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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국이 제국이라는 증거
(발해제국사 발해가 고구려 계승국인 34가지 근거에서 내가 발해국은 제국이다라는 부분을 간추려서 적은 것이니 내 손가락이 아플 경우 생략을 많이 할수 있다.)
북한에서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은 발해국은 대중상(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이 세운 소국小國인 진국이 발전한 것이며, 여러 소국 가운데 하나가 고려후국高麗侯國(평안도의 서부와 요동 지역)이고 백두산의 남북 지역에도 고구려의 정치 세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원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한 북한의 발해사 연구자들은 1990년대에 새로운 관점의 발해사를 내놓았는데, 특기할 것은 대조영의 발해국(698년)을 ‘발해제국’, 소국을 ‘후국侯國’이라고 구분 지음 것이다. 이 소국이 황제국보다 먼저 건국되었음을 우리의 옛 문헌을 중심으로 고찰하는 등 소국의 건국을 새롭게 조명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뚜렷하다.
(북한이 발해를 발해황제국으로 따지면서 정작 중국앞에서는 역사를 빼앗기는 것을 구경만 하냐? 사회과학원이 유일하게 한국에 출판한 책으로는 ‘발해국과 말갈족’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역시 발해는 황제국이며 말갈과는 다르다는 진실을 알려주는 책인데 이책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유일출판물’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북한에서 고구려,발해에 관한 자료가 많은 것은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제국인 발해국의 선행국가, 즉 전조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없으나, 『삼국사』의 기사는 고구려 유민의 새로운 왕조가 열렸음을보여주는 것으로 고구려 유민들의 국권 회복에 있어 역사적 사건임에 분명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下)를 보면,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태백산 남성南成에 의거하여 측천무후 갑신년(684)에 나라를 열었는데 발해라 이름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698년에 대조영에 의해 세워진 발해제국보다 먼저 세워진 소국의 건국을 뜻하는 듯하다.
이 『제왕운기』의 기사는 발해국보다 먼저 세워진 진국에 관한 『협계태씨족보』를 보면 “사성 13년(696)에 중상이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태백산 동쪽에 나라를 세우고 진국이라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으며, 같은 책「왕세략사」에는 발해국의 존립기간을 “1공公․14왕王 231년”이라는 기사가 있다. 이 족보에서 주목할 것은 ①발해제국보다 먼저 세워진 나라를 진국이라 하였으며,②건국 연대를 696년으로 보아 발해국의 통치 기간을 3년을 더한 231년으로 잡았을 뿐 아니라③발해국의 통치를 1공․14왕으로 구분 지은 것이다.
(너무 많으니 대충 발해국과 진국은 다르고 진국은 3년동안 존립했고 통치자는 대중상이며, 발해제국은 근거지를 옮겨서 나중에 대제국으로 이룰수 있었다.
이는 협계태씨족보와 신당서의 일부대목에 나와있다.
그런데 뒤의 내용은 좀 많이 짤랐는데 모르면 책사던지,배우던지.)
제왕운기에는 고구려의 멸망후 16년, 즉 발해제국이 세워지기 14년 전(684)에 진국이 세워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협계태씨족보에는 걸걸중상이 사성 13년에 건국한 것으로 되어있다.사성 13년이 696년이므로 이대로 보면 진국의 존립 기간은 3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발해제국은 고구려 멸망 후 30년 만에 세워진 만큼 발해국(진국)은 고구려 멸망 후 16년이 지나 세워졌으며 발해제국보다 q4년 전에 세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사성 13년의 근거는 무엇일까. 발해제국의 전신인 진국이 684년(서성1)에 세워졌다는 제왕운기의 기록을 무시할 수 없다 보니 684년 이후 14년 되는 해를 계산해보면 697년이 된다. 그러면 사성 14년인데 잘못하여 사성 13년으로 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아무튼 협계태씨족보와 제왕운기에 발해제국 이전에 진국이 이 있었다는 기사는 내용상 일치하며, 제왕운기에 실린 진국의 684년 건국설은 인정받을 만하다.
