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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5. 묵상글 ( 사순 제4주일. - 내가 혹 눈뜬장님은 아닐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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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5. 사순 제4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3.15 02:41
- 내가 혹 눈뜬장님은 아닐까?
오늘 에페소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오늘 에페소서의 태생 소경이 바로 이런 존재였습니다.
중도 장애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기에 그것이 어둠인 줄도 몰랐고,
그래서 공관복음의 다른 소경들처럼 절망도 없었고,
벗어나고 싶은 갈망도 없었으며 그래서 주님께 보게 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순시기의 요한복음은 이런 인물들을 계속 들려줍니다.
지난주에는 우물가의 여인을 소개했는데 사랑의 갈증이 있는 여인에게,
다섯 남자와 결혼했지만 만족할 수 없었던 여인에게 주님은 청하지 않았는데도
다가가시어 그의 갈증이 영적인 갈증이란 것을 일깨워 주신 얘기를 들려줬지요.
오늘도 주님께서는 보게 해달라고 청하지 않는 그에게 다가가시고,
또 묻지도 않고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인지도 모르고 청해도 되는 건지도 몰라
우리가 청하지 않았는데도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에게도 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한때 어둠이었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기에
이제는 에페소 말씀처럼 ‘주님 안에 있는 빛’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다른 사람들은 주님의 빛 안에 있지 않고,
그래서 육신의 눈이 멀쩡해도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주님의 빛을 받지 않으면 아무리 눈이 멀쩡해도
또 아무리 기를 쓰고 보려 해도 볼 수 없습니다.
빛이 한줄기도 없다는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아무리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나는 보지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빛이 있어야 보이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눈만 뜨고 있으면 당연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빛이 있어야 보이는 것이니 사실은 빛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복음에 그대로 적용하면 빛이신 주님께서
볼 수 없었던 소경을 볼 수 있게 해주신 것이고,
반대로 사람들이 볼 수 없었던 것은 빛이신 주님 없이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 없이 보려고 했던 것은
한 편으로는 주님을 빛이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주님 없이도 잘 본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이렇게 결론 지으십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말에 ‘눈뜬장님’이라는 말이 있지요.
진정 그들이야말로 영적으로 눈뜬장님이고,
육의 눈이 멀쩡한 것이 영의 눈을 멀게 한 셈이며,
그것이 그들의 불행인데 우리도 그런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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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5. 사순 제4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 이야기를 재구성하기! - 열 번째 주간 실천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가 닳아 없앤 것을, 하느님께서는 새롭게 빚어 주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죄와 마주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이야기를 재구성하기!
2026년 3월 14일 토요일
우리가 닳아 없앤 것을, 하느님께서는 새롭게 빚어 주십니다. 우리가 찢어버린 것을, 주님께서는 구속(救贖)해 주십니다(redeems). 우리가 상처 낸 것을, 하느님께서는 치유해 주십니다.
- 로리 브록(Laurie Brock), 거룩한 기억(Souvenirs of the Holy)
로리 브록은 하느님께서 우리 삶의 "자투리 조각들"을 모아, 그것들을 다시 엮어 하나의 아름답고 온전한 전체로 빚어 주신다는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모두 삶 속에서 고통과 위기, 재난으로 깊이 닳고 찢겨진 조각들과 파편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하느님의 뜻으로 잘못 해석하곤 합니다. 어떤 신학은 하느님께서 직접 깨뜨리고 찢으심으로써 그분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삶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지만, 삶은 찢김과 봉합, 뿌림과 거둠, 상처와 치유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무언가가 찢기고 부서지는 데에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깨뜨리는 데 이미 충분히 능숙합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하느님의 마음을 산산이 부수는 일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개인적·공동체적 선택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며 그 결과를 끝없이 완화해 주시는 대신, 창조 안에 "누비고 잇는 지혜"를 심어 주십니다. 우리는 삶의 파편들을 다시 이어 붙이고 새롭게 만드는 데 서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누비는 솜씨"를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존재와 영혼의 어떤 부분도 당신의 구속(救贖)에서 벗어나거나 다른 방식으로 쓰일 수 없다고 여기지 않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의 잘못은 하느님의 자비의 실로 이어 붙여지고, 젊은 시절 입었었지만 이제는 맞지 않는 모습들은 변형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 모든 조각과 파편들을 새롭고 다시 빚어지고, 구속된 하나의 전체로 꿰매어 주는 틀을 마련해 줍니다.
