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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武公 이야기 展示館
① 李舜臣의 리더십
當時 海戰에서 사용한 武器와 遺物을 模型으로 展示하고, 李舜臣 將軍에 대한 國內·外의 評價를
소개하여 威嚴 있는 李舜臣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空間.
② 朝鮮의 艦船
朝鮮의 主力戰鬪艦인 板屋船과 當代 世界最高의 突擊船인 거북선, 壬辰倭亂 당시
朝鮮·日本·明 3國의 戰鬪艦을 소개하고, 거북선 乘船, 노 젓기와 水軍武器 體驗 등 다양한
體驗 活動할 수 있는 공간.
③ 7年間의 海戰史
壬辰倭亂의 發生背景과 海戰의 歷史, 임진왜란 후 3國의 변화를 소개하고, 李舜臣 將軍의
海戰史와 海戰術을 3面 複合影像으로 관람할 수 있는 공간.
④ 亂中日記를 통해 본 人間 李舜臣
亂中日記에서 볼 수 있는 李舜臣의 人間的인 面貌를 소개하는 공간. (*貌: 모양 모)
⑤ 李舜臣의 리더십
3D와 4D 映像物을 감상하며 戰爭의 現場을 생생하게 體驗할 수 있는 공간.
⑥ 影像體驗館
⑦ 카페, 샘이 깊은 물
당시 海戰에서 사용했던 武器와 遺物을 모형으로 展示하고, 李舜臣 將軍에 대한 國內·外의
評價를 소개하여 威嚴 있는 李舜臣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공간.
*李舜臣(1545~1598) -本貫: 德水 –出生地: 漢城府 乾川洞(現 仁峴洞) -字; 汝諧
-諡號: 忠武 (*諧: 화할 해)
父親 李貞과 母親 草溪 卞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幼年時節에 卞氏는 賢母로서 아들들을
사랑하면서도 家庭敎育을 엄격하게 하여 뒤에 名將으로 나라에 큰 功을 남길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李舜臣의 羲臣·堯臣의 두 兄과 아우 禹臣 4兄弟들의 이름 돌림자인 ‘臣’字 위에
三皇五帝 중에서 伏羲氏·堯·舜·禹 임금을 時代順으로 따서 붙였다. (*羲: 복희씨 희 *堯: 요임금 요)
宣祖 9년(1576) 式年試 武科에 丙科로 及第, 權知訓練院奉事와 咸鏡道 董仇非堡 權管,
鉢浦水軍萬戶 등을 거쳐 訓鍊院 參軍을 지냈으며, 宣祖 16년(1583) 父親喪으로 官職에서
물러났다. 宣祖 19년(1586) 司僕寺 主簿로, 咸鏡道 造山堡 萬戶로 임명, 이듬해 鹿屯島의 屯田을
관리하다가 女眞族이 襲擊할 때 李舜臣의 兵力支援要請을 兵使 李鎰이 無視해서 被害를 입고
敗戰責任으로 慶興府使 李慶祿과 함께 投獄되었다가 白衣從軍하였다.
(*董: 감독할 동 *仇: 원수 구 *堡: 작은 성 보 *鉢: 바리때 발 *僕: 종 복 *寺: 관청 시
*鹿: 사슴 녹 *鎰: 무게 이름 일)
1589년 井邑縣監, 高沙里僉使, 折衝將軍 滿浦僉使·珍島郡守 등을 지내고, 47세 되던 해에
左議政 兼 吏曹判書 西厓 柳成龍의 추천으로 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赴任하여 戰艦을 建造하고
軍備를 확충하며 倭軍의 侵略에 대비하였다. (*僉: 다 첨)
=宣祖 25년(1592) 05.23(음력 4월 14일) 壬辰倭亂 勃發 - 倭軍과의 海戰
-1592.06.16(陰 05.07) 玉浦海戰: 倭船 30여척 擊破 (*現 巨濟市 玉浦洞)
-1592.06.17(음 05.08) 赤珍浦海戰: 倭船 10여척을 격파, 勝利하여 朝鮮水軍은 倭軍과의
海戰에서 自信感을 가지게 되었으며, 李舜臣은 從二品 家善大夫로 승진했다.
(*赤珍浦: 統營 지역 등 여러 說이 있으며, 慶南 固城郡 巨流面 일대로 보는 학설이 유력하다.)
-1592.07.08(음 05.29일) 泗川海戰: 西海로 北上하려던 倭船 13척 擊沈, 거북선이 처음으로
實戰配置 되었음. (*경남 泗川 앞바다)
-1592.07.10(음 06.02) 唐浦海戰: 倭船 21척 불태웠음. (*唐浦: 統營市 山陽面 三德里)
-1592.07,13(음 06.05) 제1차 唐項浦海戰: 倭軍이 逃走해 陣을 치고 있는 唐項浦를 공격,
왜선 26척 격침. 잇따른 勝戰으로 李舜臣은 正二品 資憲大夫가 되었다.
(*唐項浦: 경남 固城郡 會華面 唐項里)
-1592.08.14(음 07.08) 閑山島大捷: 李舜臣에게 잇따라 敗北한 倭軍은 水軍의 모든 力量을
全羅道로 집결해 맞서려 했다. 이에 李舜臣은 全羅右水使 李億祺, 慶尙右水使 元均과 함께
見乃梁에 집결해 있는 倭軍을 閑山島로 誘引하여 50여척의 倭船을 擊破·拿捕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閑山島大捷: 경남 統營市 閑山面 앞바다) (*祺: 길할 기 *拿: 잡을 나)
-1592.08.16(음 07. 10) 安骨浦海戰: 安骨浦에 왜군이 머물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10일 새벽
日本水軍을 공격했다. 李舜臣은 鶴翼陣을 펴 먼저 공격하고, 元均은 그 뒤를 따랐으며,
李億祺는 浦口 바깥에서 本隊를 응원했다. 倭船은 42척으로 水軍將 구키[九鬼嘉陸]와
가토[加藤嘉明]가 이끄는 제2의 水軍部隊로, 여러 번 倭船을 浦口 밖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아 번갈아 浦口에 침입하여 倭船을 공격, 왜군 250명을 射殺했으며,
殘餘 倭兵들은 뭍으로 도망쳤다. (*安骨浦: 昌原市 鎭海區 熊東洞에 있던 浦口)
1592.10.05(음 09.01) 釜山浦海戰: 倭軍의 근거지인 釜山浦에서 兵船 100여척을 파괴하여
朝鮮水軍은 制海權을 장악하고, 北上하던 倭軍은 兵力補充과 軍需品補給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공으로 李舜臣은 正二品 正憲大夫가 되었다.
(*釜山浦: 釜山廣域市 東區에 있던 浦口)
-1593년 8월 李舜臣은 閑山島로 本營을 옮김겼으며, 9월 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되었다.
