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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2일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마르코 3,22-30
마음의 평화를 원하면 절대 성령을 모독할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이들을 비판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파견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선물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결국 성령의 선물을 원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도 원치 않게 됩니다.
제가 며칠 전에 감기인 것 같아서 병원을 찾았습니다.
신자분이 운영하는 작은 병원입니다.
수액이라도 맞으면 빨리 나을 것 같아서 놔달라고 했지만, 그분은 수액은 약을 입으로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나 맞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린 터라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소화제나 감기약은 그냥 내가 약국 가서 사면 되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뒤에 코가 막히고 목에 가래가 끓었습니다.
열도 없고 몸살기도 없었습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주말에 미사를 할 때 목소리도 안 나고 콧물도 흐른다면 곤란할 것 같아 다시 병원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병원에 가보라는 말들을 많이 했지만, 사무원이 예약해주는 바람에 그 병원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진료를 매우 친절하게 다 해 주시고 미리 준비해놓으신 선물도 주셨습니다.
영양제와 방향제까지 있는 모든 것을 한 꾸러미 주셨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요?”라고 했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이 저를 믿어주셨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난번에 약간 실망한 눈빛으로 돌아간 것이 그분도 마음에 걸리셨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여기서 삼위일체 신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려준 처방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약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약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떨까요?
병원에 갈 일도 처방전을 받을 일도 없습니다. 약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내가 가서 처방전 없이
구할 수 있는 약들을 살 수는 있습니다.
물론 의사가 처방해 준 것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약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병을 고칠 희망은 있습니다.
하지만 약에 대한 희망이 믿음이 없다면 처방전도, 의사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습니다.
약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의사를 만나게 되고 처방전도 받게 됩니다.
제가 살면서 바랐던 것은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였습니다.
죽으면 구원될 수 있다는 의로움,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 없이 살고 싶어서 기쁨과 평화를 원했습니다.
행복을 원한 것입니다.
성당을 다니며 어느 정도는 이런 것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사.시.를 읽으며 더 큰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런 책을 읽을 때 나에게 들어오시는 성령의 힘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신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베푸시는 성령의 맛으로 우리를 당신께 이끄십니다.
그러나 행복이 성령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 가겠습니까?
약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처방전을 주는 의사도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의사는 욕해도 약은 욕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뮤지컬 ‘라만차의 기사’에서 돈키호테는 산초를 시켜 자신의 마음을 편지로 알돈자에게 전해줍니다.
알돈자는 사실 둘시네아, 곧 자기 나라의 공주란 내용입니다.
알돈자는 그것을 그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산초를 믿지 않더라도 그 편지 내용만이라도 믿는다면 그 편지를 보낸 돈키호테를 믿게 됩니다.
하지만 편지를 믿지 않으면 그것을 가져온 산초도 믿지 않는 것이고 심지어 그 편지를 산초에게 보낸 돈키호테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돈키호테는 하느님 아버지, 산초는 성자, 편지는 성령이 되십니다.
성령을 거부하면 다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마음의 평화를 원합시다.
그러면 성령을 만나게 될 것이고 성령을 만나면 그분께서 오시는 원천은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을 만나지 못하면 그리스도가 의미를 잃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게 전부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2일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 3,22-30
성령께서는 오늘 우리의 이 구차스러운 현실 안에도 굳건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이 땅에 육화강생하신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든 성령의 현존 속에 계셨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셨으며, 성령의 보살핌 아래 나자렛에서 30년 세월을 사셨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실 무렵 성령의 인도 아래 광야로 나가셔서 대피정을 하셨으며, 성령으로 충만해진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 앞에 펼쳐진 인류 구원사업을 위한 위대한 여정에는 성령께서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을 향한 율법학자들의 발언은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에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보십시오. 이보다 더 큰 신성 모독이 어디 있겠습니까?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향해 혹독한 악담을 퍼붓습니다.
