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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이미 난키치 생가 내 작가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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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해 8월 7~10일 ‘한일청소년 평화교류’에 참가해 나고야시 인근의 한다(半田)시를 방문한 바 있다(조선인 강제징용 터 견학과 한일청소년에게 ‘안중근 의사에게 영향을 받은 일본인들의 활동’제목의 강연을 위해). 그곳에서 한다市 시민단체인 ‘한다 공습과 전쟁을 기록하는 모임’(대표 사토 아키오)으로부터 작가 니이미 난키치(1913~1943)가 1930년에 쓴 동화 「아버지의 나라」를 최근 발굴했다는 사실을 접했다.
「아버지의 나라」는 고임금 노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가족과 작가 어머니의 교류 체험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당시, 조선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일본인과 인간적 교류를 나누는 장면을 일본 작가가 그린 문학 작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작품 배경과 의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 북쪽의 미야자와 겐지와 함께 남쪽을 대표하는 동화작가로 널리 알려진 니이미 난키치. 그는 1913년 일본 아이치 현의 한다 시에서 태어났다. 청소년기부터 여러 잡지에 동화 등을 투고하며 남다르게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그가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한 것은 도쿄외국어학교(현 도쿄외국어대) 영문과에 진학하면서부터다.
25세 때는 은사의 주선으로 안죠고등여학교에서 교사로 5년 동안 근무하면서 인간에 대한 근원적 사랑과 꿈과 희망을 주는 아름다운 동화를 다수 발표했다. 하지만 결핵을 앓은 뒤엔 자택에서 요양 생활을 하며 집필활동에 매진하다가 끝내 병환을 극복하지 못하고 1943년 서른 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대표작으로 매년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는 「금빛 여우」, 「눈깔사탕」, 「장갑을 사러 간 아기 여우」 등이 있다. 100여 편이 넘는 동화, 동요를 집필했으며 수십 편의 소설을 남겼다. 1994년 한다 시에 니이미 난키치 기념관이 들어섰고, 연간 5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그곳을 방문, 국민적 동화작가로 거듭나고 있다.
이렇게 알려진 작가인데 반면, 그의 다른 면모에 대해서는 국내 독자층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난키치는 도쿄외국어대 시절 교우들과 친교를 통해 사회의식에 눈을 떠 반전평화 정신을 키웠다.
또한 빈부 격차와 농촌현실의 모순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그의 사회 담론과 진보적 사상에 대해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75년. 난키치의 일상이 담긴 일기가 발견되면서부터다. 그리고 바야흐로 85년엔 『니이미 난키치· 청춘일기』가 세상에 공개됐다.
대학 시절 사회의식에 눈떠 반전평화 정신 추구
난키치는 프롤레타리아 작품에도 관심을 보이며 고바야시 다키치 등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이 있다. 친구에게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이라는 잡지를 빌려 읽고 그 감상을 일기에 “고바야시 다키지에 대한 내용이 가득 쓰여져 있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다. (생략) 사상적으로 고민하는 일은 이러한 것인가”(1933년 5월 27일)라고 흘린 부분이나, “조금 문예로부터 벗어나 사회과학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5월 29일)라고 고백한 내용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6개월 후에도 난키치는 “현대사회가 소재라 할지라도 그 문학이 반드시 사회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문학이 사회성을 갖기 위해서는 사회인식이 분명해야 한다”는 견해를 내보였다(10월 3일). 그리고 농촌 현실,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 빈부 격차에 대해서도 주목하는 발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일기를 쓰기 3년 전의 작품이 바로 「아버지의 나라」다. 난키치의 글로벌한 시야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적 배경을 살피면 1910년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 강화로 조선인들의 생활은 피폐해졌다. 따라서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일본으로 고임금을 찾아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본 작업현장에서는 조선인 차별과 임금 착취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으니 피식민지인의 설움을 언어로 형용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한다중 시절) 난키치의 집 부근에는 현 메이테츠코와선(名鐵河和線) 시설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31년 지다(知多)철도 오타가와(太田川)~나라와(成岩) 구간이 열리는데, 이 공사에 다름 아닌 다수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종사하고 있었다. 그 주변에 조선인 가족들이 기거하며 생활하고 있었음은 당연하다.