-1594.04.23(음 03,04) 제2차 唐項浦海戰: 倭船 30여척 擊沈
-1594.11.11(음 09.29~10.04) 長門浦海戰: 郭再祐, 金德齡 등의 義兵과 合同으로 巨濟島
長門浦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했다. (*長門浦: 경남 巨濟市 長木面 長木里)
(*齡: 나이 령)
=元均과의 葛藤; 그리고 罷職되어 또 白衣從軍
당시 朋黨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朝廷에서는 李舜臣의 戰果에 대해서도 論議가 紛紛했으며,
특히 李舜臣과 元均의 갈등이 문제가 되어, 朝廷은 元均을 忠淸節度使로 옮겼으나 朝廷大臣들은
대체로 元均의 편에 서서 여러 차례 李舜臣을 彈劾했다. 이런 상황에서 明과 講和交涉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麾下의 요시라(要時羅)라는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다시 朝鮮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水軍을 보내 막으라는 計策을 전달했으며, 이를 믿은
朝廷은 都元帥 權慄을 통해 李舜臣에게 出征하라는 命을 내렸다. 그러나 倭軍의 計略으로
우려한 李舜臣은 出征하지 않았으며, 그 책임으로 罷職되어 漢陽으로 押送되었다.
1597년 4월 李舜臣은 한 달 가까이 投獄되어 혹독한 問招를 받고, 5월 16일(음 04.01) 풀려나
權慄 陣營에서 白衣從軍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紛: 어지러울 분 *劾: 꾸짖을 핵 *麾: 기 휘)
=鳴梁海戰에서 大勝
三道水軍統制使가 된 元均이 1597년 8월(陰 07.15) 漆川梁海戰에서 倭軍에 大敗하여
全羅水使 李億祺, 忠淸水使 崔湖 등과 함께 戰死하면서 李舜臣은 다시 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었다. 李舜臣은 남아 있는 戰船을 수습하여 붕괴된 朝鮮水軍을 再建했으며,
10월 25일(음력 09.16) 珍島 울돌목에서 13척(漆川梁海戰에서 裵楔 장군이 탈출시킨 12척과
百姓들이 가져온 한 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大勝을 거두었다(鳴梁大捷).
이 승리로 朝鮮水軍은 制海權을 다시 장악했으며, 倭軍의 水陸竝進作戰을 霧散시켜 丁
酉再亂의 戰勢를 뒤집을 수 있었다. 漢陽으로 進攻하던 倭軍은 補給路 遮斷을 우려해
忠淸道 稷山에서 進擊을 멈추었으며, 戰爭은 남해안 일대의 倭城에서 籠城하는 倭軍을
朝明聯合軍이 공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鳴梁海峽: 전남 海南과 珍島 사이에 유리병의
목처럼 갑자기 좁아져 潮流가 强한 좁은 海路, ‘울돌목’이라고도 한다.)
(*漆: 옻 칠 *祺: 길할 기 *楔: 문설주 설 *霧: 안개 무)
=露梁海戰에서 戰死
李舜臣이 이끄는 水軍은 宣祖 31년(1598) 折爾島와 古今島에서 倭軍에 승리를 거두었다.
倭軍은 그 해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으면서 撤收를 준비했는데, 이순신은
12월 16일(음 11.19) 明나라 提督 陳璘과 연합하여 露梁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敵船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露梁海戰). 그러나 이 전투에서 李舜臣은
流彈에 맞아 戰死했다. <朝鮮王朝實錄>에는 당시 李舜臣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고 바로 숨을 거두었으며, 조카 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戰死 소식을 들은 朝廷은
李舜臣에게 右議政을 追贈했으며, 宣祖 37년(1604) 宣武功臣 一等으로 錄勳되고, 左議政이
贈職되었으며 德豊府院君으로 봉해졌다. (*露梁: 경남 南海郡 露梁과 河東郡 金南面의
노량 사이에 있는 海峽, 현재 南海大橋 부군) (*折: 꺾을 절 *爾: 너 이 *璘: 옥빛 린 *莞: 왕골 완)
=’忠武’라는 諡號를 받고 領議政에 追贈
1643년(仁祖 21년(1643) ‘忠武’의 諡號를 받고, 孝宗 10년(1659)에는 南海의 戰跡地에 그의
碑石을 세웠으며, 肅宗 33년(1707)에는 忠淸道 牙山에 세운 祠堂에 ‘顯忠’이라고 號를 내렸으며,
正祖 17년(1793) 領議政으로 追贈되었다. (*諡: 시호 시 *跡: 발자취 적 *顯: 나타날 현)
=墓(牙山 李忠武公墓, 사적 112호)는 忠南 牙山市 陰峰面 於羅山에 있으며, 御製 碑文과
忠臣門이 건립되었다. 忠武 忠烈祠(사적 236호), 麗水 忠愍祠(사적 381호),
牙山 顯忠祠(牙山 李忠武公 遺墟, 사적 155호) 등에 祭享되었으며, 牙山 顯忠祠의 규모가
가장 크다. (*愍: 근심할 민 *享: 누릴 향)
충무공 이야기 전시관
(01) 충무공 이야기 展示館으로 가는 길
(02) 李舜臣이 전하는 12개의 希望 價値
忠武公 李舜臣 將軍은 7년에 걸친 壬辰倭亂 동안 侵略軍에게는 恐怖의 對象이었으며,
百姓들에게는 希望의 象徵이었다.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挫折하지 않고 連戰連勝을
거두었던 그의 삶과 精神은 오늘날에도 希望의 象徵이 되고 있다.
(*恐: 두려울 공 *怖: 두려워할 포)
‘忠武公 이야기’는 12척의 적은 戰船으로도 海戰勝利의 意志를 드러냈던 李舜臣 將軍의
삶과 정신을 ‘12개의 希望價値’로 표현했다.
(03) 必死則生 必生則死 – 끊임없는 挑戰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비겁하면 반드시 죽는다.
元均이 漆川梁海戰에서 크게 敗하자 다시 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된 李舜臣 將軍에게는
겨우 12척의 戰船밖에 없었다. 부족한 戰船도 문제였으나 倭軍에 대한 極度의 恐怖心을 갖고
있던 兵士들의 士氣低下가 더 큰 문제였다. 敵을 눈앞에 둔 李舜臣 將軍은 兵士들의
恐怖心을 없애고 海戰에 自信感을 갖게 하기 위해 訓示로 軍士들의 精神力을 강화했으며,
鳴梁海戰에서 先頭에 나서 艦隊를 지휘했다. 또한 뛰어난 戰略戰術을 펴 劣勢였던
海戰狀況을 大勝利로 이끌었다.
=끊임없는 挑戰, 挫折과 絶望에서 등을 돌려라.
22세에 武藝를 익히기 시작한 이순신 장군은 28세에 訓練院 武科別試에 應試하였으나
試驗 途中에 落馬하였다. 주위에 있던 버드나무껍질을 벗겨 자신의 다리를 싸매고 마지막
關門을 통과했으나 武藝實力을 기르기 위한 긴 세월의 努力은 水泡로 돌아갔다.
비록 試驗에는 떨어졌으나 李舜臣 將軍은 결코 挫折하거나 失望하지 않고, 이후
武藝硏磨에 더욱 精進하여 4년 뒤 武科試驗에 합격했다.
