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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차를 마시는 장면, 앞에는 기러기가 놓여있다. 기러기는 죽을 때까지 다시 짝을 찾지 않는다고하여 끝까지 금슬을 지키는 새라고하여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조선의 왕들의 신주를 모신 가장 성스럽다는 종묘에는 뜻하지 않게도
고려의 부흥을 꾀하다 비명횡사한 공민왕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이 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일 같지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기에 그리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사연은 찾을 수 없고,
공민왕과 그의 둘도없는 부인 원나라 황제의 딸이었던
'노국대장공주'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영정을 대신하고 있다.
공민왕의 사당은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을 들어서면
제례를 주관하는 신관들이 향, 축문, 폐백등을 보관하는 향대청이 바로 있는데,
그 향대청의 뒷켠에 작은 건축물로 들어서있다.
건물의 크기는 정면 측면이 한칸짜리로 간소한 민도리집이지만
사당의 주변에 별도로 담장을 두르고,
앞에는 대문을 설치하여 최소한의 격을 차려주고 있다.
공민왕은 원나라 말기 고려왕자로 태어나
원나라의 서울인 심양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다, 귀국하여 왕이 되었으나,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을 꿈꾸었고,
더 나아가 북방의 옛 고구려 고토까지 회복하고자 북벌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그는 원나라 황실에 줄을 대고 출세만을 꿈꾸던
부원배들과 탐관오리들을 색출하여 바른 정치를 하고자 하였다.
그런 공민왕의 뜻에 가장 부합한 인물로
당시 권력층에게는 인재를 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공민왕은
비록 신분은 미천하였지만 불교의 개혁과 정치개혁에 적합한 인물로
신돈을 기용하여 권력층의 개혁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고,
그의 정책은 공민왕의 신뢰를 얻었지만,
개혁의 대상이었던 당시 권력층에는 그야말로 눈에 난 가시였기에
신돈은 극도의 모함을 받게 되었다.
당시 권력층에서는 신돈을 요승(요사스러운 승려)이라 하여 갖은 모략으로 탄핵하였다.
그결과 결국 신돈도 퇴출되고 말았고,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로 끝이나고 말았다.
하지만 고려말 공민왕의 개혁자체를 잘못했다고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 때문에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 마져도 공민왕이 갖고 있는
고려유민들의 민심을 역행하고서는 새롭게 민심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역성혁명으로 새왕조 조선을 세웠지만,
자신들이 세운 왕조의 사당을 세우면서도
그곳에 고려의 마지막 개혁군주였던 공민왕의 사당을 세웠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공민왕은 정치개혁에도 뜻을 두었지만, 남다른 재주가 많았다.
그는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고려시대 명필로도 소문이 났으며,
그가 그린 그림 또한 최고의 가치를 가졌다.
그가 그린 가장 유명한 그림으로는 '천산대렵도'가 있다.
그런 훌륭한 인품과 개혁의 의지를 가진 공민왕이었지만,
공민왕은 원나라 공주인 노국대장공주를 너무도 사랑했던 까닭에,
당시 왕이면 제한없이 거느릴 수 있는 후궁과 비빈을 들이지 않았다.
오직 노국대장공주만을 사랑했던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가 늦은 나이에 임신하여 산고를 겪다가 결국 죽고 말자,
궁궐안에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자신이 직접그려놓고
그곳에 기거하다 싶이하였다고 한다.
이후 정치도 손을 놓고 개혁정신은 사라지고 말았으며,
그토록 사랑한 노국대장공주를 먼저 보낸 후에는
여장 남장한 사내아이들과 놀아나는 일까지 벌이다가,
그 중에 한 아이에게 죽고 말았다.
조선 종묘에 공민왕의 사당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차를 마시는 장면의 그림과,
공민왕이 그렸다는 말그림이 3폭이 있다.
원대한 꿈을 꾸던 공민왕의 이루지 못한 꿈은 영원히 사라지고,
지금도 한민족은 잃어버린 고구려의 고토를 수복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고,
조선조에 강역마져도 두동강이 난채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있는 처지가 되었다.
공민왕이 다시 살아난다면,
그나마 쪼그라든 한민족의 갈라진 국토 찟어진 동서남북 지역으로 나뉘고,
빈부귀천으로 또 나누어진 국론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남과 북이 한 형제라고 한다면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지만 말고,
그래도 남과 북이 한 형제이고, 또 잘살던 못살던 많이 배웠던 못배웠던
이곳에 살고있는 한민족이 서로 뜻을 합해서 통일을 이룩하고,
언젠가 고구려 고조선의 영토였던 저 광활한 대륙의 고토회복을 위하여
한 번 큰 뜻을 품어보라고 하지 않을런지..
조선왕들의 종묘에 들러 고려의 마지막 개혁군주를 만나고 보고 깊은 생각에 젖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