마침 난키치의 어머니는 신발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주변에 사는 조선인 가족이 찾아와 신발을 사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체험을 살려 난키치는 1930년에 「아버지의 나라」를 집필한 것이다. 놀라운 부분은 작품에 신발가게 일본 여성과 조선인 소녀(가족)의 교류가 너무나 따뜻하고 밀도 깊게 묘사되는 점이다.
츠야코는 흰색과 검은색의 아름다운 조선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가 좋은 옷이라며 칭찬하자 츠야코는 더 좋은 옷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 그래?” 하면서 아주머니는 ‘역시 조선애도 옷이 좋은 것을 기뻐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다녀왔습니다”고 하며 아주머니의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아주머니의 아들은 중학교 5학년(구식 중학교 최고학년)이었습니다. 츠야코는 아주머니의 아들을 보자 눈을 깜빡거리며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아주머니는 웃으며 ‘아버지’는 ‘오또상’이라는 의미라고 아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조선인 소녀 이름이 창씨개명이 된 ‘츠야코’로 불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피식민지 조선에서 건너온 조선인 노동자 가족에 나라를 부여하는 작가의 시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즉 난키치는 「아버지의 나라」라고 작품명을 붙였다. 당시 일본의 속국이던 조선을 타국으로 인식하며 ‘나라’로 호칭했거니와 그 앞에 ‘아버지’라는 조선어를 그대로 사용해 제목으로 붙인 것이다.
난키치는 신발가게 주인이던 어머니가 조선인 가족에게 상냥스레 말을 거는 장면을 접하지 않았을까.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어 말살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기 전이었다고 할지라도 ‘아버지’, ‘엄마’하고 반복하도록 권하는 장면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조선인의 나라, 언어, 의복 가치를 인정
한다 시 시민단체에 의하면 당시 아이치 현에서 광산이나 댐 등의 공사에 저임금으로 종사한 조선인은 약 3만5천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주니치신문>, 2014년 8월 17일자). 여러 교류의 형태가 있었겠지만 위의 「아버지의 나라」에는 본문에서처럼 당시 조선인의 ‘나라’, ‘언어’ ‘전통의복’의 가치를 그대로 인정함은 물론, ‘아버지’라는 조선어를 아들에게 가르쳐주는 일본인 아주머니(난키치 어머니가 모델)가 등장하고 있다. 어찌 이 작품을 평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뿐만이 아니다. 난키치 작품에는 인본주의와 반전평화 정신을 일깨우는 「소좌와 중국인」(뒤에 「장홍륜」으로 개명)이나 「주운 나팔」 등도 있음을 덧붙이고 싶다. 1929년 작품 「장홍륜」에는 러일전쟁 때 일본군으로 만주에 건너가 전시 분위기를 정찰하던 소좌와 우물에 빠져 생사를 헤매던 터에 그를 구출해주는 중국인 父子의, 시대와 배경을 초월한 휴머니즘 짙은 인간적 교류가 그려진다. 1935년 작품 「주운 나팔」에는 나팔을 주운 가난한 젊은이가 전쟁에 출전해 공훈을 세우려 하지만 길에서 조우한 노인의 조언을 듣고 평화주의자로 변모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난키치는 국가주의와 전쟁이 강조되는 시기에 전혀 다른 지위와 환경을 안고 사는 인간이 서로 마음을 나누며 교류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상을 그림으로써 개인의 가치와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거기에 전쟁의 시대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고뇌하는 난키치의 작가상이 투영돼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아버지의 나라」는 식민지시대의 조선인 주인공을 통해 그 의미를 새겼다는 점에서 작품의 의의를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김정훈/
전남과학대·일본근대문학,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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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니이미 난키치의 생가가 아련히 떠오릅니다. 머지않아 다시 한 번 작품을 접해보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