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행
오늘날 우리의 삶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서구문명의
물결을 타고 흘러가고 있다. 어떤 것은 좋은 쪽으로 개선되는 부분도 있지만,
좋지 않은 많은 것들이 지나치게 앞질러 가고 있어 매우 걱정스럽다.
그 중 가장 심각한 것 가운데 하나가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남녀의
애정문제이다. 우리가 도덕적인 면에서 불건전한 서구의 풍조를 굳이
따라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 이유를 따지기 전에 남녀가 너무
쉽게 결합하고 너무 쉽게 헤어지는 풍습은 마땅히 지양되어야 한다.
남녀의 애정 결합이 순수하고 진실하고 끝까지 변하지 말 것을 전제로 할 때
값진 삶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게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일편단심! 일념의 사랑은 이 세상을 바꾸어 놓는다.
일념의 사랑은 모든 것을 정화하는 원동력이 된다. 생사의 근원이 되는
음욕까지 맑게 다스려 참 삶의 길로돌이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처자에게 해야 할 바의 일을 충실히 하는 사람
가운데에는 방종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고, 남편에게 의리를 지키고
일편단심 가정을 생각하는 여인이 타락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많은 사람들, 특히 사랑과 이별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일부 사람들은 가정생활을 원활하게 이루기 위하여 서로 의지하고
서로 경계하고 규제하는 법도 자체를 싫어한다.
그리고 나만의 자유와 쾌락을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혼자만의 자유와 쾌락은 자신을 외톨이로 만들어 버린다.
그에게는 의지할 데도, 간섭할 사람도 없으므로, 특별한 인격을 갖추지
않은 이상 방종하거나 성격 이상을 가져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동시에 남녀의 결합은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애정의 결합이고 약속인 만큼,
어느 한 쪽에서 배신을 하고 저버릴 때에는 상처를 받는 쪽의 아픔은 말할수
없이 큰 것이며, 배신자 역시 배신을 한 죄책감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사랑은 기분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분위기에 따라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서로를 살리고 인생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어늘,
정당한 이유 없이 사랑하던 사람을 배신하여서야 되겠는가?
사랑에 한이 맺힌 삶은 죽어서 상사뱀이나 원귀가 되어 원한을 갚는다는
말이 있듯이, 사랑의 배신은 큰 원한을 사는 일이므로 크게 자제해야만 한다.
전라남도 고흥의 수도암(修道庵)은 상사뱀이 되어 밤마다 괴롭히는
한 여인의 원혼을 천도하기 위해 세운 절이다.
그 창건 연기를 살펴보면서 음욕의 인과를 함께 음미해보자.
과거에 낙방한 홍씨(洪氏) 총각은 한려수도의 장관을 넋없이
바라보며 고향으로 돌아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고흥 땅 풍남리라는 작은 포구를 뒤로 하고 지나갈 무렵, 장대처럼 쏟아
붓는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홍총각은 대나무 숲 속의 초가집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 집은 들이치는 비를 밖에서 피할 만한 곳이 따로 없었다.
“주인 계십니까? 잠깐 비를 피해 갈까 합니다.”
방문이 가만히 열리면서 놀란 눈을 한 젊은 여인이 모습을 보였다.
“방은 누추하지만 관계치 않으시면 잠시 들어오시어 비를 피해 가십시오.”
홍총각은 옆으로 비켜 선 여인이 좀처럼 보기 어려운 절세의 미인임을 느낄 수
있었다. 저녁 나절에 시작된 소나기는 날이 어두워질 무렵부터 한층 더
쏟아져서 두 사람은 한 방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미목이 수려한데다 어질고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홍총각에게
여인은 저녁을 대접하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 때 고을의 이름나 미인으로서 뭇 남성들의 선망이 되었던 자신이었건만
시집온 지 1년만에 남편이 병으로 죽어 과부가 된 이야기며, 병간호
때문에 있던 재산마저 다 잃어 모든 것이 싫어진 나머지,
이 숲 가운데 오두막을 짓고 세상을 등진 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홍총각 또한, 부럽지 않은 양반집 자제로서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마침내 전생의 인연이었던지 뜻이 통하여 백년가약을 맺기로 하고 하
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튿날, 아침 홍총각은 집으로 가는 즉시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꽃가마를 가지고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길을 떠났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 보름이 가고 한 달, 두 달, 1년이 다 가도록 한번 간
홍총각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여인은 뒷동산에 올라서 하염없이 바다와
나룻배를 바라보며,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 몸져 눕게 되었다.
워낙 상사병이 깊어 약으로는 어이할 수 없다는 의원의 말대로,
홍총각과 이별한 지 꼭 1년만에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편 홍총각은 부모님의 기대와 간절한 소망에 따라 엄한 훈계 속에서
초가집 여인을 까맣게 잊은 채 열심히 책을 읽으며 과거 준비를 했다.
그리하여 그 다음 과거에 급제하였고, 함평 현감으로 부임하여
양가댁 규수를 아내로 맞아 단란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던 어느 날, 현감이 술이 거나하게 취해 막 겉잠이 들었을 때였다.
이불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눈을 뜨자, 눈앞에는 커다란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곧 큰소리로 외쳤다.
“게 누구 없느냐.
빨리 들어와서 저 구렁이를 냉큼 붙들어 내어라.”
그러나 하인들이 문을 열려고 하였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문을 부수려 하자
손에 쥐가 내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현감은 숨이 콱콱 막히고 정신이
몽롱해지는 속에서 구렁이가 혀를 날름거리며 여자의 음성으로 역력하게 말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 “도련님, 당신은 왜 저를 버리셨습니까?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언약을 믿고 애절하게 기다리다
상사병으로 죽은 여인입니다. 맹세를 저버리면 구렁이가 되어
당신을 죽이겠다고 한 그날 밤의 약속을 잊으셨습니까?”
그러다 새벽이 되어 첫닭이 울자 구렁이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현감은 총각 시절의 잘못을 뉘우치며 사죄하였지만, 그날 이후 밤이 깊어지면
반드시 구렁이가 나타나는 것이었다. 급기야 현감은 병이 들었고,
그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약도 쓰고 굿도 하였지만 효험이 없었다.
생각다 못한 현감은 깊은 산 속의 고승을 찾아가 구원을 청하였다.
“여인이 살던 대나무 숲 속의 초가집을 헐고 그곳에 절을 지은 뒤,
재(齋)를 크게 지내 주고 조석으로 축원을 하시오.”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현감은 절을 창건하고 축원하였으며,
그 뒤부터 상사뱀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단순한 하나의 전설이나 민간설화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녀 사이의 굳은 약속을 배신하거나 욕정을 채우기 위해 사람을 속이면
그 인과는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좋지 않게 되돌아온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한다.
-일타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