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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어느 목사님께서 노우호목사님의 글을 퍼 나르고 있어서, 제가 그 목사님에게 방언에 대한 노우호목사님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알려드리자, 제게 방언과 방언기도 및 방언통역에 대해 질문해 온 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1. 성경에 방언기도란 말이 언급된 곳이 있는가? 예. 있습니다. 고전14:14~15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고전14:2의 말씀도 참고하면 될 것 같습니다.
먼저 헬라어 전문가들(카리스종합주석)이 번역한 고전14:14-15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카리스직역] 고전14:14 왜냐하면(에안) 만일 내가 방언(글로싸=tongue, 단수)으로 기도하면(동사,가정법,현재,중간태수동태디포,1인칭,단수), 나의 영이 기도하기 때문이다(동사,직설법,현재,중간태수동태디포,3인칭,단수). 그러나 나의 이해력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동사,직설법,현재,능동태,3인칭,단수) [카리스직역] 고전14:15 그러므로 그것은 무엇이냐? 내가 영으로 기도할 것이다(동사,직설법,현재,능동태,3인칭,단수). 그러나 내가 또한 이해력으로 기도할 것이다 (동사,직설법,미래,중간태디포,1인칭,단수)
우선 고전14:14은 가정법 현재 문장입니다. 노우호목사님은 가정법 현재 부정문이라고 하는데 부정문이 아니라 긍정문입니다. 가정법 현재 문장은 동작의 계속되는 반복, 계속, 진행(만일 계속해서 ~한다면)을 나타낼 뿐입니다. 그러나 노우호목사님처럼 이 문장을 실현가능성이 없는 문장으로 번역하려면, 고전14:14은 가정법 현재 문장이 되면 안 됩니다. 실현가능성이 없는 가정법은 가정법 과거이자 가정법을 달고 오는 문장의 서두에 “에이(ei)”라는 접속사가 달고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고전14:14은 ‘에이(ei)’로 시작되는 가정법 과거 문장이 아니라, 에안(ean)으로 시작되는 가정법 현재 문장이라 결코 부정적으로 해석될 수 없는 문장입니다. 하지만 성경원문에서는 이 문장이 분명,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곧 자신의 영이 기도한다고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우호목사님께서는 이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하여, 실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크게 잘못된 번역이자 해석입니다.
그러면, 제가 고전14:14을 좀 더 원문에 가깝게 번역해보겠습니다. 먼저 13절부터 번역해보겠습니다. [원문직역] 고전14:13 그러므로 (계속해서) 방언으로 말하는 자는 통역하도록 기도하라. [원문직역] 고전14:14 (왜냐하면) 만일 내가 방언으로 (나를 위하여) (계속해서) 방언으로 기도한다면(동사,가정법,현재,중간태수동태디포), 나의 영이 (나를 위하여)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이성(마음, 이해력)은 열매를 맺지는 못한다(동사,직설법,현재).
그러므로 본문의 뜻은 왜 방언으로 말하는 자가 통역하도록 기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문장입니다. 그 이유는 영으로 기도하지만 마음으로는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이성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은 ‘영’이 받은 바 축복에 이성이 지거으로 참여하지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방언은 신령한 은사에 속하지만 지적인 기능이나 인격적인 성숙 혹은 성경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는 전혀 참여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방언을 듣는 자는 방언으로 듣고 아무런 사고의 전달도 받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올바르게 사용되기 위해서 대안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바로 ‘영’으로 하는 기도 즉 방언기도만 하지 말고, ‘이성(마음)’으로도 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5절).
그리고 고전14:2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 함으로써 이것이 곧 기도인 것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14:2에 대해 개역한글성경을 우선 보시고, 제가 헬라어원문에 맞게 번역한 것을 보십시오.
[개역개정]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원문직역]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글로싸=tongue, 단수)을 (계속해서)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오히려(역접접속사, 헬라어 ‘알라’) 하나님께 말하기 때문이다(동사,직설법,현재,능동태,3인칭,단수). 왜냐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동사,직설법,현재,능동태,3인칭,단수). 그럼에도 불구하고(헬라어 ‘데’) (그가) 영으로 비밀들을 말한다(동사,직설법,현재,능동태,3인칭,단수).
