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뒷뜰에는 소나무도 있지만 도토리나무나 호도나무등 14그루의 나무가 있다. 그래서 해마다 가을이 깊어가는 이때 쯤에, 나는 뒷뜰에서 낙엽을 밟으며 걷기도 한다. 요즘에는 이제 겨우 네살 반된 외손자 엘리엇(Eliot)과 함께 놀아주기도 한다. 그러다 한줄기 바람이 나무가지를 한번 흔들고 지나가면, 낙엽이 마치 함박눈이 내리듯이 팔랑이며 수없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엘리엇은 그 낙엽이 땅에 닿기 전에 잡으려고 그 작은 두팔을 이리 저리 휘저어며 이리뛰고 저리뛰느라 야단이다.
낙엽을 밟으면서 손자가 뛰노는 것을 바라 보노라면 어느새 내마음은 이곳에 있지않고, 가을의 노스탤지어(Nostalgia)에 빠진다. 가을이라고 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야 당연히 '단풍'일것이다. 그러나 단풍은 가을 에는 너무 보편적이고 어디서나 쉽게 볼수있는 풍정이어서 그런지 단풍 이외에 가을에 생각나는것을 더듬어본다. 그것은 아무곳에서나 쉽게 보거나 느낄수 없는 그런 것 말이다.
이상하게도 '봄'에는 언제나 따스함과 미래의 아름다운 영상이 먼저 마음에 그려지지만, '가을'은 지나온 과거를 생각나게 한다. 나 같은 시골출신은 성장하면서 해마다 반복되는 똑같은 주위 환경의 영상이 뇌리에 깊이 인상지워졌다. 그래서 가을이라고 하면 추수라든가 결실에 관련된 그림이 마음에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어쩔수 없는 것 같다.
내가 자라날 때만 해도 강렬한 시각적인 가을의 모습은 뭐니뭐니해도 새볏짚으로 단장한 노란 초가지붕 위에 널려있는 빨간고추이다. 따가운 가을햇빛을 반사하면서 말라가는 그 빨간고추는 왜 그리 아름답고 따스한 안방같은 정취를 느끼게 하는지, 또 시골집 벽에 짚으로 엮어 걸어 놓은 무청도 잊을 수 없는 정경이다. 바람에 스르륵 소리를 내면서 흔들리며 말라가는 무청을 많이 걸어놓은 집 옆으로 어쩌다 지나칠 때면 그 구수한(?) 무청 냄새도 이제는 아득한 추억속 동화로 변해버린 옛 이야기 속에만 남아있을 것 같다.
추운 겨울내내 얼었다 풀렸다 하기를 반복하면서 그 무시래기는 많이 부드러워지고 맛이 깊어진다고 하시던 그 아저씨는 지금은 어디 계실까? 그리고 가을의 추억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다른 추색(秋色)은 사람의 손길이 닿을수 없는 감나무 꼭대기 언저리에 높이 달려있는 감이다. 왜 시골 아저씨들은 나무에 올라가서 막대기로 딸 수도 있는 스무개 남짓한 감을 따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는 것일까?
한해의 아름다운 수확중의 일부를 그냥 풍성함의 멋으로 남겨두려고 그러는지,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감을 보고 사색에라도 잠겨보라고 그러는 것일까.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통해 무식한 사람들이 교실이나 책에서 배울 수 없는 문학이나 예술적 정감을 자연을 통해 불러일으키려고 그러나 보다.
같은 가을의 영상이라도 초가지붕 위의 붉은고추와는 달리, 감은 왠지 쓸쓸한 한해를 마감하는 저녁 노을을 느끼게 한다. 동양에서는 가을을 인생의 석양에 곧잘 비유하는데, 늙어가는 육신의 안타가움을 표현한 고려 충선왕 때의 관리를 지낸 '우탁'이라는 분이쓴 시조를 읽어보면 참 재미있다.
'한손에 가시 쥐고 또 한손에 막대 들고/늙는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늙음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게다. 쳐들어오는 늙음과 백발을 가시와 막대기로 막아보겠다는 익살이 읽는이로 하여금 미소짓게 한다. 참 기발하고 재미있는 표현이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는 늙음과 어떻게 싸우고 있는가? "많이 걸어라, 많이 웃으라, 과일과 채소 중심의 식사를 많이하라. 또는 주기적으로 의사의 검진을 받아라" 등등이겠지만 늙는 길 오는 백발은 그대로이다. 궁여지책으로 꾀를 낸 것이 머리염색하는 것이지만, 염색한다고 젊어지나요? 잎떨어진 사과나무 가지에 인조꽃을 매어달아 놓아도 사과는 열리지 않는다.
이모습 이대로의 즐거움을 즐기자. 이탁 씨의 시조는 애교라도 있지만, 머리염색은 눈을 속이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깊어가는 가을밤에 가족들과 둘러앉아 옛동요 함께 부르면서 잠시 묵상의 시간 가져 봅시다.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푸른잎은 붉은치마 갈아 입고서/남쪽나라 찾아가는 제비 불러모아/봄이오면 다시오라 부탁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