(04) 慧眼 – 有備無患의 慧眼
=慧眼, 海上 防禦體制를 構築하라.
石手들이 새로 쌓은 垓子의 구덩이가 많이 무너져 罰을 주고 다시 쌓게 했다.
-<亂中日記> 1592년 2월 15일-
防踏(突山島)의 北峰에 올라가 地形을 살펴보니 외롭고 위태로운 섬인지라, 四方에서 敵의
공격을 받을 수 있고, 城과 垓子 또한 매우 엉성하니 참으로 걱정, 걱정스러웠다.
- <亂中日記> 1592년 2월 27일 -
李舜臣 將軍은 麗水 左水營에 赴任한 후 海上防禦를 위해 萬全을 기했다.
麗水 本營과 突山島 사이에 鐵鎖(*쇠사슬)를 설치하는 등 各 陣別로 戰船과 軍器를 보수했다.
有備無患의 자세로 海岸防禦體制를 構築한 결과 이순신 장군은 朝鮮의 바다를 지킬 수
있었다. (*突: 갑자기 돌 *鎖: 쇠사슬 쇄)
=有備無患의 慧眼, 편안할 때에 危機를 생각하라.
李舜臣 將軍은 日本이 朝鮮을 침략할지 모른다는 危機感을 일찍이 感知했다.
그래서 陸軍 將帥 申砬이 水軍을 없애야 한다고 임금에게 奏請했을 때 水軍의 重要性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바다로 오는 敵을 막는 데는 水軍이 제일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李舜臣 將軍은 有備無患의 자세로 板屋船과 거북선[龜船]을 새로
건조하고 銃筒을 만드는 한편 매일같이 軍事訓鍊을 통해 戰鬪力을 높여나갔다.
동시에 軍糧米와 火藥, 砲彈, 화살 등을 備蓄하며 海軍力을 强化했다.
(*慧: 슬기로울 혜 *砬: 돌소리 립 *筒: 대통 통)
(05) 白衣從軍 – 愛國忠節의 ‘忠’
=白衣從軍, 묵묵히 軍人의 길을 가다.
李舜臣 將軍은 두 차례나 白衣從軍(벼슬 없이 군대에 從事함)했다.
첫 번째는 宣祖 20년(1587) 鹿屯島 屯田官으로 근무할 때 女眞族의 침입을 막지 못한
책임 때문이었다. 女眞族을 追擊해 百姓들을 救出했으나 朝廷은 現場 指揮責任만 물어
白衣從軍하도록 命했다. 이듬해 初 女眞族 征伐戰에서 功을 세워 赦免되었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10년 뒤인 壬辰倭亂 때였다. 日本에서 오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공격하라는 朝廷의 명령이 있었으나, 敵의 奸計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주저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愛國忠情의 一念으로 白衣從軍한 李舜臣 장군은 漆川梁海戰의 敗北로
나라가 危機에 처했을 때 다시 三道水軍統制使에 任命되었다.
(06) 忠 – 聖雄 李舜臣의 生涯
=忠
獨依樓上 念國勢 危如朝露 內無決策之棟梁 外無匡國之柱石 未知宗社之終至如何 心思煩亂
(독의루상 염국세 위여조로 내무결책지동량 외무광국지주석 미지종사지종지여하 심사번란)
(*梁: 들보 량 *匡: 바를 광 *煩: 번거로울 번)
/ 혼자 수루에 앉아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아침이슬처럼 위태롭기만 한데.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인물이 없으니
나라가 앞으로 어찌될지 마음이 산란했다.
=聖雄 李舜臣의 生涯
李舜臣 將軍을 ‘聖雄’이라고 부르는 것은 天才的 才能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人品의 所有者이며, 어떠한 逆境에도 굴하지 않고 限界에 挑戰하며 時代的 召命을 다 했던
거룩하리만큼 훌륭한 軍人이었기 때문이다.
李舜臣의 一代記
-救國의 聖雄, 忠武公 李舜臣
-李舜臣 年譜 (*譜: 족보 보)
-將軍의 삶에 바치는 諡號, 忠武公 (*諡: 시호 시)
*李舜臣 將軍에 대한 評
=壬辰倭亂에 參戰한 明나라 水軍都督 陳璘
“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
/하늘을 날줄 삼고 땅을 씨줄 삼아 천하를 경륜할 인재요, 무너진 하늘을 메울 만큼 공이
크다.”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李舜臣의 訃音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薝園 鄭寅普 (1893~1950) -漢學者, 敎育者, 歷史家 (*薝: 치자나무 담)
公은 名將보다도 聖者이다. 神妙不測(신묘부측)이 오직 至誠惻怛(지성측달)에서 나온 것이다.
公은 聖者이므로 名將이다. (*惻: 슬퍼할 측 *怛: 슬플 달)
=後石 千寬宇(1925~1991) -言論人, 歷史學者
“忠武公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간이기에 聖者라 하고 英雄이라 일컫다.”라 하였다. 當代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고, 死後에는 그 精神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발라드(G. A. Ballard) -海戰史硏究家 -英國 海軍准將
李舜臣 提督은 西洋 史學者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業績은 충분히 위대한
海軍司令官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戰略的 상황을 파악하고,
海軍戰術의 비상한 기술로 전쟁의 유일한 참精神인 不屈의 攻擊原則에 의하여 항상 鼓舞된
統率精神을 兼備하고 있었다. 어떠한 戰鬪에서도 李舜臣이 參戰하면 勝利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盲目的인 冒險이 아니었다.
李舜臣은 싸움이 벌어지면 强打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勝利를 위하여 愼重을 기하는
점에서는 넬슨(Nelson)과 共通點이 있었다. …中略… 英國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是認하기란 항상 어려우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李舜臣은 한번도 敗北한 일이 없고 戰鬪 중에 戰死한 이 위대한 東洋의 海軍司令官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
(07) 朝鮮時代 作戰 信號
朝鮮時代의 作戰은 다양한 信號로 전개되었다. 信號는 크게 聽覺을 이용한 것과 視覺을
이용한 것으로 구분된다.
聽覺信號는 砲, 북, 징, 꽹과리 등을 이용하고, 視覺信號는 연기와 불을 이용한 烽燧와
전쟁터에서 命令을 내리고 받는 깃발 등을 이용했다. 李舜臣 將軍은 주변 상황에 따라
制約이 있는 聽覺信號와 多樣한 意思表現이 어려운 視覺信號의 短點을 보완한 作戰信號를
사용했다. 朝鮮水軍들에게 익숙한 陰陽五行論에 바탕을 두어 靑色은 東쪽, 赤色은 南쪽,
白色은 西쪽, 黑色은 북쪽, 黃色은 가운데를 뜻하는 깃발을 사용했다. 陣法뿐만 아니라
作戰信號에서도 그의 뛰어난 創意力이 發揮된 것을 알 수 있다.
