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반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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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평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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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몇 발자국쯤 앞으로 나아갔지만 그 발자국이 전부인 것 같다.
여전히 부당함이 우위를 점령하고 있고 당연히 보통 사람의 시대는 오지 않았다.
대신 대세에 머리를 조아려 수긍하면서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나는 남들과 달리 몹시 특별한 사람이라고,
그러니 제발 나를 좀 주목해달라고 온몸으로 외쳐야 하는 세상이 왔다.
나는 하필이면 이 시대에 청춘의 끝자락을 맞이한 숱한 여럿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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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반이나 학원 경품 추첨, 등에서 같은 이름을 발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과자를 먹다가 봉지를 뒤집어보면 생산 공장 직원명에
내 이름이 박혀 있었고 유명한 연예인의 본명 역시 내 이름이었다.
때로 그건 나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강아지, 고양이 같은 보통명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좀 아쉬울 때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내게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때로는 그 무수한 익명 속에 숨을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자랑할 것이 많지 않은 삶에는 그게 더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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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모르고 살면 언젠가 인생 전체가 창피해질 날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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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 씨를 만들어낸 건, 이 답답한 도시생활에서 하나의 숨통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언제나 같은 사람들과 밥을 먹는다는 건 정말이지 숨 막히는 일이다.
매일 점심때마다, 뭐 먹을래, 아무거나요, 오늘은 돈가스 어때, 좋아요,
메뉴는 짜장면으로 통일할까, 그러죠, 따위의 대화를 나누는 것.
나서서 냅킨을 깔고 숟가락, 젓가락을 놓고 도맡아 물을 따르는 것, 다들 그런다고 생각하면 어렵지 않지만
그래도, 그래도 가끔은 도피처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루는 친구가 온다고 했다. 그게 몇 번 반복되자,
사람들은 친구의 성별을 알고 싶어 했고, 나이와 이름도 필요해졌다.
그렇게 해서 정진 씨가 탄생했다. 정말, 진짜, 라는 이름을 가진 내 가짜 친구.
몇번 얼버무렸더니 유 팀장은 제멋대로 정진 씨가 나를 좋아하는 것으로 몰아가더니,
급기야 나와 정진 씨를 '썸 타는 관계'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귀찮아서 변명을 안 하고 있었는데 조금만 더 지나면 결혼이라도 시킬 태세다.
더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정진 씨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시나리오까지 짜야 한다는 게 새삼 우스워 피식, 콧바람이 나왔다.
있지도 않은 사람과 썸 타고 연애하고 헤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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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미련함이 반갑지 않았다. 모름지기 사람은 적당히 일을 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분수에 맞게, 주어진 시간과 급여에 맞게.
그러므로 최저임금을 간신히 넘는 비정규직인 우리에게 일이라는 건
꼼수, 눈치, 요령의 삼 요소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최소한의 노동이라야만 한다.
그래야 헤프게 이용당하지 않고, 당연한 듯 착취당하지 않고 적당히 치고 빠질 수 있다.
계속 못하다가 갑자기 잘하면 칭찬을 받지만 계속 잘하다가 한 번 실수하면 본전도 못 뽑고 신랄히 욕만 먹는다.
아슬아슬 선을 지키는 수준에서 일하고, 할 수 있는 일도 가끔은 못 하는 척 피해 가고,
귀찮더라도 가끔 핀잔을 듣는 상황을 만들어 상사를 우쭐하게 만들 줄도 알아야 한다.
당신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그럭저럭 보통은 해. 가끔 덤벙대기도 하지만 발전 가능성은 있어.'정도면 충분하다.
그게 자신을 지키며 일하는 방법이다. 특히 대단한 보람이나 연봉, 자아실현과는 거리가 먼 일일수록.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너무 닳고 닳은 인간인 걸까. 아니면 꿈이 없는 사람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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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시간 많아서 좋겠다. 너만 생각할 시간."
좋겠다, 같은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너는 애도 있고 집도 있고 돈 벌어다주는 남편도 있잖아.
나만 생각하는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래서 더 외롭고 무서운지 알기나 해? 라고 말할 순 없다.
해봤자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친구 사이에 공통화제의 간극이 생기고 그게 점점 멀어지면 평행선을 달린다.
언젠가 다빈이와도 그렇게 될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그저 그 시간이 되도록 천천히 와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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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보려고 휴대폰을 들자 검은 액정에 내 얼굴이 비친다.
발그레한 얼굴과 풀린 눈으로 미소를 짓고 있다.
웃음은 뇌를 춤추게 한단다. 가짜 웃음이든 진짜 웃음이든 일단 웃기만 하면
뇌는 도파민이니 뭐니하는 좋은 호르몬들을 생산한단다.
생전 만나볼 일 없는 연예인의 사생활이 나를 웃게 한다.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었으니 조금쯤은, 적어도 하루쯤은 다시 버틸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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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삶에 체증이 밀려오는 날
이 책을 만나 조금은 숨이 트였습니다.
첫댓글 오 읽고 싶어졌어요 나중에 한번 책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아몬드 작가님이시네요?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글 감사합니다
좋네요ㅠㅠㅠ책 읽어보고싶어졌어요
나중에 읽어봐야겠네요ㅜㅜ
글이 너무 좋아요 특히 정진씨 ㅠ ㅠ ㅠ ㅠ 직장인들이라면 한 번씩 저런 거짓말 할 때가 있죠
우와.. 너무 제 얘기하는 거 같아요. 내일 서점 갑니다..
오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 아몬드도 좋았는데 글 감사합니다 ..!
너무 좋네요 저 북마크해두고 읽을게요
오랜만에 좋은책 하나 알았어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