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5월11일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제1독서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9-18
복음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20-23ㄱ
◈ [서울] 부활 제6주간 금요일
2018년 나해 5월11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지난 토요일은 아버님의 기일이었습니다. 어린이날이 아버님의
기일입니다. 아버님은 따뜻한 봄날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어린이 날이기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모일 수 있었습니다. 미사를
함께 하면서 가족들이 기억하는 아버님의 모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저는 가족들이 기억하는 아버님을 함께 나누면서 아버님의 삶을
마음에 새기고 싶었습니다. 그러한 기억들을 가족들의 삶을 통해서
드러낸다면 아버님은 우리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의 기억을 함께 나누니 아버님에 대한 행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아버님은 강직하셨고, 책을 가까이
하셨고, 분별력이 좋으셨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많으셨습니다. 글을 쓰셨고, 시를 쓰셨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많이 배우셨던 아버님은 집안의 기둥과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님에 대한 기억을 한마디로 하였습니다. 돈을 벌지는
않으셨지만 평생 존경하면서 함께 할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작은
어머니는 아버님에 대한 기억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아버님은 말씀은
없으셨지만 조금 어려운 분이었다고 하였습니다. 형님은 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저와 비슷하였습니다. 강직하신 분으로 기억아고
있었습니다. 조카들도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나누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주 자상하셨다고 기억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삶을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는지, 사도들과 초대 교회 공동체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면서 기쁨과 희망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들도 때로는 의견이 달랐던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어떻게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였고,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문제들을
해결하였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 기적, 삶을 보았던
제자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성서는 아름다운 이야기, 희망찬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한 인간의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서로 다투고, 죽이는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과 허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아내의 탓으로
돌렸던 아담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시기해서 죽인 카인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팔아넘긴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부하를 시기했던 왕도
있었습니다. 스승을 팔아넘긴 제자도 있었습니다. 스승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제자도 있었습니다. 성서는 어째서 인간의 나약함을,
인간의 잘못을, 인간의 교만을 숨기지 않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기쁜 이야기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행복만을 이야기 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에게 다가올 위험과
고통을 가감 없이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여러분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해산할 때에 여인은 근심에 쌓입니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고통과 시련이
있겠지만, 박해와 순교가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근심은 ‘불통’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말씀과 함께 하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의 비유에서 소통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고, 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에서도 이야기 하셨습니다.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싱싱하게 열매를 맺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말라 버릴 것이고, 버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시는 근심과 기쁨의 기준은 바로
‘소통’입니다.
우리 몸의 건강도 소통이 중요합니다. 혈액순환이 잘 되면 우리의
몸은 건강을 유지하게 됩니다. 신선한 공기와 양분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노폐물이 걸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도,
소화가 잘 되어야만 합니다. 소화가 안 되고, 배변이 안 되면 음식을
잘 먹을 수도 없고, 우리의 건강은 점차 나빠질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오늘 옷을 적시지 말고, 내일 내릴 비 때문에
오늘 우산을 펴지 마십시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하느님의 영광으로 살아가자!/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5월11일 부활 제6주간 토요일
하느님의 영광으로 살아가자!
복음: 요한 16,23-28: 아버지께서는 친히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23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신다. 지금까지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은 것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전에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베푸시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영광을 받으신 후에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와 청을 아버지께 드릴 수 있고
아버지께서는 그 청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의
기쁨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청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바로 구원과 관계되는 것이어야 한다.
구원과 관계되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24절)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을 청해야 한다. 이 말씀은 잠시
우리를 즐겁게 하는 기쁨 말고 항구하게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을 청하라고 하신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리게 될 충만한 기쁨이란
우리를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삼위일체 안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분을 누리는 것이다.
