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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9 : 10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계 19 : 10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
요한은 너무 감격하여 그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였다.
그때 그 천사는 자기도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했다.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천사가 증거하는 예수님에 대한 증거가 하나님의 영에 의한 대언(代言) 사역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천사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를 사용하시는 하나님께만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한다.
10. 요한의 경배 -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 예수를 증거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1) 요한의 경배에 대한 여러 견해
(1) 당시 유행하던 혼합 종교의 천사 숭배를 말한다.
* 골 2: 18 -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모리스[C. L. Morris] : 초대교회가 천사 숭배로 유혹을 받았다. 이 본문은 그 실행에 대하여 저지하고 꾸짖고 있다. [모리스, 요한계시록, p. 278]
존슨[A. F. Johnson] : 우상숭배에 대하여 분명한 계시를 받았다. 요한은 자신을 예언자 로 말하면서 이 유혹에 빠졌다. 마지막 환상 후, 그는 다시 우상 숭배에 빠졌다[22: 8]. 요한은 아시아의 교회들이 천사를 숭배하고 있다고 앎으로 자신의 실수를 말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것으로 보아 우리는 우상 숭배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존슨, 요한계시록, p.512]
얼[Ralph Earle] : 소아시아 교회에 천사를 숭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요한은 이러한 위험을 알고 배교에 대한 경고로 말했을 것이다. [얼, 요한계시록, p.713]
(2) 천사를 예수로 착각하여 경배하려 한 것이다.
렌스키[R. C. H. Lenski] : 요한이 그 발 앞에 경배하기 위하여 엎드려졌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 이 행위는 22장 8절의 행위로 설명되어야 한다. 요한은 주님으로 착각한 것이다. [렌스키, 성경주석 요한계시록, p.435]
마운스[R. H. Mounce] :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천사 앞에 엎드렸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요한은 말하는 자를 주님으로 착각하였다. 이것은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했기 때문이다. [마운스, 요한계시록, pp. 403, 404]
(3) 감격스러워 자신도 모르게 경배하려 한 것이다.
래드[G. E. Ladd] : 이 본문은 계시를 받는 자로서의 자세를 말해 준다. 하나님의 구속 목적의 종국에 대한 설명은 천사에 의하여 요한에게 전달되었다. 그 때 요한은 경외심과 기이함에 가득 차 천사를 경배하려고 엎드리게 되었다. [래드, 성경주석 요한계시록, p.379]
휴스[P. E. Hughes] : 천사의 찬란한 위엄에 두려움을 느끼고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진리의 영광스러운 실체에 감동하였다. 요한은 그 천사를 경배하려고 엎드렸다. [휴스, 요한계시록, p.293]
2) 저자의 견해
감격스런 기쁨에서 나온 경배이다.
(1) 천사숭배의 유혹에 빠진 것이 아니다.
① 요한이 경배하려 한 이유를 천사숭배의 유혹에 빠진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히브리인이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구약 율법과 복음의 가르침을 뿌리 깊게 배운 제자이기 때문이다.
② 율법이 금하는 우상숭배와 복음이 말하는 우상숭배를 모를 이유가 없다.
③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를 볼 때[2: 6, 9, 14, 15, 20.], 우상숭배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보기가 어렵다.
(2) 예수님으로 착각 한 것도 아니다.
① 요한은 예수님의 환상을 보고[1: 12-16] 죽은 자[1: 17]같이 되었다.
② 18장 1절에서도 실수하지 않았다.
③ 예수님의 수제자중 한 사람으로 예수님을 보고 착각할 정도가 아니다.
(3) 감격한 가운데 무의식적인 경배이다.
① 허다한 무리의 감격에 찬 음성의 고백을 들었다.[19: 7]
②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다. [19: 9]
③ 요한도 로마 정부로부터 끓는 기름 솥에 던져지는 핍박과 고난으로 밧모 섬에 유배된 처지였다.
④ 교회와 성도들의 피에 취한 음녀가 멸망 당하고,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유황불 못에 던져졌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신부로 청함을 받아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3)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본문은 요한이 천사를 경배하려는 모습이다.
초대 교회 당시에 천사를 숭배하는 것에 대해서 사도들이 비판하였던 것으로 보아 요한이 천사를 숭배하려고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골 2: 18 -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 혹자는 요한이 천사가 전하여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에 경외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경배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Ladd).
Ⓑ 혹자는 하나님으로 오인하여 경배하려 했다고 주장하나(Morris) 분명하지 않다.
천사가 가지고 있는 복음(福音)은 사도 요한이 생각하는 것보다 크기에 그 앞에서 경배하려고 한 것이다.
천사는 사도 요한보다 더 큰 존재요 사도 요한보다 큰 존재는 예수님 밖에 없는데 천사는 예수님의 차원의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표현이다.