우리가 버리거나 더 이상 돌보지 않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존재의 이 "자투리 조각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성스러운 공간 안에 머물러 계시며, 우리가 무가치하다고 여겼던 파편들로 하느님께서 지어내시는 "누비이불"을 바라볼 수 있기를 갈망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기를 거쳐 여성들이 천 조각을 만지듯, 우리의 파편들을 어루만지시며 작은 무늬 속에 깃든 아름다움을 알아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파편들을 새롭고, 유용하며, 때로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것으로 다시 빚어 주십니다.
References
Laurie M. Brock, Souvenirs of the Holy: Encountering God Through Everyday Objects (Broadleaf Books, 2025), 180–181.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alint Mendlik,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과녁의 중심을 놓친 화살은 우리에게 죄가 본질이 아님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참된 목표에서 벗어날 수 있지만, 여전히 다음 번에는 중심을 겨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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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한때는 길을 잃었으나 이제는 찾았고 / 눈이 멀었으나 이제는 보게 되었네."
우리의 모든 감각이 다 그렇겠지만,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그것이 은총인 줄 잘 모르다가 눈이 아프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침침해지게 될 때, 혹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에 걸려 넘어질 때에야 비로소 그 은총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본다는 것은 우리의 세계를 넓혀 주는 역할을 합니다. 외부의 세상을 보게 해 줄 뿐 아니라 인간관계의 폭을 넓혀 주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을 때, 그분은 그의 세계를 모든 차원에서 넓혀 주셨습니다. 단순히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적으로도 말입니다.
요한 복음은 빛과 어둠의 이미지를 가득 담고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단순하게 쓰일 수도 있지만, 요한 복음 저자는 그것을 복잡하고 역설적으로 사용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은 육체적 시력을 얻었을 뿐 아니라 영적 시력도 얻게 됩니다. 반면 스스로 영적 시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던 바리사이들은 점점 더 영적으로 눈멀어 갑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라는 성가를 작사한 존 뉴턴(John Neuton: 1725-1807)은 돈에 눈이 멀어 노예상으로 돈을 벌다가 하느님 은총에 의해 서서히 영의 눈을 뜨게 되어 회심의 삶을 살게 되면서 이 가사를 작사했다고 합니다. 그는이렇게 고백합니다. "한때는 길을 잃었으나 이제는 찾았고 / 눈이 멀었으나 이제는 보게 되었네." 그러나 우리는 이 고백이 너무 단순하고 단번에 이루어진 하나의 사건이라는 뉘앙스를 느낍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리고 과연 우리 안에 아직도 어둠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실상 우리는 보면서도 보지 못합니다. 마르코 복음 9장 24절에서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외칩니다.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사도 바오로의 회심 이야기(사도행전 9장)에서도 같은 역설이 드러납니다. 그는 즉시 환호하며 "이제 보네!"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것도 잠깐이 아니라 사흘 동안 완전히 보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사도는 어린아이처럼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낯선 이의 도움을 받아서야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곧바로 "이제 나는 봅니다!" 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훗날에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기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눈부신 빛이 아니라 겸손히 걸어갈 수 있도록 비추어 주는 희미한 빛입니다. 니사의 성 대 그레고리오 주교(332-395)는 요한이 "빛나는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고 말하며,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요한 1,18)고 했습니다. 그는 "빛나는 어둠", "지혜로운 어리석음", "절제된 취함", "움직이지 않는 움직임", "살아 있는 죽음"과 같은 역설적 표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복음 자체가 역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가진 빛보다 더 많은 빛을 주장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그것은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빛을 값싸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요한 9,41)
따라서 우리는 신앙을 말할 때 언제나 겸손과 존중심을 가지고 말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처럼, 우리도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무리에서 쫓겨나야 할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바오로처럼 어린아이처럼 다른 이들의 손에 이끌려 겸손한 길을 걸어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광야의 고독 속으로 내몰릴 때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우리 안의 거만한 빛을 없애기 위한 과정일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어둠을 꿰뚫으실 수 있습니다. "암흑인 듯 광명인 듯 어둠도 당신께는 어둡지 않고 밤도 낮처럼 빛납니다." (시편 139,12).
오늘 복음의 태생 소경이 자신을 심문하는 사람들 앞에 서 있는 모습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앞에 서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 증언은 때로 배척을 감수해야 하는 용기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또 감수해야 할 것은 이렇게 증언할 수 있게 되는 깨달음이 서서히 우리에게 온다는 사실입니다.
