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조명
내가 빵으로 웃을 때
김영자
귀가 웃을 때는 빵이 될 수 있었다
빵의 살을 쪼개며
어느 날은 빵이 되고 싶었다
빵 속에 숨어 계시는 님을 만나면
뜨거워서 꽃이 핀다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빵이 있어
무더기무더기 뜨거운 꽃이 핀다고
늙은 귀로 기록하였다
모든 촉감을 열고
사이와 사이에서 오는 즐거움으로
살과 뼈 사이의 간격을
꽃과 꽃의 사이를 기록하였다
빵으로 웃을 때 귀가 웃었다
이명이 아니었다
내가 빵으로 다시 웃을 때
모든 간격은 사라지고
빵의 박동 소리가 들렸다
님이 따뜻한 빵으로 오시는 중이었다
음악의 창고
몸이 춤의 창고임을 알았을 때 꼿발*을 들었더니 꽃발이 되었다 두 팔을 펴고 날았다 새처럼 날았다 날다가 다시 걸으면서 그대에게 안부를 묻고 있는 동안 둥그러진 허리를 보고 씩 웃었다 순간 균형이 무너지고 흔들거렸다 쏟아져 나오는 함성으로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지천으로 올라오는 함성이 굳어지기 전에 다시 날고 싶었다 나는 날고 싶었다 먼 곳에서 꿈들이 걸어오고 어깨에 세워진 날개의 집들이 무지개로 필 때 반복하는 음, 그 음의 간격이 풀잎들을 흔들어 깨웠다 잠시 멈추어 섰다 진동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온몸에 흐르는 떨림의 속도로 자귀나무 꽃숭어리는 분홍빛을 감아올리고 내 몸은 창고가 되어 가는 중 음악은 쌓여 가고 있었다
*꼿발: ‘까치발’의 방언.
가벼운 것이 좋다
날이 갈수록 가벼운 것이 좋아진다 가벼워진다는 것은 무릎의 각도를 펴고 바람을 쐬는 일 조금 더 무게를 덜어내며 무게와 무게 사이로 물길을 내는 일이다
물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차곡차곡 챙겨 넣어 두었던 계단 아래 창고 속에서 탈출하는 아침, 펑퍼짐하고 가장 가벼운 옷을 고른다 색깔도 맵시도 다 버리니 매달릴 일 없어 잠시 누워 있다 일어나기도 하고 그대로 다시 누울 수 있으니 좋다
살 안에서 살 밖으로 살 밖에서 살 안으로 드나들 수 있으니 묶인 것들을 적시고 적신 것들을 다시 풀어 햇살에 내어놓으니 아침이 솜털처럼 웃는다 향낭이다
갈색 두건을 쓴 화가
별에 풍덩 빠져 봐요 스며들어 봐요
젖어 보고 웃어요
갈색 두건을 쓴 화가는
노랑머리텃새 한 마리 만나 무릎을 꿇고
햇 닥나무껍질을 벗기며
덜어낼 것 덜어내고 들일 것 들이는 일이
젖는 일이라는데
여우 눈 내리는 날 서서히 번지고
스며들어 다시 번지는
햇살과 바람의 길목에서
소전리 벌랏마을 한지韓紙 마을에서
오래된 풀무를 돌리는 그가
스며드는 일은
세상에 내어주는 꽃이라며 웃는데
나는 누구에게 스며들었는가
한 번이라도 내려놓고 젖은 일이 있는가
그의 풀무 소리를 응시한다
풀꽃 동산 푸른 눈물에서나 젖을 수 있을까
상자에 관한
나비야, 박스 속에서 넘쳐나는 공기는
연분홍이 되었지 하르르 벚꽃 잎
그런데 동굴처럼 깊은 네 눈동자 속에서
휘날리는 꽃의 비밀은 살구꽃 울음이었어
부풀어 오르는 통증을 껴안고
수많은 꿈이 팽팽해 질 무렵
어릴 적 무서웠던 그 이야기 속
벽 속의 검정고양이가 번개처럼 빠져나가는데
살구 꽃잎들이 사방으로 흩날렸거든
고양이를 안아볼래요 아니
무서워요 무서워요 상자 속에 넣어주세요
흩어진 꽃잎들이 살구나무 아래 쌓이던 날
발등에 제 얼굴 문지르며 놀다가
상자 속에서 낮잠 자는 고양이
저를 안아 주세요
검은 구름이 몰려올 것 같아요
검은 고양이 네로 네로 네로 장난꾸러기
리듬을 타고 달려오는
덩치와 꼬맹이, 날라와 지지 그리고 흰발이와 야옹이
꽃들에게 고양이를 보내고 싶어요
좋아하는 풀잎을 먹이고 싶어요
사각 속의 둥'E
아늑한 꽃잎 태반의 집
상자가 꽃으로 막 피어나는 순간이거든요
휘발
낯설었다 분명한 것은 낯선 말이 아닌데 휘발되었다는 말이 오늘따라 먼 곳에서 천천히 온다 겉옷을 벗어 어깨에 걸치고 온다 속을 들여다보는 힘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휘발시킨 것인가 무엇이 휘발된 것인가 시간을 자꾸 덮다 보면 스스로 날아갔다는 말은 유효한가
사라짐이 아닌
오직 감추어진
사실도 진실도 휘발된다는 말은
슬픔, 무거운 슬픔의 발자국이어서
흰 눈썹을 가진 황금새처럼
푸른 눈썹을 올리고
때 지난 내 영수증 한쪽 한쪽
쪼아볼까
가장 깊숙한 곳을 콕콕 찍어볼까
휘발된 것은 없는지 살아있는 것은 있는지
스스로 죽어가는 만물은 다시 태어나는 자리를 품는다 영락없이
풍경 속 풍경은 리듬