4)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요한이 어리둥절하면서 궁금해 하자 천사는 자기를 밝히고 있다.
너희들과 똑같은 형제요 종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증거는 대언(代言)의 영이요, 내가 전하는 것도 대언(代言)의 영이라는 것이다.
(1) '예수의 증거'로 번역된 헬라어 '텐 마르튀리안 예수'(*)의 해석은 두 가지이다.
Ⓐ 주격적 소유격으로 보아 예수께서 전하여 주신 증거로 해석한다.
Ⓑ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보아 예수에 관한 증거로 해석한다.
두 견해 중 전자가 타당한 듯하다(Ladd, Johnson, Beasley-Murray). 즉 예수께서 자신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로 증언하신 것을 가리킨다.
천사는 자신이 요한을 비롯한 많은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증언하신 것을 받은 존재임을 드러냄으로 요한이 경배할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 천사 자신이 경배를 받을 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 예수의 증거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천사는 요한에게 자신이 경배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낼 뿐만 아니라 요한과 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받은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하나님에게만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임을 암시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5)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예수의 증거'란 예수님께서 전하여 주신 복음(福音)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부활로 증거(證據)하신 것들을 가리킨다.
천사는 자신이 요한을 비롯한 많은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증거하신 것들을 받아먹고 다시 증거하는 대언의 영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자기는 경배할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1) 본문에 대한 해석 역시 두 가지이다.
Ⓐ '예수의 증거'를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해석.
대언의 영은 오직 예수에 관한 증거만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Morris, Eerdman, Ladd).
Ⓑ '예수의 증거'를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
예수께서 증거하신 것이 대언하는 영의 주요 관심사이며 핵심일 뿐만 아니라, 대언의 영에 의해서만 성취됨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Mounce, Beasley-Murray).
* 요 16: 12-14 –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예수님은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읽어서 낭독하여 주시는 분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면서 구약의 말씀들을 대독하여 이렇게 성취되었다고 대언(代言)하신 대언 자였다.
* 요일 2: 1 -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본문에 천사도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실상을 말하고 신약성경의 말씀들을 대독하여 대언하는 것이요 계시록의 말씀이 이렇게 성취되어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게 된다는 것을 대독하는 대언(代言)자일 뿐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 항상 찬송하자.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면,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큰 음녀 즉 배교한 교회로부터 분리된 삶을 사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하늘의 천사들과 화답하여 힘차게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공의의 심판과 은혜의 구원을 찬송해야 한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송해야 한다.
둘째, 어린 양의 신부가 되자.
우리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즉 성도가 부활한 몸으로 천국에서 누릴 영광을 사모해야 한다.
거기에서는 더 이상 죄가 없고 슬픔과 질병과 고통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완전하고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천국의 그 영광을 사모해야 한다.
셋째, 새로운 삶을 준비하자.
우리는 혼인 잔치에 참여할 신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거룩과 의를 간직하고 그 거룩과 의 안에서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부로서 마땅한 일이다.
할렐루야 합창 ( 박 조준 목사 ) 저자와 견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본문은 하늘에서 올려온 할렐루야 대합창입니다. 우리가 이미 17장과 18장에 기록된 바벨론의 멸망과 19장에 기록된 이 웅장한 대합창 사이에 보이는 대조적인 일면은 시간과 장소를 살펴볼 때 설명될 수가 있습니다. 19장은 마침내 하나님이 이 땅에 심판을 내리셔서 인간들이 더 이상 패역하지 못하도록 한 것을 기뻐하는 하늘의 장면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죄를 범하게 되면 하나님이 괴로워하시고 주님이 십자가에 다시 못박히는 일이 되고, 성령이 슬퍼하는 결과가 됩니다. 온 하늘의 천군과 천사가 가슴 아파합니다. 그러나 선이 악을 이기고, 사랑이 미움을 이기며,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고, 그리스도가 적그리스도를 승리하고, 하나님이 사단을 이기고, 성령이 악령을 이기게 되는 최종적인 승리를 볼 때 온 하늘이 기뻐하며 “할렐루야”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19장에 기록된 장면은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었는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맺어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잠깐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 낙심과 좌절에 빠져 있는가를 우리 생활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의 자만과 교만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게 되니까 그것이 곧 불신앙이요, 신앙 없이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해결하려 하니까 고민이 생기고 걱정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기고 낙심이 되고 좌절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해보려 하는 동안은 우리의 마음에 참된 평안과 