(*聽: 들을 청 *烽: 봉화 봉 *燧: 봉화 수)
(08) 거북선 모형, 船首부분
내부구조와 시설은 海軍士官學校에 있는 거북선을 基準으로 했으며, 크기는 實物의 55%로
축소한 것이다.
(09) 戰爭記念館(龍山 三角地 所在)에 전시된 거북선 모형 -2013.07.19 사진-
(10) 거북선 內部, 위층은 火砲, 아래층은 노꾼 자리이다.
(11) 掌令房 (왼쪽) – 화장실 – 船長房 (오른쪽)
(*掌: 손바닥 장) *掌令: 조선시대 司憲府의 正4品 官職
(12) 火砲와 火砲匠 (*匠: 장인 장)
(13) 거북선 모형, 船尾部分
(14) 勇氣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 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
(병법운 필사즉생 필생즉사 우왈 일부당경 족구천부 금아지위의)
/兵法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고, 살려고만 하면 죽을 것이다.’ 라고 했으며,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이 와도 두렵지 않다.’ 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逕: 좁은 길 경 *懼: 두려워할 구 *謂: 이를 위 *矣: 어조사 의)
(15) 7年間의 海戰史
7년간의 壬辰倭亂은 朝鮮이 日本의 侵略을 擊退하면서 끝났다. 朝鮮 朝廷의 전쟁극복노력,
制海權을 장악하며 兵站線을 끊은 朝鮮水軍의 활약, 義兵들의 조직적인 遊擊戰活動 그리고
友邦 明나라의 援軍派兵 등이 이끌어낸 勝利였다.
=壬辰倭亂; 宣祖 25년(1592)~宣祖 31년(1598)
-임진왜란 발생배경
-임진왜란 海戰史
-壬辰倭亂 後 3國의 변화
*壬辰倭亂
1592.05.23(음력 4월 13일)~1598.12.16(음력 11월 19일)
[*丁酉再亂: 1597.08.27(음력 7월 15일)~1598.12.16(음력 11월 19일)]
=複合 映像館
=勝利의 海戰史·海戰術
-勝利의 海戰術
-壬辰倭亂 主要海戰
(16) 壬辰倭亂 發生背景
*朝鮮이 壬辰倭亂 初期에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國力이 衰弱해진 것은 政治的으로는
燕山君 이후 明宗代에 이르는 四大士禍와 勳舊·士林 勢力間에 계속된 政爭으로 中央政界의
혼란, 士林勢力이 得勢한 宣祖 卽位 이후 격화된 黨爭 등으로 정상적인 정치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性理學에 沒頭하고 文治의 나라로 ‘文臣優待’ 팻말이 걸려 있었으며,
文 中心社會는 必然的으로 國防에 소홀하여 無防備로 이어졌다. 軍事的으로는 朝鮮初期에
설치된 國防體制 崩壞로 外侵에 대비하기 위해 備邊司를 설치했으나 兵法을 모르는
文臣들이 최고 자리에 앉아 정상적인 機能을 발휘하지 못했다. 栗谷 李珥는 南倭·北胡의
侵入을 對備하여 十萬養兵說을 주장했으나 財政이 허약하여 이루지 못하고, 社會는 점점
解弛해지고 文弱에 빠져 근본적인 國家方策이 확립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宣祖 23년(1590) 日本 事情을 탐지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朝鮮通信使(正使 黃允吉,
副使 金誠一)는 1591년 2월 歸國報告에서, 黃允吉은 ‘倭軍이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고
보고하고, 金誠一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朝廷은 東人勢力이 강했으므로 西人인
正使 黃允吉의 의견은 묵살되고, 東人인 副使 金誠一의 보고를 채택하여 國防은 더욱
無防備 狀態가 되었다.
=왜 朝鮮이 7년전쟁의 무대가 되었나?
-日本軍이 쳐들어오다.
日本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는 1590년 센고쿠(戰國)時代의 幕을
내리며 分裂된 국가를 統一했다. 그는 朝鮮을 거쳐 大陸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을 실현하고자
했다. 明나라를 치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는 名分을 내세우며 侵攻한 日本軍은 開戰初期
釜山鎭城과 東萊城을 점령하고, 연이어 朝鮮軍의 防禦線을 무너뜨리면서 侵攻 20여일만에
宣祖가 도망가고 無防備의 漢城을 無血 占領했다. 그러나 朝鮮官軍의 反擊과 곳곳에서
일어난 義兵들도 日本軍에 抵抗했다. 결정적으로 李舜臣 將軍의 閑山大捷(閑山島大戰)과
이어진 晋州大捷으로 戰爭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다.
(*萊: 명아주 래 *禦: 막을 어 *擊: 칠 격 *捷: 이길 첩)
=再侵略이 시작되다.
朝鮮水軍의 制海權掌握과 곳곳에서 일어난 義兵의 활약, 明軍의 支援 등으로 日本軍은
남부지방으로 후퇴한다. 그 후 疾病發生과 軍糧米不足 등으로 戰爭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明과 日本은 4년간의 긴 講和協商을 벌인다. 日本軍은 一部 兵力만 南海岸地域에 남기고
대부분은 撤收했다. 그러나 迂餘曲折 끝에 講和協商이 決裂되고 日本은 丁酉年(1597)에
再 侵略한다. 丁酉年 再侵은 壬辰年(1592) 1차 침략 때보다 훨씬 殘酷해 朝鮮의 피해는
처참했다. 朝鮮人의 코를 베어 戰功을 확인하는 등 殺戮을 일삼는 殘虐함이 極에 달했다.
1598년 8월 豊臣秀吉이 病死하자 日本軍이 本國으로 撤收하고 7年餘에 걸친 戰爭은
끝난다. (*撤: 거둘 철 *迂: 에돌 우 *裂: 찢을 렬 *殘: 잔인할 잔 *酷: 심할 혹 *戮: 죽일 륙
*虐: 모질 학)
(17) 임진왜란 主要海戰地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唐項浦海戰 - 赤珍浦海戰 – 栗浦海戰 – 合浦海戰 – 安骨浦海戰 – 釜山浦海戰 – 玉浦海戰 –
漆川梁海戰 – 閑山大捷 – 唐浦海戰 – 泗川海戰 – 露梁海戰 - 鳴梁海戰
(18) 壬辰倭亂 후 3國의 변화 -朝鮮
7년(1592~1598)에 걸친 壬辰倭亂은 朝鮮·明·日本 3國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전쟁터였던 朝鮮은 國土가 荒廢해 지고 전쟁이 끝 난지 50여년이 지난 후까지 國家의
戶籍臺帳에서 파악된 人口數는 전쟁 이전의 1/3밖에 되지 않았다. 朝鮮에서는 政治·經濟·
文化·社會 등 각 방면에 걸쳐 적지 않은 변화가 나타났다.
*不幸하고 恥辱的인 歷史는 잊으면 反復된다고 하던가?
