면서 ‘눈물’로써 ‘고향산천을 향하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여기서 시작화자의 ‘눈물’의 이미지는 어버이를 그리는 영원한 향수다. 사랑을 상실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현재 사랑에 대하여 집착에 가까운 태도를 보인다. 호되게 앓아본 사람은 건강에 대하여 남다른 애착을 더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반드시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개체의 탄생의 시절과 이 세상을 처음으로 접하는 유년의 추억이 담긴 고향. 무無에서 탄생시킨 무형의 형질을 키워 한 사람으로, 하나의 인격체로, 한 집의 가장으로, 사회인으로 성장하게 한 유일한 대지인 고향은 그러나 인간의 대지에서 머물기만을 고집하기 어려운 하늘나라의 에덴동산이다. 어쩌면 저 영원한 그리움의 대명사인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는 금단의 사과를 따 먹은 이브였는지 모른다. ‘그리움’ 은 망각의 유속에 휩쓸려 서서히 하나 둘, 하늘로 귀향하여 지상에는 더 이상 에덴이라는 행복, 에덴동산이라는 행복동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낳고 자란 고향땅은 더 이상 고향이 아닌 마음속에 떠도는 관념으로 깊이 패여 상처로 얼룩진 눈물의 고향하늘로 존치된다. 그런 의미에서 ②의 시편은 망향가望鄕歌다. ‘어연 어버이 떠난 그 자리에/먼 길 돌아와 내가 있는데/이순의 나를 안고 어디로 가는’이라는 망향의 장단이 구슬프게 울려 퍼진다.
③의 시편 또한 ‘고향은 있건만’, 어버이 돌아가시고, 동산에서 뛰어놀던 유년의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간 ‘고향 없음의 표기’이다. 시적화자는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지만, ‘고향’은 이미 ‘낮 설은 타향’으로 변모하여 버린 지 오래인 ‘아스라한 기억들이 전설처럼 들려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정든 고향을 그리워하며 다시 예전의 정을 떠올리지만, 고향엘 가도 더 이상 고향이 아닌데, ‘고향은 있건만’ 우겨대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근원은 어머니다. 소중한 추억, 소중한 동경의 심지, 소중한 영혼의 둥지인 ‘어머니’에의 회상이야말로 영원한 시적 상상력의 화석化石 아닌가.
사립문 나서시며
마주 잡은 손 놓지 못하시고
언제 다시 올래
묻지도 못하시던 어머니
손수 빚어낸 음식
바리바리 싸주시며
타향 객지 몸성히 잘있거라
흔드시던 손
-<고향무정> 일부
고향이 고향으로 등장하며 누구나의 뇌리에 그리움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있는 이유를 찾는다면 단언컨대 그것은 ‘어머니’로 인함이다. 모태 없이 생명탄생의 법열을 상상할 수 없다. 어머니의 젖가슴 없이 생명사랑의 가치를 말할 수 없다. 터지고 갈라진 어머니의 손길 없이 생명운동의 약진을 설명할 수 없다. 실로 ‘어머니’라는 말에는 우주의 온갖 신비와 신기함과 비밀이 담겨져 있다. 위 시「고향무정」은 ‘사립문’을 나서시면서 기억에 저장된 ‘어머니’를 회상하며, 어머니를 그리는 사모곡이자, 그리운 고향의 ‘어머니’를 만나고 뵙는 피안의 현장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방망이 두드려 지아비 적삼 만드네/광목에 물 한 모금 적시어 밤 이슥토록/ 가난을 등에 지고 온 어머니’ (<다듬잇돌>일부)라든가, ‘심지 내려/ 홀로 밝힌 밤/ 할머니 옛 이야기들어라’ (<등잔불>일부) 라는 유년시절의 향수 어린 비망록의 일단을 꺼내놓길 반복하는 것은 의식 깊이 저장된 그리움의 물꼬가 토해내는 고향상실의 갈증에 기인한다. 이렇게 한고석의 시에는 지구를 둘러싼 세계의 총체성이나 우주의 심원한 질서에 대한 통찰 등의 거대한 담론보다는 여리고 섬세하지만 철저하게 주관화된 기억의 실타래가 뭉쳐져 있다. 이는 '갈증', 고향상실의 갈증에 해당된다.