이 눈먼 사람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은 단 한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점차로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예수님이라는 분"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다음 심문에서는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 고백합니다. 마침내, 점점 더 깊은 통찰로 인해 배척당한 후에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며 경배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는 것이야말로 참된 "깨달음(Enlightenment)"입니다. 그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창조의 참된 이야기를 깨닫게 됩니다. 눈앞에 있는 것을 올바로 보고,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너무나 분명해야 하지만 다른 이들이 놓치는 것, 바로 하느님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어떤 모습을 볼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면, 하느님의 충만한 계시를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보는 것이며, 다른 어떤 길로도 알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를 아는 것입니다. 세례의 부르심은 세상의 눈멀음에서 치유를 받으라는 초대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입니까? 왜 수많은 더 나은 사람들이 그 기회를 갖지 못하는데, 내가 주님을 알도록 선택받았을까요? 어쩌면 '내'가 그분을 더 절실히 필요로 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눈뜸의 체험이 없다면, "나"의 눈멀음은 바리사이들보다 더 심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무엘서에서, 이사이의 잘생기고 힘센 장남들이 아니라, 가장 어린 막내 다윗이 선택됩니다. 왕이 될 것 같지 않은 이가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종교 전문가들에게 참된 시력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릅니다. '나'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 속의 태생 소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첫째, 그는 세상 앞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그분을 위해 변론하고, 그분을 위해 고난을 받습니다. 곧,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다른 이들이 자신의 눈멀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아는 눈뜸의 체험으로 인도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둘째,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그분께 경배합니다.
그 치유받은 사람은 단지 믿음을 다른 이들에게 말했을 뿐 아니라, 직접 그리스도께 고백하고 경배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감사와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자신이 치유받았음을 알고, 누가 그 일을 하셨는지를 압니다. 그리고 그 분명한 진리를 두려움 없이 선포합니다.
증언과 경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입니다. "나" 또한 부당하게나마 하느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눈멀음에서 치유받은 사람으로서, 감사의 용기에 이끌려 증언하고 예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님을 우리는 새겨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과정 중의 하나일 수 있다는 사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뚜렷하게 감지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우리에 대한 크나큰 사랑 때문에 우리를 위해 당신의 일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마음에 새기고자 시시각각 노력(수양)한다면 우리도 분명히 언젠가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때는 길을 잃었으나 이제는 찾았고 / 눈이 멀었으나 이제는 보게 되었네."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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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5. 사순 제4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사순 4 주일이며, 기쁨주일 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참된 기쁨이 어디로부터 오는 지를 밝혀줍니다. 곧 참된 기쁨은 ‘빛을 보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또한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을 말해주기에, 기쁨은 ‘빛이신 주님을 아는 데서 온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우리는 모두 눈을 지니고 있고, 눈으로 타인과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바라본다고 해서 모두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당달봉사’가 있는가 하면, 눈을 감고도 볼 수 있는 ‘심미안’이 있고, 보아도 보여 지는 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보는 대로만 고집하는 ‘편견’이 있습니다.
<제1독서>는 눈이 빛나는 다윗이 선별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은 말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제2독서>는 빛의 자녀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입니다.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말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리라.”(에페 5,8-14)
그리고 <복음>은 태생소경이 눈을 뜨고 빛을 보는 이야기 입니다. 제자들은 태생소경이 보지 못하는 것이 자신의 죄든, 부모의 죄든, 죄 탓인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그에게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이다.”(요한 9,3)
그렇습니다. 그에게서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소경인 그는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류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곧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대변해 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눈을 뜨게 되는가? 어떻게 그에게 빛이 생기게 되는가?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침을 묻힌 진흙을 눈에 발라 주었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요한 9,7)하고 하셨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도 못했지만, 말씀에 순명하여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었던 것입니다. 그의 살이 예수님의 신성과 결합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도유된 것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친히 소경의 눈을 만지시고, 그의 가슴 속에 당신의 빛을 부어주시어 그가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는 남들처럼 볼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도 보게 되었습니다.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혹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도 아직 눈 먼 존재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리 가정, 우리 공동체를 주님을 계시하는 장소로 알아 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을 떠난 저 높은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의 신학자라 불리는 보나벤뚜라는 인간에게는 3중의 눈이 있음을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의 눈과 지성의 눈과 관조의 눈이 그것이다.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세계와 그 안에 있는 것을 보고, 정신의 눈으로써 영혼과 그 안에 있는 것을 보며, 관조의 눈으로써 하느님과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본다. 그리하여 인간은 육신의 눈으로써 인간 밖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지성의 눈으로써 인간 안에 있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관조의 눈으로써 인간 위의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이’에게 말합니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요한 9,37)
분명, 우리는 이미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면, 완고하여 보고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은 어둠을 보고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서나 타인에게서 어둠이 보인다면, 얼른 그 어둠을 비추고 있는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을 향하여 있어야 할 일입니다. 세상과 모든 이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일, 바로 이것이 “기쁨주일”인 오늘 우리가 누리는 참된 기쁨일 것입니다. 빛이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깊이 들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요한 9,37)
주님!