“더 이상 너희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지 않고 아버지에 관하여 드러내
놓고 너희에게 알려줄 때가 온다.”(25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때’는 우리가 그분을 마주 뵙게 될 미래의 삶을 의미한다. 즉
“얼굴과 얼굴을 마주”(1코린 13,12) 본다는 때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라는 말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같은 곳) 같은 말이고, “너희에게 알려 줄 때”
라는 것은 아들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즉,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그날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청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청하겠다는 말이 아니다.”(26절)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는
나라에서 살 미래의 세상에서 좋은 것들로 이미 우리의 소망이 다
이루어질 텐데 우리가 청할 것이 있을까? 우리가 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육적이고 자연적인 상태에서 영적인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만이 아들이
아버지께 청하시지 않고 청하는 이들의 기도를 아버지와 함께
들으시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하느님이시기에 당신이
하느님께 청하지 않으시고도 “너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27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신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
(1요한 4,19)이라고 한다.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이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한 원인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때도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던 것이다.
그로써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는 은총을 주셨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28절) 그분은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에게서
오셨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받으신 육체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육체를 거두심으로써 세상을
떠나셨고, 인간으로써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아버지께로 가셨지만,
그분의 다스림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버리신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셨고, 십자가를 통하여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고
이제는 영광 중에 돌아가시는 때이다.
이제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그 모범을
따라 살 때에 예수님과 같이 그분을 닮아 아버지께 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우리를 성령께서
이끌어주신다. 성령 안에서 성령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언제나 주님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은총을
청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기타] 말씀에 매인 믿음의 줄 : 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나해 5월11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말씀에 매인 믿음의 줄
오늘은 “말씀에 매인 믿음의 줄”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누가복음 5장 5절 말씀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범지 점프가 있는 곳이 어딘 지 아십니까?
미국 콜로라도에 있는 로열 협곡 현수교 번지점프입니다.
무려 321미터나 되는 정말 어마 어마한 높이입니다.
사람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다리가 저절로 후들거리는 이 높은 곳에서 무얼 믿고
점프를 하겠습니까? 바로 절대 끊어지지 않는 강력한 줄과 그 줄을
어떤 힘이 있어도 붙들 수 있는 견고한 기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마음 놓고 점프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아무리 눈앞이 아찔한 높은 문제의
절벽 위에 서 있다 할지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
기둥에 믿음의 줄을 꽁꽁 묶기만 하면 담대하게 세상을 향해 점프를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말씀에 매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느 곳에든지 갈
수가 있지요.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믿음의 줄을 어디에 묶고 계십니까?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 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고통을 품어 안는 힘|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5월11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요한16,20-23)
고통을 품어 안는 힘
성 아우구스띠노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에
승리를 거두게 하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사실 “주님은
기쁨이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기쁨이십니다. 하찮은 우리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까롤로 까레또). 그러므로 기쁨이신 주님을
차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듣고 근심에 싸인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16,2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게 된다는 말씀은 곧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완전한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승리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죄악의 어둠에 죽고 거듭나는
일상의 새 삶을 통해서 부활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고통이 없이
영광 없고, 죽음이 없이 부활이 없습니다.’
기쁨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기쁨에 앞서 괴로움을 크게 겪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것에 맛들이지 않고
주님을 희망하고 천상 것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주님을 갈망하면 처음에는 갈등이 생깁니다. 할 일도 많아집니다.
손해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고 괜한 일을 시작하였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남들은 편히 사는데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가까이 가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조금만 더, 또다시 참아 내고 이겨내면 하느님의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산할 여자가 어여쁜 아기를 기다리는 진통의 시간을
겪듯이 우리 또한 아픔의 시간을 이겨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고통은 없어질 것이 아니라 품어서 극복되어질 고통이라는 사실이고
진통이 끝난 뒤 새로운 생명의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상처를 극복하는 사건이지
그것을 없던 일로 만드는 사건은 아닙니다. 인생 여정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은 부활의 기쁨을 향한 디딤돌이지 없애야 할 절대악은
아닙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혼돈과 실망과 눈물의 순간에
그리스도의 눈물은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기도가 됩니다. 기도는
우리 고통의 진정한 치료제입니다. 기도에서 또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분의 자애로운 눈길이 우리를 평안케
합니다. 그분 말씀의 힘은 우리를 지지하고 희망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옆에 서시어 기도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1-42).
