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3: 6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고전 13: 7 모든 것
고전 13: 6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사랑은 결코 불의를 행하거나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사랑은 성결하고 의롭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를 그냥 죄 없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의 독생자에게 우리의 죄의 형벌을 담당시키심으로써 공의롭고 정당하게 우리를 구원하셨다.
1]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1) 불의
불의는 하나님의 원수이니,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가 그것을 기뻐할 수 없다. 시 5: 4에 말하기를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불의(不義)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 사 53: 4-6 –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2) 기뻐하지
성도 된 우리가 어찌 불의를 기뻐할 수 있을까?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배척하며 떠날 그때에 바로 참 기쁨은 신자의 마음 속에 온다.
2]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그러므로 우리 본문 하반절 (下半節)은 뒤이어 말하기를,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한다. 이 말씀 뜻은, 복음 진리가 좋아할 바(복음 진리가 가르친 선과 의)를 기뻐한다는 뜻이다.
(1) 진리
"진리"는 여기서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
* 골 1: 5 -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 엡 1: 13 -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 갈 5: 7 -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 살후 3: 13-14 –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14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 요 1: 17 –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2) 함께
"함께"란 말은 "진리"란 말을 인격화(人格化)한 경우의 용법(用法)이니, 성령께서 진리를 통하여 인격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이런 표현법이 나왔다. 그런데 이 기쁨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① 그것은 물론 몸의 건강을 위하여도 유익하다.
② 그보다도 그것은 영적(靈的)으로 유익하니,
기쁨이 있어야 믿음과 감사가 증진(增進)되고 또한 모든 덕을 힘있게 피곤함이 없이 실행하게 된다.
고전 13: 7 모든 것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우리가 참으로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참을 수 있고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다.
이것은 불의와 거짓과 위선의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진실한 성도간의 관계는, 비록 지금 다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
1] 모든 것을 ... 견디느니라.
(1) 성도와 모든 것.
본 절에 "모든"이란 말이 네번 나온다. 속죄함을 받은 성도들을 위하여 "모든 것은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
* 롬 8: 28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믿는 자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롬 8: 32).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 37).
"만물이 다 너희(성도들)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성도들)의 것이요"라고 하였다. (고전 3: 21-22).
그러면 속죄의 사랑을 입은 사랑의 사람, 성도는 무엇이든지 결국은 자기에게 복될줄 아는 것 만큼, 그는 그 모든 일에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딘다.
한 번은 어떤 배가 파선되어 그 배에 탔던 사람들이 다 죽고 한 사람만 남았다. 그가 바다에서 표류(漂流)하다가 한 무인도(無人島)에 상륙하여 조그마한 초막(草幕)을 짖고 살고 있었다. 하루는 먹을 것을 구하려고 섬을 돌아다니던 중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막이 불붙어 버렸다. 그러나 불붙는 연기 때문에 멀리서 다른 배가 그 연기를 신호(信號)로 알고 와서 그 사람을 건져주었다.
그레이스 삭스(Grace Saxe) 부인은 외국 선교사로 가기를 작정하고, 타고갈 기선을 정하고 떠날 시간까지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 부인은, 부친이 병들었기 때문에 정한 날자대로 떠나지 못하여 마음이 불안하였다. 그후에 알려진 바는 그녀가 타려던 배가 파선하여 승객(乘客)은 모두 다 죽었다.
(2) 모든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 줄 아는 자는 역경과 고난에 대하여 보는 방법이 불신자와 다르다.
성도는 평안한 일에도 인내와 소망과 신앙을 지키지만, 역경과 고난도 자신을 훌륭하게 만들어 주는 줄 안다.
* 롬 5: 3-4 –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약 1: 2-4 – 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성도는 역경과 고난을 잘 이긴 뒤에 하나님의 상급이 오는 것을 믿는다.
* 약 1: 12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그는 자기를 위하여 독생자의 보혈까지 내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까지든지 실패하지 않을 줄 믿는다. 이 믿음으로 그는 어디까지든지 참으며, 이 믿음으로 바라보며 견딘다. 이러한 생활은 비상(非常)한 일, 곧, 큰 희생이나 순교 행위가 요구되는 경우에만 지향(指向)된 이상(理想)이 아니다.
그의 생활은 "모든 것"이란 말이 보여줌과 같이 일상생활(日常生活)에 실시되어야 한다. 일상생활에 승리 하면, 비상한 희생이나 순교의 승리는 자동적(自動的)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도가 일상생활에 승리하지 못한다면 비상한 생활이나 순교의 때가 와도 그 기회에는 참여하지 못한다(Lenski).
일상생활의 어려움에 있어서, 성도인 나는 참나니, 그 참는 것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기쁜 일이고, 지혜있는 일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사실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기뻐하면서까지 이약속을 바라본다.
* 벧전 1: 3-4 –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견디라고 명령함에 있어서 "모든 것"을 견디라고 하신 것은,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인것 같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동하여 나에게 유익이 될줄을 아시는 주님은, 모든 것을 견디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무거운 짐이 아니고 도리어 복된 소식이다.
