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근대적 시간 관념
2시간 단위로 셌던 시간… 철도·학교 생기며 시·분·초 정착
근대적 시간 관념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입력 2024.11.07. 00:30 조선일보
최근 미국의 서머타임(summer time)이 해제됐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서머타임이란 낮이 길어지는 여름철에 표준 시간을 1시간 앞당기는 제도입니다. ‘오전의 햇빛을 오후에 활용하자’는 개념이죠. 서머타임의 해제로 한국과 미국 동부와의 시차는 13시간에서 14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지구 반대편의 시간을 따지는 것은 물론, 분·초 단위로 시간을 활용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언제부터 어떻게 이런 근대적 시간 관념을 받아들이게 됐던 걸까요?
①국제사회가 사용하는 표준 시간인 '협정세계시'를 보여주는 지도예요. 보통 한 칸마다 1시간씩 시차가 나요. 칸 안에서 같은 색깔로 표시된 지역은 같은 시간대를 사용한다는 뜻이에요. ②1899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통된 경인선(서울 노량진~인천 제물포)을 열차가 달리고 있어요. ③1928년 조선일보에 실린 삽화로, 전차 손잡이를 잡은 여성들의 손목에 찬 시계가 눈에 띄네요. 당시엔 손목시계가 '신여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대요. ④1988년 개최된 서울 올림픽 개막식 모습. 당시 우리나라는 올림픽을 앞두고 미국과 시차를 줄이기 위해 서머타임을 실시했답니다. /위키피디아·한국민족문화대백과·조선일보 DB
‘하루에 24시간’ 개념 이해 못하기도
“어허~ 이것들이! 어서 발차(發車)하라 하였거늘 못 들었느냐?”
1900년(광무 4년), 인천에 가기 위해 경성(옛 서울)역을 찾은 한 지체 높은 양반이 기차에 올라 승무원들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어요. 서울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은 1899년 개통한 한국 최초의 철도죠. 당시 한 외국 함대가 인천항에 들어와 대한제국 고관들을 배로 초대했는데, 관리 한 사람이 발차 시각 1~2시간 전 역에 도착해 자기 집 마차꾼을 부리듯 “빨리 출발하라”며 떼를 썼다는 겁니다. “기차는 정해진 시간에 운행한다”고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고 해요.
1922년 잡지 ‘동명’에 실린 이 일화는 서양 문명이 유입되던 시기에 한국인이 근대적 시간 관념을 이해하지 못했던 일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하루는 12개의 시(時)로 나뉘었습니다. 자시(子時)는 23시에서 1시까지, 축시(丑時)는 1~3시, 그다음은 2시간 간격으로 인(寅)·묘(卯)·진(辰)·사(巳)·오(午)·미(未)·신(申)·유(酉)·술(戌)·해시(亥時)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옛 시간 관념은 지금에 비해 무척 여유가 있었습니다. “여보게, 내일 신시에 광통교에서 만나세”라고 했다면 먼저 온 사람은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최대 2시간을 다리 위에 서 있어야 했다는 얘깁니다. 이 정도 관념도 없이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눕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다지 불편하진 않았어요. 굳이 더 급하게 움직여야 할 필요가 없어서였습니다.
학교와 철도가 시간 관념 정착시켜
하지만 1876년 개항과 1894년 갑오경장(갑오개혁) 이후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하루는 24시(時), 한 시간은 60분(分), 1분은 60초(秒)’라는 근대적 시간 개념이 조선에도 들어온 것입니다. 특히 교육과 우편, 교통수단의 발달과 시계의 보급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1885년 아펜젤러가 서울에 세운 근대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은 1890년 무렵 이런 교칙을 만들었어요. ‘등교 시간은 오전 8시 15분이며 점심은 11시 45분, 저녁 식사는 6시에 마친다.’ ‘시’와 ‘분’이 학교 생활에 도입된 것이죠. 1905년 2월 경인선 열차 시간표는 ‘서울 출발 오전 06:35·08:50, 인천 도착 08:22·11:03′ 등으로 표시했다고 합니다.(정재정 ‘철도와 근대 서울’) 이제 분 단위로 시간을 맞춰 생활하지 않으면 수업을 제대로 들을 수도, 열차를 타거나 손님을 맞을 수도 없게 됐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계는 점차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10년 경성의 시계점 주인들은 ‘경성시계진흥회’라는 단체를 설립했습니다. 시계 판매를 확장하려는 것으로, 10개월에 나눠 시계 값을 받는 할부 판매도 성행했다고 합니다. 1910년대 신문 광고엔 주로 벽시계와 회중시계가 실렸는데 1920년대가 되면 손목시계가 자주 나타났습니다.(정상우 ‘개항 이후 시간 관념의 변화’) 언제 어디서든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유비쿼터스(ubiquitous·언제 어디서나) 혁명’이 20세기 초 조선에 일어났던 셈입니다.
옛 ‘대한표준시’를 쓰지 않는 이유
지금 우리나라가 쓰고 있는 국제 표준 시간대는 ‘UTC+9:00′입니다. 협정세계시(UTC·Universal Time Coordinated)인 영국 시간대보다 9시간 빠른 시간대로 일본, 북한, 동티모르, 팔라우, 인도네시아 동부(뉴기니섬 서부), 러시아 야쿠츠크와 같은 시간대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 시간대였던 것은 아닙니다. 대한제국(1897~1910) 때 쓰던 ‘대한표준시’는 일본보다 30분이 늦고 중국보다는 30분 빠른 ‘UTC+8:30′이었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를 계기로 한반도의 시간대는 일본에 통합돼 ‘UTC+9:00′이 됐습니다. 광복 이후엔 이 시간대를 따르는 것이 일제 잔재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실제로 제1공화국 시절인 1954년 3월 21일부터 5·16 군사 정변 직후인 1961년 8월 9일까지 ‘UTC+8:30′으로 시간대를 바꿨었습니다.
다시 ‘UTC+9:00′으로 돌아온 이유는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도·이란 정도를 제외한 세계 대부분의 나라와 시차가 ‘O시간’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O시간 30분’으로 어긋나게 됐습니다. 항공·항해와 기상 등에서도 혼동이 생겼다고 합니다. 결정적으로 군사 작전 면에서 문제가 컸습니다. 예를 들어, ‘UTC+9:00′을 사용하는 북한이 오후 1시에 우리를 침공했을 경우 서울 기준으론 12시 30분이 됩니다. 또 주한 미군 측에서 보면 12시 30분이 되는 반면, 한반도 출동을 앞둔 주일(駐日) 미군에겐 1시가 되는 것 아니겠어요?
북한에서도 2015년 8월 ‘UTC+8:30′으로 시간대를 바꿨던 적이 있는데, 채 3년도 되지 않은 2018년 5월에 ‘UTC+9:00′으로 복귀했습니다. 아무래도 불편해서였겠죠. 서유럽은 프랑스·독일·이탈리아·스페인·네덜란드·스웨덴 등 여러 나라가 같은 시간대(UTC+1:00)를 사용하고 있답니다.
앞에 나왔던 서머타임을 우리나라도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1948~1951년, 1955~1960년, 1987~1988년이었죠. 세 번째 때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미국과 시차를 줄이려는 목적이었답니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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