이 문장은 결코 부정적으로 해석해서야 할 문장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노우호목사님께서는 이 본문의 앞부분을 부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래와 같이 말입니다. 교묘한 속임수를 보십시오. [노우호목사] 고전14:2 왜냐하면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말을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한다 하지만(고린도 교인 중에서)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 우선 노우호 목사님의 오역은 2군데입니다. ‘하지만’의 위치가 달라졌고, ‘그의’라는 말은 원전에는 없는 것을 일부러 끼워 넣으셨습니다. 문제는 역접접속사 ‘하지만’의 위치입니다. ‘하지만’의 위치는 “말한다”라는 말의 뒤에 들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라는 문구 다음에 들어가야 합니다. 즉 ‘사람에게 말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말합니다.’라고 넣어야 합니다.
더욱이 고전14:2의 말씀은 콤마를 통해 3개의 문장이 하나로 합쳐진 문장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원문직역]한 것을 다시 보십시오. 그런데 노우호목사님께서는 2번째 문장 다음에 일부러 “말한다. 하지만”이라고 넣음으로써 앞 문장을 부정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노우호목사님의 주장대로, 고전14:14이 가정법 현재 부정문으로서 실현불가능한 것을 말한다고 치겠습니다. 하지만 고전14:14과 똑같은 가정법 현재의 다른 문장은 어떻게 해석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래의 예를 보십시오.
[막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접속사 '에안'이 이끄는 가정법 현재 문장으로서, 고전14:14과 같은 종류의 문장).
이 문장의 앞부분을 부정문으로 해석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사람의 손은 언제든지 범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긍정문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이 범죄하는 것은 실현불가능한 일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전14:14을 가정법 현재 부정문으로써, 실현불가능한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렇듯 방언기도는 성경에 분명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2. 방언기도가 은사라고 성경에 언급된 곳이 있는가?
우선 질문에 ‘방언기도’가 은사인가라고 질문하지 마시고 ‘방언이 은사인가?’라고 물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물으시려는 의도가 방언기도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부정적인 마음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방언은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일종이기 때문에 방언기도라고 해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은 은사의 목록을 나열할 때 방언기도라 하지 않았고 ‘방언’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왕이면, 은사적 측면에서 질문할 때에는 “‘방언’이 성령의 은사입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방언을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는 9가지 은사들 가운데 하나의 은사로서((고전12:4,10, 28~31), 영적인 은사들의 하나임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고전12:1, 14:1). 고전12:4 은사(타 카리스마타= the Gifts)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고전12:8-11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게네 글로쏜=the kids of Tongue)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12:28-31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게네 글로쏜=the kids of Tongue)이라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글로싸이스=Tongues)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타 카리스마타= the Gifts)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문제는 노우호목사님의 잘못된 주장(해석)입니다. 노우호목사님께서는 단수로서 ‘글로싸(glosssa=tongue, 알 수 없는 방언)’는 은사가 아니라 ‘헛소리’ 내지는 ‘귀신방언’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복수로서 ‘글로싸이스(glosssais=tongues, 외국어방언들)’는 성령의 은사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방언(글로싸, 글로싸이스)는 성령의 은사이며,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 명사가, 단수인가 복수인가 하는 점뿐입니다. 즉 노우호목사님께서는 고린도전서에 14장에 단수로 나오는 ‘방언’이라는 단어(글로싸)는 ‘알 수 없는 방언’으로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말했던 헛소리 죽 의미없는 소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수로 등장하는 ‘방언들’(글로싸이스)이라는 단어는 ‘외국어들’ 혹은 ‘외국어방언’으로서 성령의 은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는 원칙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것이며, 누가 세운 것입니까? 방언에 대한 헬라어 단어를 보면, ‘글로싸’는 단수이고, ‘글로싸이스’는 복수형태일 뿐입니다. 이 차이는 주어가 단수일 경우는 ‘글로싸’로 쓰였고, 주어가 복수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방언을 언급할 때에는 ‘글로싸이스’로 기록되어 있을 것뿐입니다. 예를들어 보겠습니다. 