참된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얻기 전에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찾아나서는 일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기도 안에서 주님을 차지하여
고통을 감당하고 기쁨을 만드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예레15,16).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도회] 목숨 아홉인 고양이도 근심 때문에 죽습니다!
2018년 나해 5월11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목숨 아홉인 고양이도 근심 때문에 죽습니다!
돌아보니 저도 참 쓸데없는 근심.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늘 삶에 여유가 없고 팍팍했습니다. 인생이 늘 우울.
울적했고, 긴장초조의 연속이었습니다.
날씨가 흐리면 흐리다고 걱정,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걱정, 시험 잘
못볼까봐 걱정, 만남의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
혹시라도 내 꿈이 좌절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그리고 어떤 날은
걱정이 없어서 걱정...
‘목숨이 아홉 있다는 고양이조차도 근심 때문에 죽는다.’는 속담이
남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근심걱정의 연속이었던 어느 잔뜩 흐리고
우울한 날,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하다가, 세면대 거울을
들여다봤는데, 정말이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나이보다는 열살은
더 들어보이는 아주 낯선 제 얼굴이 거기 들어 있었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죽기살기로 대대적인 ‘마음 비우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심호흡에 심호흡을 거듭했습니다. 걷고 또 걸었습니다.
날숨을 내쉴때 마다, 의식적으로 제 안의 근심거리, 걱정거리들을
강제로 밀어냈습니다. 들숨을 들이쉴 때마다 대기중에 있는 충만한
성령의 기운을 들이마신다고 생각하며 힘차게 들이마셨습니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죽기살기로 비움 작업을 거듭하던
어느 순간, 놀라운 기적이 제 내면 안에서 시작되더군요. 끔찍했던
상처들, 미처 치유되지 못했던 아픈 기억들, 수시로 떠올라 삶을
옥죄이던 트라우마들로부터 아주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기적과도 같이 호수처럼 잔잔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한 가지 깨달음이 제게 다가왔는데, 정말이지 쓸데 없는 데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괜히 오지도
않을 쓸데 없는 일에 대한 근심 걱정이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종이배 하나 띄워보내듯, 흘려보내도 될 것들이었는데,
그리고 꼭 붙들고, 끌어안고, 괴로워했다는 뒤늦은 자책감도
들었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들, 동반자이신 성령께 모든
것 내어맡긴 사람들, 보호자이신 성령께 두손 두발 다 든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큰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가도 얻을 수 없는 잔잔한 내면의 평화요 은은한
기쁨이요 자유로움입니다.
태생적으로 불완전하고 나약한 우리들이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근심 걱정,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너그러운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언젠가 우리에게 다가올 고통과 십자가 근본적으로
결핍된 인간 존재로서 당연이 겪어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하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고맙게도 근심 걱정과 관련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지는 한
가지 특권이 있습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복음 16장 20절)
주님 자비와 은총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매일 선포되는
말씀과 더불어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과분한 성령의 은사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근심은 근심도 아닙니다. 기도 안에
소화하고 극복할 수 있는 근심입니다. 그리고 그 근심은 머지 않아
넘치는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근심, 90퍼센트는 근심하지 않아도 될
근심입니다. 나머지 10퍼센트는 기도안에, 성령 안에, 성모님 도움
안에 충분히 극복 가능한 근심입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 청주교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5월11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 22)
기쁨이라는 이름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됩니다.
당신 먼저 우리의 기쁨이 되십니다.
기쁨만큼 깊은 사랑도 없습니다.
사랑을 향한 기쁨이며 기쁨 속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으면 결코 몰랐을 하느님 나라의 기쁨입니다.
아무도 빼앗지 못할 그 기쁨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삶에 함께 하시며 우리가 누려야 할 기쁨을 지켜주십니다.
기쁨으로 우리를 끌어올려주시고 기쁨으로 우리를 바꾸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삶으로 기쁨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기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기쁨의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무도 빼앗지 못할 이 기쁨이 예수님과의
참된 관계이기에 사랑으로 머물게됩니다.
기쁨으로 고통을 이겨내길 기도드립니다.
기쁨과 예수님 사랑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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