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어린 시절은 무척 가난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던중에 부도를 내서 집안이 급격하게 기울었기 때문이다. 빚쟁이들에게 얼마나 독촉을 당했던지 김택진의 아버지는 그 괴로움에 집을 가출까지 하게 된다. 김택진의 어머니는 행방불명된 남편을 찾기 위하여 갓난 아기인 김택진 사장을 엎고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 다녔다.
어머니가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은 곳은 낚시터였다. 아버지는 사업 실패후의 막대하게 쌓인 빚으로 인해 좌절과 고통에 떨고 있었고 그 고통으로 인하여 자살을 결심하고 낚시터에 갔다. 하지만 하늘이 도왔는지 물에 뛰어들기 직전 어머니와 마주치게 됐고 아버지는 어머니 등에 엎혀 있던 어린 아들을 보고 자살을 포기한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빚쟁이들을 찾아 나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모든 돈을 꼭 갚을 테니 그때까지 자신을 믿고 조금만 기달려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양말과 옷등을 팔았다. 무거운 짐들을 들고 산동네의 집들까지 일일이 방문해서 물건을 팔정도로 악착같이 일하였고 결국 빚을 조금씩 갚아 나갈 수 있었다.
집안의 가장이 집에 있질 못하고 전국 방방 곡곡을 쏘다니며 노점상을 하는 가난한 집안이였지만 그렇게라도 열심히 살아가는 아버지를 보는 아들 역시 철이 일찍들었다. 수학과 과학을 유난히 좋아했던 김택진은 아버지의 노력이 열심히 일하는거라면 자신의 노력은 열심히 수학 공부를 하는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중학교 시절에 이미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까지 마스터할 수 있었다.
중학교때 이미 고등학교 3학년 수학까지 모두 끝낸 김택진은 이제 취미를 기계로 돌리게 된다. 라디오키트를 구해와 기판을 보며 기계의 작동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더욱 고심했다. 이제 소년 김택진은 기계중 가장 고차원 기계라 할 수 있는 컴퓨터의 근본적인 작동원리를 알고 싶어했다. 컴퓨터란 원래 실리콘과 같은 반도체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런 고급 지식을 이해하려면 10대의 어린 독학만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그렇게 그는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1985년 한국 최고의 명문대학교인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김택진 사장은 하루라도 빨리 컴퓨터라는 기계의 원리를 마스터하고 싶어서 당시 컴퓨터의 메카 청계천 세운상가를 찾았다. 그는 20살때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컴퓨터에 관련된 소식과 최신기종 그리고 외국서적들을 눈으로 보고 책으로 읽으며 탐독하기 시작했다. 새벽이 온지도 모른체 책에 몰두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러다 새로운 작동 원리를 터득하게 되면 그 기쁨에 혼자 눈물을 펑펑 쏟기도 했다.
그는 이미 학점을 위한 전공 공부보단 자신의 지적욕구를 풀어주는 일에서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컴퓨터를 공부하다보니 그의 눈에 컴퓨터는 달라 보였다. 컴퓨터의 전원을 키고 컴퓨터가 켜지는 과정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파워 버튼을 누를때 메모리에 데이터가 저장되고 CPU가 데이터를 처리해 그래픽카드로 보내고 이를 모니터 화면으로 표시되는 모든 부팅 과정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작동원리와 기계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자 이젠 이 컴퓨터를 활용해서 뭔가 일을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겨우 21살때 이야기다.
원래 김택진의 꿈은 하드웨어를 제작하는 것이였는데 컴퓨터를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하드웨어 보다는 소프트웨어로 그의 관심이 옮겨갔고 결국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세계로 그렇게 입문하게 된다. 당시 서울대학교에는 SCSC라는 서울대 컴퓨터연구 동아리가 학생회관 2층에 있었다. 거기에는 컴퓨터에 미친 사람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그들은 아마추어 대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통신 기반의 전자 게시판 버들골 BBS를 만들어 낼정도였다.
그들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예술이라 생각했고 시인이 머릿속에 있는 여러 이미지들을 글을 통해 표현해내듯이 컴퓨터로 구현했다. 화가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컴퓨터 모니터 화면속에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빠른 속도로 동아리에 적응을 하고 김택진이 두각을 나타내자 당시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다니던 이찬진이 김택진을 워드프로세서 개발을 함께 하자고 하였다.