壬辰倭亂(1592~1598)의 恥辱을 잊은 채 黨爭에만 沒頭하고, 國際政勢는 뒤로하고
明을 향한 事大思想만 주장하던 朝鮮은 仁祖 5년(162) 丁卯胡亂과 仁祖 14년(1636)
丙子胡亂으로 仁祖는 三田渡에서 淸太宗에게 三跪九叩頭禮로 치욕적으로 降伏하고,
鳳林大君을 비롯하여 百姓 數 萬 名이 人質로 잡혀가는 受侮를 당했다.
(*恥: 부끄러울 치 *辱: 욕될 욕)
(19) 壬辰倭亂 후 3國의 변화 -明나라 – 日本
=明나라 (1368~1644년)
明나라는 朝鮮 다음으로 큰 打擊을 받았다. 20萬餘의 支援軍을 파견하면서 막대한 戰費를
지불하여 國家財政이 어려워졌으며, 滿洲의 女眞族은 朝鮮과 明이 戰亂에 휩쓸린 틈을 타
급속하게 勢力을 키웠다. 마침내 明나라는 女眞族에 의해 滅亡하고, 女眞族은 中國 최후의
統一王朝인 淸나라를 建國했다.
=日本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死後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幕府政權이 들어서게
되었다. 朝鮮으로부터 들여온 金屬活字의 영향으로 印刷術이 크게 발달하고, 捕虜로 잡아간
陶工을 중심으로 陶瓷器 제작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했다.
(20) 勝利의 海戰術
=戰鬪力은 兵力과 武器, 組織力의 調和로 極大化될 수 있으며 때와 場所에 의해서도 左右된다.
李舜臣 將軍은 戰鬪力을 높이기 위해 兵力, 武器, 組織力 등 어느 하나도 疏忽히 하지 않았다.
兵書에도 通達했던 李舜臣 將軍은 海戰에 임했을 때 항상 戰略的 思考로 形勢를 살피고,
戰術을 驅使했다. 또한 軍士들의 士氣를 북돋아 精神力과 組織力을 강화했다. 어떠한 狀況에
처하더라도 朝鮮水軍이 有利한 戰爭을 치를 수 있도록 띄어난 海戰術을 펼쳤다.
(*疏: 소통할 소 *忽: 갑자기 홀 *驅: 몰 구)
=信賴받는 指揮官
李舜臣 將軍은 統制營 指揮所인 運籌堂에서 麾下 將校들과 作戰會議 할 때도 그 分野에
專門性을 가진 사람이라면 地位高下를 막론하고 會議에 參與시켰다. 또한 戰鬪에서 功을
세운 부하들에게는 賞을 주고 <狀啓>에도 상세하게 기록하여 王에게 報告했다.
(*籌: 살 주 *麾: 기 휘)
壬辰倭亂의 主要海戰
(21) 玉浦海戰, 순식간에 26척을 焚滅하면서 첫 勝戰鼓를 올렸다.
朝鮮水軍이 처음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은 壬辰倭亂이 시작되고 20여일이 지나
玉浦 앞바다에서였다. 海岸가에 배를 정박해 놓고 掠奪하고 있던 日本軍을 火砲와 화살로
공격하여 순식간에 26척의 倭船을 焚滅하면서 첫 勝戰鼓를 울렸다(玉浦海戰).
朝鮮水軍은 첫 勝戰鼓와 함께 自信感을 얻었으며, 이후 李舜臣이라는 最高의 指揮官을
筆頭로 連戰連勝의 기록을 세워 나갔다. (*焚滅: 불에 타서 없어짐)
(*掠: 노략질할 약 *焚: 불사를 분 *滅: 멸할 멸)
*玉浦海戰 -宣祖 25년(1592) 5월 7일(양력 06.16)
玉浦(현재 慶南 巨濟市 玉浦洞) 앞바다에서 李舜臣이 지휘하는 朝鮮水軍이 日本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壬辰倭亂 初期, 倭軍의 기세에 밀려 많은 군사를 잃었던 慶尙右水使 元均은 全羅·忠淸地方에
이르는 海路의 목줄인 玉浦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 全羅左水使 李舜臣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李舜臣은 板屋船 24척, 挾船 15척, 鮑作船 46척을 이끌고 唐浦 앞바다에서
合勢했다. 이때 元均은 70여 척의 戰船을 모두 잃고 겨우 6척(판옥선 4척, 협선 2척)으로
合勢했다. (*挾: 낄 협 *鮑: 절인 물고기 포)
낮 12시경 朝鮮艦隊는 玉浦 浦口에 정박하고 있는 敵船 50여 척을 발견하고 이를 포위해
포구를 빠져 나오려는 敵船을 향해 맹렬한 砲擊을 가해 적선 26척을 격침하는 큰 전과를
올려 최초의 海戰을 勝利로 장식했다. 이어 合浦(경남 馬山) 앞바다에서 敵船 5척, 다음날
赤珍浦(統營市 光道面)에서 적선 11척을 불태우는 戰果를 올렸다.
(22) 泗川海戰
*泗川海戰 -宣祖 25년(1592) 5월 29일(양력 07.08)~6월 1일 -거북선이 처음 參戰한 海戰
朝鮮水軍이 慶尙道 泗川 앞바다에서 倭軍 艦船 13척을 격침하고, 倭軍 2,600여명을 射殺한
海戰이다.
艦隊 규모는 李舜臣의 全羅左水營 精銳艦船 23척과 元均의 慶尙右水營 艦隊 3척 등 26척이며,
李舜臣 艦隊에는 새로 창안된 戰艦 거북선도 포함되었는데, 거북선이 實戰에 투입된 것은
泗川海戰이 처음이다. 李舜臣 艦隊는 西海岸으로 進出을 노리는 倭 水軍을 공격하기 위해
露梁으로 나아가 倭軍 斥候船 1척을 擊沈한 뒤, 泗川浦口에 이르렀다.
浦口에는 倭船 12척이 정박하고, 선창 뒷산에는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마침 썰물 때로
戰船을 浦口에 댈 수 없어 作戰上 後退하며 먼 바다로 유인했다. 倭船이 我軍 板屋船 活動에
유리한 海域에 이르자, 李舜臣 艦隊는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倭軍을 공격했다.
最前方 突擊任務는 거북선이 맡아 天·地·玄·黃 등 四字銃筒과 火砲의 集中射擊에 놀란
倭軍艦隊는 泗川浦口 쪽으로 도주하고, 그 사이에 滿潮가 되었다. 거북선에 이어 밀물을
따라 浦口에 도착한 板屋船의 砲射擊으로 10척을 불태우고 泗川灣 입구의 毛自郞浦로
이동했다. 나머지 2척을 타고 도주하려던 倭軍 敗殘兵은 6월 1일 새벽 배와 함께
불에 타 죽거나 목이 베어졌다. 이 海戰에서 왜군 2,600명이 죽고, 13척의 倭船도 모두
擊沈되었다. 我軍은 거북선 건조의 책임자 軍官 羅大用이 총탄에 맞고, 李舜臣도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아 負傷당했다. 泗川海戰은 거북선을 처음으로 參戰해 性能이 확인되고, 각종
艦砲로 무장한 最前方 突擊線으로 임무를 성공적으로 遂行해 거북선은 閑山島大捷을 비롯한
각종 海戰에서 朝鮮水軍을 상징하는 戰船의 威容을 떨치게 된다.
