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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2. 묵상글 ( 사순 제3주간 목요일. - 기도의 정석, - 연결이라는 치유 행위.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08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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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2. 사순 제3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3.12 05:05
- 기도의 정석
오늘 예레미야는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제 독서의 기도 첫째 독서 곧 탈출기가 떠올랐습니다.
“주께서 그의 앞을 지나가시며 외치셨다. ‘나는 주님이다. 주님이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모세는 얼른 땅에 엎드려 예배하고 아뢰었다. ‘주여,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드셨으면,
부디 주께서 우리와 동행해 주십시오.’”
예레미야서를 듣다가 왜 어제 탈출기가 떠올랐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모세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앞을 지나가시는 하느님,
나는 주님이라고 외치시는 하느님 앞에
얼른 땅에 엎드리고 예배하며 아룁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앞을 지나가시는데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여 있고,
하느님께서 나는 ‘주님이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라며 외치시는데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간다면 되겠습니까?
우선 모세처럼 땅에 엎드리는 자세가 보기 좋고 닮고 싶습니다.
이것은 포악한 인간 앞에 굴욕스럽게 꿇린 것과 전혀 다릅니다.
자발적이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거룩한 겸손과 경외심의 표시이며
그래서 땅만큼 낮추어졌어도 행복합니다.
다음으로 그는 예배드립니다.
하지만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예배가 아니라
마치 절에서 백팔 배 절을 올리듯 온몸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 한 분은 당신의 성당 제대 앞에 큰 방석을 깔아놓고는
당신도 그렇게 하고 신자들도 그렇게 하게 하는데 성당에 들어와
바로 자기 자리에 가 철퍼덕 앉지 않고 그 방석에서 큰절을 올리게 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정석입니다.
성당에 들어오자마자 마구 떠들거나
떠들지는 않더라도 먼저 자기 하소연이나 냅다 하지 않고
먼저 하느님께 정성껏 경배드리는 것이 참 기도 자세지요.
그런 다음에야 모세는 하느님께 자기 청을,
곧 동행해주십사 하고 청을 드립니다.
그런데 이는 오늘 예레미야서가 한탄하는 것,
곧 주님께 등을 돌리고 고집스럽게 자기 길을 가려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동행해주십사고 모세가 하느님께 청하지만
실은 자기가 하느님과 함께 가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요청과 동시에 자기 의지를 봉헌하는 기도입니다.
돌렸던 등을 다시 돌려 하느님께 향하는 것,
그런 다음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청하는 것,
이것이 사순절의 회개이자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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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2. 사순 제3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연결이라는 치유 행위(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치유의 연결 행위)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죄를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으로부터 태어나, 언제나 사랑으로 초대받는 존재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죄와 마주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연결이라는 치유 행위(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치유의 연결 행위)
2026년 3월 10일 화요일
그렉 보일 신부(Greg Boyle: 그렉 보일 신부는 미국 예수회 사제로, 세계 최대 갱단 개입·재활 프로그램인 ‘홈보이 인더스트리-Homeboy Industries’의 설립자이자 대표입니다. 그는 폭력과 범죄 속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을 사랑과 치유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사회적 연대와 회복을 강조하는 인물입니다.)는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많은 악이, 사랑의 하느님과의 고통스러운 단절에서 비롯된 결과임을 성찰합니다:
무의미한 총기 폭력, 정치적 배신과 복수, 증오 범죄, 집단 총격, 테러 공격 앞에서 어떤 이들은 단순히 "죄와 악이 드러났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포기한 것입니다. 더 이상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않고, 인간이 태초부터 더럽혀진 존재라 선언해 버리는 셈입니다. 원죄는 이러한 참혹함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에 대해 다른 많은 요인들이 있지만, 원죄는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죄의 유전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태어나며, 언제나 사랑으로 초대받는 존재입니다.