이때 김택진은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하기로 마음먹고 이찬진과 함께 개발을 진두지휘하였다. 그런데 개발 과정에서 그래픽 처리부분을 두고 난항을 거듭하였고 이때 이찬진은 해답을 김택진에게 찾았다. 김택진은 원리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그가 사용하는 프로그래밍 언어는 기계어인 어셈블리였다 C언어나 베이직처럼 개발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들은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기계어로 변환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어셈블러는 기계어 그 자체이기 때문에 따로 변환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는 관계로 빠른 처리속도를 자랑한다. 특히 그래픽 처리 부분은 컴퓨터에서 가장 속도를 잡아 먹기 때문에 어셈블리로 그래픽 처리 부분을 개발하면 많은 부분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워드프로세서가 바로 아래아 한글이란 이름으로 세상 밖으로 나왔고 이 프로그램은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효시로 불리울만큼 사회전반에 엄청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아래아 한글을 쓰기 위해서 컴퓨터를 구매할 정도로 킬러 애플리케이션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아래아 한글이 출시 후 선풍적인 인기로 어린 대학생들이 큰 돈을 만지게 되자 바로 회사를 세우게 된다. 바로 그 회사가 한글과 컴퓨터이다. 당시 상당수 SCSC 동아리 회원들이 회사 중역으로 스카웃 됐다. 하지만 김택진은 이찬진의 스카웃 제의를 거부했다. 당시 김택진의 꿈은 공과대학 교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만해도 운영체제 환경에서는 한글이 지원되지 않았다. 한국은 이때만 해도 그렇게 잘살지 않는 나라였고 컴퓨터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였기에 외국에 컴퓨터 업체들이 한국을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유저들은 고가의 한글지원카드를 구입해야만 했다. 이때 김택진은 생각했다. 컴퓨터에서 자유롭게 한글을 쓸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자는것이다. 이런 사명감으로 연구에 돌입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제품이 한메 한글이었다. 나오자마자 판매량 1위를 달렸다. 도스와 윈도우 같은 운영체제뿐만 아니라 각종 응용프로그램에서 자유롭게 한글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 한메한글의 등장은 그야말로 아래아 한글만큼이나 컴퓨터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줬다.
이후 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박사과정으로 진학하려던 김택진에게 현대전자가 스카웃 제의를 한다. 당시 김택진은 병역이 미필인 상태였고 현대전자가 제시한 혜택에는 병역특례가 있었고 그 장소가 현대전자 미국 연구소였다. 미필이였던 택진은 공학 선진국 특히 컴퓨터 산업의 메카 미국에서 병역특례를 받으며 연구할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아래아 한글-한메한글등 컴퓨터 업계의 큰 충격을 두번이나 안겨준 20대 어린 대학생들 현대전자가 오래전부터 지켜본 결과에서 나온 뜻 밖에 행운이였다. 그렇게 그는 1991년 미국 보스턴 현대 전자 연구소에 도착하게 된다.
그는 여기에서 인터넷의 세계에 푹빠져 버린다. 전세계의 컴퓨터를 서로 연결시켜주는 인터넷환경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통신 표준 규격인 TCP/IP 기술을 마스터해야만 했다. 그는 1년 6개월동안 연구에 매진한 끝에 한국 최초의 인터넷 기반 포탈서비스 아미넷(지금의 신비로)를 개발한다. 현대 전자에서는 김택진이 병역특례 요원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승진을 시켰다. 고 정주영회장이 주목하는 젊은이라며 공공연하게 떠들기까지 했다. 이런 뛰어난 능력으로 그는 병역특례 요원 신분으로 대기업의 팀장까지 단기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사건은 얼마 안가 터졌다. 현대그룹 내부에서 김택진이 개발한 아미넷을 두고 분열이 일어난거다. 애초에 계획대로라면 아미넷서비스를 현대전자에서 해야 하는데 현대정보통신사업부에서 그것을 뺏으려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현대그룹내 김택진의 개발품을 두고 주도권 싸움이 일어나자 총 개발 책임자였던 김택진의 상황은 매우 난감했다. 결국 이런 싸움으로 인해 1년 넘게 사업이 그룹내부에서 표류됐고 발전은 없이 계속 끝나지 않을 주도권 싸움만 터지자 염증을 느낀 김택진은 차라리 자기가 회사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품고 사표를 내게 된다.
