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423년 전 조선의 전국토가 유린되던 임진왜란을 당하여,
정규 조선군은 전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연전 연패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은 압록강만 넘으면 중국으로 망명할 처지였고,
백성들은 왜군에 유린당하여도
어디에 기댈 곳없이 죽지 못해 살아가는 참혹한 시대를 살았다.
그런 시대에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조선에는 이순신장군이 계셨고,
그가 있었기에 조선은 나라가 없어지지 않고 살아남았고,
지금의 우리가 이어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이충무공의 전공은 모두가 인정했지만,
그 공이 너무도 컸기에 조선의 왕은 오히려 그게 두려웠다.
이순신장군이 전장에서 전사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 공이 모두가 허물이 되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죽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간지 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의 혁혁한 공을 알아주는 이들이 많아지자
그의 공을 잊지않고 길이 후손에게 전하기 위하여 명량대첩비를 세우고
그의 행적을 기록하고 혼을 위로하는 글을 지어 바쳤다.
기자는 오늘 후학으로 해남땅을 지나다가 이충무공의 행적을 더듬고
그의 행장을 살펴보게 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명량대첩비는 1688년 예조판서를 역임한 이민서가 글을 짓고
이정영이 글을 썼으며 김만종이 새겼다.
아래에 새겨진 글을 한글로 번역한 내용을 그대로 다시 적어본다.
통제사이충무공명량대첩비
유명조선통제사 증 시호 이충무공 명량대첩비
지은이 이민서-자헌대부 예조판서 홍문관대제학 지경춘추관 성균관의금부사
글쓴이 이정영- 보국숭록대부 행 판돈영부사
새긴이 김만종-숭록대부 행자돈영부사겸 지경연사 동지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만력25년 정유년 9월 통제사 이공이 수군을 거느리고
진도 벽파정 아래 나아가 일본도적을 울돌목 어귀에서 크게 쳐부수니
도적이 이로 말미암아 크게 세가 꺾여 감히 해로로 전라도를 쳐들어오거나
충청 경기로 다가오지 못하다가 이듬해 도적이 전쟁을 그만두고 돌아가니
세상에서 가장 중흥의 전공은 공이 제일이라 일렀고
그 중에서도 울돌몰 싸움이 가장 뛰어났다
공이 처음에 좌수사로 부임한 뒤,
일본의 도적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강개하여
부하들과 맹세하고 영남으로 나아가 바닷가의 도적들을 맞아 쳤는데
처음에는 옥포에서 싸우고, 당항포에서 싸우고 다시 당항포에서 싸웠는데
모두 적은 수로 도적의 무리를 쳐부수니 수가 헤아릴 수없이 많았는데
마침내 한산에서 크게 이겨 위세를 바다 한가운데 떨치니
이에 조정에서 이통제사의 벼슬을 내려 삼도의 수군을 모두 통괄하게 하였다.
한산에 몇 해를 이어 머무르자 도적들이 다시는 바닷가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이때 크게 움직여 전에 패했던 것에 원한을 품고 힘을 모아 바닷길을 뚫고 바로 올라오려하였다.
이때 공은 모함을 당하여 호송되고,
백의종군으로 도원수를 따르라는 명을 받았다가 전세가 위급해지자 갑자기 옛벼슬을 다시 받았는데,
이때는 원균이 공을 대신하여 나아가 싸웠으나
군대는 무너지고 함선과 기계의 축적이 모두 없어졌으며 한산도도 이미 함락된 뒤였다.
어허 통재라. 공은 허물어진 진지와 싸울 군사도 없는 수군을 찾아
간신히 바닷길을 헤메어 겨우 얼마안되는 패잔병들을 모아
전선 12척을 거두어 드디어 울돌목에 막아셨다.
적들이 바다를 뒤덮어 오는지라
공은 여러 장수들에게 나아가기를 재촉하여
좁은 목에다 뱃머리를 잇대고 닺을 내리고 바다 중간을 끊어 적들을 기다렸다.
울돌목은 목이 좁은데다 조수는 마침 들어와 물결은 더욱 빠른데
적군들이 상류쪽으로 조수를 따라 덮쳐오는데
그 형세는 마치 산이 누르는 것 같아 우리군사들은 풀이 죽으므로
공은 기운을 더욱 돋우고 기회를 따라 쳐 부수게 하니 장군들은 모두 죽기를 맹세하였다.
