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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1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마태오 12,1-8
영원한 안식을 누릴 이들은 이 세상부터 안식을 누린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에서 밀 이삭을 뜯어 먹다가 바리사이들에게 들켜 비난당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라고 하시며,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라고도 하십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이 명확하게 안식일을 어기고 도둑질까지 하였는데 죄가 없다고 하실까요?
또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심선미 씨는 무당이었다가 하느님을 만나 회개한 사람입니다. 몸이 갑자기 아프고 자신 안에 신들이 들어 있음을 알았을 때 신내림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신들에게 맡기기로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져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들은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았고 학대하였으며
그녀는 결국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몰라 불안함에 떨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배를 탔을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반면 자수성가한 억만장자 글렌 스턴스는 100달러(약 12만 원)와 고물 트럭 한 대만 가지고 90일 안에 100만 달러(약 12억 원)의 부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챌린지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동네에서 막일부터 시작하고 그것으로 축제 때 풍선을 팔고 그것으로 중고 자동차를 수리해서 팔고 그다음은 집을 사서 수리해서 팔아 그 이익 1억 원 정도로 언더독이라는 바비큐 브랜드를 런칭합니다.
그 마을에 커다란 바비큐 행사가 있다는 것을 기회로 잡아 1등을 하여 상표 가치를 높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가게 평가액은 75만 달러였습니다.
어쨌든 10만 원으로 석 달 만에 10억을 번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석 달 동안 월급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를 도와주는 이들은 최선을 다하면서도
왠지 모를 확신에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을 고용한 글렌 스턴스라는 사람이 매우 친절하고 자신들을 존중해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확신에 찬 그의 행보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잡신들에게 끌려다니는 심선미 씨 마음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글렌 스턴스는 자신을 따르는 1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돈도 주지 못하고 고생만 시키지만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꼭 이 사업을 이뤄낼 수 있고 결국엔 그들을 행복하게 할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전이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안식 안에 머무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라는 배를 탔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어떻게 되나?’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을 누립니다.
이것이 참 안식처를 찾는 방식입니다.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배에 절대 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전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만 한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기 때문에 구원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하느님 창조사업에 뛰어든 이는 이미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은 이미 그리스도의 안식 안에 있게 됩니다.
전쟁터에서 군인이 적군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 책임이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잘못된 나라를 선택한 것은 본인 책임이 될 수 있겠지만, 그 나라 안에서는 그런 사람은 영웅이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 창조사업에 뛰어든 이들은 이미 피 흘림, 곧 죽음을 향하고 있습니다(갈라 2,19-20 참조).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히브 4,9-10)
우리가 참 안식으로 가고 있음은 믿음으로 느끼는 평화의 감정으로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21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마태오 12,1-8
지극히 인간적이고 인본적이며 사람을 살리기 위한 안식일 규정!
바야흐로 여름 신앙학교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하루 온 종일 캠프 오는 청소년들의 안전을 위해 뙤약볕 아래서 콘크리트 작업을 했습니다.
모래와 시멘트, 물을 적절히 배합해서 콘크리트를 만든 후 채워 넣는 일인데, 무게가 만만치 않아
허리가 휠 지경이었습니다.
몇 시간 일하고 나니 하늘이 노란 게, 거품 물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이러다 쓰러지지 하면서, 수시로 쉼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틈만 나면 물을 마시고, 목에다 들이부었습니다.
일과 휴식의 적절한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실감했습니다.
더불어 삼복더위에 냉난방 설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 지하 주차장에서, 체감온도가 6~70도 까지 올라가는 철판 위에서 작업하시는 분들, 얼마나 고생이 많으실까, 걱정됩니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중요시여기던 안식일법 규정, 그 근본 취지는 참으로 합리적이면서도 상식적인 것, 인간적이고도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강요되고 있던 안식일법 규정은 참으로 모순되고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던 안식일 규정을 통쾌하게 파기하십니다.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내는 동시에, 지친 우리 인간과 동물과 땅과 자연에게도 휴식 시간을 부여하는, 참으로 유익한 안식일 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안식일법 규정을 제정한 취지는 참으로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주간 내내 열심히 일했으니 주말에는 편안히 휴식을 취하자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규정이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도 바치고, 오붓한 시간도 보내고, 책도 좀 읽고, 맛있는 것도 해먹고...
그런데 안식일 관련 세부 규정이 하나하나 추가되면서 정말이지 ‘웃픈’ 규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제정된 안식일 규정이 인간을 못살게 굴고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규정이 되고 만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심기를 거스르게 한 사건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부분을 서술함에 있어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사가·루카 복음사가와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루카 복음사가는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품위를 살려주기 위해서인지 예수님께서 불편 없이 지나가실 길을 내기 위해서 밀 이삭을 뜯었다고 기록합니다.
어쨌든 밀 이삭을 자르는 행위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행동 39가지에 해당됩니다.
일종의 추수 행위로 간주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바리사이들의 특징인 지나친 확대해석,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행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여차하면 고발할 건수 하나 잡기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의 뒷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커다란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바리사이들의 옹색함과 완고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한없이 관대하고 너그러운 예수님의 모습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선은 어떠합니까?
이웃들, 특히 매일 매 순간 함께 지내는 이웃들을 향한 시선, 나와 생각과 의견, 사상과 지향점이 다른 이웃들을 향한 시선이 어떠합니까?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2023. 7. 21. 금)(마태 12,1-8)
<누가 죄인인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마태 12,1-4)”
안식일의 ‘첫 근거’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창세 2,2-3).”
‘두 번째 근거’는 탈출기에 있는 십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탈출 20,8-11).”
‘세 번째 근거’는 신명기에 있는 십계명입니다.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너의 소와 나귀, 그리고 너의 모든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2-15).”
탈출기의 십계명과 신명기의 십계명을 합해서 생각하면,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네가 쉬고 싶으면 남도 쉬게 해 주어라.”
안식일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어서 그들도 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쉬는 날도 없이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도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안식일의 정신입니다.
안식일은 ‘내가’ 쉬는 날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쉬는 날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천지창조 작업을 마치시고 나서 그 후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만 하실까?” 라는 점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보살피고 보호하고 사랑하는 일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으시고, 계속 일하신다.
그래서 나도 안식일에도 쉴 수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쉬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본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만 보았고, 제자들의 배고픔은 보지 않았습니다.
<못 본 것이 아니라 외면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고픔을 먼저 보셨습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그냥 심심해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이라면, 아마도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지금 그 밀밭이 누구의 밭이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제자들의 행동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제자들의 사정을 먼저 보라고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 ‘배고픔’이라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때에는 먹을 것을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먼저라는 가르침입니다.
굶주리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는 않고 안식일 준수만 강요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십계명과 ‘하느님의 뜻’을 내세우지만, 그런 폭력은 결코 하느님의 뜻도 아니고 계명 실천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느라고 안식일 규정을 어긴 제자들은 죄인이 아니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는 않고
율법 준수만 강요한 바리사이들이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배가 고프기만 하면 안식일을 안 지켜도 되는가?
배고픔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얼마나 배가 고파야 하는가?”
그것은 객관적으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각자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싫어서 안 지켰으면서도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다고 변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진심으로 지키고 싶었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못 지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실제 현실을 보면, 정말로 몸이 아파서 누워 있느라고 주일을 ‘못 지킨’ 사람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면서 고해성사를 보는데,
놀러가느라고 ‘안 지킨’ 사람은 대충 가볍게 대송을 바치는 것으로 때우고 마음 편하게 지나갑니다.
진짜 율법주의자는 누구인가?
이 시대의 바리사이들은(위선자들은) 누구인가?>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