(23) 唐浦海戰
*唐浦海戰 -宣祖 25년(1592) 6월 2일(양력 07.10) (*唐浦: 統營市 山陽面 三德里)
李舜臣 艦隊 主軸의 聯合艦隊가 慶南 統營市 唐浦 앞바다에서 倭船 21척을 격침시킨 海戰이다.
泗川海戰(음력 5월 29일)을 끝내고 全羅左水營 李舜臣의 戰船 23척과 慶尙右水營 元均의
戰船 3척은 三千浦 앞바다를 거쳐 蛇梁島에 이르러 밤을 보내고, 斥候船의 敵情報告를 받고
唐浦 앞바다로 갔다. 唐浦 부두에는 倭軍 大船 9척, 中船·小船 12척이 碇泊해 있었으며,
가장 큰 배에는 붉은 日傘을 세우고, 帳幕 안에는 倭將 카메이 코레노리[龜井玆矩]가 앉아
있었다. 我軍이 접근하자 倭軍은 鳥銃을 쏘며 저항했으나 거북선을 앞세워 玄字銃筒을
비롯한 天字·地字銃筒을 쏘면서 뱃머리로는 倭將船을 들이받으며 격파했다.
火砲와 화살을 倭將船에 集中 發射했다. 倭將은 中衛將 權俊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僉使 金完과 軍官 陳武晟이 敵船에 올라가 敵將의 목을 베었다. 倭將이 죽자, 倭軍은 戰意를
잃고 육지로 도망치기 시작하고, 倭船 21척을 모두 격침했으며, 많은 倭軍이 사망했다.
唐浦海戰은 敵情과 地形의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거북선을 앞세워 敵의 指揮船에
火力을 집중하는 李舜臣의 치밀한 戰略이 돋보인 海戰이다. (*蛇: 긴 뱀 사 *碇: 닻 정)
(24) 閑山大捷(閑山島海戰)
*閑山大捷 -宣祖 25년(1592) 7월 8일(양력 08.14)
閑山島(경남 統營市 閑山面) 앞바다에서 朝鮮水軍이 日本水軍을 크게 무찌른 전투로
晋州大捷, 幸州大捷과 함께 壬辰倭亂 三大捷이라고 부른다.
5월 29일부터 제2차로 출동한 李舜臣의 水軍은 6월 10일까지 泗川·唐浦·唐項浦·
栗浦海戰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陸地에서는 계속 敗戰消息만 들려왔다.
敵은 海上에서도 다시 머리를 쳐들기 시작하여 加德島와 巨濟島 부근에서 敵船 10여 척에서
30여 척까지 떼를 지어 출몰하면서 陸軍과 호응하고 있었다.
이에 全羅左水使 李舜臣은 右水使 李億祺와 연락하여 출동을 결정했으며, 이때 日本은
海上敗戰을 만회하기 위해 兵力을 증강했다.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제1진은
70여 척을 거느리고 熊川 방면에서 출동하고,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의 제2진은
40여 척을, 제3진의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많은 兵船을 이끌고 合勢했다.
이에 李舜臣은 7월 6일 李億祺와 더불어 49척을 거느리고 左水營을 출발, 露梁에서
元均의 함선 7척과 합세했으며, 7일 저녁 固城 唐浦에 이르렀을 때 敵艦 70여 척이
見乃梁에 들어갔다는 정보에 접하고 閑山島 앞바다로 적을 유인할 작전을 세웠다.
板屋船 5,6척으로 敵의 先鋒을 쫓아가 急襲하여 敵船이 일시에 쫓아 나오자 我軍艦船은
後退하며 적을 誘引했다. 閑山島 앞바다에 이르자 모든 배가 일시에 뱃길을 돌리며
鶴翼陣을 펴고 일제히 倭軍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거북선의 地字·玄字·勝字銃筒 등
모든 火力을 一齊 射擊하여 敵船 66척을 격파했다. 閑山大捷의 功으로, 李舜臣은 正憲大夫,
李億祺와 元均은 嘉義大夫가 되었다.
*鶴翼陣: 鶴이 날개를 편 듯이 치는 진. 적을 둘러싸기에 편리한 陣形이다.
(25) 釜山浦海戰
*釜山浦海戰 -宣祖 25년(1592) 9월 1일(양력 10.05)
李舜臣의 朝鮮水軍이 釜山 앞바다에서 日本水軍의 戰船을 격파한 싸움이다.
釜山 부근의 西平浦·多大浦·絶影島 등에서 倭軍戰船 24척을 격파한 뒤, 倭軍의 根據地
釜山과 本國과의 연락을 차단할 계획을 세웠으며, 왜군 전선 470여 척이 숨어 있는 것을
알고, 거북선을 선두로 全 艦隊를 동원하여 공격하자 배를 버리고 육지에 상륙하여 대항했다.
李舜臣은 敵船 100여 척을 격파하고 麗水로 돌아갔다. 이 전투에서 李舜臣이 아끼던
鹿島萬戶 鄭運 등 戰死 6명, 負傷者 25명이 발생했다.
(26) 鳴梁大捷
*鳴梁: 全南 珍島郡 郡內面 鹿津里와 海南郡 門內面 鶴洞里 사이의 海峽으로, 가장 좁은 곳은
293m이며, 潮流는 사리[大潮] 때의 流速이 11.5knot(21.3km/h)로 빨라 바닷물이 암초에
부딪혀 나는 소리가 매우 커 ‘바위가 우는 것 같다.’고 ‘울돌목’이라고 했다.
(*knot: 1,852m/h) (*潮: 밀물 조)
*鳴梁海戰 -1597년(선조 30) 9월 16일(양력 10.25)
丁酉再亂 때 조선 水軍이 鳴梁에서 일본 수군을 쳐부순 싸움으로 조선수군은 다시 戰列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元均이 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多大浦·漆川梁에서 大敗하여 海上權을 상실하자 柳成龍의
건의로 宣祖는 白衣從軍 中인 李舜臣을 다시 三道水軍統制使로 起用했다.
李舜臣은 敗戰 後 남은 13척의 戰船과 수군을 정비하여 전투에 對備했으며, 얼마 남지 않은
조선수군의 戰力을 우려하자 李舜臣은 宣祖에게 "臣에게는 아직 13척의 戰艦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비장한 각오의 狀啓를 올렸다. 9월 15일 碧波津에서 右水營으로 陣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말하고, 9월 16일 왜선 133척이
於蘭浦를 떠나 鳴梁으로 공격해오자, 13척의 전선과 군사를 정비하여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지휘하는 倭船 31척을
擊退·勝戰하여 朝鮮은 다시 海上權을 회복했다. (*啓: 열 계)
(27) 露梁海戰
*露梁海戰 -宣祖 31년(1598) 11월 19일(양력 12.16) *李舜臣 將軍 戰死
*露梁: 慶南 南海郡 雪川面 文義里 露梁과 河東郡 金南面 사이에 있는 나루터.