적선은 나는 듯 나들고 대포는 사방에서 터지며 바닷물을 뒤끓는데
적선음 불타고 깨어져 물에 빠져죽은자 헤아릴 수 없게 되었고
마침내 적들을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처음에 싸움이 한참 어우러질때 거제현령 안위가 뒤로 물러나메,
공은 큰소리로 안위의 목을 자르라 호령하니
위도 두려워 되돌아 들어 날세게 싸워 이날 쳐부순 적군의 배가 500척이요
그 장수 ‘다마시’의 목도 베었다.
이때 남도 백성들은 적을 피애 공을 따르는 배가 100여척인데
공은 싸우기 전에 그 배들을 빌려 바다에 벌려세우고 싸우는 배처럼 꾸몄다.
전투가 벌어지자 배에서 구경하던 이들은 모두 얼굴빛이 질리며
공은 군사가 적으메 응당 패하리라 걱정하였더니 적이 물러나고
싸움이 끝난 뒤에 우리 전함들이 그냥 우뚝 아무 탈없음을 보고는
모두 경탄하며 달려와 치하하니 이로부터 우리 수군의 위세가 또 다시 크게 떨치었다.
저 이일과 신립이 패한뒤로 관군과 의병이
모두 적을 만나는데로 무너져 적들의 칼날에 맞설길이 없더니
명에서 많은 군사들을 보내주어 크게 깨트리니
세 도성도 차례로 수복되어 우리의 군사도 버틸수 있게되었다.
연안에서는 행주에서의 승첩이 비록 훌륭했다고 하나
모두 명나라 군사의 힘을 빌려 겨우 성을 지키고 적을 막았을 뿐인데,
제 힘으로 혼자 한방면을 당해내어 모조리 죽이고 큰 승리를 거둔 것은 오직 공만이 한 일이다.
그래서 적들이 호남과 영남에 진을 치고 있은지 예닐곱해 동안에도
감히 서쪽바다는 한 발거름도 밟아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남원이 무너짐에 따라 적들의 기세는 더욱 거세어 졌지만,
그래도 적들은 뒤가 무서워 제멋대로 다 못했던 것도 다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량싸움에 이르러서는 크게 싸우고 또한 크게 이겼으며 진중에서 운명하여
마침내 몸을 나라에 바쳤고 공이 돌아가시자 마침내 적들도 물러났다.
그 뒤에 조성에서 적을 평정한 공로를 논할 때 공으로써 으뜸을 삼아
선무공신의 호를 내리고 좌의정벼슬을 내리고 노량에 충민사를 세워 제사하게 하였다.
공의 이름은 순신이요 자는 여해이며 아산사람이다.
공은 평소에는 차근차근하여 단아한 품이 마치 선비와 같았으나,
전장에 다달아 적을 무찌를 때에는 계략이 신기하여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 하나 이에 다 할 수가 없었으며,
늠늠한 품위은 저 해와 달을 꿰고 귀신까지도 감통케 하였다.
그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승리가 있었으며
그 위엄은 도적들로 하여금 무서워서 벌벌떨게 하였고, 의기는 중국을 흔들었나니,
공과 같은이는 그야말로 옛날부터 일러오는 참장군 이라 가히 큰일을 할만한 분으로
다만 한때의 승리를 들어 훌륭하다 논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의 모든 행적과 군사를 거느리던 일들은 역사와 많은 사람들의 기록에 적혀 있거니와,
내가 젊어 울돌목을 지나다가 공의 싸우던 터를 둘러보고
하염없이 한숨쉬며 오래 거닐면서 그의 인격을 상상해본 적이 있었는데
이제 남도 사람들이 그곳에 비석을 세우고 그곳에 새길 글을 청하는지라
그 의리에 감히 사양할 길이 없어 드디어 옛날 들었던 이야기를 대강 적고 시를 이어 붙인다.
울돌목 입구여 좁은 곳을 묶었도다
바다 조수의 줄어듬이여 양 협곡의 물길이로다
전투함에 임하여 출기하기 이롭도다
어리석은 병추에 견디지 못했도다
병사들의 분발함이여 북소리가 사방에 진동하도다
왜벽을 섬멸함이여 그 잔해 즐비하도다
오직 장군만이 충과 의를 갖추었도다
해상을 봉쇄함이여 바다에 걱정이 없도다
성난 물결이여 교나 경도 떠내려가네
전적지를 돌아보니 영웅의 면모가 상상되네
영령의 아름다움이 바다도 경외로움을 표하네
별들을 꾸짖음이여 바람과 우레가 달리도다
바다가 다하지 않음이여 돌도 부서지지 않도다
장렬한 전공이 발으니 끝없이 빛나도다
숭정 후 을축년 3월 일 쓰다
가선대부 행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박신주가 무진년 3월 일 세우다
감역출신 한 시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