먼저는 주어가 복수이어서 방언을 ‘글로싸이스(방언들)’로 쓰고 있는 헬라어 문장을 보겠습니다. [예루살렘교회]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헤테로스=other) 언어들(글로싸이스=tongues)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고넬료가정] 행10:45-46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그들이) 방언(글로싸이스=tongues)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에베소교회] 행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그들이) 방언(글로싸이스=tongues)도 하고 예언도 하니 그런데 개역개정판한글성경을 볼 때마다 좀 속상한 것은 똑같은 복수명사 ‘글로싸이스(방언들)’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전부 ‘방언들’이라고 번역했으면 좋았을 것을, 행10:46과 행19:6에서는 ‘방언’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행2:4에서는 아예 ‘언어들’이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2:4를 개역한글판에서는 ‘방언’이라고 번역하였었는데, 이번에 개정판에서 바꾸면서 본문을 더 어렵게 만들어놓은 것 같습니다). 어느 것 하나 원칙을 지키지 않고 있음을 보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또한 복수접미사 ‘들’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우리말성경은 원칙을 거의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어떤 명사가 2개 이상이면 무조건 복수접미사 ‘들’을 붙여야 하지만, 우리말은 대부분은 ‘들’이라는 복수접미사를 붙이지 않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가지고 따지고 볼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도 “여기, 네 분들이 오셨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여기, 네 분이 오셨습니다.”라고 말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단어가 단수인지 복수인지 분명하게 나와 있기에, 설교자는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편, 방언의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글로싸이스(방언들)’이라고 사용하고 있는 문장을 보겠습니다. 이때 주어는 단수입니다. 고전12: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단수)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게네 글로쏜=the kids of Tongues)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원문직역] 고전12:10 그러나 그리고 다른 이에게는 능력의 행함들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는 예언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는 영들의 분별함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다른 이에게는 방언들의 종류들(게네 글로쏜=the kinds of Tongues)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는 방언들(글로쏜=Tongues)의 통역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고전14:5 나는 너희가 다 방언(글로싸이스=Tongues)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글로싸이스=Tongues)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글로싸이스=Tongues)을 더 말하므로(단수동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14:22-23 그러므로 방언(글로싸이=Tongues)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글로싸이스=Tongues)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전14: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너희들은) 방언(글로싸이스=Tongues)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2인칭 복수)
그런데 노우호목사님은 성경에서 방언이 복수(글로싸이스)로 나오는 곳에는 전부 ‘외국어들’ 혹은 ‘외국어 방언들’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성령의 은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글로싸이스’라는 단어는 단지 ‘글로싸’의 복수형태일 뿐입니다. 그냥 “방언들”이지 결코 “외국어들”이라고 단정해서는 아니 됩니다. 물론 “방언들”에는 외국어들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마치 행2장의 오순절날 방언들(글로싸이스) 중에는, 15개 외국어방언들(헬라어 ‘디아레크토’)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헬라어 “글로싸”에 대한 한글번역은 ‘방언’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알 수 없는 혓소리”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한글성경번역자들이 ‘글로싸 혹은 글로싸이스’를 ‘방언’이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지금에 와서는 방언이라고 굳혀져 버린 것이죠. 그리하여 오늘날에 ‘방언’이란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3가지 뜻으로 나옵니다. ①?언? 한 지역 또는 계층에 한해서 행하여지는 언어의 체계. ②?언? 한 나라의 언어 중에서 지역에 따라 표준어와 서로 다른 언어 체계를 가진 말. 사투리. ↔공통어. ③?기? 신약 시대에, 성령(聖靈)을 받은 신자가 하는, 뜻을 알 수 없는 말. 어찌되었든 우리는 여기서 노우호목사님의 엉뚱한 주장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노우호목사님은 ‘글로싸이스’는 전부 진짜 성령께서 표적으로 주신 방언으로서, 외국어들 방언들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좀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글로싸이스’는 ‘글로싸’의 복수 형태일 뿐 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런데 노우호목사님께서 ‘글로싸이스’를 ‘외국어 방언들’로 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고전12:10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거기를 보면, 한글성경은 ‘각종 방언말함’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게네 글로쏜’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민족(종족) 방언들’ 즉 ‘외국어 방언들’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에, ‘외국어방언들’은 바로 성령의 은사이자 표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문맥을 무시한 번역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개역개정판성경에 나오듯 ‘각종 방언’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고전12:10에 나오는 ‘게네(원형은 ’게노스‘)’라는 말은 3가지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민족’이요 둘째는 ‘자손, 혈통’이요, 셋째는 ‘종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게노스’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에는 우선적으로 ‘민족’이라고 번역할 수 있지만, 고전12장은 외국어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성령의 신령한 9가지 은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어 방언들’이라고 번역해서는 아니되고, ‘방언들의 종류(고전12:10,28)’라고 번역하든지 한글개역성경에 따라 ‘각종 방언들’이라고 번역함이 좋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고전14장에서조차 ‘게노스’라는 단어를 ‘종류’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14: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게노스)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런데 위의 문장을 ‘종류’라는 뜻 대신에 ‘민족’을 넣어서 한번 번역해보십시오.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민족이 많으나(?)” 번역이 이상하게 변해버립니다. 그러므로 ‘게노스’라는 단어를 ‘민족’으로 번역할 것인지 아니면 ‘종류’로 번역할 것인지는 문맥에 따라 결정되어야 합니다. 사실 은사들의 종류를 나열하는 고전12:10과 고전12:28 외에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게네 글로쏜(the kinds of tongues)’이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더욱이 외국어를 말하는 것을 결코 성령의 은사라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외국어를 서너개 말하는 을이 성령의 은사를 받은 증거라면, 이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서너개 내지는 5~6개까지 외국어를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은 고전12장에서 ‘방언들의 종류들’ 즉 ‘각종 방언들’이라고 명시함으로써(고전12:10,28), 성령의 9가지 은사들 중의 하나로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3. 예수님과 바울이 방언기도를 하였다는 성서적인 증거가 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방언으로 기도할 필요나 이유가 없는 분이죠.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방언에 대해 언급하신 부부분을 조금 후에 살펴보겠습니다. 문제는 바울이 과연 방언으로 기도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바울은 방언기도를 더 많이 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고전14:18).
[개역개정]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글로싸이스)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 본문을 헬라어 원문에서 직접 번역해 보겠습니다. [원문직역]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내가) 너희의 모두보다 더 (계속해서) 방언들(글로싸이스)로 말(하기 때문이다). 이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도바울은 방언기도를 계속해 왔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가 말했던 방언도 한 개가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방언을 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외국어(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로마어 등등)를 더 많이 말하기 때문에 감사한다는 내용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고전14장에서 당신이 외국어를 더 많이 말하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문제를 논하면서 고전14장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여기에 나오는 ‘방언’은 복수로서, 외국어방언들을 가리킨다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신 노우호목사님을 따라가실 분이 혹 있을른지 모르겠습니다. 단어의 단수와 복수 문제는 제가 2번 문항에서 자세히 답변하고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고전14:18에 나오는 ‘방언들(글로싸이스)’를 외국어방언들이라고 번역해야 한다는 주장은 왜 잘못된 것인지 한 번 더 언급하고자 합니다. 첫째, 만약 노우호목사님의 주장대로 고전14:18에 나오는 방언들이 외국어방언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면, 방언들이라는 글자 앞에 ‘게네’라는 단어가 붙어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언들이 외국어를 지칭한다고 하는 근거를 고전12:10,28에서 따오셨는데, 거기에서는 분명히 ‘게네 글로쏜’이라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게네’라는 단어가 여기서는 나오지 않는데, 어떻게 고전14:18에 나오는 ‘글로싸이스(복수)’를 외국어들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쓰여진 그대로 보아야지 개인의 견해를 자꾸 집어넣어 낱말의 뜻을 변경하려는 시도는 좋은 않은 테도입니다. 둘째, 고전14장에 나오는 방언은 사도바울이 고전13장에 이어서 성령의 신령한 은사들 중에 ‘방언과 예언’만을 따로 떼어내어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쓰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어찌 단수(글로싸)는 ‘알 수 없는 방언’으로서 헛소리로 보아야 하며, 복수(글로싸이스)는 ‘외국어방언들’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알아 들을 수 없는 ) 방언이 은사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혹 이러한 억지 주장이 맞는다고 칩시다. 그러면, 고전14장의 다른 부분에서 나오는 복수 ‘글로싸이스’는 어떻게 해석하시려고 그런 억지 주장을 하는 것입니까? 자, 고전14:22~23을 보십시오. 고전14:22-23 그러므로 방언(글로싸이스, 복수)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글로싸이스, 복수)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이 본문을 노우호 목사님의 주장에 따라 번역해 보겠습니다.