지금까지 발해국의 존립 기간을 228년으로 알고 있었으나 협계태씨족보에 실린 걸걸중상의 재위 3년을 합하면 231년이 된다. 그러나 제왕운기와 협계태씨족보의 두 기사를 종합하면 684년부터 14년간은 걸걸중상이 다스리는 소국의 시기이며, 698년부터 228년간은 대조영을 비롯한 여러 황제의 통치 기간이다. 이 두 통치기간을 합하면 242년간이 된다.
『일본후기日本後記』,『구당서』,『신당서』(『』이 있는 책과 없는 책의 차이는 나의 귀찮을때와 안귀찮을때의 차이이다.)에서도 진국과 빈리하여 발해제국의 건국을 698년으로 보았다.
(나머지는 적절하게 생략)
중국의 문헌에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 되었다는 대목이 있는데, 발해국이 당나라의 제도를 배운다 해서 해동성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동생략~~)
해동성국의 탄생은 대조영이 동모산 일대에 세워진 진국을 확대하여ㅕ 발해제국을 선포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구당서에 “만세통천 연간 거란의 추장 이진충이 당나라를 반대하여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영은 말갈 사람 걸사비우와 함께 각기 망명자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려가 험한 지세에 의거하여 견고해졌다.·····조영은 그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서 계루桂樓의 옛 땅을 차지하고 동모산에 의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라는 기사는 대조영이 영주에서 당나라를 반대하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까지 이끌고 동모산에 당도하여 제국을 선포한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대조영이 계루(읍루)의 옛 땅, 즉 동모산 일대에 발해국을 세웠다는 소식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그의 밑으로 다투어 모여들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한반도의 서북 지역과 요동지방에 세워진 고구려 유민의 나라가 스스로 발해제국의 후국으로 들어왔으며, 한반도 동북 지방의 정치 세력들도 역시 자진하여 발해제국에 속하였다.
발해국은 세워진 지 얼마 안 되어 옛 고구려의 땅을 대부분 차지 하였다. 신당서는 이와 관련하여 “조영이 비우의 무리까지 규합하여 멀리 떨어져 있음을 믿고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진국이라고 하였으며 사신을 돌궐에 파견하였다. 그 지방은 5천리였다라고 했다.
(그 지방이라... 역사왜곡?? 그 영토로 기록되었으면...)
(대충 생략)
발해국이 건국 초기 고구려가 차지하지 못한 흑수 말갈 지역과 고구려 영토의 중심지역을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발해국 건국 이전에 고구려 유민이 세운 진국과 고려국이 정치적 기반을 공고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조영 휘하의 유민 세력이 동모산 일대에 쉽게 모일 수 있었던 것도 요동반도에서 고구려 유민의 정치·군사적 기반이 공고해진 것과 관련이 있다. 고구려 유민이 세운 고려국은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에 움녕을 맡기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자진해서 발해국의 후국이 된 듯하다.
(~~)
발해국이 세워지기 전에 그 동남부 지역 (강원도의 동해안)은 발해국의 영역 확장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668년 고구려 멸망 시 이 지역은 당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고 고구려의 톷치 기구가 그대로 유지된 듯하다. 이 지역에 정치 세력이 있었음은 『삼국유사』에 “국선國仙인 부례랑夫禮郞이 693년(신라 효소왕 2) 화랑무리들을 거느리고 금란金蘭(강원도 톷천)으로 놀이를 나갔다가 북명北冥(원산 일대)에서 포로로 붙잡혀 포로 생활을 하다가 풀려난 이야기를 그 부모에게 하는 가운데, 적에게 잡혀간 뒤 적국의 대도구라大都仇羅의 집에서 짐승 기르는 일을 하게 되어 대조라니大鳥羅尼 들판에서 말에게 풀을 뜯기고 있는데·····”라는 대목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를 보면 발해제국이 세워지기 전 그 동남부 지역에 정치 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도구라는 한 정치 집단에 속해 있었을 것이며 그세력은 발해국의 동부 지역 또는 강원도의 동예 지역에 존재하였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 세력은 발해국이 건국 초기부터 이 지경으로 영역을 확대해나가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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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이상 이웃한 발해제국의 서부 지역에 고려후국이 있었던 만큼 동남부 지역에도 정치 세력 집단이 있었을 것이다. 이 두 지역이 쉽게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은 발해국이 처음부터 이 지역들에 대해 군사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여기서 대조영의 정치․군사적 역량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아보자. 이와 관련하여 18세기의 실학자 홍석주는 발해세가라는 저서에서 “조영은 드디어 비우의 무리 및 고구려·말갈의 군사를 거느렸는데 40만이나 되었으며 스스로 진국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내용은 『오대회요五代會要』와 『고려도경高麗圖經』에도 전해진다.