베엘제불은 마귀 중에서도 대 마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존귀하시고 거룩하신 분, 가장 선하신 분 앞에 가장 사악하고 불경스러운 사람들이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엄청난 두려움과 거부감을 느끼고 길길이 뛰고 발악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이런 멋진 말씀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활기차고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한 가장 첫째가는 비결은 성령의 현존과 동반에 대한 확고한 의식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네 인생 여정에 항상 현존하시고 동반하심을 굳게 믿는다면, 우리 삶이 조금은 더 성숙해지고, 조금은 더 거룩해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들의 이 구차스러운 현실 안에도 굳건히 현존하심을 믿는다면,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좀 더 의연해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각자의 신앙 여정을 매일 동반하시는데, 그리고 우리 공동체 안에 확실히 현존하시는데, 우리가 겪는 매일의 작고 소소한 사건 안에서 활동하시는데, 그것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다거나, 믿지 않는다거나, 망각 속에 살아간다면, 꽤나 심각한 성찰이 필요한 상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겨울 한 본당에 대림 특강을 하러 갔을 때였습니다.
저의 젊은 시절을 소상히 잘 파악하고 계시는 분들이 그 본당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셔,
정말이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답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는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랍니다.
그래서 저를 보면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것을 느낀답니다.
사실 저는 젊은 시절, 숫기도 부족하고 말수도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배움도 부족했고 그럴만한 탈랜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남 앞에 서서 발표를 한다거나, 공개 석상에 서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이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정도로 완전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잊고 있었는데, 저도 요즘 저를 돌아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바뀌었지?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그러면서 결국 성령께서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 한 인간 존재 안에 머무시면서, 그를 지속적으로 자극하셔서 움직이게 하시는 분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틀렸어. 나는 늦었어. 지금 이 나이에 변화는 무슨 변화? 하는 것은 성령을 무시하는 죄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불꽃처럼 활활 타오를 것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주간 월요일 강론>
(2024. 1. 22. 월)(마르 3,22-30)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마르 3,22-27)”
마귀들은 ‘사람의 힘’으로는 쫓아낼 수 없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만물의 주님이신 하느님에게만 복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 드러난 일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사람’으로만 보였습니다.
<율법학자들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것을 직접 보았고,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싫고, 마귀들이 쫓겨난 것을 부정할 수도 없고, 그래서 율법학자들이 생각해낸 ‘논리’가 바로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는 논리입니다.
마귀들은 자기들의 우두머리에게 복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라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억지 논리’를
‘합리적인 논리’로 반박하십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라는 말씀은, 사탄, 즉 우두머리 마귀라고 해도, 부하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한다는 뜻인데, 부하 마귀들이 우두머리 마귀에게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거슬러서 싸울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마귀들의 속성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귀들은 단합이 잘 되는 조직체가 아니라, ‘분열될 수 없는 한 덩어리’인 존재입니다.
만일에 마귀들이 분열되어서 자기들끼리 싸운다면, 그것은 스스로 멸망하는 일이 될 뿐인데, 마귀들은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멸하는 길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쉽게 말하면 마귀들은 자살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24절-26절의 말씀은, 마귀들이 단합을 잘하고 결속력이 강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은 스스로 멸망하는(자멸하는) 길을 선택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율법학자들도 마귀들의 속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논리를 반박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기는 싫어서 그냥 침묵을 지킨 것으로 생각됩니다.
27절의 ‘힘센 자’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마귀들을 가리킵니다.
그 ‘힘센 자’를 묶어 놓는 ‘더 힘센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라는 말씀은, ‘사람의 힘’으로는 마귀들을 쫓아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재물’은 마귀들의 억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뜻하고, ‘재물을 털다.’ 라는 말은 마귀들의 억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마귀들을 쫓아내실 수 있고,
마귀들의 억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을 쫓아내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의 권한과 권능’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계시이기도 합니다.)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참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아 계시면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은 마귀들을 쫓아낼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냈는데, 마귀들은 아버지 하느님에게 복종하는 것과 똑같이 아들 예수님에게도 복종해야 하고, ‘예수님의 이름’에도 복종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마르 3,28-30).”
여기서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는 일반적인 죄를 가리킵니다.
‘신성을 모독하는 죄’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죄, 그리고 예수님을 안 믿는 죄로 해석됩니다.
“용서받을 것이다.”는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부정하고 모독하는 죄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구세주로서, 또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또 하느님으로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들입니다.
<그 일들에는 용서, 사랑, 자비 등도 모두 포함됩니다.>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라는 말씀은, ‘회개해도 소용없다.’처럼 들리는 말씀인데, 정말로 그런 뜻일까? 그런 뜻은 아니고, 그만큼 ‘큰 죄’ 라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누구든지, 또 무슨 죄를 지었든지 간에,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부정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받기를 거부해서 용서받지 못하게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