고전14:22-23 그러므로 외국어들(글로싸이스)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외국어들(글로싸이스)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생각해보십시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 즉 성령의 은사의 하나인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으니, 믿지 아니할 자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미쳤다고 하는 것이지, 어찌 그들이 외국어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고 미쳤다고 하겠습니까? 고린도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없는 여러 종류의 방언들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성령께서 은사들로서 그들에게 주신 것들이죠.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공예배시에 사용하지 말고, 정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려고 한다면 예언의 은사를 사용하라고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예수님께서는 방언기도를 했느냐고 언급하신 것에 대해 조금 부가해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방언으로 기도하셔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그분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오순절 마가다락방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에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한 것이 시초인데, 그것은 그때 사람의 영에 하나님의 생명이 공급되어지므로 나타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사람이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요(고전14:2),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임(고전14:14)을 감안한다면, 성령이 사람에게 오시게 될 때에, 사람 위에도 임재해 계시지만, 사람의 영 속에 들어와 그 영을 살려내십니다. 성령은 생명의 성령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인간의 영 속으로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흔히 ‘중생’ 혹은 ‘거듭남’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성령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그 사람 속으로 들어가 거하시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죽었던 영이 살아나 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곧 그것이 방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영이 새로 태어났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죠. 물론 방언으로 말을 하지 못한다고 성령으로 거듭 태어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죠. 어찌되었든 사람은 요한복음 3장에 나와 있듯이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보더라도,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태어나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이 거듭나서 그 출생을 알리고 자신의 영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왔음을 표시하기 위해 사람의 영은 그때부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방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16장에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를 것인데, 그들이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것이며, 새 방언을 말하게 될 것(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3인칭, 복수)이라고 하셨습니다(막16:17). 여기에 나오는 ‘새 방언’이라는 말은 ‘카이나이스 글로싸이스’라는 말로서, ‘새로운 방언들’이라는 뜻입니다. 거듭나는 사람마다 다 다른 종류의 말(방언)을 말하게 될 것이기에, 주님께서도 ‘새로운 방언들’을 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새’라는 말은 ‘카이노스(kainos)’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질적으로 새로운”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와 비슷한 단어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네오스(neos)’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시간적으로 새로운”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믿는 자들은 새 방언을 말하되, 이전에 사용하던 말과는 질적으로 다른 말(정확히는 혓소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 때부터 자신의 영이 거듭난 사람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글로싸이스)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방언으로 말씀하실 필요는 없으셨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새 방언이 따르게 될 것임을 미리 말씀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한편, 노우호목사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방언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마가복음 16장의 말씀의 뒷부분(막16:9~20)이 후대에 첨가된 말씀이라는 점을 말씀하심으로,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식으로 말씀하고 계신데 이는 정말 성경에 대한 모독이요 또한 신구약성경이 66권으로 정해지게 된 하님의 섭리를 무시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도 사본학에 대해서는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장신대 신대원에서 신약성서신학의 권위자이나 헬라어교본을 쓰신 나채운 교수님에게 직접 강의를 들었고 또한 따로 공부를 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9~20의 말씀이 후대에(후대라고 해서 많이 뒤쳐진 것은 아닙니다)에 첨가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신구약66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겨지게 된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요 하나님의 섭리임에는 분명합니다. 정말 오늘날과 같이 방언문제 때문에 왈가불가할 것 같아,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지만 복음서에 기록이 누락되어 있는 부분이어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으로 마가복음 16:9~20의 말씀이 누군가에 의해 첨가되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옥스퍼드주석에서는 마가가 종결부를 기록했으나 초기에 본문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그 종결부가 유실된 것으로 보이며, 종결부에 있어야 할 내용이 없음을 발견한 초대교회가 그것을 보충한 것이 9~20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 말씀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 아니었다면, 즉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면 이 본문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뒤의 모든 교회가 이 말씀도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기에 오늘날에 우리가 마가복음 16:9~20이 포함된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 본문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니 빼어야 한다거나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역사는 하나씩 둘씩 빼내기 시작할 것이고, 요아킴 예례미야(?)인가 하는 신학자처럼, 성경의 기록은 실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의 신앙고백에 불과하다고까지 하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던 독일과 미국교회의 현재를 보십시오. 성경을 난도질하더니 지금 교회는 나이트클럽으로 바뀌어가고 있고, 이슬람사원으로 바뀌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신구약 66권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그대로 믿습니다. 그래서 고전12장에 기록된 성령의 9가지 은사들 중에 방언의 은사가 있다고 하니, 방언의 은사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4. 방언기도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은 무엇인가?