낯선 풍경을 만나면 설렌다. 그 풍경 속에 잠들어 있는 또 하나의 풍경은 숨소리, 그 숨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슴이 뛴다. 새로운 풍경 안에서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관계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사물 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과 리듬과 빛나는 파동으로 또 다른 새로운 풍경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만나면서 쓰게 되는, 태어나는 시 한 편 한 편은 시인 자신이며 분신이다. 그러나 풍경의 숨소리에서 태어나는 나의 시가 나의 것이 아니고 나의 생각에 불과했음을 알아차릴 때는 절망한다. 그리고 시가 되지 않음을 인정한다. 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다시 붙들고 씨름하는 가여운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다. 거듭되는 그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슬픔을 안기도 하고 절망하면서 조금씩 성장하기도 한다.
햇살로 반죽한 빵을 식탁에 올리고 싶을 때 행복감을 느낀 적이 있다. 빵 냄새가 풍기는 순간의 따스함과 아늑함은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빵을 나누는 것, 밥을 나누는 것은 생명 나눔이며 사랑 나눔이니 어찌 만물조응萬物照應의 담론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있는가! 빵 속에 숨어 계시는 님을 만나면 사이와 사이의 즐거움을 기록할 수 있으며 모든 간격은 사라지기 마련이리라. 내 몸이 춤의 창고가 되어 음악의 창고가 되는 일은 살의 리듬을 되찾으려는, 부풀어 오르는 빵의 이야기인 줄도 모른다. 빵의 살 안에서 살 밖으로, 살 밖에서 살 안으로 드나들 수 있음은 묶인 것을 적시고 적신 것들을 다시 꺼내어 햇살에 내어놓을 수 있으니 얼마나 자유로워지는가! 어느 날 벌랏한지마을에 살고 있는 갈색 두건을 쓴 화가의 삶을 내 안에 초대하고 싶었다. 내어놓고 스며들며 살아가고 있는 화가의 삶이 눈부시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어릴 적 두렵고 무서워 섬뜩하기까지 했던 고양이들도 초대하고 싶었다. 즐거움으로 초대하는 삶이 이루어진다면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착각의 덫에 갇히게 되는, 진절머리 나게도 혼란한 세상에서 나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몸은 길이다. 몸의 길은 더운 길이며 씨앗의 길, 생명의 길이다. 내 몸은 스스로 물길을 내면서 의식을 체화體化하고 나의 사유와 느낌을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다. 한 줄 한 줄 태어나는 기쁨과 고통, 감당하기 어려운 진통의 리듬까지 흐르게 한다. 내 몸이 물길이며 숨길인 까닭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상상력은 우리들의 오관에 날카로운 침을 만들어 놓게 마련이다.’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기에 어느 때는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을 만나 위로받고 싶어 한다. 때로는 눈 부신 햇살 한 가닥을 손으로 움켜쥐고 하늘을 우러러본다. 풍경 속 이야기를 들으며 리듬을 찾는다. 그러하기에 시를 쓰는 시간은 자신에게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다. 어느 때는 허공에 뿌리를 내리고 어느 때는 땅속 깊이, 어느 때는 가슴 속에, 어느 때는 꿈길 위에 내리고 바람과 햇살에 내리기도 한다. 뿌리를 내리는 일은 내가 나와 소통하는 작업, 그러다가 영혼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날은 무척 행복하다.
굳은 어깨를 펴고 양팔을 벌린다. 오랜만에 펄펄 내리는 함박눈을 받아 안으니 흰 눈꽃 송이 꽃다발이다. 봄 냄새가 난다. 힘들어도 꽃은 곧 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봄이 오고 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꽃이 꼭 피어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삶을 열어가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