나는 한 친구에게, 예수회(가톨릭) 대학을 갓 졸업한 딸과 함께 '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야기를 나눠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실 죄라는 말을 잘 쓰지도 않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않아요. 죄는 옛 세계의 지도와 같아요."라고요. 어떤 이들은 죄가 더 이상 중요한 주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타까워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죄는 불판 앞에도, 불판 뒤에도 놓여 있지 않습니다. 아예 불판 근처에도 없습니다. 마치 오늘날 이라크로 가려는 사람이 옛 세계의 지도를 사용한다면, 결국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젊은 세대가 죄를 이렇게 바라본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한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오히려 하느님의 초대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죄로 물든 세상을 내려다보시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고 깨어진 세상을 바라보시며 치유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바라보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네 빛이 새벽처럼 터져 나오고 네 상처가 속히 아물리라. 네 어둠 속에서 빛이 떠오르고, 네 암흑은 대낮과 같이 되리라."(이사 58,10). 저는 늘 갱단원들에게 말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은 죄를 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과 딸을 보십니다. 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죄가 아무런 실체도 없다고 믿습니다. 존재의 티끌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덧붙입니다. "어머니신 교회에게 온전히 존경을 드리지만… 그러나 이것은 맞지 않습니다." 그녀는 죄라는 개념을 사랑의 하느님과 결코 일치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일은 인간의 행위를 바라볼 때 강조점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제안합니다:
도덕적 추구는 우리를 도덕적으로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멀어지게 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 "도덕적 추구"라는 옛 세계의 지도를 내려놓고, 온전함과 사랑의 충만, 그리고 꺾이지 않는 기쁨을 향한 여정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다음에 옳은 일을 하자!"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옳은 일"이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건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돕습니다. 더 나은 선택을 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걸으며 온전한 삶과 사랑의 더 깊은 성장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나는 호수에 페레아(Josué Perea)의 musica divina(무시카 디비나) 체험담을 읽다가 눈물이 났습니다. 나의 여정에서도 힙합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영감과 연결의 원천이 되어 주었습니다. 신학대학 입학을 위해 주교님께 드린 발표 제목은 ‘Let them have hip hop’(그들에게 힙합을 허락해 주시오)이었는데, 이는 청소년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호수에(Josué)가 깨달은 것처럼, 제도화한 교회는 때로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은총을 발견하는 데 열려 있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며, 특히 그분을 찾는 마음 안에 계십니다.
—Julia B.
References
Gregory Boyle, Cherished Belonging: The Healing Power of Love in Divided Times (Avid Reader Press, 2024), 40–41, 49–5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alint Mendlik,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과녁의 중심을 놓친 화살은 우리에게 죄가 본질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참된 목표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여전히 다음 번에는 중심을 겨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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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 서로 안에서는 물론이고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모든 존재 안에서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바라보려는 마음!
임종을 앞둔 한 사람이 사제의 임종 기도 중 '마귀'라는 말이 나오자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무진 애를 써서 고개를 살짝 들어 숙였습니다. 놀란 사제가 물었습니다. "왜 '마귀'가 언급될 때 고개를 숙이셨습니까?" 그러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예의를 지키는 데는 돈이 안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원수를 만들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CAC(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활동과 관상을 위한 센터')의 삶의 모토 중 하나가 바로 "악에 대한 가장 훌륭한 대응은 선을 마음에 간직하고 새기며 이를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나쁜 것을 나쁜 것으로 분별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나쁜 것을 나쁘게만 대응한다면, 즉 악에 대해 악으로 대응한다면 더 큰 악, 즉 설상가상의 문제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역사가 증명해 주는 바인데도 우리의 현실 역시 이런 모습을 보일 때가 많지 않나요??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권능을 두고, 어떤 이들은 그분이 악마와 한패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는 선을 악이라 부르는 것이었고, 이것이 바로 성령을 거스르는 죄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마르 3,29). 이는 악을 악으로 대응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선을 볼 줄 모르는 마음은 길을 가리키는 표지판을 거꾸로 돌려놓는 것과 같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제는 마귀를 상상할 때 뿔과 꼬리를 가진 괴물을 상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을 악이라 하고, 악을 선이라 하며, 진리를 거짓이라 하고 거짓을 진리라 하는 이 표지판 뒤바꿈이야말로 진짜 더 무서운 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에게서 참된 선을 바라보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선을 선으로 보지 못한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력, 두려움, 편견, 그리고 자기 이해관계가 그들의 눈을 가려 예수님의 참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오늘 미사의 독서와 화답송에서 예레미야 예언자와 시편 저자는 모두 "굳은 마음", 즉 "닫혀 있는 마음"이라는 개념을 언급합니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이집트를 떠난 때부터 줄곧 완고하게 하느님의 인도를 무시하거나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하느님인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민족"이었습니다. 시편은 '므리바'와 '마싸'라는 장소를 언급합니다. 이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미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한 기적의 양식을 경험하고도, 물이 없다고 불평하며 이집트에서 나온 것을 원망했던 사건을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에서 '굳은 마음'이란 영적으로 닫혀 있는 상태, 고집스럽게 닫혀 있는 마음을 뜻합니다. 이는 이성이든 증거든 성령의 이끄심이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마음이며,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신뢰하고 이를 마음에 간직하고 세상 안에서와 사람들 안에서 선을 보려는 의지를 거의 남겨두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흔히 굳은 마음을 구약 시대 사람들의 영구적인 상태나, 혹은 오늘날 비신자들의 문제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모두는 때때로 마음이 굳어지고, 생각이 닫히는 순간을 겪습니다.