1)방언기도의 성서적인 해석이 있다면 무엇인가? 2)고전에서 바울은 소위 방언기도(unknown tongue)에 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3)신약의 방언기도를 지지하는 구약의 내용이 있는가? 구약 사람들은 왜 방언기도를 하지 않았는가? 4)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I thank my God, I speak with tongues more than ye all ) 여기서 왜 바울은 방언들(글로싸이스)를 받았다고 했을까요?
이제는 방언기도란 무엇인가 아니 방언이라 무엇인가를 정의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방언기도는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서(막16:17), 오순절 마가다락방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새로운 말이자 언어입니다(행2:1~4). 정확히 말하자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성령받은 사람들의 혀에서 나오는 일종의 소리(글로싸=tongue)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방언에 대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말하는 일종의 기도로서(고전14:14), 자신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14:2). 어떤 사람은 이것이 기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즉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에는 기도하고 찬송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전14장에서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고 이성으로 드리는 기도가 있으며, 방언으로 드리는 찬송이 있고 이성으로 드리는 찬송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고전14:14~15). 이처럼 방언으로 드리는 기도는 이성(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고전14:15). 이성(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자기자신의 언어로 드리는 기도로서,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지만 방언기도는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에 자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람도 알아들을 수 없는 기도가 됩니다(고전14:2,28). 저는 개인적으로 귀신들도 이 기도를 알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알아듣는 기도입니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의 내용을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방언 혹은 방언기도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는 방언기도가 개인을 세워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여러 종류의 방언들을 말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14:18). 그리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모두가 다 방언말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고전14:5). 왜냐하면 방언 혹은 방언기도는 분명 성령께서 나눠주시는 신령한 은사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고전12:10,28, 14:1). 이처럼 방언기도란 성령의 신령한 은사들은 성령께서 자신의 뜻을 따라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는 것으로써, 고린도전서를 보면, 9가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고 있습니다(고전12:8~11).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별한 것은 역시 방언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방언과 예언의 은사에 대해 더 할애해서 글을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과 14장입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에서 방언과 예언의 은사만을 집중적으로 거론했습니다. 특히 사도바울은 자신이 외국어들을 더 잘 말하는 것을 쓰려고 고전 13장과 14장을 할애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령한 은사라 할지라도 제일 위대한 것은 역시 사랑의 은사인 것 같습니다(고전13장). 왜냐하면 사랑이 빠진 신령한 은사는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고전13:1~3). 그러므로 사람이 무슨 신령한 은사를 받았던지 사랑의 은사도 동시에 구해야 됩니다. 사람이 성령을 받을 때에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그것은 죽었던 자신의 영이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람은 새 방언을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성도들은 단 한 사람도 영이 살아난 사람이 없으므로 즉 성령이 사람 속에 내주하여 거하신 일이 없으므로 한 사람도 방언을 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고전12:30).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이 성령을 받을 때에 죽었던 영이 되살아나고 그때에 말을 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은사이기 때문에 거기에 사랑의 은사가 빠지게 되면, 방언은 소리나는 구리(청동)과 울리는 꽹과리(굉음나는 심벌즈)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고전13:1). 그리고 교회가 공적으로 모여 예배드릴 때에는 방언의 은사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가 사용하기 유익한 은사는 방언보다는 예언의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방언의 은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은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불신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 다 미쳤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14:22~23). 다시 말해 방언의 은사는 신령한 은사이기는 하나 직접적으로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은사로서, 교회를 세워주는 은사라고 했습니다(고전14:1~5). 왜냐하면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거나(고전14:31), 사람들을 회개하라고 책망하거나(고전14:24~25,31), 위로하는(고전14:2)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그 예언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고, 위로받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아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교회로 모일 때에는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기보다는 예언의 은사를 사용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고전14:1,29). 그래도 방언의 은사를 공예배 중에 사용하고 싶다고 하면, 그때에는 방언통역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고전14:13,27). 방언통역을 통해서, 그 사람이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차례를 따라 방언을 하게 하되, 2명 많으면 세 명 정도가 좋다고 하였습니다(고전14:28). 