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중인 1952년부터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 때까지
남한은 육군첩보부대(일명 H I D) 소속의 무장공작원을 북쪽으로 파견 하였읍니다
이들은 한국전쟁때 지리산의 빨치산처럼 북한의 후방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양성되었으며
이들의 채용은 계약방식으로 3년 또는 4년 등 일정기간을 정해 채용 되었다고 합니다
한번 채용되면 계약 기간 만큼만 일을 시키고 비밀유지 각서를 쓰게한 뒤 해고 되었으며
기간을 연장하는 경우는 없으며 당사자가 사회복귀를 원치않을 경우 군경으로 특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2011년 봄부터 저는 인천~영흥섬을 운행하는 790번버스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며
영흥섬에서 하수오농사를 짓기 시작했읍니다
2011년의 초복을 하루앞둔 7월 22일 영흥섬의 버스종점에서 독특한 복장의 노인을 보게 됩니다
사진에는 안보이지만 이분의 오른쪽 허리에는 권총이 차여져 있었습니다
(물론 장난감 수준의 모조품 이었읍니다)
이노인이 입고있는 군복(?)의 왼쪽 팔뚝위에 달려있는 문양에는
영문 HiD와 특수임무수행자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이날로부터 두달여후인 10월 3일날 저는 용현초등학교의 총동문체육대회장에서 이분을 다시 다시 뵙게 됩니다
그리고 해마다 10월 3일에 치러지는 총동문 체육대회때마다 빠짐없이 뵙게 됩니다
저의 초등학교 12년 선배님(용현초등학교 2회 졸업생) 이십니다
북파 공작원들이 작전에 투입될때의 소속인 HID (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는
1948년께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지며 대북 정보수집 및 공작을 담당하는 부대 입니다.
특수임무수행자(特殊任務遂行者)또는 특수임무유공자는
북한에 파견한 공작원을 포함한 특별한 내용·형태의 정보수집 등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를 위한 특별한 희생이 요구되는 활동을 한 사람을 부르는 말입니다
남한 정부는 오랜 기간 동안 북파공작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거짓말’을 해왔읍니다.
이들을 북쪽에 보내는 것은 정전협정 위반일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 “북한은 공격적이며 남한은 평화적”이라고 해왔던 선전도 타격을 받기 때문이었지요
무장공작원으로서 임무를 마치고 생환한 북파공작원들은
자신들의 임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국가로부터 받기를 원했지만,
국가의 ‘거짓말’과 언론의 침묵으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국가의 거짓말을 뚫고 존재를 인정받게 된 데는 <한겨레21>의 보도의 공이 컸읍니다.
<한겨레21>은 1996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알리는 기사를 내보낸 데 이어
몇차례 북파공작원 특집을 내 이들이 실제하는 사람들임을 알렸읍니다.
북파공작원들의 자구노력과 몇몇 언론보도에 힘입어 국가의 거짓말은 금이 가기 시작했고
마침에 국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되는 데 이르게 됩니다.
김성호 전 민주당 국회의원은 2004년, “7·4 남북공동성명이 있었던 지난 72년까지
모두 1만여명의 남한 공작원이 북한에 파견됐으며 이 가운데 7,726명이 실종처리됐다”고 밝혔읍니다.
이런 노력들이 모아져 남한 정부는 북파공작원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 했읍니다.
지난 10월 3일 총동문체육대회가 열린 모교 운동장에서
2011년경에 저희부부는 만수동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때 저희식당에 자주 오시던 손님들중에 용현초등학교 3회졸업생이 한분 계셨었습니다
그때 그분께 들었던 이야기인데 한국전쟁이 터진1950년 (용현초등학교 5학년 재학중)여름 어느날
수업시간에 인민군들이 교실로 들이닥는 바람에 무척 놀랐고 무서웠었다고 하더군요
세월이 흘러 한국전쟁당시 초등학생 이셨던 용현초등학교 선배동문들은 8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고
오늘 이글의 주인공분 께서는 해마다 빠짐없이 모교의 행사에 참석을 하고 계십니다
다음에 이선배님과 마주치면 인사 드리는일 잊지 마시고 경의를 표해드렸으면 좋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