李舜臣이 이끄는 朝鮮水軍이 日本水軍과 벌인 마지막 海戰으로 7년간의 壬辰倭亂은
끝났으며, 李舜臣 將軍은 敵의 流彈에 맞아 戰死했다.
倭軍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病死하며 撤軍하게 되자, 李舜臣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뇌물을 받고 소극적이던 明 水師提督 陳璘을 說得하여 退路를
遮斷하기로 했다. 倭將 小西行長은 경남 泗川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와 南海의
소시라노부[宗調信]에게 구원을 청하여 戰船 500여 척을 露梁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이에 李舜臣은 露梁 앞바다로 쳐들어가 敵船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의 적병을 射殺했다.
이 海戰에서 400여 척의 戰船이 擊破된 倭軍은 南海 方面으로 도망쳤는데, 李舜臣은
이 追擊戰에서 敵의 流彈에 맞고,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바로 숨을 거두었으며, 조카 李莞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朝鮮軍은 倭軍을 격파한 후에 李舜臣의 戰死 소식을 들었으며,
이 추격전에서 왜군은 다시 50여 척의 戰船이 격파되고 50여척의 남은 배를 수습하여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 李舜臣 외에도 明나라의 鄧子龍, 朝鮮水軍의 加里浦僉使 李英男,
樂安郡守 方德龍, 興陽縣監 高得蔣 등이 戰死했다. 이 전투의 승리는 7년간 계속되었던
壬辰倭亂을 끝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海戰 武器
(28) 海戰 武器
(29) 天字銃筒
*天字銃筒 -朝鮮時代 火砲. -길이 약 1.5m, 砲口 지름 약 13㎝
-射距離: 900步(약 1.6㎞) 또는 1200보(약 2.16㎞)
文獻에는 世宗 7년(1425)에 鑄造했다는 기록이 처음이나, 太宗 때 地字銃筒과 玄字銃筒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天字銃筒도 世宗 이전부터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砲의 크기,
射程距離, 火藥重量에 따라 天·地·玄·黃의 順으로 명칭을 붙인 것으로, 天字銃筒은 함께
개발된 地字·玄字·黃字銃筒보다 크다. 砲口에 장전한 砲彈에 火繩으로 불을 붙여 發射하며,
童車라는 砲架에 장착하여 사용했다. 壬辰倭亂 때 李舜臣 將軍이 거북선 등 戰船에 備置하여
왜선에 큰 타격을 주었다. (*筒: 대통 통 *鑄: 불릴 주 *繩: 노끈 승)
현재 天字銃筒은 2점이 있다. 明宗 10년(1555)에 제작한
嘉靖乙卯銘天字銃筒(보물 제647호)은 國立晋州博物館에, 다른 1점은 顯忠祠에 소장되어
있으며, 정확한 製作年代는 알 수 없으나 壬辰倭亂 이후의 것으로 推定된다.
(*展示品은 모두 現品의 模型 製作品이다.)
(30) 玄字銃筒 (앞) - 中碗口
*玄字銃筒
天字·地字 銃筒에 이어 다음에 해당하는 火砲로, <火砲式諺解> ‘玄字銃筒’條에 中藥線 半條,
火藥 4냥, 檄木 4寸으로 次大箭을 발사하면 800步에 이르고, 彈丸을 쓸 때는 鐵丸 100개를
발사한다고 했다. 현재 國內에 있는 7基의 玄字銃筒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72년 全南
麗州市 白道 근방 海底에서 파손된 地字銃筒, 別勝字銃筒과 함께 引揚한 것으로
보물 보물 제1233호로, 慶南 巨濟島 古縣灣에서 발견된 것은 보물 제885호로 지정되었다.
(*諺: 언문 언 *檄: 격문 격 *箭: 화살전)
*中碗口
碗口는 일명 ‘댕구’라고도 부르며 有筒式 火器의 한 종류로 太宗 때 최해산이 만들었다고 한다.
완구는 크게 碗, 激木筒, 藥筒의 3부분으로 나눌 수 있으며, 완은 발사물 즉 큰 돌이나 쇠공을
올려 놓는 곳으로 그릇 모양이다. 약통은 화약을 넣는 곳이며, 碗과 藥筒 사이에 있는
激木筒은 화약이 폭발할 때 생기는 폭발력을 완에 전달하기 위한 나무로 만든 激木이다.
中碗口는 火器發達史는 물론 海軍戰爭史 硏究史料로 높이 評價되고 있다.
보물 제858호(국립진주박물관 소장)과 보물 제859호(해군사관학교박물관 소장) 등이
있다. (*碗: 사발 완)
(31) 地字銃筒
*地字銃筒 -조선시대 兵仗器類
地字銃筒은 天·地·玄·黃銃筒 중에서 天字銃筒 다음으로 큰 우리나라 固有의 大砲로,
길이 89㎝, 筒口 內徑 10.5㎝, 外徑 17.2㎝이다. 손잡이 2개가 붙어 있으며, 마디가
모두 10개이고 일곱 번째 마디와 여덟 번째 마디가 서로 붙어 있어 화약을 넣는 藥筒과
激木筒을 구분하고 있다. 약통 속의 구멍은 2개이고 發射物은 화살이나 彈丸을 사용한다.
地字銃筒은 이미 太宗 때 製作·使用했으며, 世宗 27년(1445) 火藥兵器 개발정책에 따라
형체를 改良·發展시켰다. (*仗: 의장 장)
明宗 12년(1557)에 제작한 것은 보물 제863호로 지정되었으며, 보물 제862호가 남아 있다.
(32) 勝字銃筒 (뒤) - 別勝字銃筒 (앞)
*勝字銃筒 -전체길이 56.8㎝, 통길이 34.8㎝, 입지름 4㎝, 무게 4.5㎏.
승자총통은 불씨를 손으로 點火·發射하는 銃筒 중 小形으로 개인의 携帶用火器이다.
宣祖 初期에 金遲가 全羅左水使로 在任할 때인 世宗 때에 만든 獨創的인 우리나라 小銃의
短點을 개량하여 발전시킨 銃筒이다. 총의 부리를 길게 하여 射程距離를 늘리고 命中率을
높였다. 승자총통의 종류에는 勝字銃筒, 次勝字銃筒, 小勝字銃筒, 別勝字銃筒,
雙勝字銃筒 등이 있다. 宣祖 12년(1579)에 제작한 勝字銃筒은 보물 제648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所藏하고 있다.
*別勝字銃筒
宣祖 25년(1592)에 제작된 靑銅製 有筒式火器로 전체길이 76.2㎝, 筒身 길이 51㎝,
藥室 길이 5.7㎝, 柄部 길이 9.5㎝, 筒口 지름 1.6㎝이다. 筒口로 화약과 실탄을 장전하고
손으로 藥線을 점화하여 발사하는 有筒式 화기이다. 1570년대 後半에 제작된 勝字銃筒을
改良한 것으로, 오늘날 小銃에 이용되는 腔線의 원리를 적용해 筒身을 휘도록 만들었다.