분명, 이미 당신을 보았습니다.
보고도 아직 보지 못함은 완고하여 인정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오히려 어둠을 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여전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항상 저를 향하여 계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주님! 빛을 보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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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5. 사순 제4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랜드마크(Land Mark)’라는 말이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는 에펠탑, 중국 북경은 만리장성, 미국 뉴욕은 자유의 여신상을 떠올립니다. 저는 미국 텍사스 달라스의 랜드마크를 말하라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을 떠올리고 싶습니다. 나라에 랜드마크가 있듯이, 세계의 미술관에도 그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는 ‘모나리자’가 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는 ‘돌아온 탕자’가 있으며, 뉴욕현대미술관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작품을 통해 사순 제4주일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고흐의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고흐 역시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신학교 입학에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신앙의 열정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특별전도사’의 자격으로 혹독한 탄광촌으로 자원했습니다. 고흐는 깨끗한 사택을 가난한 이들에게 내주고, 자신은 탄을 캐다 다친 광부들이 머무는 숙소에서 지냈습니다. 월급은 모아 가난한 아이들에게 빵을 사주었고, 광부들과 함께 지하 깊은 곳으로 내려가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탄광촌에 예수님이 오셨다.” 그러나 얼마 뒤, 그를 파견했던 교회는 뜻밖의 결정을 내립니다. 고흐를 파면하였습니다. 전도사의 옷차림이 남루하고, 얼굴이 더럽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먹고 지낸다는 이유로 ‘전도사의 품위’를 실추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흐는 탄광촌을 떠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화려한 교회 건물 안에만 계신 분이라면, 나는 그런 예수님은 믿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신앙을 그림으로 전하기로 결심합니다.
고흐의 그림 속에는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는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에 나오는 농부들은 초라하지만, 정직한 노동으로 하루를 살아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식탁은 제대와는 달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가장 깨끗한 자리가 아니라 가장 진실한 자리에 계십니다. 「성경책과 에밀 졸라」에서 펼쳐진 성경의 말씀은 이사야 예언서 53장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그는 멸시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고통을 아는 사람이었다.” 고흐는 말씀을 덮지 않았고, 현실을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말씀과 고통의 현실을 나란히 두며, 말씀이 인간의 상처 속으로 내려와야 함을 고백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서는 농부보다 태양이 더 크게 그려집니다. 씨를 뿌리는 것은 인간의 몫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 하늘에는 별이 소용돌이치듯 빛나지만, 마을 한가운데 있는 교회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습니다. 고흐는 일부러 교회를 어둠 속에 남겨 둡니다. 하느님의 빛이 교회 건물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스럽고 불안한 밤하늘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고백입니다. 고흐의 삶을 노래한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노래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당신이 살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혼탁했다.” 고흐가 너무 약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의 빛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의 말씀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다윗은 형들 가운데서 가장 작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는 죄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기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본다고 하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사순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복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가! 이 말씀은 저 자신에게도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교회의 질서와 품위를 지키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하느님께서 먼저 바라보시는 마음과 고통을 충분히 보고 있는가! 사람들의 시선에 맞는 사제가 되려 하느라,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용기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고흐를 파면했던 교회의 시선이 혹시 오늘의 내 안에도 남아 있지는 않은지, 장미 주일의 기쁨 속에서 조용히 저 자신을 성찰해 봅니다. 교회에 불이 꺼진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이미 밤하늘에 별을 켜 두셨습니다. 오늘 장미 주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둠 속에서도 기뻐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주님, 세상의 눈이 아니라 주님의 눈으로 보게 하소서. 어둠 속에서도 이미 빛을 켜 두신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우리들 또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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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5. 사순 제4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분의 따뜻한 손길에 우리 인생이 활짝 꽃피어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는 치유과정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행동은 꽤 색다른 것이어서 의구심을 품게 합니다. 그분께서는 땅에 침을 뱉습니다. 진흙으로 갭니다. 그 지저분한 것을 눈 먼 사람의 눈에 바릅니다. 눈먼 사람이나 그 부모 입장에서 보면 꽤 불쾌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그냥 말씀 한마디로 간단히 고쳐주시지. 그도 아니라면 깨끗한 물이나 기름으로 눈을 닦아주면서 치유시켜 주면 좀 좋아? 그렇게 하면 모양새도 좋을 텐데, 왜 하필 침이냐구? 왜 더럽게 침을 흙에 개어서 눈에 바르느냐 말야?’
눈먼 사람 입장에서도 난감했을 것입니다. 침에 갠 진흙을 눈에 바르니, 얼마나 느낌이 답답했을까요? 눈도 따가웠을 것입니다. ‘도대체 뭘 하시려고 그러시나? 내 눈 갖고 장난치려고 그러시나?’