안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만이 인간의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참된 찬양의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왈부르드 박사는 계시록 7장 9절에 나오는 “능히 셀 수 없는 무리”라는 말과 본문 2절에 나오는 “허다한 무리”라는 말씀이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반적인 명칭은 하늘에 있는 성도 모두를 가리키는 것 같으며 대환난 때에 순교 당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본문 1절에 기록된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구원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이 속에서 구약 시대 성도와 교회 시대 성도, 그리고 환난기의 성도들 모두를 모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무리, “허다한 무리,” “능히 셀 수 없는 무리들”이 합창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 19장은 신약성경 전체를 통틀어 ‘할렐루야’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 유일한 부분인데 그것도 네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구약의 시편에서 인용한 것이고 ‘할렐루야’라는 말은 “주를 찬양하라”(Praise the Lord)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 시편 146편에서부터 시편 150편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인간들이 하나님께 찬양 드려야 할 것들이 많지만 그 중에는 주님의 심판에 대한 찬양이 있습니다. 이 ‘할렐루야’라는 말 외에도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쓰인 다른 표현 방법이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구원’이라는 말, ‘영광’이라는 말, 그리고 ‘권능’이라는 말입니다. 월터 스콧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록에 대한 해석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낱말 중에 첫 번째는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뜻하고, 둘째 것은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찬양할 것이며, 셋째 것은 음녀에게 내리시는 징벌의 심판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2절 말씀은 바벨론에 내리신 심판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큰 음녀’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것은 이미 17장에서 생각한 대로 종교적인 도시 바벨론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미 상업주의와 정치라는 종교를 만들어 냈으며 그것의 멸망에 대해서는 이미 18장에서 우리가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찾지 못하도록 만들어 준 거짓 종교나 재물에 대한 욕심, 그리고 정치를 통해서 얻는 권력욕 등의 세 가지 위력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악들은 홍수 전부터 타락한 인간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멸망은 바벨론 성읍이나, 상업적인 정부나, 종교계의 본부뿐이 아니라 전세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인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게 된 제도들을 이 땅에 세워 놓았던 가인과, 노아의 홍수 이전의 업적을 이어 받았던 니므롯의 시대부터 바벨론이 이루어 놓은 여러 가지 죄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 이 사람들은 모두 사단의 도구가 되었는데 그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종”으로 일하기를 꺼려한 탓입니다.
지난날의 모든 부패상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그 손에 있는 종들의 피’에 대해서 복수하시는 날에 완전히 파괴당함으로써 그 응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심판의 범주는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연기가 세세토록(영원토록) 올라가더라” 했습니다. 그 말 그대로 바벨론적인 종교와 정치 그리고 경제 위에 행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0여년 전에 일본에 떨어진 원자탄의 연기를 “버섯 연기”라고 했는데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기념으로 세워진 박물관에 가보면 그 당시의 흔적을 사진으로 볼 수 있으며, 또는 그 때 타다 남은 것, 녹다 남은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 끔찍한 것을 무엇으로 다 말할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원자탄의 버섯 연기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연기가 영원토록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단의 종교와 상업행위와 정치 체제가 다시는 인간들을 유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하늘에서는 큰 기쁨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4절을 보십시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여기에 나타나는 이십사 장로는 처음 등장한 인물이 아닙니다. 이미 4장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왕국에서 봉사하고 있는 수많은 천사의 무리를 다스리는 특별한 지위를 가진 천사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4장에 기록된 네 생물과 더불어 구원받은 사람들과 함께 찬양 드리는 일에 참여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24장로가 다섯 번 나오는데, 그때마다 찬양하며 기뻐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것을 읽을 때 우리는 이 장로들이 그때마다 어린양과 그의 승리에 대한 찬양을 맨 처음으로 시작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10~11절에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능력을 찬양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으며, 요한계시록 5장 8~9절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아 그 인을 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어린양을 찬양하고 있고, 요한계시록 7장 11~12절에는 하늘에 이른 이 수많은 이방인의 무리를 즐거워하고 있으며, 요한계시록 11장 16~1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 땅이 그리스도의 왕국이며 주님이 영원히 다스리신다고 선포하는 것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그들이 하나님이 바벨론에 내리신 심판과 멸망에 대해서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하고 있습니다.