나의 마음은 언제 굳어지는가? 아마도 내가 “걱정하지 말라”(마태 6,25-34)는 계명을 잊을 때일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처럼, 하느님의 약속을 들었으면서도 "걱정의 가시덤불과 더 많은 것을 얻고 모든 것을 갖고 싶어 하는 환상"(마태 13,22; 메시지 성경 번역)이 그 말씀을 질식시키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과 같아집니다.
거짓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행위 중 하나입니다. 거짓은 창조를 붙들고 있는 "말씀(로고스)"을 깨뜨리는 것이며, 하느님과 당신 자신을 "진리"라 부르신 그리스도(요한 14,6)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거짓말은 우리 서로 안에 하느님께서 깊이 심어 넣어 주신 '선'과 '사랑'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사람 안에서 바라보는 선을 그 사람, 당사자는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닫혀 있다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선을 볼 수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중요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안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 안에서, 심지어는 악을 자행하는 사람들 안에도 그 하느님의 선과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성 요셉 수녀회 소속 헬렌 프레잔(Helen Prejean) 수녀나 넬슨 만델라 등과 같은 사람은 이런 믿음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준 대표적인 예들입니다. 헬렌 프레잔 수녀는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책으로 냈습니다. 그 책의 이름이 바로 "Dead Man Walking"(걸어가는 죽은 사람)입니다. 이는 영화로도 상영된 이야기이지요. 헬렌 수녀는 어린 아이들을 납치해 강간하고 살해하여 사형 선고를 받은 어떤 죄수를 보살피면서 그 사형수의 거부와 경멸의 말과 태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보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결국 헬렌 수녀는 그 사형수가 사형을 받는 순간 그 사형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던 것이지요....
우리는 시시각각 우리 안에 심어 주신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의식하고 인식하기 위해 우리 내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잡념들을 내려놓고 오직 이 선과 사랑 안에 머무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마를 두고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버지"(요한 8,44)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악마는 선을 선으로 보지 않고 자기 자신처럼 악으로 보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서로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 존재 깊숙한 곳에 심어 넣어 주신 사랑과 선을 보려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며 우리 믿음의 여정을 해 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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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2.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목을 뻣뻣이 세우고 고약하게 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에, 오히려 적대하며 악담을 퍼붓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두 개의 중심이 되는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말을 들어라” 라고 할 때 “들어라”라는 동사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라고 할 때 “걸어라” 라는 동사입니다. 이 두 동사의 표본은 곧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걷는 일의 표본은 오늘 <화답송>에 나오는 “양 떼”입니다. 곧 ‘양’은 목자의 말을 알아듣고 그의 말을 따라 걷는 이의 표상입니다.
한편, 그 반대의 표상에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가 있습니다. 벙어리 마귀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따라 걷지 못하게 하고, 말씀의 실현을 훼방하는 방해꾼입니다.