40만이라는 대군은 영주에서 동모산으로 진출한 대조영의 부대를 포함하여 각지에서 모여든 벽력까지를 일컫는다. 이러한 대부대를 지휘한 대조영이 용감하고 용병술이 뛰어났다는 구당서의 기사는 믿을 만하다.
대조영이 동모산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옛 고구려 유민들뿐만 아니라 고려후국 또는 동남 지역의 기존 정치 세력들도 자신들보다 우세한 발해국에 자진하여 자신들의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만약 대조영이 용감하고 용병술이 탁월하지 않았다면 고구려 유민들과 기존 정치 세력들은 선뜻 발해국에 통합되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발해국이 건국 초기에 영역을 급속하게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대조영의 건국 세력이 매우 막강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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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국 관련 문헌과 금석문에 따르면 발해국의 군주는 자신들을 황제라고 하였다. 이는 대조영아 맏아들 대무예大武藝에게 계루군왕이란 칭후를 준 사실로 알 수 있다.
책부원구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발해국왕 무예는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그의 아버지 조영이 동쪽에서 계루의 땅을 차지하고 자립하여 진국왕이 되었는데 무예를 계루군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같은책(권 964) 당나라 현종 개원 8년(720)8월 초의 기사를 보면 현종이 대무예의 아들 대도리행을 계루군왕에 봉하였다는 대목이 있다. 군왕이란 무엇인가. 보통 황제는 자신의 아들을 왕에, 손자나 조카를 군왕에 책봉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면 대조영은 맏아들 무예를 계루군왕이 아니고 계루왕에 책봉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대무예의 계루군왕 책봉은 계루왕 책봉으로 보는 것이 맞다. 그런데도 『책부원구』는 왜 대무예를 계루군왕에 책봉하였다고 했을까. 당나라의 관료들은 발해국을 황제국으로 부르기를 몹시 꺼려하여, 대무예가 아버지 대조영으로부터 계루왕의 책봉을 받았건만 이를 계루군왕으로 격하시켰다고 하겠다. 따라서 대무예의 계루왕 책봉은 대도리행의 계루군왕 책봉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대무예가 아버지 대조영으로부터 계루왕의 책봉을 받았음은 발해국이 제국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러면 또 다른 근거는 없을까. 『협계태씨족보』의 「선조세계」를 보면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발자에 물수자가 붙어야 하는데)이 검교태위 반안군왕이 되었다는 기사를 만날 수 있다. 그도 발해국왕으로부터 왕의 책봉을 받은 것이다. 대무예나 대야발이 작은 왕이듯이 고려후국의 왕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점으로 보아 발해국의 최고 통치자는 작은 왕들을 거느린 대왕, 즉 황제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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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으로서 발해국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연호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신당서』발해전을 보면 발해국은 연호를 일관되게 사용하였는데 확인된 연호는 다음과 같다.
인안仁安 ·····>무왕(720·737)
대흥大興 ·····>문왕(738~793)
중흥中興 ·····>성왕(794)
정력正歷 ·····>강왕(795~809)
영덕永德 ·····>정왕(810~812)
주작朱雀 ·····>희왕(813~817)
태시太始 ·····>간왕(818)
건흥建興 ·····>선왕(819~830)
함화咸和 ·····>□왕(831~857)
문왕은 774년 연호를 보력으로 고쳤다가 다시 대흥으로 하였는데 보력 연호를 언제까지 사용하였는지를 알 수 없다. 발해국의 연호는 보력을 포함하여 10개이지만 발해국의 군주 15명이 모두 연호를 제정, 사용한 걸로 본다.『협계태씨족보』를 보면 고왕 때의 연호로 천통天統이란 것도 보인다.
(작업이 끝났으니 출저는 발해제국사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국인 34가지 근거)
첫댓글 이런 역사를 우리 조상들이 잘랐으니 원... 남들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