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창작과 비평』 11호, 1968. 가을)
[작품해설]
이 시는 시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계하기 직전에 쓴 마지막 작품으로, 반서정성(反抒情性)과 참여 시의 가치를 높이 든 그의 후기 시 세계를 한눈에 보여 준다.
1960년대 민중 문학을 해 준과 함께 이끌고 온 김수영은, 투철한 역사 인식과 건강한 민중성에 기초를 둔 해 준과는 달리, 모더니즘 속에서 자라난 모더니스트였다. 그러나 김수영은 4.19 혁명을 계기로 모더니즘을 비판하고, 강한 현실 의식에 바탕을 둔 참여시의 진수를 보여 줌으로써, 마침내 이성부 ⸱ 이시영 ⸱ 조태일로 이어지는 1970년대 민중 문하의 기틀을 마련한다.
‘풀’은 이 세상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강한 생명력을 지닌 생명체로서 오랜 역사 동안 권력자에게 천대받고 억압받으면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그와 맞서 싸워 온 민중-민초(民草)를 뜻한다. 이와 반대로 ‘바람’은 풀의 생명력을 억누르는 세력, 곧 민중을 억압하는 사회적 힘[독재 권력⸱외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바람에 의해 눕는 풀의 수동성과 바람에 앞서는 풀의 능동성, 그리고 바람을 넘어서는 풀의 넉넉한 생명력을 통해 민중의 끈질긴 저항과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사회적 상황이 나빠져[풀은 눕고 울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나약한 힘과 의지를 하나로 모아 권력에 맞서 싸워 이기는 [바람보다 먼저 웃는] 인류 역사의 총체적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쉬운 우리말 시어와 ‘풀⸱바람’, ‘눕다⸱일어나고’, ‘울다⸱웃다’ 등의 시어를 과거 시제에서 현제 시제로 반복적으로 진행하면서 표현함으로써 ‘풀’이 지닌 역사적 상징성을 뚜렷이 드러내 준다.
이 시에는 자연을 대하는 시인의 관찰력이 무엇보다 돋보인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이란 봄에 예측하지 못하게 몰아치는 궃은 날씨를 의미한다. 막 싹을 틔워 겨우 뿌리를 내린 풀들은 갑자기 몰아치는 비바람에 여린 몸을 눕힐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미처 바람이 부는 것을 느기기도 전에 여린 풀들은 미세한 바람을 감지하고 흔들린다. 그것을 시인은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마치 저배속 비디오 카메라로 찍듯이 포착해 낸다. 따라서 이 부분을 그넉로 바람에 앞서 몸을 숙이는 민중의 기회주의적 속성을 드러낸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비록 바람이 부는 것을 먼저 느끼고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지만 그것이 오히려 힘없는 민중의 속성이다. 그러나 시인은 3연에서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고 하여 다시금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을 강조한다. 이처럼 시인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자연 현상의 한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통하여 중후하면서도 명징(明澄)한 현실주의적 의미를 제시하는 시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작가소개]
김수영(金洙暎)
1921년 서울 출생
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 토쿄(東京)상대 전문부에 입학했다가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
1947년 『예술부락』에서 시 「묘정(廟廷)의 노래」를 발표하여 등단
1958년 제1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59년 시집 『달나라의 장난』 발간
1968년 사망
1981년 김수영문학상 제정
시집 : 『새로운 도시의 시민들의 합창』(공저, 1949), 『달나라의 장난』(1959), 『거대한 뿌리』(1974),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9), 『김수영전집』(1981),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1984),『사람의 변주곡』(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