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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0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마태오 11,28-30
일상의 노고와 고통이 나의 십자가인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모두 당신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식을 얻는 방법은 당신 마음의 온유하고
겸손한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타인에 의해 지워지는 짐도 있고 나의 잘못으로 지는 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무거운 짐이 십자가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일상의 십자가를 잘 지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면이 더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는 참 십자가의 의미를 잃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할 때 그 십자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통과는 사뭇 다릅니다.
아래 이야기에서 이 사람의 진정한 십자가는 무엇인지 발견해봅시다.
마이크 블랙은 100억 대의 사업가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잠시 접어두고 무일푼 노숙자로 시작해서 1년 안에 10억을 버는 챌린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목적은 젊은이들에게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도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믿음과 도전의 용기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판매할 수 없는 자신의 일상을 담아야 하는 카메라, 휴대전화, 그리고 옷 한 벌입니다.
자신의 전문 분야 사업을 하면 안 되고 자신의 인맥에 도움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신용이나 가족, 친구, 현금, 자산, 전문지식, 인맥, 심지어 자신의 이름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진짜 리얼로 길바닥에서 맨땅에 아무것도 없이 그의 챌린지는 시작됩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물 한 잔 얻어 마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조금씩 이 챌린지를 시작한 것을 후회합니다.
한 푼도 못 벌고 노숙 생활을 하며 음식도 먹지 못하여 말라갑니다.
그는 첫날 저녁부터 눈물을 흘립니다.
다행히 모르는 사람이 며칠 재워주기도 하지만,
집이 없다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면서도 한 푼도 벌지 못합니다.
그저 만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먹고 자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이크는 아이삭이라는 인상 좋은 사람의 도움으로 며칠을 카라반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고 슬슬 사업을 시작합니다.
스마트폰으로 남이 버리는 가구를 팔아 이익을 배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돈을 모으는 동안 그는 돈이 없어 오로지 콩만 먹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사업화하기 시작합니다.
돈이 좀 모이자 집도 하나 월세를 내어 자신도 살고 나머지 방들은 세를 줍니다.
잠도 자지 않고 일을 합니다.
자그마한 사무실도 임대합니다.
이 과정에 실패도 겪었지만, 그래도 돈은 조금씩 쌓여갑니다.
12주 차 6,600불의 현금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사업은 그가 관심을 가지지 못하자
매달 25,000불의 적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이제 인터넷으로 커피를 판매하려고 합니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타겟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익 중 일부를 유기견 보호센터에 기부하는 형식입니다.
첫 판매도 이루어지고 어느 정도 사업이 궤도에 오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32주가 지났을 때 그는 임대업으로 1,600불의 현금흐름을 일으킬 수 있었고, 커피 사업으로만 34,000불을 법니다.
그러는 와중에 아버지가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습니다.
전화를 받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아버지는 얼마 못 삽니다.
그는 챌린지를 계속해야 할까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차피 시작한 것 끝까지 가보라고 합니다.
마이크는 아버지를 자신의 월세 집에 모시고 돌봐드리며 사업을 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42주 동안 달려온 그도 건강이 악화하여 건강에 문제까지 발생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챌린지를 포기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42주 동안 맨땅에서 시작하여 그의 통장엔 64,000불을 찍었습니다.
노숙자에서 10개월 만에 8천만 원의 돈을 모으게 된 것입니다.
2개월 더 했다면 10억을 벌 수 있었을까요?
어쨌건 마이크 블랙은 자신의 건강도 챙기고 아버지와 마지막까지 함께 하며 좋은 곳으로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챌린지는 비록 실패했지만,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도 처음 사업을 할 때 5천만 원의 빚을 져서 고통스러워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면 무엇이든 해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이크 블랙의 십자가는 무엇이었을까요? 자기 사업이 월 3천만 원씩 적자가 나는 것?
아버지의 대장암? 친구들의 비웃음? 먹을 것이 없고 잠잘 곳이 없었던 인생 최대의 고통? 아닙니다. 그의 십자가는 이것이었습니다.
“아무것 없이 시작해도 믿고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히 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싶은 마음.”
이 마음 때문에 그는 그 많은 고통을 사서 겪어야 했습니다. 그 마음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곧 인간을 구원하고 싶은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은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받는 고통이나 어쩔 수 없이 받는 고통은 오늘 복음에서 보면 그냥 무거운 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마음을 받아들여 멍에로 매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십자가를 진 사람이고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20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마태 11,28-30
시원한 물 한 잔 하고 가세요!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자주 드는 생각 하나가 있습니다.