이 방해꾼은 <제1독서>에서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 그리고 <화답송>에서의 “무딘 마음”의 표상입니다. 곧 이들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말, 곧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따라 걷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쫒아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 말씀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루카 11,15)고 악담으로 대적하면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순을 반박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이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이 단지 하나의 기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가락, 곧 ‘하느님 권능의 임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뜻이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의 실현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말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직 “하느님 나라”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말씀을 듣고도 따라 걷지 못하게 하는 ‘완고한 무딘 마음’이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이 있어 주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따라 걷고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이미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양 떼”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화답송>의 시편구절을 되새겨봅니다.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시 95,7-8).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주님!
제 안에는 당신 형상의 빈자리가 있습니다.
오로지 임자이신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 계시오니,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성전이오니,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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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2.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본당에는 참으로 많은 봉사자들이 계십니다. 전례 분과 안에서도 헌화회, 제대회, 독서단, 해설단, 복사단, 성가대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의 손길과 기도가 있기에 미사 전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의 고백이 됩니다. 이분들이 뿌리가 되어 전례라는 꽃이 피어납니다.
또 본당에는 신앙 안에서 성장하기 위한 다양한 신심 단체들이 있습니다. 성서 공부반, CLC, ME, 꾸르실료는 각기 다른 영성과 길을 따라가지만, 모두 말씀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고자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본당 사목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 있습니다. 바로 레지오 마리애입니다. 구역장과 반장이 본당을 조직적으로 이끈다면, 레지오 단원들은 기도와 방문과 봉사로 본당의 숨결을 이어 줍니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일정한 기간을 거쳐 ‘선서’를 합니다. 저는 선서가 있는 프레시디움의 주해에는 가능하면 꼭 참석하여 축하해 드리고, 강복을 드립니다. 그 선서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앙 인생이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최근 논의가 되는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 문구 수정에 관한 한 사제의 기고문을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그 글은 교도권의 사목적 의도를 존중하면서도, 레지오의 영성과 대중 신심이 지닌 생명력을 지켜야 한다는 진지한 문제 제기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성모님을 통하지 않고서는’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레지오 영성의 첫 번째 초석이라는 지적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신학은 신앙을 정리하고 보호하는 소중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말하면서 문법이 생겼듯이, 신심의 삶이 먼저 있었고 그 뒤에 신학이 생겼습니다. 양파 껍질을 모두 벗기면 남는 것이 없듯이, 살아 있는 신앙의 체험을 지나치게 분석하고 정제하다 보면 오히려 본질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신심과 신학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관계여야 합니다. 여기서 저는 사제로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는 혹시 교우들의 기도와 신심을 ‘설명해야 할 대상’이나 ‘조정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사목의 이름으로, 신학의 정확성을 이유로, 누군가의 간절한 신앙 고백에 쉽게 제동을 걸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신심이 지나치다고 느껴질 때, 그것을 곧바로 교정하려 하기보다 먼저 그 안에 담긴 갈망과 사랑을 경청했는지 묻게 됩니다. 사제는 신앙의 주인이 아니라 봉사자입니다. 신앙의 생명력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생명이 자라도록 길을 내주는 사람입니다. 사제 자신부터 신학이라는 언어 뒤에 숨지 않고, 신심이라는 현장에서 다시 무릎 꿇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순시기에 더욱 절실히 느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십니다. 그 말씀에는 분명한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분의 겉모습을 안다는 것이 곧 그분을 다 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느꼈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쥐고 있던 해석의 권위, 판단의 권위를 내려놓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기와 질투는 폭력이 되었고,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계획으로 이어졌습니다.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더 높은 자리를 요구하자 다른 제자들은 불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늘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십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마음은 여전히 ‘떡고물’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며 저는 괴로웠지만 동시에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내려놓으라고 하신 분, 이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신 분,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분입니다. 사랑하면 진리를 알 수 있고, 사랑하면 진리를 볼 수 있다고 하신 분입니다. 진리는 반드시 자연이나 신화, 이성이라는 옷을 입어야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사랑 안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그분의 말씀과 표징,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그분 자신이 바로 진리입니다. 신심과 신학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의 신앙은 메마르지 않습니다. 머리로만 이해하는 신앙이 아니라, 가슴으로 살고 몸으로 실천하는 신앙이 됩니다. 사순시기, 우리 각자의 신앙이 다시 그 조화를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우리의 신앙이 차가운 판단에 갇히지 않게 하소서. 사랑으로 시작된 신심과 지혜로 다듬어진 신학이 교회 안에서 하나로 숨 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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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2.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https://cafe.daum.net/bbadaking/LgBn/2017
26.03.12 01:18. 박베로니카
우리는 이 시대 또 다른 하느님의 손가락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이라는 문장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사실 하느님의 손가락이란 표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삼위는 가끔씩 팔-손-손가락으로 상징됩니다. 성부는 팔, 성자는 손, 성령은 손가락을 의미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셋은 일심동체입니다. 손가락은 손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손 역시 팔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또한 팔은 손과 손가락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성령께서 활동하실 때, 비로서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 안에서의 나라, 하느님을 통한 나라는 도래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한 인간 존재가 아무리 하느님 가까이 다가섰다 할지라도, 마귀의 강력한 유혹과 공세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극한 겸손의 덕입니다.
