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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44편)*
※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 ※
1616년 여진족이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後金)은 광해군의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조선과는 큰 마찰이 없이 지냈으나
인조가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표방하고 명의 모문룡이 가도(椵島)에 주둔하는 것을 허락 하고 군사원조까지 하자
명나라를 치려던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또한 후금은 명나라와의 싸움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렸고 이를 조선과의 통교(通交)로써 해결 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인조가 즉위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 일어났던 이괄의 난은 겨우진압되었으나,
이 난은 엉뚱하게도 후금에 조선을 침공할 구실을 주게 되었다
부하에 의해 살해된 이괄의 부장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가서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한 것이다
조선의 내부 분열을 눈치 챈 후금이 1627년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왕자 아민(阿敏) 을 총사령관 으로 삼고 유해(劉海)를 선봉장으로 한 3만 5,000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후금이 강홍립, 박난영 등 조선 장수들과 한윤을 길잡이로 삼아 공격을 해 온 것이다.
1627년 1월13일 새벽, 후금군의 선발대가 압록강의 얼음을 타고 국경을 넘는 동안 의주 부윤 이완
(李莞 1579~1627)은 제대로 방어도 못한 채 살해 되었고 의주는 함락되었다
이완(李莞)은 작은 아버지인 이순신 장군을 도와 노량해전 에서 활약했던 이순신의 조카였다.
다행히 후금군은 평상에서 진군을 멈추고 강홍립을 강화도로 보내 화의를 요청했다.
화의 내용은 후금이 조선의 형의 나라가 되고, 압록강을 경계로 하며, 국경 일대에 시장을 열어 달라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별 볼일 없는 요구 였으므로 조선은 황감하게 이 조건을 받아 들이고 화의를 함으로써 후금의 아우가 되었다.
어제까지 오랑캐니 야만인이니 하고 우습게 여겼다가 꼴 좋게 생겼다
그러나 조선과 후금의 화약은 두 나라가 다같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은 후금과의 형제관계를 굴욕적인 것으로 인식하였고 더욱이 수시로 강요하는 후금의 물자조달에 따라 과중한 경제적 부담에 반발,배금(排金)의
길을 더욱더 굳히게 되었다.
후금 역시 중강(中江)의 개시
(開市) 등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모문룡의 세력을 공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배금 경향이 날로 높아지는 데 불안을 느꼈다
이러한 양국의 관계는 후금이 더욱 팽창된 세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군신(君臣)의 관계를 요구하므로써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다시 일어날 후금과의 한판 붙기 작전*
정묘호란(丁卯胡亂)에서 후금에 깨지고, 사사건건 후금과의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자 인조는 후금과 다시 한판 붙기로 작정했다.
관서지방군에 군량 4개월 분을 실어 보내고 청천강 이북의 산성에 5~6개월 분의 군량미를 비축하도록 했다
또 군사조직을 정비해 김시양을 도원수로,정충신을 부원수로 삼았으며!
임경업(林慶業)을 북면방어사로 삼고, 남한산성을 최후의 방어성으로 지정해 정비토록 했다.
도원수 김시양과 부원수 정충신이 인조의 강경방침에 반대 의견을 내자 인조는 둘을 해임해 버리고 그들보다 훨씬 멍청하고 모자란 간신 김자점을 도원수로, 그리고 윤숙을 부원수로 임명했다.
이렇게 엉성하게 전쟁 준비에 들어갔으면서 인조는 국론을 통일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매일 척화파와 주화파가 죽을 둥 살 둥 싸움을 벌이고 있었으며
덜 떨어진 인조는 그 가운데서 어정쩡 하게 있으면서 무엇 하나 제대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조선이 오직 명나라만을 섬겨야 한다는 대의명분 하나만 붙들고 소모적인 세월을 보내는 동안 후금의 침공은 눈앞으로 다가왔다.
전쟁 분위기가 무르익자 도원수 김자점은 의주, 안주, 평양, 황주, 평산을 주요 방어선으로 삼아 산성을 수축하고 병력을 집중 배치했다.
의주 부윤 임경업은 3,000의 병력을 이끌고 백마산성으로 들어갔고, 평안감사 홍명구와 유림은 평양 주둔군 3,000여명을 이끌고 자모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산성들은 큰 길에서 30~40리씩이나 떨어져 있어 적군이 큰 길로 진군해 오면 막을 수가 없었다.
(아뿔사~)
대사간 윤황이 이러한 전략에 적극 반대하면서 인조에게 평양에 직접 나아가 적을 맞아 싸우면 온 나라의 군사와 충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적극책을 건의했다
그러나 비겁한 인조는 적이 쳐들어오면 강화도로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었으며, 육지에 남은 백성들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후금을 청으로 바꾼 청태종은 당당하게 직접 출전하고, 조선의 인조는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으니 처음부터 되는 싸움이 아니었다!
조선이 얼마나 한심한 나라인고 하니, 당시 조선의 인구는 거의 800~900만 정도 되었고 만주의 후금은 겨우 50~60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던 신흥 소국이었다.