너무 많은 사람이 너도나도 할 것이 방언으로 말하게 되면 교회가 어지럽게 되고, 시간이 많이 소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바울은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드리는 방언기도에 대해 교회 공예배중에는 통역을 시켜보라고 했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놀라운 영적 진리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방언기도가 개인이 드리는 기도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교회와 복음전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 필요한 기도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서 그 내용이 아주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도바울이 방언기도를 공예배시에 통역을 하여 모든 성도들로 듣게 하라고 한 것은 그만큼 방언기도가 개인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방언기도는 개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지만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건강하게 하려면, 교회가 공동체로 모여 예배를 드릴 때에는 가급적 예언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이때의 예언은 결코 구약적인 의미로서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일을 예측하여 미리 말하는 예언은 과거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두 가지 것을 예언하였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로 보낸 분은 어떤 사람으로서 어떤 일을 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보내줄 것인가를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 메시야를 믿고 영접하기 위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라고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언해오던 메시야가 2천년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30세가 되어서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시어,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42달이 지나자, 예수께서는 속죄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유월절날에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요19:30). 구약에 예언된 모든 속죄사역을 완성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예언을 하라고 한 것은, 이미 부활승천하신 예수 즉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던 예수님이 누구였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라는 것이요(고전14:31), 예수님을 믿고도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자나 불신자들에게 회개하라고 책망하라는 것이요(고전14:24~25,31), 이미 회개한 자들을 위로하는 일을 하라고 한 것입니다(고전14:2). 그러므로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깨달을 수 있는 자신의 언어로 성도들에게 예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이런 의미에서 보면 ‘예언’은 일종의 설교와 비슷한 것입니다). 하지만 방언기도를 쉬어서는 아니 됩니다. 방언기도는 개인을 위해서도 매우 필요한 기도일 뿐만 아니라 통역을 해보면 알겠지만 그 내용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내용을 간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로 모여 예배를 드릴 때에는 가급적 이성(마음)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듣는 자가 아멘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개인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는 예언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너희가 가 방언말하기를 원한다(고전14:5)”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방언들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으며(고전14:8), 방언들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14:39)이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방언의 통역입니다. 수많은 종류의 방언들을 제대로 통역해 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방언을 통역해온 사람들 중에서 사회와 교회를 소란스럽게 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92년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했던 다미선교회나 작년 12월 한국전쟁설을 이야기했던 홍혜선전도사의 경우는 아주 심각한 것들이었습니다. 방언통역을 제대로 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거짓으로 통역해도 그런 줄 알고 믿고 따라간 사람들이 많았고, 지금까지 방언이나 방언통역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로 제대로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성령의 은사를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지 않음으로, 성령의 활동을 제한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결국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기기에 제한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성령의 은사 자체를 부정하게 사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한국을 떠나시게 될 것입니다. 한편, 방언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탄의 속셈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교회에 기도의 불을 꺼버리겠다는 사탄의 계략에 말려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사실 이성(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방언기도를 동시에 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기도는 2~3시간이면 끝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면, 이성으로 기도하다가도 방언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충분히 기도에 몰입할 수 있고,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는 이성(마음)으로도 기도해야겠지만, 특히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고 봅니다. 방언기도는 기도를 충분히 그리고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통역을 할수만 있다면 교회를 세워주는 내용의 기도이기에 방언기도는 계속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13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글로싸이스)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8)” 그렇다면 언제 방언이 그쳐지는 것입니까? 그 다음 구절들을 보면, 믿는 자들의 주님의 얼굴을 마주 대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3:9~12). 그것은 주님의 재림의 때를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방언기도를 쉬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해서도 아니 되겠습니다. 질서하게 교회의 유익을 위해 지혜롭게 방언기도를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방언기도를 맹신하여 그것만을 좇아가는 것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방언은 성령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나눠준 신령한 은사인만큼(고전12:7) 잘 활용하여 개인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했으면 합니다.