하느님을 떠난 우리는 아무런 힘도 없음을 늘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분 옷자락을 꼭 쥐고 있으며, 그분 손길 안에 머물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마귀와 관련된 예수님 가르침의 요약은 이것입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루카, 11,23)
하느님과 마귀, 그리스도와 반그리스도, 천국과 지옥,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저주, 그 사이에 어정쩡한 중립 지대, 제3의 지대, 투쟁하지 않아도 되는 지역, 방관자로 남아있어도 되는 장소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두 갈림길 앞에서 미적미적 망설이지 말고, 신속하고도 단호하게 선택할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해야만 합니다. 갈림길 앞에서 흥미나 관심을 두지 않는 것 역시 일종의 선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관심과 방관 역시 거절의 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손가락을 통해 이루어지던 놀라운 일들이 지금 이 시대에는 또 다른 선인들과 의인들을 통해 지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잘 준비된 의료진들과 누군가의 피나는 연구 끝에 발명된 최첨단 의료기기들이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시키고 살려내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을 그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싶은 선한 의지를 지닌 의료진들의 손가락은 이 시대 또 다른 하느님의 손가락입니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어린이들, 그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난민들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그들을 존중하고 지지하며 후원하기 위해 자신을 기쁘게 희생하는 사람들의 손가락은 이 시대 또 다른 하느님의 손가락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이웃들이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프고 견디기 힘들어서 겨우겨우 통증을 참아내고 신음 소리를 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이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2천년전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사랑의 기적을 각자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계속해나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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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2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黃Dami 매일묵상
성령을 거스르고 모독한 죄는 가장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유다 사상에 따르면 수많은 마귀들을 통솔하는 마귀들의 ‘보스’이자 ‘대(大)마귀’가 있는데, 그 마귀의 이름은 ‘베엘제불’이었습니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어둠의 통치자’ ‘악의 통치자’ ‘세상의 통치자’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대마귀와 결탁해서 다른 새끼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성령으로 마귀들을 내쫓고 있는데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대마귀와 손을 잡고 마귀를 쫒아내고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큰 죄요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나 어리석은 율법학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한 마디 던지십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이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루카 복음 11장 17~18절)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사탄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존재로, 그리고 당신은 오로지 하느님의 힘으로 사탄을 굴복시키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느님 힘의 소유자요 관리자임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내쫓으시는 사건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공생활로 인해 마귀의 세력은 점점 소멸되어 갈 것이며 언젠가 당신 앞에 굴복하게 될 것임을 드러내고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업적을 훼손시키며 성령을 모독한 율법학자들의 미래는 참담할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고 거스르는 죄는 단순한 죄, 일회적인 죄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고집스런 영혼의 태도입니다. 끝까지 이 땅에 오신 메시아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수용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영예와 능력에 대항하며, 하느님의 구원행위와 맞서는 죄입니다.