(*柄: 자루 병 *腔: 속 빌 강)
(33) 長劍
李舜臣 將軍이 閑山島에 있을 때 제작한 것으로 항상 壁에 걸어두고 보면서 心身을 가다듬던
칼로 길이 107cm이다.
=長劍에 새긴 銘文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삼척서천 산하동색 일휘소탕 혈염산하)
/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34) 小神機箭 (앞에서부터) – 火箭 – 長箭
*小神機箭
길이 101cm의 대나무 앞에 쇠촉을 달고, 그 뒤에 길이 14.4cm, 안지름 1.1cm의 약통을
달았다. 약통의 양쪽 끝은 종이로 막으며 아래 끝 면에는 지름 4mm의 분사구멍이 있다.
小神機箭은 大·中神機箭과는 달리 爆發物을 장치하지 않는다.
*火箭 -最大 射距離 800m, 有效射距離 500m.
화살 끝에 火藥주머니를 매달아 불을 붙여 쏘던 火器로, 高麗 禑王 3년(1377) 火筒都監에서
만들어 倭寇의 선박을 공격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했으며, 戰船·掩蔽物 등을 공격하는 데
효과가 커 朝鮮時代에도 제조했다. (*掩: 가릴 엄 *蔽: 덮을 폐)
*長箭: 人命殺傷用 화살로 鐵鏃이 달려있다. (*鏃: 화살촉 촉)
(35) 海戰武器와 遺物
李舜臣 將軍은 狀況에 따라 여러 가지 戰略·戰術을 驅使하고 鐵丸과 長箭, 片箭, 皮翎箭,
火箭 및 天字·地字銃筒 등 다양한 火藥武器와 화살 등을 사용했다. <壬辰狀草>에는
이와 같은 무기를 사용하여 敵을 焚滅한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明나라 水軍都督 陳璘이 그의 뛰어난 戰略戰術에 대하여 明 皇帝에게 報告했으며,
明 皇帝 神宗은 都督 벼슬을 내리고, 특별히 8가지 물건 ‘八賜品’을 보내주었다.
八賜品은 ‘皇帝가 下賜한 8가지의 物品’이라는 뜻이다. (*賜: 줄 사)
*八賜品은 1966년 [統營 忠烈祠 八賜品 一括]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統營 忠烈祠 八賜品 一括
① 都督印 1개: 銅製 印으로 높이 18cm, 길이 15.1cm, 폭 7.8cm, 鈕高 6.9cm. (*鈕: 인꼭지 유)
② 虎頭令牌 1쌍: 길이 31.8cm, 폭 30.3cm. 八稜形 (*稜ㅣ 모날 능)
③ 鬼刀 1쌍: 칼날 길이 83.3cm, 폭 7cm, 전체 길이 137.9cm.
④ 斬刀 1쌍: 길이 180.2cm, 폭 6cm. 칼자루를 상어껍질로 싸고 붉은 칠
⑤ 督戰旗 1쌍: 가로 16cm, 세로 63cm, 깃대 길이 178㎝. 깃대 끝에는 길이 45.5cm의 창을
꽂았다.
⑥ 紅小令旗 1쌍: 가로 62cm, 세로 63cm, 깃대 길이 177cm. 깃대 끝에는 길이 24.2cm의
창을 꽂았다.
⑦ 藍小令旗 1쌍: 크기나 형식은 홍소령기와 같으며 깃대 길이 180cm이다.
⑧ 曲喇叭 1쌍: 길이 218.2cm, 開口徑 25.7cm. 구리로 만들었으며, 목이 구부러져
‘曲喇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喇: 나팔 나 *叭: 나팔 팔)
八賜品 -보물 제440호 (複製品)
(36) 紅小令旗 1쌍 - 督戰旗
=紅小令旗
令旗는 軍中에서 軍令을 전달할 때 쓰는 旗로, 紅小令旗는 가로 62cm, 세로 63cm,
깃대 길이 177cm. 붉은 비단으로 만들고 藍色 비단으로 '令'자를 붙였다.
깃대 끝에는 길이 24.2cm의 창을 꽂았다. (*藍: 쪽 남)
=督戰旗: 戰鬪할 때 싸움을 監督하고 士氣를 북돋아 주기 위하여 달던 基.
가로 16cm, 세로 63cm, 깃대 길이 178㎝. 남색 비단으로 만들고, 한가운데에
‘凡軍臨敵不用命者處斷(범군림적부용명자처단)’/ ‘무릇 군사로써 적을 맞아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처단한다.’라고 세로로 쓰고, 左右로 붉은 비단으로 된 ‘督戰’ 두 字를
오려 붙여 褙接했다. 깃대 끝에는 길이 45.5cm의 창을 꽂았다.
(37) 斬刀
重罪를 지은 사람들을 斬首할 째 쓰던 칼 1쌍이다. 길이 180.2cm, 폭 6cm. 칼자루를
상어껍질로 싸고 붉은 칠을 한 다음 쇠가죽 오라기를 감았다. 칼집은 나무로 만들고
쇠가죽으로 싸서 붉은 칠을 했으며, 銀鍍金한 쇠로 장식했다. (*斬: 벨 참)
(38) 都督印 (앞) - 都督印函
=都督印: 中國 明나라 皇帝 神宗이 李舜臣 將軍에게 내린 八賜品의 하나로 水軍都督의
地位를 상징하는 印章
=都督印函: 都督印을 보관하는 상자. ‘皇朝 御賜印’ 글씨가 있다. (*函: 함 함)
(39) 곡 나팔[曲喇叭) 1쌍
軍隊를 지휘할 때 사용하는 나팔로 길이 197cm, 開口徑 25.7cm이며,
구리로 만들고 나팔입은 퍼졌으며 4마디로 되어 있다. 붉은 술을 달고,
목이 구부러져 ‘曲喇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40) 虎頭令牌 1쌍
虎頭令牌는 命令을 전달할 때 傳令이 지참하는 牌로, 호랑이 머리를 그렸으며,
길이 31.8cm, 폭 30.3cm의 八稜形 1쌍이다.
(41) 督戰旗 (왼쪽) - 藍小令旗
사진 (36) 督戰旗와 한 쌍이다.
(42) 藍小令旗 1쌍
크기나 형식은 紅小令旗와 같으나 깃대 길이 180cm이며, 藍色 비단 바탕에 紅色
비단으로 ‘令’字를 붙였다.
(43) 鬼刀 1쌍
護身用으로 사용하던 칼이며, 손잡이가 귀신모양과 같아 ‘鬼刀’라고 한다.
칼날 길이 83.3cm, 폭 7cm, 전체 길이 137.9cm이다. 칼자루는 박달나무로 만들고 龍頭를,
그 아래에는 鬼頭를 새겼다. 칼집은 오동나무로 만들고 종이로 싸서 붉은 칠을 한 다음
彩色으로 龍의 비늘을 표현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