그렇게라도 하고 즉시 눈이 떠졌으면 아무 군소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 난감하게 해놓고 그게 다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시는 말씀은 눈먼 사람의 속을 더 긁어놓았습니다. “실로암 연못으로 가서 씻어라.”
그간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치유과정을 보면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사람들은 그분의 옷깃만 만져도 병이 낫곤 했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마디로 즉석에서 오그라든 손이 펴지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으면 죽었던 사람이 일어서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여간 복잡하지 않습니다. 지저분하게 침으로 갠 흙을 바르셨습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근처 아무 연못이나 찾아가서 씻으라는 것이 아니라 굳이 실로암 연못을 찾아가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럴경우 자존심이 상해서, ‘이게 도대체 뭐야?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거야 뭐야?’라고 소리 지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눈먼 사람은 예수님의 치유과정에 군소리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능동적이고 협조적입니다. 그 결과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입습니다.
오늘 눈먼 사람이 겪은 축복의 기적, 그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침과 진흙으로 제조하신 기적의 고약 때문일까요? 결코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비위생적인 고약으로 인해 병이 더 악화되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침과 진흙으로 만든 고약을 바르는 행위는 구약시대 예언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위가 상징하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가지 해석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재창조’, ‘말씀의 강생’, ‘인간의 자연생활에 대한 은총의 주입’과도 같은 해석. 여기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 그래도 보이지 않는 눈에 진흙을 바름으로서 그 눈을 더 확실하게 막아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눈에 진흙을 바른 것은 다른 생각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바라보지 말고,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예수님 자신만을 따르라는 초청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을 향한 전적인 믿음, 그분께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 그분 외 부차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차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오랜 세월 눈 못 뜬 상태로 어둠 속에, 죄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생명과 희망의 창을 하나 열어놓으셨습니다. 그 창으로 하느님 사랑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둠뿐이던 우리 인생이었으나 빛이신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우리 인생이 활짝 꽃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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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5. 사순 제4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9,1–41
예수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먼저 원인을 묻습니다. “누가 죄를 지어서?”
그러나 예수님은 원인 규명보다 먼저, 그에게 빛을 주십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눈이 뜨이는 기적”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사건입니다.
보지 못하던 이가 보게 되지만,
오히려 “본다”고 확신하던 이들이 더 깊은 어둠에 머뭅니다.
초대 교부 성 예로니모는 복음을 읽을 때
말씀의 문자를 넘어, 그 안에 숨은 생명의 뜻을 보라고 권합니다.
그는 “말씀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 하며,
복음이 우리를 “정보”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시선을 바꾸어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는 빛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 나는 누군가를 만날 때, 먼저 “왜 저럴까”를 묻고 있지는 않은가?
• 혹은 하느님을 말하면서도, 정작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은 눈먼 이를 고치시며 동시에 우리를 고치십니다.
상처를 분석하는 눈이 아니라,
존엄을 알아보는 눈으로.
오늘 성체를 모시는 우리는
빛을 “받는 사람”에서 멈추지 않고,
세상 안에 작은 빛이 되어 존엄을 지키는 사람으로 파견됩니다.
주님,
제가 원인을 따지느라
당신이 이미 시작하신 치유를 놓치지 않게 하소서.
사람을 판단하는 눈이 아니라
존엄을 알아보는 눈을 주소서.