이렇게 한 인간이 끝까지 완강하게 하느님과 맞서게 될 때, 하느님께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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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2. 사순 제3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0&id=2130032&menu=4770
2026-03-11 ㅣNo.188430
■ 생활묵상 : 사랑하면 곰보도 곰보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글을 많이 올려 죄송합니다. 좋은 내용이라 공유를 하고 싶습니다. 어젠 15년 만에 친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호주로 이민 간 친구입니다. 호주로 이민을 간 이유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 친구는 연상의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몇 살 많은 정도가 아닙니다. 띠동갑에다가 다섯살 더 많습니다. 그럼 계산이 나올 겁니다. 열일곱살 연상입니다. 이 친구는 정상적으로 결혼식을 올리지도 못했습니다. 집에서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친구 어머니는 일찍 결혼해 친구를 20세에 출산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결혼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따져보면 며느리되는 사람과 세살차이나는 것이죠. 친구 어머니 연세로 보면 거의 엄마뻘 되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거라 반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연상과도 많이 결혼을 하는 추세이지만 그당시에는 아무리 양보를 해 좋게 생각해도 열일곱은 정말 많은 차이이고 보통 기준으로 보면 정상적인 결혼이라는 인식을 할 수 없는 시대적인 과제였습니다. 사랑엔 나이와 국경도 초월한다고는 하지만 이게 현실적으로 당사자가 되면 그것도 쉽게 잘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결국은 정상적인 결혼을 하지 못하고 혼인신고만 하고 부부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한국에서는 사는 게 힘들어 이민을 간 것입니다. 친구는 호주로 가면 호주에서 대접을 잘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게 있습니다. 프로그래머입니다. 친구는 지금 55세이고 부인은 72세입니다. 한국을 잠시 나왔습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입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있습니다. 아들과 딸은 호주에서 영주권이 있어 호주에서 평생 살 거라고 했습니다.
한국으로 다시 오고 싶은 이유는 아내가 원하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아내는 하숙집에서 하숙생과 하숙집 주인으로 인연이 돼 어떻게 사랑이 꽃핀 것입니다. 결혼을 할 때 이미 아내는 딸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사고로 먼저 하늘나라 가 딸과 살면서 하숙집을 운영했던 것입니다. 결혼을 할 때 친구의 결혼 사실을 제일 먼저 저한테 이야기하고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친구한테 이상한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너무 나이 차이 많이 나는 게 아니냐고만 했습니다. 저는 그때 친구 엄마가 아주 젊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고등학교 졸업 후에 친구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계산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친구한테 엄마가 보시면 기가 막힐 것 같다는 말만 했습니다. 친구도 인정했습니다.
나이도 많거니와 또 이건 이유야 어찌됐든 친구는 총각이고 부인될 사람은 애 딸린 여자분이었기 때문에 이건 엄마 입장에서 기가 막힐 정도가 아닌 것이었죠. 엄마는 명문대까지 나왔기 때문에 며느리에 대한 환상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 환상이 무너진 것입니다. 친척들 보기에도 그렇고 해서 결혼을 반대한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궁금했습니다. 아무리 친구라도 궁금한 게 있지만 친구의 감정과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도 묻지 못했습니다. 친구가 이상한 사고를 가진 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능력있는 친구였기 때문에 친구가 그런 사람을 결혼 상대로 생각을 했으면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한 번 같이 결혼할 분과 식사나 같이 하자고 해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길래 친구보다도 열일곱 많은 사람과 그것도 한 번 결혼했던 여자분과 하려고 했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번 만나고 그 이후에도 몇 번 같이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나이만 아니면 어쩌면 친구가 반할 만한 그런 면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숙집 주인 같은 느낌은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기업의 대표이사 같은 중후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친구가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에 친구가 결혼할 사람에게 호감을 가진 게 아니었습니다.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였던 분이 호감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이땐 이성의 감정으로 좋아했던 건 아니였습니다. 애가 나이는 어리지만 주인이 봤을 땐 어린 애처럼 보이지 않았나 봅니다. 듬직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처음엔 그런 감정이었는 그게 그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감정으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나이는 어린데 하는 행동이 나이 어린 것처럼 보인 게 아니라 그만 나이를 잊을 정도로 듬직하니 이성의 감정이 싹튼 것입니다.
