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자료[1973]王梵志(왕범지)시 무제(無題)
王梵志(왕범지)
당나라때 시인들 중에 특이한 인물이 있다.
그는 시를 쓸 때 어려운 말도 쓰지 않았고, 가
장 통속적인 표현으로 가장 쉬운 시를 썼다.
그는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 평생 무슨 일을 했는지,
집안내력은 어떠한지조차도 수수께끼이다.
개략 17,8수정도의 시를 남겼고,
시종 정통문학에서는 배제되어 있었다.
심지어 의고학파(疑古學派)의 학자는 그의 존재 자체도 부정한다.
무제(無題)-王梵志(왕범지)
오부유전시(吾富有錢時), 부아간아호(婦兒看我好)
아약탈의상(我若脫衣裳), 여오첩포오(與吾疊袍袄)襖=袄
오출경구거(吾出經求去), 송오즉상도(送吾即上道)
장전입사래(將錢入舍來), 견오만면소(見吾滿面笑)
요오백합선(繞吾白鴿旋), 흡사앵무조(恰似鸚鵡鳥)
해후잠시빈(邂逅暫時貧), 간오즉모초(看吾即貌哨)
인유칠빈시(人有七貧時), 칠부환상보(七富還相報)
도재불고인(圖財不顧人), 차간래시도(且看來時道)
鴿=집비둘기 합,襖=웃옷 오=袄-안을 댄 중국식 저고리
七貧七富
내가 돈이 있을 때,
처는 나에게 잘 대해주었다.
내가 옷을 벗으면,
받아서 개어주곤 했었지.
내가 돈벌러 나가면,
길까지 따라나와 배웅을 하고,
돈을 벌어 집으로 돌아오면,
함박웃믐으로 나를 맞이해주었다.
내 주변을 비둘기처럼 돌고,
앵무새처럼 재잘거렸다.
그런데 얼마후 가난해지고나니,
나를 보면 싫은 표정을 짓는다.
사람은 가난할 때도 있고
부자일 때도 있는 법인데
돈만 사랑하고 사
람은 사랑하지 않는구나.
내가 다시 부자가 되면 두고보자.
무제(無題)-王梵志(왕범지)
아석미생시(我昔未生時), 명명무소지(冥冥無所知)
천공강생아(天公强生我), 생아부하위(生我復何爲)
무의사아한(無衣使我寒), 무식사아기(無食使我飢)
환니천공아(還你天公我), 환아미생시(還我未生時)
내가 아직 태어나기전
옛날에는 아무 것도 몰랐었다.
하늘이 나를 억지로 태어나게 했는데,
나를 태어나게 해서 뭘하라는 것인가?
옷이 없이 추위에 떨고,
먹을게 없어 굶주리고 있다.
하늘이여 나를 돌려줄테니,
태어나지 않았을 때로 돌아가게 해달라.
무제(無題)-王梵志(왕범지)
성외토만두(城外土饅頭), 함초재성리(餡草在城裏)
일인흘일개(一人吃一個), 막혐몰자미(莫嫌沒滋味)
세무백년인(世無百年人), 강작천년조(强作千年調)
타철작문한(打鐵作門限), 귀견박수소(鬼見拍手笑)
성밖에는 흙으로 만든 만두가 있고(무덤),
성안에는 만두속이 있다(산 사람)
한 사람이 한개씩 먹을 수있으니,
맛없다고는 말하지 말라.
세상에 백년을 사는 사람이 없는데,
천년은 살 것처럼
쇠로 문턱을 만들다니,
귀신이 보면 박수치며 웃겠구나.
무제(無題)-王梵志(왕범지)
범지번착말(梵誌飜着襪), 인개도시착(人皆道是錯)
사가자니안(乍可刺你眼), 불가은아각(不可隱我脚)
내가 양말을 뒤집어 신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차라리 네 눈에 거슬리는게 낫지,
내 발이 불편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제(無題)-王梵志(왕범지)
타인기대마(他人騎大馬), 아독과려자(我獨跨驢子)
회고담시한(回顧擔柴漢), 심하교사자(心下較些子)
다른 사람들은 큰 말을 타고 가는데,
나 혼자 당나귀를 타고 간다.
뒤돌아보니 땔감을 지고가는 사내가 보인다.
내가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낫구나.
무제(無題)-王梵志(왕범지)
아유일방편(我有一方便), 가치백필련(價値百匹練)
상타장복약(相打長伏弱), 지사불입현(至死不入縣)
나에게 보물이 있었는데,
가격이 비단 백필은 되었다.
센 놈과 싸웠다 져서 빼았겼지만.
감수하고 살아야지,
죽어도 관청에 고소는 못하겠다.
이하-동아일보 2022-12-02 03:00
안쓰러운 인정세태[이준식의 한시 한 수]〈189〉
―‘내가 돈이 많으면(오부유전시·吾富有錢時)’
왕범지(王梵志·약 590∼660)
내가 돈이 많으면
마누라와 아이는 내게 참 잘하지.
옷 벗으면 날 위해 차곡차곡 개주고,
돈 벌러 나가면 큰길까지 배웅해주지.
돈 벌어 집에 돌아오면 날 보고 함박웃음 지으며,
내 주변을 비둘기처럼 맴돌며 앵무새처럼 조잘대지.
어쩌다 한순간 가난해지면 날 보고는 금방 싫은 내색.
사람은 아주 가난하기도, 또 부유해지기도 하는 법이거늘,
재물만 탐하고 사람은 돌보지 않는다면,
장차 어떻게 될지 두고 볼 수밖에
(吾富有錢時, 婦兒看我好.
我若脫衣裳, 與吾疊袍襖.
吾出經求去, 送吾卽上道.
將錢入舍來, 見吾滿面笑.
繞吾白합旋, 恰似鸚鵡鳥.
邂逅暫時貧, 看吾卽貌哨.
人有七貧時, 七富還相報.
圖財不顧人, 且看來時道.)
선승(禪僧)이 시를 통해 대놓고 부유할 때와 가난한 경우를
대비한 예는 흔치 않다. 재물 앞에 각박해진 인정세태를
이렇듯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건 자신이 세속의 명리와는 동떨어진
승려였기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재물이 있고 없음에 따라
가족조차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수시로 표변할 수 있다.
극도로 가난했다가 큰 재물로 보상받아 부유해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련만 재물만 탐하느라 사람을 돌보지 않는 세태가
시인의 눈에는 안쓰럽고 딱하다.
종교적, 교훈적 효과에 가려 시적 흥취가 다소 퇴색되긴 했지만
그의 시는 일상 대화처럼 쉽고 친근한 어휘와 어투가 특징이다.
이 때문에 당시 많은 사원에서 초학자의 학습용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옷이 없어 날 추위에 떨게 하고, 먹을 게 없어 날 굶주리게 하느니
/하늘이여 그대에게 날 돌려줄 테니,
태어나지 않은 그때로 돌아가게 해주오’처럼 자유분방하고 기발한 발상,
해학미 넘치는 풍자 등으로 해서 ‘범지체(梵志體)’가 생겼고,
한산(寒山), 왕유, 백거이 등 적지 않은 시인들이 이를 답습했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