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이야기🌼
-권혁웅-
골목길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여우가 그녀 주변을 돌아 다니고 있었다 나를 처음 알아본 것은 그녀가 아니라 여우였다 긴 치마에 가방을 모아 쥔 손이 가지런했다 흰 발목과 꼬리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가자 여우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여우가 나를 알아보았을 때 겨우 열다섯이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곁을 지나쳐갔다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삼 년 후에 다시 여우를 만났다 한성여자고등학교 하교 길, 여우는 고갯마루에 앉아 있다가,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학생들 틈에 끼어들었다 나는 몰래 여우를 따라갔다 골목을 돌아 한 대문 앞에서 꼬리를 놓쳤다 집에는 병든 노모와 아이들이 보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겨우 열여덟 이었으므로, 닫힌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대학 때에 그녀를 만났다 그때 겨우 스물둘이었으므로 나는 그녀와 백년해로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 대해 안 건 아홉에 하나였다 왜 열이 아니냐고 물어볼 사람은 없겠지 그녀와의 보금자리는 늘 풍찬노숙이었다 천 일 을 하루 앞둔 어느 날 결국 그녀는 나를 버렸다
그 후로도 자주 여우가 출몰했다 어떤 여우는 몇 년 동안 내 그림자를 밟다가 사라지기도 했고 어떤 여우는 내가 맛이 없다고도 했다 여우인 줄 알고 버렸던 그녀가 몇 년 후에 여봐란 듯이 아이를 낳기도 했다 그때마다 간이 아팠으나 며칠 후면 새살이 돋곤 했다
나는 아직도 겨우일 뿐이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도 다음이 궁금하지만 미안하게도 내게는 뒷이야기를 기록할 여백이 없다 여우는 겨우 말하면, 달아난다 당신도 알다시피 여우 이야기는 늘 미완이다
[황금나무 아래서] 문학세계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