성체로 제 안에 오신 당신의 빛이
오늘 제 말과 선택 속에서
작은 등불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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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5. 사순 제4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눈이 침침하고 사물이 흐르게 보일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는 분의 권유로 눈 검사를 받았고, 검사 결과 백내장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이내 백내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잘 보이지 않아 안경을 쓰고 살아왔기에 눈의 소중함을 잘 압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소경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었고, 그런 상태로 태어났기에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없었으며 단지 그러려니 하면서 자신의 보지 못함을 받아들이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도 없었고 주님께 다가가서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먼저 눈먼 이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9,2)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당대의 모든 사람에게는 헤어나지 못한 그릇된 고정 관념, 곧 죄의 인과응보를 믿고 있었습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지금 겪고 있는 육체적인 질병은 바로 본인 혹은 가족들의 죄의 결과인 벌이다.’고 굳게 믿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태중 소경과 그의 부모 그리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태중 소경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영적인 측면에서 ‘눈뜬장님’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삼아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9,3)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먼저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치유해 주십니다. 이로써 예수님을 통해서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시어” (루4,18) 여기 사람들 가운데 당신이 함께 계시며 일하심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먼 이의 치유는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9,6)라고 명하심으로 완결하십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의 일반적인 치유 방법이었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행동하신 것이지만, 이 모든 일은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하심이고 행하심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신 구원의 행위였습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당신 또한 눈먼 이를 치유하심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신 분’으로 소개하는데 파견되신 분이 눈먼 이에게 ‘실로암’(=‘파견된 이’라는 뜻)에 가서 물로 씻음으로 앞을 보게 되었다는 의미는 바로 당신이 이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9,5)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로써 지금껏 눈이 멀어 마치 잠자는 상태에 있었던 그를 깨어나게 하고 죽음과 같은 어둠에서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에5,14참조)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태중 소경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에5,8)라고 역설하시면서 스스로 보고 왔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제대로 보고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빛인 주님으로 말미암아 어둠의 자식에서 빛의 자녀가 되었음을 환기시키며,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5,8)라고 분발을 촉구합니다. 하지만 태중 소경의 눈뜬 날이 안식일이었고, 안식일에 진흙을 만지는 행위는 안식일 법을 어긴 행위였었기에 바리사이들에겐 충격이었고 혼란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9,16참조)라는 의문을 가진 채 진상을 조사한답시고 눈뜬 이와 그의 부모를 불러 추궁하고 예수님에 관한 생각을 바꾸도록 강요하였습니다. 하지만 눈뜬 이는 예수님을 “예언자이며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다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9,17.33)하고 당당하게 고백합니다. 이처럼 때론 자기 안에 갇혀 살아왔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은 늘 자기식대로 보고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기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단죄하고 심판하듯이 그 눈뜬 이를 질책하고 밖으로 내쫓아 버립니다. 정작 치유가 필요한 부류는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보고도 보지 못하는 눈뜬장님이었던 것입니다.
눈 뜬 이는 비록 바리사이파 사람들로부터 내쫓김을 당했지만,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자, 그에게 “너는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9,35)라고 묻자, 그는 “선생님,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제가 그분을 믿을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9,36)라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굳건한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다.”(9,37) 고 말씀하시자, 이내 그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9,38)하고 하며 예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로써 그가 단지 육안肉眼만을 뜨게 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 영안靈眼까지 뜨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역시도 단지 육적인 눈뜸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주님으로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의 눈뜸을 통해서 ‘빛의 자녀로 온전히 새롭게 거듭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태중 소경의 치유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듣는 모든 이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9,39)라는 말씀 안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지 못하는 이란 바로 치유 받은 태중 소경이며,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부류는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런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우리도 눈먼 자라는 말은 아니겠지요?”(9,40)라고 항변하자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에게 직설적으로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라고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있다.”(9,40~41)라고 말씀하심으로 이미 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만 아니라 우리 역시도 육적으로 볼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자부하지만 그릇되게, 왜곡되게 봄으로써 늘 빛이 아닌 어둠 가운데 있기에 여기 우리 가운데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당신과 당신이 하신 일을 알아볼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눈 뜬 이를 보게 하는 것과 모든 치유는 단지 치유만이 아니라 치유를 통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질병-악-죄로 고통받고 있는 당신 자녀들에 대한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여기 함께 계심을 그리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심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강생의 신비를 통하여, 어둠 속에서 살던 인류에게 신앙의 빛을 주시고, 옛 죄의 종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재생의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나이다. 아멘』 (감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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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5. 사순 제4주일. 키엣 대주교님.
빛과 어둠의 묵상
일반적으로 음양의 개념에서 어둠은 죽음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둠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하고, 사람이 태어나면 “세상에 나왔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빛을 보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영적인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둠 속을 걷는다는 것은 결국 멸망을 향해 가는 길을 의미하며, 빛을 향해 걸어간다는 것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의미합니다. 어둠은 인간을 쇠퇴하게 하지만, 빛은 인간을 살게 합니다.
육체의 빛을 넘어 믿음의 빛으로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은 주님께서 진흙을 눈에 바르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밝히셨을 때 그는 즉시 믿었습니다.
그는 회당과 공동체 앞에서 주님을 증언하였고, 사람들 앞에서 엎드려 주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는 단지 눈을 뜨고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생명을 주는 빛, 사랑으로 가득 찬 따뜻한 빛, 그리고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기쁨의 빛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육체의 치유는 단지 눈을 뜨게 하는 기적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영혼이 치유되었음을 보여주는 깊은 표징이었습니다.