4. 자연이 주는 힘
자연은 순환과 반복을 연속한다. 시냇물은 흘러가고 호수는 밤을 맞는다. 숲속의 나무들은 ‘나무의 우듬지를 밀어 올리지만 /언제인가 잘려나갈 운명의 몸/.....생략...../산비알에 뿌리 내린 몸통 키우며/오순도순 몸 부비며 살아가는 곁가지(<곁가지> 일부) 처럼 곁가지’를 키우면서 몸체를 키워간다. ‘호롱불’ 이라든가, ‘사립문’ 등등 인간의 마을에서의 기억들이 춥고 으스스하였던 것에 비하여, 한고석의 자연은 은밀하지만 농후한 몸짓으로 새로움의 밀어를 내뿜는다. 자연에 닿아서만 소망을 품고, 자연에 이르러서만 운명개척의 끈을 당긴다.
①차마 말하지 못하고
떨리는 입술로
온 몸의 냉기를 바라만 보았어
양지쪽에 가지 뻗어
시린 손 가득히 햇살을 쥐고는
필거야 다시 피어낼 거야
칼바람 강하게 휘몰아쳐도
제 영혼의 온기로
노오란 꽃 피울 겨울 개나리
-<겨울 개나리> 전문
②배추꼬랭이 언 땅에 꼬옥 박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세상 가시 삼키며
봄이면 봄동으로 다시 피어날 겨울배추
-<겨울배추> 일부
마치 운명교향곡의 우렁차고 약동적인 음향을 들려주는 듯 시적자아의 촉수는 미세하지만 뚜렷하게 강인한 생명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①의 시편에서 보듯이 ‘양지쪽에 가지 뻗어/ 시린 손 가득히 햇살을 쥐고는/ 필거야 다시 피어낼 거’ 라는 이 처연한, 그리고 결연한 주장이 내쏘는 시선은 뜨겁다. 동토의 땅을 환하게 뒤덮어버릴 새 생명들의 새로운 계절, 봄의 환희와 기대가 감정 이입된 상관물로 등장시키는 ‘겨울 개나리’는 그러한 새로운 생명에너지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생을 짓누르는 무수한 ‘냉기’를 이겨내는 치료제는 다름 아닌 ‘칼바람 강하게 몰아쳐도/ 제 영혼의 온기로/ 노오란 꽃 피울 겨울 개나리’ 로 특정 지워진다.
자연이 주는, 또는 자연에게서 수용하는 한고석의 삶의 의지는 이렇게 자연으로부터 근원적인 힘을 얻는다. 생에 대한 치열한 투지와 현실을 극복하려는 냉철한 의지는 오직 자연에서만 발현하는 한고석의 아방가르드적 양상이다. 생명탄생의 시원이 어버이로 표상되는 고향 또는 유년에의 기억이고, 어버이와 고향을 상실한 망향의 갈증이 시적자아의 고통스런 독백이라면, 이 둘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면서 다독거려 주는 새로운 재생 에너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미래를 향하여 치달려나가는 강인한 삶의 동기부여는 자연이 틀림없다. 이렇게 자연은 점차 한고석 시편의 새로운 생명부름이자 새로운 생명율동의 시작점인 것이다. 이와 유사한 동향의 시편이②의 시편이다. 여기서 ‘겨울배추’는 ‘세상가시 삼키며/ 봄이면 봄동으로 다시 피어날’ 강인한 생명의 표현이다. ‘겨울’ 이라는 삶의 차갑고 척박한 환경에서 비상하는 유일한 길은 평범한 것 같지만 ‘자연’에 근접하여, 자연과의 교감을 나누면서 새로운 힘, 바야흐로 약동하는 새 힘을 얻는 모습들을 그린다. 바야흐로 이런 관점이 한고석의 자연관이다. 일반적인 시인들의 자연에 관한 접근방식도 되는 이러한 시도를 통하여 ‘제 영혼의 온기’를 찾는 일이야말로 한고석 시의 가장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운명극복적인 단면이다. 한고석의 또 다른 시편인 ‘산비알에 뿌리 내린 몸통 키우며/ 오순도순 몸 부비며 살아가는 곁가지(<곁가지 일부>)’에서는 자연과의 동화를 그리고 있다. 그러다가 급기야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는 드라마를 펼쳐내기에 이른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그토록 사랑하기에
내 한 잎의 꽃이 되어
그대에게
피어납니다.