원래 하숙집을 하면서 딸 있는 거 잘 키워 시집보내는 걸 인생의 마지막 숙제라고 생각하고 재혼 같은 건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운명의 여신은 그걸 허락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혼자서 속앓이만 했던 것입니다. 어느 누구한테도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마음을 일기로 어떤 글로 남겼는데 이걸 우연히 딸이 보게 됐습니다. 딸이 그런 글을 보고 난 후에 나이는 어리지만 애가 철이 들었는지 엄마이기 이전에 하나의 여자로서 이해를 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자기는 결혼을 해 가정을 가지게 되면 그땐 엄마는 혼자 남게 될 것을 생각했던 것이죠. 결국은 이 딸이 일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친구에게 알려준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처음엔 애가 장난치는 줄 알았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 애가 이야기한 걸 아주머니께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친구는 그냥 애가 그런 장난을 쳤다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한 이야기였는데 웃자고 한 이야기였는데 아주머니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아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딸래미가 그런 글을 보게 될 줄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말을 친구가 이야기했을 때 상당히 당황스러웠던 거겠죠. 누구나 그런 상황이면 그럴 겁니다. 이때 친구가 뭔가 이상한 걸 느꼈던 것입니다. 그냥 웃고 지나갈 그런 일인 줄 알았는데 아주머니 반응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친구는 당황이라기보다는 황당하다고 해야 맞을 겁니다. 전혀 그런 걸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사건이 터지고 나서 친구도 조금은 당황스럽고 황당했지만 그때부터 하숙집 아주머니를 하숙집 주인으로 보이지 않고 마치 이성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저도 이 정도까지밖에 친구의 결혼 과정을 알고 있습니다.
결국은 운명의 여신이 이렇게 친구와 그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랑 사랑의 결실을 맺게 해 준 것이었습니다. 제가 제목에는 곰보라고 했지만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호주로 이민 갈 때 보고 어제 처음 만난 것입니다. 어제 다시 보니 예전에 처음 살림을 할 때 그때 본 모습과 많이 차이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보다는 지금은 친구랑 친구 아내가 더 나이 차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보면 이젠 마치 엄마와 아들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그땐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친구 아내는 먼저 자리를 떴습니다. 다른 친척집에 가고 친구랑 더 많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아내가 있는 자리에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친구이다 보니 친구 사이라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친구로서 물어봤습니다. 솔직히 후회해 본 적 었는가 하고 말입니다. 친구의 답변이 놀라웠습니다. 바로 사랑하면 곰보도 곰보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 하나에 모든 게 다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어제 친구와 만나서 반가웠지만 친구의 이런 인생을 보고서 생각한 게 있었습니다. 친구가 남긴 마지막 말을 보고 말입니다. 친구는 이성적인 사랑인 에로스 같은 사랑을 이야기했지만 저는 신앙 측면에서 아가페 사랑을 생각해봤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 사랑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랑도 친구가 친구 아내랑 나누는 사랑처럼 그렇게 되게 되면 친구가 말했듯이 사랑하면 곰보도 곰보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이렇게 바꿔도 성립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우리의 옆 형제자매도 신앙 안에서 마찬가지일 겁니다.
내가 형제자매를 이 친구가 하는 사랑처럼 신앙적으로 아가페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랑이 진정할 때는 그 상대가 미울 수도 없고 또 그 상대 속에 있는 죄도 보이지 않을 거란 묵상을 많이 했습니다. 사랑을 하면 곰보가 곰보로 보이지 않듯이 우리도 신앙 안에서 신앙으로 형제를 사랑하면 형제의 허물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형제의 허물이 보이는 것은 그만큼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 친구를 만나면서 또 다시 사랑이라는 게 뭔지 저한테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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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2.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9:00 추가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14-23)”
1)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마귀를 쫓아내신 이야기는, ‘예수님과 마귀의 관계’를 잘 나타냅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고 고함을 지르고서 그분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말하였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당신께 청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마귀들은 예수님께 지하로 물러가라는 명령을 내리지 말아 달라고 청하였다(루카 8,28-29ㄱ.31).”