5. 노우호목사님 동영상에 조용기 목사님의 방언과 통역이 나오는데 이에 대하여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제 마지막 답변이군요. 조용기 목사님께서 하신 방언과 그 통역이 맞는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하셨는데요. 제가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 방언통역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에 조용기목사님께서 공예배 중에 방언하시고 방언통역을 하신 방법은 성경적인 것이었다고 보여집니다(물론 지금의 조용기 목사님의 모습은 매우 실망스럽지만요).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하기를 공예배 중에 방언할 수 있도록 허락한 유일한 경우가 바로 방언통역을 수반하는 경우라고 했기 때문입니다(고전14:27~28). 그러므로 조용기 목사님께서 예배중에 방언하시고 방언통역하신 것은 (정확히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겠지만), 그래도 성경적으로 하지 않으셨나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방언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데, 방언을 예언처럼 사용하신 부분(사람에게 선포하듯 )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여간 오늘날의 방언의 문제는 방언의 통역의 문제가 더 크지 않나 생각합니다. 수많은 종류의 방언들은 존재하는데, 그것을 제대로 통역해 줄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탄도 이것을 알고 장난치는 것 같습니다. 방언기도의 내용을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으니, 방언을 통역하는 사람에게 적당히 생각을 집어넣어서 거짓 방언통역을 하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동안 방언을 통역해온 사람들 중에는 사회와 교회를 소란스럽게 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92년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했던 다미선교회나 작년 12월 한국전쟁설을 이야기했던 홍혜선전도사의 경우는 아주 심각한 것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방언통역을 제대로 해 줄 사람이 없으니, 거짓으로 통역해도 그런 줄 알고 믿고 따라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구더기가 무섭다고 장을 담그지 않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아마 방언의 문제보다도 방언통역의 문제가 더 큰 것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방언통역이 잘못되어서 방언에 대해 잘못된 이해를 조장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방언 중에는 귀신들이 주는 방언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함께 기도해보면 금방 들통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방언이 성경에 없다고 방언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주시는 분은 성령이신데, 방언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하고는 방언을 금한다면 이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방언을 제대로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게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하지만 성령의 은사를 성령의 은사로 인정하지 않고, 성령의 활동을 제한하는 것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님은 인격적인 분이기기에 제한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성령의 은사 자체를 부정하게 사태가 발생할 것이고, 그러면 성령께서는 한국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 방언으로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뒤에서 배후조종하고 있는 사탄의 속셈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교회에 기도의 불을 꺼버리겠다는 사탄의 계략에 말려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사실 이성(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방언기도를 동시에 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기도는 2~3시간이면 끝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면, 이성으로 기도하다가도 방언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충분히 기도에 몰입할 수 있고,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서는 이성(마음)으로도 기도해야겠지만, 특히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도 매우 유익하다고 봅니다. 방언기도는 기도를 충분히 그리고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통역을 할 수만 있다면 교회를 세워주는 내용의 기도이기에 방언기도는 계속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13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글로싸이스)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8)” 그렇다면 언제 방언이 그쳐지는 것입니까? 그 다음 구절들을 보면, 믿는 자들의 주님의 얼굴을 마주 대할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3:9~12). 그것은 주님의 재림의 때를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방언기도를 쉬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해서도 아니 되겠습니다. 질서하게 교회의 유익을 위해 지혜롭게 방언기도를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방언기도를 맹신하여 그것만을 좇아가는 것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방언은 성령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나눠준 신령한 은사인만큼(고전12:7) 잘 활용하여 개인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했으면 합니다.
-정병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