2] 사랑은 참는 것
바울이 정의한 ‘사랑’은 ‘참고’로 시작해 ‘견디느니라’로 마친다. 둘 다 <참는 것>이다. 중간중간에도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정의한 ‘사랑’은 - <참는 것>이 아닐까?
나아가 ‘아니하며’가 8번이나 나온다. ‘아니 한다’는 것도 사실은 <참는 것>에 해당한다. 그런 의미로 다시 한번 읽어보자.
시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시기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해지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을 참으며)
성내지 아니하며, (성내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악한 궤계를 꾸미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보고 기뻐하는 마음을 참으며)
그러나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고 또 ‘모든 것’을 견디라고 했다. 요컨대 매사에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성령의 은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며 사랑은 믿음 소망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다. 다른 모든 것은 폐해져도 하나님 사랑은 영원히 남는다.
아무리 성령의 은사가 많아도 교회 안에서 끝까지 모든 것을 <참지 않으면> 성도 간의 분쟁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본문의 일차적인 뜻은 상대에 대해 어떤 종류의 나쁜 생각도 품지 않는 것이다. 우선 싫어하거나 미워해선 사랑이 아님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 상대에게 조종, 위계, 사기를 치려해서도 안 된다. 손해, 부담, 상처를 주는 일을 궁리해선 더더욱 안 된다.
그러나 악한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고 사랑이 아니다. 상대에 대해 가능한 모든 좋은 것을 생각해서 실천해야 참사랑이다. 그런데도 바울이 악한 생각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구태여 사랑이라고 말한 까닭은 원어적인 특별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악한 것”의 헬라 원어 kakos에는 채무를 뜻하는 Debit의 의미가 있다. 즉 상대와 있었던 안 좋았던 일, 상처를 주고받은 일, 무시당하거나 자존심 상한 일, 손해 본 일 등 언젠가는 앙갚음하려고 두고두고 되씹지 말라는 것이다. 나아가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면 겉으로는 용납해 준 것처럼 해놓고, 뒤로는 여전히 앙금이 남아 있어도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의 장부에 남아 있는 상대에 대한 모든 빚을 완전히 지우라는 뜻이다. 회계장부에 빚으로 기록해 놓는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받아내겠다는 목적이다. 어떤 형태로든 복수하여 내가 당한 만큼 톡톡히 갚아 주리라는 뜻이다.
현실적 대응책이 불가능하다면, 내 마음의 저주라도 절대 약해지거나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도이다. 그런 불편한 관계가 자주 오래가면 Black List에 올려버린다. 말하자면 회수 불가능한 빚으로 간주하여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는다. 영원히 상종못 할 인간 취급을 하여 자기의 기대나 관심의 대상에서 완전히 제거해 버린다. 차라리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되돌릴 가능성이라도 있다. 무관심이야말로 분노나 저주 대신 사랑의 완전 반대다.
사랑은 상대에게 받으려고 남겨둔 모든 채권을 완전히 탕감해 주는 작업이다. 나아가 예수님이 가해자의 모든 잘못을 십자가에 지고 죽은 것같이 그 채권을 먼저 하나님께 갚아야 할 채무로 바꾸는 싸움이다.
받아내야 할 것을 오히려 그저 줌으로써 받는 오직 십자가가 아니고는 사랑은 커녕 용서도 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앙금은 예수님의 나를 향한 사랑마저 가로막는다. 이제는 마음의 모든 부채를 십자가 지우개로 지우자.
[내 마음의 풍금]이란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홍연(전도연 분)은 17살인데도 아직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다. 어머니는 이 소녀(딸)에게 이름을 부르지 않고 언제나 욕을 하면서 부른다. “야 이 예맨아이야!”
그 날도 밥을 태우고 집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동생을 등에 업고 동산 위로 올라갔는데, 우연히 한 총각을 만난다. 그 마음 초등학교에 새로 부임하시는 총각 선생님(이병헌)이다. 이 총각이 한 마디한다. “아가씨, 여기 학교가 어디지?” 그 한마디에 이 소녀는 완전히 제정신이 든다.
그 이전까지 동네에서 아무도 자기를 ‘아가씨’로 불러준 적이 없었다. 아마도 나이는 찼지만, 아직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이리라. 자기 자신 역시, 나이는 많아도 항상 자신이 어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한 마디를 들은 후부터, 이 소녀는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렸다.
그 때부터 더 이상 아이들과 어울려 ‘고무줄놀이’도 하지 않았다. 동생하고 싸우지도 않았다. 오로지 하는 일이란, 자기를 ‘아가씨’로 불러주었던 선생님. 이 선생님은 바로 자기 반의 담임선생님이셨다. 그분을 마음속으로 사모하는 일을 계속하게 되는 영화다.
여러분, 주님께서 내 이름을 한 번 불러 주실 때, 내 영혼이 살아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우리 이름을 불러주셨다. 그 때부터 우리 인생의 목표, 의미, 생활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부터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인생으로 완전히 바꿔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