-<꽃이 되어> 전문
‘꽃’은 자연의 최대 정점이다. 꽃은 자연의 영혼이며 가장 고귀한 아름다움인 침묵이다. 특히 사람의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어준다. 그래서 예전부터 현인들은 청복淸福이 있는 사람이라야 능히 꽃을 사랑할 수 있는 복을 누린다 하였다. 여기서 복은 행복을 의미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란 목적이 되고, 스스로 ‘꽃’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이 분명한 ‘그대에게/ 피어나는’ 일이라면, 이 시점부터 행복을 말할 수 있다. 삶의 모든 ‘허기’ 와 모든 ‘상실’의 고뇌는 광대무변한 자연의 치유내지는 안식에 안착하였다는 인식이 이 시편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할 것이다.
5. 맺는말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다양한 사회 문화적 특성들이
존재한다. 한고석은 여러 ?쳤玆湧?통하여 시대의 특성과 개인의 취약점을 일종의 ‘허기’로 진단한다. 이 시대의 특성 중 하나는 공유나 소통의
방식을 차치하고 시인 자신을 비롯하여 사회구성원들이 ‘허기’에 시달린다고 본 것이다. 이는 단순히 배고픔이 아니라 갈증의 배고픔, 정서의
배고픔이다. 즉 식탁에서 밥을 먹음으로써 채워지는 욕구가 아니라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욕구에의 허기다. 이는 인간성의 원형이자 모태인
고향상실이라는 현대적 삶의 방황과 실의에서 오는 번뇌의 갈증을 짚는다. 그리고는 궁극적으로 한고석은 그에의 치유방식으로 자연을 제시한다. 자연과
의 동화同化를 추구하는 서정적 대상인 자연을 통하여 치유불능의 '허기'와 '갈증'을 치유되는 동시 새 힘을
추구하는 것이다. 육체만이 아닌 영혼의 명징성을 포함하여 말이다. 좋은 관점이다. 반면에 상당수의 시편들의 호흡이 늘어진다. 시어들의 고착적인
정형성에다 시행이 너무 길다. 이러한 현상들은 다분히 사물과 영상들을 관념화 시킨 탓이다. 특히 시어에서의 새로운 이미지 창출도 깊이 고민해야할
대목이다. 그렇더라도 시의 부름을 듣고 뛰어나가는 한고석의 시의 자세는 부지런하다. 가일층 정진하여 한고석의 시세계가 날로 윤택해지고, 시처럼
삶이 윤택해지며, 더 나아가 시와 삶을 비롯한 온 생애가 온전히 아름다워지기를 염원한다.
* 신익선
충남문협 전 회장님은 시와 수필을 쓰시던 분이신데
2013년 평론가로도 등단하셨습니다.
여러 장르에서 활동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아름다워서
이번에는 한고석 시인의 시집을 평설하신 신익선 선생님의 글을
회원님들과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여
홈전체공지로
지정하고 전체메일로도 발송합니다.
2016년 8월 24일 카페지기 김윤자 드림
* 한국문인협회충남지회 카페에서 6회로 발송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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