인간 존재 하나하나가 마치 어여쁜 꽃 한 송이 같다는 생각입니다.
각자의 인생이 한 송이 꽃처럼 예쁘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열흘 붉은 꽃 없다고, 활짝 피어오르는가 하면, 순식간에 시들고 말라버리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네 인생, 긴 것 같지만 찰나같이 짧습니다.
솜털 같은 유소년기, 어여쁜 청소년기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장년기로 넘어갑니다.
눈 깜짝할 사이 어느새 희끗희끗한 노년기에 접어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순풍에 돛단 듯이 인생이 술술 풀려나갈 때도 있습니다.
만개한 한 송이 꽃처럼 절정에 도달할 때도 있습니다.
만사형통하고 승승장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잠시입니다.
어느새 나이가 들어 이런저런 다양한 병고 앞에 노출되고, 결코 원치 않는 심연의 바닥체험도 하게 됩니다.
깊은 상처에 홀로 돌아서서 눈물짓곤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안쓰럽고, 가련하고, 측은한 존재가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오늘 주님께서는 참으로 큰 위로와 격려의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1장 28~29절)
고생 많이 하기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특별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생들을 가만히 분석해보니 하지 않아도 될 고생들, 결국 ‘사서 고생’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신도 모르게 그 지옥 같은 ‘쌩고생’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다들 너나 할 것 없이 죽을 고생들입니다.
어디 가서 마땅히 하소연할 곳도 찾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 시대 우리 교회에 주어지는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어야겠습니다.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말 못할 고초에 마음 깊이 공감하며 맞장구쳐줘야겠습니다.
그들이 소리 없이 흘리고 있는 서러운 눈물을 조용히 닦아줘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문턱을 완전히 낮춰야겠습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다양한 모습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은 세상을 향해 활짝 두 팔 벌리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모든 인간이 다 존귀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생명 붙어있는 모든 인간이 다 하느님의 모상이자 거룩한 창조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앞에는 그 어떤 차별도 없었습니다.
혹독한 더위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물 한 잔 하고 가세요, 요기라도 하고 가세요, 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포근하게 그들을 감싸 안고 격려의 말이라도 한마디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물이자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변장하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또 다른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2023. 7. 20. 목)(마태 11,28-30)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 말씀은, 표현만 다를 뿐이고 사실은 ‘복음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입니다.
성령 강림 때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사도 2,38.40).”
예수님 말씀에서, “나에게 오너라.” 라는 말씀과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은, “회개하고, 나를 믿어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라는 말은 “구원을 받으십시오.”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해야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든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야 할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고생’하고 있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첫 사람인 아담 때부터 그렇게 되었습니다.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7-19).”
예수님은 먼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출하려고 (먼지로 돌아가지 않게 하려고) 오신 분이고,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렇지만 태어날 때부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고생할 일이 전혀 없는 인생을 살다가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에 그런 사람이 자기에게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외면하고 살다가 인생을 마친다면, 그 사람은 그냥 먼지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아니면서, 인생에서 크게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아쉬워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예수님의 복음을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살다가 허무하게 먼지로 끝나버립니다.
회개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허무에서 벗어나기를, 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받을 길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허무에서 벗어나서 영원을 향해 나아가려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허무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면서도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사람의 경우를 보면, 더욱 깊은 허무에 빠져서 절망하는 것을 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에서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다는 요한 사도의 말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1요한 5,1-5)”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하나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과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도 하나입니다.
신앙생활과 계명 실천의 바탕은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신앙생활도, 또 계명들을 실천하는 일도 힘겹지 않습니다.
힘겨운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쁜 일’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에 사랑 없이 의무감으로 하는 일이라면 ‘강제 노동’으로 변질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가르침들을 ‘멍에’와 ‘짐’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그렇게 억지로 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멍에와 짐이 아니라,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멍에와 짐을 제거하는 ‘해방의 열쇠’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멍에가 아닌데도 멍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짐이 아닌데도 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랑 없이’ 의무감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강제 노동을 하듯이 신앙생활을 하고 계명 실천을 하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억지로 하는 일이니 그 신앙생활과 계명 실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으니 생기도 없고 생명력도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하다가는 결국에는 목적을 잊어버리게 되고, 신앙생활을 중단하면서 ‘냉담자’가 되어버립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