김택진이 이때 창업한 회사가 바로 오늘날 게임 산업의 효시라 불리는 NC소프트이다. NC소프트는 Next Company의 약자다. 이때 컴퓨터 업계에선 현대전자의 김택진이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는 소문이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가 회사를 세우자 마자 대기업들의 제작 의뢰가 넘치기 시작했다. 결국 그가 회사를 창업하고 처음 한 일은 SK로부터 인터넷 기반의 PC통신 서비스인 넷츠로 프로그램 제작이였다. 여기서 그는 또 국내 최초로 100% 순수 인터넷 기반 넷츠고를 성공적으로 구축하면서 역시 김택진이다라는 말을 컴퓨터 업계에서 떨치게 된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김택진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예측을 철저하게 벗어나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바로 게임이란 분야에 도전을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통신,언어 SW에선 김택진이 있다면 당시 게임 SW에선 송재경이란 사람이 있었다. 당시 송재경은 넥슨을 다니다 아이네트란 허진호박사가 이끄는 회사에 몸을 담고 있었다. 김택진은 송재경을 아이네트에서 NC소프트로 빼오고 싶었지만 아이네트의 허진호 박사역시 서울대 공과대 출신으로 거기다 김택진과 사적인 인연이 있었다. 결국 업계에서 선배의 직원을 빼왔다는 소리를 우려한 김택진은 송재경의 영입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때 송재경은 아이네트에서 게임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었는데 이 게임이 바로 '리니지'다. 그런데 1997년 일이 터졌다 바로 IMF다. 이 IMF가 터지면서 아이네트는 구조조정차원에서 게임개발팀을 전격적으로 취소시킨다. 이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송재경뒤에는 NC소프트에 김택진이 있었다. 김택진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에 송재경에게 찾아가 게임 프로젝트 리니지를 그대로 NC에서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들을 받아들인다. 지금이야 리니지가 성공한 게임으로 탁월한 선택이였지만 당시 분위기상 이 게임이 얼마나 성공할지도 미지수였을 뿐만 아니라 작은 벤처기업이 큰 제작비를 감당한다는 무모한 도전이다 과감한 결단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렇게 리니지는 무모한 사업가와 과감한 개발자의 도전으로 제작됐다 원래는 PC통신 기반이였으나 아이네트에서 NC소프트로 넘어올때 김택진이 송재경에게 리니지 프로젝트를 수정하기를 요구한다 바로 모든 사람들이 편하게 즐길수 있도록 인터넷기반으로 만들자고 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현실로 만드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리니지는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당시 한국 게임들은 일본 게임의 영향을 많이 받아 대부분 3등신에 아기자기한 만화풍에 그래픽이었던데 반해 리니지는 8등신에 사실적이고 실감나는 그래픽이었다. 결국 리니지는 초기부터 큰 성공을 이루었다.
김택진
1967년 3월 14일생
학력사항
1989년 2월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 학사
1991년 2월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 석사
경력사항
1985~9년 - 서울대학교 컴퓨터 연구동아리 SCSC 활동
1989년 - 아래아한글 공동개발
1989년 - 한메타자교사,한메한글 개발
1992년 - 현대전자 미국 보스턴 R&D 파견 근무 (병역특례)
1995년 - 현대전자, 국내 최초의 인터넷 온라인 서비스 아미넷 개발
1997년 - NC소프트 창립 (넥스트 컴퍼니)
현재 NC 다이노스 구단주, NC소프트 대표이사-CEO
수상 내역
2001년 - 비즈니스위크 선정 아시아의 스타
2001년 - The Far Eastern Economic Review 선정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
2001년 - 문화관광부 2001 문화산업 발전 기여 표창 수상
2002년 - 세계경제포럼(WEF) 선정 아시아 차세대 리더 18人
2002년 - 한국과학문화재단 선정 닮고싶은 과학기술인 10人
2002년 - 비즈니스위크 선정 세계 e비즈 영향력 있는 25人
2003년 -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주최 기술경영인상 최고경영자상
2007년 - 대한민국문화콘텐츠 해외진출유공자 포상 대통령표창
2009년 - 매경이코노미 선정 올해의 CEO
2009년 - 제3회 언스트앤영 엔터테인먼트 최우수 기업가상
길어도 심심하면 읽어봐라 단순한 게임개발자가 아니다 ㅅㅂ ㅅㄷㄷㄷㄷㄷ
첫댓글 될놈될이네 ㅠㅠ
그래봤자 결혼한거 보면 ㅉㅉ
김택진: 능력없는 사람이 학교에 남아서 되는게 '교수'다 (설공만 해당)
김택진: 가장 재미있는 게임은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