인구만 해도 15배 이상 되는 나라가 붙는대로 깨지니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인데
그 첫째 원인은 비겁하고 무능한 임금이었다.
그냥 선조를 판에 박은 것이 인조였다.
하긴 아래의 모습만 보아도 겁이 나서 오줌을 질질 쌌겠지? (ㅠㅠ)
(흐미 짠허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45편)*
*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전쟁 병자호란(丙子胡亂) *
후금(後金)은 점점 세력을 키워 나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더 조선에게 양국관계를 '형제관계' 에서 군신관계'로 바꾸라고 명했다
조선을 더 압박해 온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어떻게 했을까.
조선의 조정은 두 파로 나뉘었다. 오랑캐에게 또 다시 무릎을 꿇을 수 없다! 우리의 대의명분을 지켜야 한다."
라는 척화론(斥和論)과 오랑캐라고 하나 우리보다 군사력이 강한 걸 무시할 수 없다!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라는 주화론
(主和論)이 대립되어 있었다
척화론자인 삼학사(三學士) 윤집(尹集)의 말을 들어보자.
화의가 나라를 망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옛날부터 그러하였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명나라는 우리나라에 있어 부모의 나라이고 노적(청)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원수입니다
인조실록 33권, 14년 11월 8일 어디서 개뿔, 부모의 원수라니.
명나라가 밥 먹여준다더냐.
주화론자인 최명길 (崔鳴吉)의 입장을 살펴보자.
요즈음 대각에서는 사람마다 모두 척화(斥和)를 주장하고 있으나
유독 화의를 주장하는 의견은 언론이 몹시 정당하고 방략이 채택할
만하니(중략)
인조실록 33권 14년 9월 5일 여러분 이라면 의리, 명분, 실리 중에서 어떤 걸 선택할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실리를 선택하겠지요
실리 추구야말로 21세기식 사고 방식 이니까요
하지만 인조가 살던 17세기 조선은 달랐다
어릴 때부터 유학을 배우고 자란 그들은 의리와 명분을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 결국 죽더라도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다'라는 생각으로 청(淸)을 배척하는 척화의 입장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을 청은 어떻게 했을까.
죽고 싶다고? 그럼 죽여주마.
이렇게 청나라가 제대로 조선에 쳐들어왔으니 그것이 1636년의 병자호란(丙子胡亂) 이었다.
1636년 12월 8일, 청태종은 용골대를 대장, 마부대를 선봉으로 삼고, 여진족, 한족군, 몽골족 등
총 12만 8천여 명의 혼성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 병력은 당시 청(淸)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병력이었다.
임경업이 지키는 의주의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텅텅 비어 있는 큰 길로 남하한 청군은 3일만에 평양을 통과하고 보름이 채 안되어 개성을 점령했다.
(거봐요~ 김자점! 큰 길에서 30~40리씩이나 떨어져 있는 산성으로 들어가면 안된다 하지 않았소!)
조정으로 부터 차별받으며 서럽게 살아온 서북지방 백성들은 청군이 도성을 향해 진격할 때 내다 보지도 않았다.
청군의 진군 속도는 조일전쟁 때 일본군이 진격해 온 속도보다 훨씬 더 빨랐다.
도성까지 오는 동안 중간에 한 놈도 길가에 얼씬 거리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 속도였다.
도원수 김자점은 정방산성에서 남하하는 청군과 맞섰다가 단번에 깨지고는 산성으로 도망가 그 후로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이런 멍청한 도원수를 총사령관에 앉혀놓고 적을 막으라 했으니 어질인(仁)을 쓰는 인조(仁祖)란 임금, 참 한심하기 그지없다.
평양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仁祖)는 강화도로 도망 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이 퍼지자 강화도로 가는 길은 피난가는 백성들로 미어졌다.
그러나 마부대의 기마대가 벌써 도성에 인접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어 졌다는 보고를 받고 인조 일행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청군의 선봉 마부대는 만주의 성경(심양) 에서 한양까지 12일 만에 주파했다
조일전쟁 때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하고 20일만에 도성을 점령 했었다
조선은 그냥 동네북 이었다.
청군은 조선 침략을 신속히 끝내기 위해 남하하는 도중 거의 약탈행위를 하지 않았다.
물론 군량미와 군수품이 넉넉한 것도 약탈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청군은 조선군과의 전투를 속전속결로 끝낼 생각 이었고, 조선인들의 인심을 잃지 않으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남한산성(南漢山城)에는 군사 1만5천명과 관원 300명, 그리고 약 50일치의 군량이 있었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빙 둘러 사람 키 두배쯤 되는 높이의 나무를 쌓아올려 외성을 만들었다
외성 밖에는 나무 울타리를 쳐놓고 쇠방울을 달아 놓음으로써
남한산성은 졸지에 번지없는 주막이 아니라 감옥이 되어 버렸다.