본문 5~6절을 봅시다.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보좌에서 울려 나온 물소리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그분을 찬양하도록 명령하고 있는 천사들의 음성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충성된 종들입니다. 천사들은 사단이 심판으로 떨어질 때 선택권을 갖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곧 그 자리를 떠나고 다른 이들은 조금 있다가 떠나게 됩니다. 하늘에 울리는 이 커다란 합창 소리는 인간들과 천사들의 음성이 합쳐져서 울려납니다.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라. 우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11절에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거부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며 불순종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어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우리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주인으로 영접했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주님의 종이 되기를 자원한 것입니다. 하늘에 울려 퍼지는 합창들은 모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심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이런 사건들이 어떻게 하여 예언된 순서대로 일어날 것인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이런 기쁨에 넘치는 노래가 울려 퍼지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영광스런 왕국을 건설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이래 오늘까지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이 땅을 영원히 다스릴 때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 예언적인 사실은 이 사실을 믿고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에게 큰 기쁨을 줄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어느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고별 예배에 참석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생존시에 그처럼 충성되게 교회에 봉사했고 사는 동네에서도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먼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혼자 지내고 있었는데, 이 세상을 떠나 먼저 간 아내와 그분이 주님께로 인도했던 많은 성도들과 다시 만나게 될 것을 확신하면서 고별 예배가 엄숙하게 드려졌습니다. 미국에서는 고별 예배가 끝나면 관 뚜껑을 열어놓고 세상을 떠나가는 성도의 모습을 조객 하나 하나가 지나가며 다 그 얼굴을 들여다봅니다. 그 동안 올갠 연주자가 폐회 찬송을 연주합니다. 그런데 보통 고별 예배에 부르는 찬송에 익숙해 있던 저는 그때 승리에 찬 찬양 “할렐루야”가 웅장하게 연주되는 것을 듣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슬퍼만 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격스럽게 경배드릴 때이기 때문입니다. 노종은 죽은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이 땅에 다시 오게 될 마지막 부활의 때를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헨델의 불후의 명작인 오라토리오 “메시야” 중에 나오는 “할렐루야”는 바로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요한계시록 19장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헨델은 신령한 눈으로 하늘의 세계를 바라보며 신령한 귀로 허다한 무리의 할렐루야 합창을 들으며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본문의 내용을 알고 이 합창을 들을 때 더욱 감명이 깊습니다. 이 합창 소리가 끝나자 무엇이 나타납니까?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나타납니다. 어린양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세례 요한도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신랑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신부는 누구입니까? 어떤 이는 이스라엘을 신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 말하면서 남편을 그리스도에, 아내를 교회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약혼한 셈이 됩니다. 그러면 언제 어디서 이 결혼식이 이루어집니까?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하늘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스리시게 될 천년왕국이 임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27절에서 그리스도 앞에 그 신부가 소개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오순절 때로부터 교회가 들림 받을 때까지 은혜의 시기에 그리스도를 믿은 이들은 주님의 신부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신부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8절에 보니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입는 옷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라고 했는데 이 세마포는 천이 아니라 성도들의 깨끗한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신부가 자신의 착한 행실로 준비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심판 후에 혼인 잔치가 거행되는 만큼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이들의 위치는 그 사람의 행적이 심판을 받을 때 심판의 불을 이겨낸 결과에 따라 결정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일을 하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디도서 3장 8절에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장차 상급을 받기 위해서 일을 한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갖추어야 할 면들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충성된 헌신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거짓말하고 속이는 데 명수입니다. 마귀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행하라”고 속삭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열심히 행해야 구원을 받습니까? 거짓말입니다. 이런 거짓말이 실패로 돌아가 예수를 믿게 되면 그 다음에는 뭐라는지 아세요? “너는 은혜로 구원받았으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도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2장 10절 말씀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선한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기구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종 우리가 참으로 주님께 봉사하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하여 우리의 상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 날에는 경건치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믿음 없는 것을 뉘우치며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왜요? 그것 때문에 저희들이 원하던,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일에서 제외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회심할 때 주님께 드린 기도를 따라서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장 10절에 보면 그는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했습니다. 이런 태도는 믿는 이들로 하여금 그가 주님으로부터 큰 상급을 받을 뿐 아니라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물론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결혼식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연입니다. 이 잔치에 초대받은 것은 특별한 영광입니다. 본문 19장 9절에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했습니다. “복이 있도다”하는 말은 ‘행복하다’ 혹은 ‘영광스럽다’는 뜻입니다. “청함을 받았다”는 것은 ‘초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일은 복된 일입니다”하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라는 초대를 받은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직후 천년왕국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들과 함께 통치하시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11~12절을 보세요.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 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1절 이하에 보면 므나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봉사에 있어서 양적인 면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잘하였도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차지하라”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늘렸으므로 천년왕국 때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이생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는 일은 그의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는 일이기 때문에 천년왕국 때 그의 위치와 권세를 결정해 주는 일이므로 믿는 이들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찬 이슬 맺힐 때에 즉시 일어나
해 돋는 아침부터 힘써서 일하라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2.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일할 때 일하면서 놀지 말아라
낮에는 골몰하나 쉴 때도 오겠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리라
3.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지는 해 비낀 볕에 힘써 일하고
그 빛이 다하여서 어둡게 되어도 할 수만 있는 대로 힘써 일하라
밤의 그늘이 곧 드리워집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빛이 있을 때에 “시간을 아껴 주님의 사업에 골몰해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라도 다시 오실 때 준비하고 있다가 당황하지 말고 부끄러움 없이 맞이할 수 있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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