어둠의 세력과의 싸움
그러나 세상에는 여전히 어둠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공격하며, 때로는 위협과 두려움으로 마음을 흔들어 빛을 따르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방해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실 때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 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십시오.” (에페소서 5,8-11)
주님께서 이끄시는 길
주님의 빛을 따라가는 여정은 시편의 말씀 안에서도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시편 23,1.4)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결국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시편 23,6)
사순 시기는 이미 절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사순 시기의 삶이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금식과 절제, 그리고 기도는 죽음으로 이끄는 어둠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영적인 길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어둠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유혹하고 압박하며, 때로는 주님의 말씀을 포기하도록 우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세상은 성공과 명예, 부와 쾌락을 삶의 기준으로 내세우며 우리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 삶에 빛을 밝혀 주실 것입니다.
때로는 이 길이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고난의 길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언제나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는 것을.
주님 말씀의 빛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빛과 생명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행복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지금 빛 속을 걷고 있습니까? 아니면 어둠 속을 걷고 있습니까?
내 삶 속에서 나를 어둠으로 이끄는 생각이나 습관은 무엇인지 조용히 돌아봅시다.
2.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던 것처럼,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신뢰하며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지 생각해 봅시다.
3. 세상의 유혹과 압박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성공과 명예, 부와 쾌락이 나의 기준이 되고 있지는 않은 지 묵상해 봅시다.
4. 주님의 빛이 내 삶을 비춘다면, 지금 내가 변화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나를 어떤 새로운 길로 이끌고 계신 지 마음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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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5. 사순 제4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당신은 운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자기는 ‘뽑기’에 단 한 번도 당첨된 적이 없고, 또 자기가 응원하는 팀은 반드시 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기처럼 운이 없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십니까? 운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말하면 진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실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신문을 나눠주고는 이 신문안에 사진이 몇 장 들어 있는지를 세어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신문안의 사진 중 한 장에 이런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 사진을 진행자에게 가져다주면 상금을 받습니다.”
이 글자를 본 사람은 곧바로 진행자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진행자에게 달려간 이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전에 운이 좋은가, 운이 좋지 않은가를 물어봤는데, 글자를 본 사람은 모두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운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주위를 잘 살피는 사람이었고, 자기 일에 집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찾아온 행운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운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주의 깊게 주님 안에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침과 흙으로 진흙을 개어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 치유 방법이 어떻습니까?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아닐까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그는 사람들의 냉대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는 자신의 죄, 부모의 죄로 앞을 못 보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포자기의 상태로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봤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요구가 담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 결과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호칭의 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라는 분’에서, 바리사이들의 추궁에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나중에는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3)라고 말하고, 마지막에는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38)라며 경배합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앞을 볼 수 있었지만, 영적으로도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바리사이들은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문제를 내세워 “그는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요한 9,16)라고 판단합니다. 편견과 교만 속에서 영적으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모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운이 정말로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진짜 운이 좋은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포기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곁에 늘 계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 진짜 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또 다른 목표를 세우거나 새로운 꿈을 꾸기에 절대 늦은 때란 없다(레스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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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5. 사순 제4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의 ‘희망’이자 ‘빛’이자 ‘기쁨’이신 예수님
“기뻐하라! 감사하라!”
오늘은 사순 제4주일 장미주일입니다. 래타레 주일, “기뻐하라” 주일로 사제는 기쁨을 상징하는 장미색 혹은 분홍색 제의를 입습니다. 대림 제3주일 기뻐하라, 가우다테 주일과 일년에 단 두 번뿐입니다. 그러니 오늘 장미주일부터 남은 사순시기 동안 부활의 기쁨을 미리 앞당겨 맛보며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은총의 사순시기 깨어, 일어나, 기쁘게 살 것을 촉구하는 말씀도 참 멋지고 고무적입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신다.”(에페5,14)
주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자 빛이자 기쁨입니다. 이 주 그리스도 예수님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맛나는 인생입니다. 방금 힘차게 부른 화답송 후렴도 우리의 기쁨을 배가합니다. 오늘뿐 아니라 일년 내내 아니 평생 노래 기도로 바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오늘 입당송 라틴어 래타레로 시작하는 성구도 우리의 기쁨을 고조합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는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뛰리라.”(이사66,10-11)
제가 날마다 불암산 앞에 설 때 마다 자주 바치는 좌우명 짧은 고백도 나눕니다. 늘 고백해도 늘 새롭고 좋습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이어 자주 바치는 행복기도 한 대목도 나눕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꽃같은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그러니 한번뿐인 소중한 선물인생,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쁘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기쁨과 감사는 우리가 참신자임을 보증하는 신분증입니다. 기뻐하라 주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주님을 만나라!”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이요, 기쁨중의 기쁨이 주님과 만남의 기쁨입니다. 주님의 유일한 소망이자 기쁨은 우리를 만나 기쁨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기쁨의 샘>인 주님을 만나러 파스카 미사축제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새창조의 기쁨과 더불어 눈이 열리고 새로운 존재의 삶이 펼쳐집니다. 바로 오늘 요한복음의 눈먼 걸인이 상징하는바 바로 결핍된 우리 인간들입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나름대로의 아픔과 상처를 안고 눈뜬 맹인으로, 걸인처럼 초라하게 살아갑니다. 왜 이런 불행을? 부질없는 시간낭비입니다. 바로 주님을 만나라는 신호입니다.