주 예수님은 마귀들을 인간 세상에서 쫓아내시는 분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만일에 복종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러면 마귀들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지옥은 마귀들을 가두어 놓는 감옥이고, 마귀들은 지옥에 가는 것을 대단히 두려워합니다.
2) 마귀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 자체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징’입니다.
신앙생활은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 편에서 살아가는 생활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마귀들 편에 서는 것과 같은 일이 되어버립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마귀들과 같은 편이 되는 것이라는 뜻이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멸망을 향해 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마귀들의 싸움에 ‘중립’은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안’이 아니면 ‘밖’입니다.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구원이 아니면 멸망입니다.
나중에 종말이 되면, 마귀들과 지옥은 영원히 소멸되는데, 마귀들 편에 선 자들도 함께 소멸됩니다.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0,13-21,1).”
3) 그런데 인간 세상의 실제 현실을 보면, 예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마귀들 편에 선 것도 아닌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 사람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본인들은 자기들이 절대로 마귀들 편에 선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겠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지금은 마귀들 편에 서 있지 않더라도, 끝까지 예수님 편에 서기를 거부한다면, 마귀들과 함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 21,27).”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단순하고 명확한 말입니다.
<마귀들은 인간들을 유혹할 때 이렇게 유혹할 것입니다.
“우리 편에 서지 않아도 된다. 예수 편에만 서지 마라.
그러면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즐기면서 살 수 있다.
예수 편에 서지 않는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은,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했던 말을
조금 각색한 것입니다.
유혹이란 그렇게,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인 것처럼 꾸며서 속이는 짓입니다.>
4) 이미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고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확실하게 예수님 편에 서지 않고, 또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 않고, 자꾸만 다른 마음을 품고,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나타내는 말이 바로 ‘미지근함’입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
무슨 큰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닌 ‘미지근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멸망 쪽으로 끌려가는 것이기 때문에, 죄보다 더 위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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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2. 사순 제3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9:50 추가
루카 11,14-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어 그가 다시 말을 하게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런데 걔중에는 예수님을 믿음이 아닌 경쟁의 눈으로, 순명이 아닌 시기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섞여 있었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모함하여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사람들을 이렇게 선동합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그들은 놀라운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프레임을 씌움으로써, 그분께서 하시는 ‘좋은 일’들의 의미를 ‘폄훼’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배척하게 만들려고 했던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모함은 누구라도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그 안에 담긴 왜곡과 억지논리를 찾아낼 수 있는 ‘얕은 수’에 불과합니다. 첫째, 만일 그들의 말대로 예수님이 사탄의 왕인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면 사탄이 자기 손으로 악의 나라를 멸망시키는 꼴인데 사탄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습니다. 사탄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존재입니다. 악은 다른 악과 ‘결탁’을 하면 했지 다른 악을 배척하거나 제거하지 않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유다 지역에는 마귀 쫓아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구마 업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모함하는 것은 그 구마업자들과 그 가족들 전체를 ‘사탄의 세력’이라고 모함하는 일이 되겠지요. 그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기에, 예수님은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라고 반박하시며 그들의 억지주장을 일축하십니다.
사람들은 보통 나를 모함하여 이미지를 실추시킨 이들을 역으로 공격하거나 복수를 하려고 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신 것은 단지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과시하기 위한 ‘기적’이 아니니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당신을 통해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뜻과 의지를 보여주시는 ‘표징’이니 오히려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기쁨으로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며 그분 나라가 오기를, 즉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가득한 참된 행복의 세상이 실현되기를 기다리라는 것이지요.
그 하느님 나라는 어느 날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선택의 순간마다, 당장 나에게 이익이 될 것처럼 보이는 세상의 뜻을 마다하고 하느님의 뜻을 선택함으로써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우리에게 애매하게 ‘양다리 걸치기’ 할 생각 말고 입장을 분명히 정하라고 하십니다. 당장은 힘들고 괴로운 십자가의 길을 걷지만 그 안에서 빛나는 행복의 조각들을 하나씩 모아 완성해가는 당신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이익을 얻기 위해 하느님께서 모아주신 행복의 기회, 구원의 기회를 흩어버리는 사탄의 편에 설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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