조선군 지휘부는 조선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간혹 군사를 내보내 청군을 기습 하곤 했으나
대세에는 전혀 영향을 줄 수 없었고, 양측은 화의조건을 협상하느라 지루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1637년 1월1일 후속 부대로 도착한 청태종 (淸太宗)은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포위망을 강화해 놓고 느긋하게 술을 마시면서 되어가는 꼴을 보고 있었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청군들은 경기 지역 전체를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강간했다
젊은 여자들은 모조리 청군의 군막으로 끌려가 노리개가 되었다.
엄마가 끌려가고 길가에 버려진 아이들은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이룬 빌어먹을..개새들)
청군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은 시일이 지나자 식량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기대하던 전국의 근왕병 들도 오지 않았다.
이렇게 한심하게 된 판국에도 대신들은 주화파(主和派)와 주전파 (主戰派)로 나뉘어 쌈박질만 하고 있었다.
김상헌(金尙憲)과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재)는 한치의 양보도 없이 청나라와 싸울 것을 주장 했고, 최명길(崔鳴吉)은 화의를 적극 주장했다(주화파의 최명길)
주전파(척화파)라는 것들은 사실 칼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한 문신들이었다
칼 한 번 써보지도 못한 것들이 상황파악도 못하고 주제도 모른 채 명분에 매달려 입방아만 찧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역사책에서 '척화파가 조선의 기개를 대표하고 어쩌구' 라고 배웠으나.
사실 여러번 반복해서 제대로 그들에게 문장읽기를 시켜야 한다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었으니...
( 주전파의 김상헌) 인조가 남한산성 에서 농성하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주화파(主和派)가 항복조건을 가지고 청군 진영을 왕래하는 동안 경상도 군사 4만이 2일 광주의 쌍고개에 이르러 진지를 구축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조선 최대의 병력이 집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멍청한 것들은 척후를 내보내지 않아 청군이 몰려와 자신들을 포위하는 것도 몰랐다
포위당한 경상도군 4만은 청군의 공격에 궤멸되었고, 경상우병사 민영이 전사하자 근왕군은 남한산성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아뿔사..이런 🐕같은 경우가..)
당시 조선군 전체 병력은 청군에 비하여 절대 적은 수가 아니었다
총력을 집결했으면 20만 명은 되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임금인 인조가 애초부터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도망칠 궁리부터 했다
게다가 총사령관인 도원수라는 것이 전쟁에 대하여 🐀 뿔도 몰라 제대로 된 전략 하나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바람에 조선군은 지리멸렬해져 적을 앞에 두고도 총력을 집결하지 못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이었다.
1637년 1월 23일 강화도가 청에 함락되어 왕자와 비빈들을 비롯한 2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결국 농성 47일만인 1월 30일, 주화파 최명길은 인조의 명을 받아 항서를 청태종에게 전하고 삼전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부딪치는
삼배구고두 의 황제 알현 예를 행하고 용서를 빌기로 했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항복 예식 에서 인조가 머리를 아홉 번 언 땅에 부딪칠 때 그 소리가 청 황제의 귀에 들려야 했다
인조는 맨 땅에 가시자리를 펴고 앉았고, 청태종은 수항단이라는, 9층 계단을 만들어 놓은 꼭대기에 앉아 절하는 인조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러니 웬만큼 세게 땅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고는 그놈의 소리가 청태종 에게 들릴리 만무했다
소리가 작게 나면 곁에 있는 청나라 관원이 소리질렀다.
얌마, 안 들려?
좀 더 세게 박아!이 무슨 🐕꼴이냐?
(오늘 여러번 🐕 가 등장하네..)
항복의 절차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참혹한 것이 '제1등 절목'이다.제1등 절목이란 '함벽여츤
을 말한다
즉 항복하는 임금이 손을 뒤로 묶어 결박된 채 구슬을 입에 물고 관(棺)을 등지고 가는 것을 말한다
7인조는 용골대의 관용으로 '제2등 절목'의 절차를 밟은 것이다
제2등 절목은 신하의 예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하는 것이니 이마에 피가 났었어도 찍소리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조가 창덕궁 양화당에 조정을 벌여놓자, 용골대가 와서 청태종이 새로 만든 '고려왕'이라고 쓴 인장을 전달했다.
조선이라는 국호는 명(明)이 정해 준 것이니 청은 고려왕이라는 인장을 새겨서 준 것이었다.
이 치욕이 바로 인조반정(仁祖反正) 의 결과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백성들은 양식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심지어 사대부의 집에서도 양식이 떨어져 얼굴이 누렇게 뜬 사대부가 흔히 있을 정도였다
인조 16년 함경감사가 장계를 올려
한 해에 굶주림과 역병으로 죽는 사람이 무려 4,300명이나 된다고 보고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는 말이 있다 겨우 한 세대쯤 전에 일어난 조일전쟁 때의 교훈을 잊어버려 다시 나라가 이꼴이 되었으니 그래서 역사를 배워야 한다.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