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산스님의 자비심은 비록 열반 50주년을 맞이하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귀감이 되고 있다.
범어사에서 주석할 무렵 구름처럼 몰려든 납자(衲子)들을 단 한명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스님의 자비심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전해오는 데 다음과 같다.
운수납자들이 줄을 잇자 사중(寺中) 살림을 책임진 원주(院主)의 상념이 깊어졌다.
국가는 물론 사찰의 재정상태도 넉넉하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동산스님에게 걱정을 고백했다.
그러자 동산스님은 간단하게 답했다.
"의식(衣食)은 제천(諸天)이 감당하느니라."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는 대중을 외면할 수 없다는 소신에 따른 것이다.
동산스님을 모시고 정화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청담스님은 생전에,
"식량의 유무를 불고(不顧)하고 수도납승(修道衲僧)들이 많이 오면 올수록 기쁘게 생각하고 한 사람이라도 가는 것을 섭섭히 여기고 만류했다.
이러한 자비심으로 세세생생에 무량대복(無量大福)을 받을 것이며, 또한 많은 중생을 제도할 줄 믿는다" 고 회고한바 있다.
청담스님은 동산스님이 옳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노도(怒濤)와 같은 폭발적인 꾸짖음을 했지만, 이내 무심(無心)한 얼굴로 대했다" 고 전했다.
예불에 맞춰 각 전각을 참례(參禮)하던 동산스님이 대웅전 앞 오른쪽에 있는 향나무를 가지치기한 스님에게,
"당장 나가라"고 크게 경책했다.
깜짝 놀란 그 스님은 범어사를 나갔고, 다음날 아침 동산스님을 찾아가 문안 인사를 했다고 한다.
대중들은 또 다시 꾸중을 듣고 쫓겨나리라고 여겼지만 동산스님은,
"잘 왔다. 저기 앉아라"고 자리를 권했다.
그때 다른 스님이, "어제는 쫒아냈는데 금방 받아 주십니까" 라고 하자,
동산스님은,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거야" 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옳지 못한 일에는 따끔한 경책을 하면서도, 참회하고 다시 정진하겠다고 하면 거두었던 넉넉한 품을 느낄 수 있는 일화이다.
1956년 세계불교도대회가 열린 카투만두에 머물면서 당시 네팔 불교계의 현황을 살펴본 스님은,
한국불교가 출가자는 수행에 집중하고, 재가자는 사찰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일체의 불교사업은 신도들이 맡아서 하며, 비구들은 오직 정진득도(精進得道) 중생제도(衆生濟度)에 전념할 뿐이다.
이곳에도 수선자(修禪者)가 있으나, 그들이 닦는 선(禪)은 모두 수상선(修相禪)이다.
동산스님은 이어 교단 운영 방안에 대한 복안을 설명했다.
짧은 시일이나마 다른 나라에 와서 그 곳의 불교를 살피고,
비구들의 행도(行道)를 보고서 느낀 것은 우리나라도 이곳 불교의 좋은 점들은 본받아 사원운영(寺院運營)은 재가신도(在家信徒)들에게 맡기고,
비구들은 교단의 기둥으로써 오로지 수도(修道)에 정진하며 중생들을 지도 교화하는 데만 주력하여야 되겠다는 것이니,
왜냐하면 현 세계불교의 형세(形勢)로 봐서 자연히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국불교 종단을 재건하고 불일(佛日)이 증휘(增輝)케 하기를 마음 속 깊이 다짐해 본다.
동산스님의 가르침은 대중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스님을 따르는 후학과 불자들이 줄을 이었다.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한 대의스님은, "동산스님은 우리 불교계의 자랑일 뿐 아니라 국가 사회적인 보배가 아닐 수 없다" 면서,
"이처럼 고귀한 인격의 소유자였던 동산스님이 아니고서는 그 누가 감히 한국불교정화의 제 일선에서 선두 지휘, 악전고투할 사람이 있었겠는가" 라고 밝혔다.
동산스님이 열반에 든 후 대의스님은,
"그러나 아직도 불교정화의 완수를 보지 못하고, 스님께서 홀로 가셨음은 가슴 터질 듯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면서,
"우리들은 마치 기둥 없는 집이요, 부모 없는 아이들이요, 목동 없는 양(羊)떼가 되었으니,
지금에 오직 그 높은 덕(德)을 우러러 사모할 뿐" 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통도사 조실 경봉스님은 1967년 나온 '동산대종사석영첩(東山大宗師錫影帖)' 권두언에서,
"우리 인간에 문사(文士)의 생애는 일병필(一柄筆)이요,
무사(武士)의 생애는 일척검(一尺劒)이요,
종사(宗師)의 생애는 일개(一箇) 주장자(拄杖子)로다."고 했다.
"동산 대종사는 대원력(大願力)과 대자심(大慈心)으로,
무궁무애(無窮無碍)의 종문본지가풍(宗門本地家風)과,
운수납자(雲水衲子)의 행(行)으로서 천산만수(千山萬水)를 변답(遍踏)하고,
고행신도(苦行信道)하여 일생의 생애가 일개(一箇) 주장자(拄杖子)로서,
불조(佛祖)의 현풍(玄風)을 대진(大振)하고 중생을 교화하였으니,
과시(果是) 출격대장부(出格大丈夫)의 생애(生涯)로다" 라고 추모했다.
청담스님은 동산 대종사 열반 소식을 듣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큰 법당이 무너졌구나. 어두운 밤에 횃불이 꺼졌구나" 하면서,
"어린 아이들만 남겨두시고 우리 어머니는 돌아가셨구나" 라고 아파했다.
동산(東山)이 물 위에 떠다니니
일월(日月)이 무광(無光)하도다
억! 봄바람이 무루 익어 꽃이 피고 새가 운다
신구 학문과 내외전을 두루 익히고 계율을 호지하면서 참선 수행으로 일관한 동산대종사의 삶은,
지금은 물론 미래의 한국불교가 가야할 등대와 같다.
열반 50주기를 맞아 동산대종사의 가르침을 조명하고 계승하는 일은,
대한불교조계종 나아가 한국불교의 지향이 될 것이다.
범어사 주지 수불스님은,
"언제나 동산 큰스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수행정진한다는 원력을 지닌 도량이 금정총림으로 그 정신을 깊이 새겨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것" 이라면서,
"동산 대종사의 정신이 불교는 물론 사회와 국가 나아가 지구촌 발전의 원동력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조선말에 태어나 격동의 세월을 거치며 수행 정진하고, 한국불교의 청정성 회복의 주춧돌을 놓은 동산 대종사.
선지식으로 존경받는 스님은 직접 작성한 자찬(自贊)에서 삶을 자평했다.
元來未曾轉(원래미증전)
豈有第二身(기유제이신)
三萬六千朝(삼만육천조)
反覆只這漢(반복지저한)
원래 일찍이 전한바 없거니
다시 어찌 두 번째의 몸이 있으랴
100년이라 3만6000일이
단지 이놈의 반복이라
●
동산스님 제자인 성철스님의 숨은 일화
범어사 교무 소임을 보고 있던 1993년 5~6월경,
성철스님께서 열반하신 해인 1993년에 시자 한명만 데리고 조용히 동산대종사 부도전을 찾아 3배를 올렸다.
성철스님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주지 스님께 알리지도 못하게 하고, 동산노스님 탑전에서 3배의 절을 올렸습니다.
아마 회향 할 것을 미리 예측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해 해인사에서 열반에 들었습니다.
수불스님은 "마지막으로 절하는 성철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평상시에도 늘 스승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고 회고했다.
[불교신문]
첫댓글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양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