우리의 희망이자 기쁨이요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만나야 비로소 치유의 구원입니다. 주님은 이 눈먼 걸인을 만났고 주님은 지체없이 땅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진흙을 개어 그 사람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어라.”하고 그에게 이르십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고 번역되는 말입니다. 그가 가서 씻고 앞을 보게 되어 돌아옵니다.
개안! 바로 눈이 열려 제대로 보게 된 것입니다. 진흙으로 인간을 만드신 창조일화를 연상케 하는 대목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의 은총에 힘입어 눈먼 걸인은 새롭게 창조된 것입니다. 파견된 분, 예수님이 진짜 실로암 못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성전 <실로암 샘터>의 미사잔치에 참석한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의 거듭된 만남을 통해 눈먼 걸인은 점점 영의 눈도 밝아지고 단단해 집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대한 인식입니다. ‘예수님이란 분’에서, “그분은 예언자입니다.”라는 대담한 고백으로, 마침내 마지막 주님과의 직접적 만남에서 “예언자는 주님”으로 바뀌며 절정의 믿음의 고백이 뒤따릅니다.
“주님, 믿습니다.”
말그대로 온전한 전인적 치유의 구원이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복음입니다. 우리 또한 “주님, 믿습니다.” 고백하며 이 미사를 봉헌합니다.
둘째, "빛의 자녀답게 살라!"입니다.
빛의 자녀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빛나는 영예로운 신원입니다. 어둠이 아닌 빛이 되어,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어 사는 것이 바로 빛이신 주님을 닮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부단한 파스카의 삶이 빛의 자녀다운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그대로 오늘 복음의 치유의 구원을 받는 사람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여러분은 한 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마음에 드는지 가려내십시오.”
빛의 자녀로 살 때 선사되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문득 창세기 12장3절,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며 파견시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라는 대목입니다. 주님의 빛이, 주님의 복이 되어 <세상 안에서,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우리의 복된 신원임을 새로 확인하게 됩니다.
셋째, "주님의 자비와 지혜의 눈빛을 눈길을 지녀라!"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빛이 되어, 주님을 닮아 빛의 자녀답게 살아갈 때, 매사 배려와 존중, 그리고 살피시고 돌보시는 주님의 섬세하고 따뜻한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이 참 좋은 본보기입니다. 쉽게 지나쳤을 눈먼 걸인에 대한 접근이 감동적입니다. 눈먼 걸인에 대해 죄의 소재를 묻는 인과응보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의 부질없는 질문을 일소에 붙이시고 딱 부러지게 대답하십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 드러나려는 그리된 것이다.”
에수님의 사고의 전환이, 안목의 지혜가 놀랍고 참신합니다.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부질없는 원인 추구의 삶에서 자유롭게 하며,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삶에 집중하게 하니 지극히 지혜로운 현실주의적 접근이요 해결입니다. 오늘 사무엘상권에서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과정에서 주님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사무엘의 부족을 일깨우는 주님입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마침내 사무엘이 다윗 앞에 섰을 때 주님의 눈길은 그를 놓치지 않고 사무엘에게 명령하십니다.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새삼 주님의 눈빛을, 눈길을 닮았을 순종의 예언자 사무엘임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희망이자 빛이자 기쁨이신 주님께서 늘 함께 계시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맛나는 세상입니다. 기쁨과 감사는 신자들의 신분증입니다. 남은 은총의 사순시기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만나, 빛의 자녀로서, 주님의 자비롭고 지혜로운 눈빛과 눈길을 지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기쁘게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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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5. 사순 제4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누가 진짜 소경일까?
교우 여러분, 사순 제4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며 "누구 죄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불행의 원인을 과거의 잘못에서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요한 9,3)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과연 '하느님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그저 기적을 일으켜 안 보이던 눈을 뜨게 하는 신기한 마술이 하느님의 일일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진짜 일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곧 새로운 '하느님'으로 재창조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된다고 하는 게 듣기 거북합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새로 재창조된 태생 소경은 ‘나는 곧 나다’라고 고백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일반 사람이 하느님의 이름, 곧
‘에고 에이미’(I AM)으로 자신을 고백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주고 그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만 새로 태어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의 일이 무엇입니까? 자녀에게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는 생존의 보조자가 전부가 아닙니다. 부모의 가장 큰 과업은 자녀에게 "너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 인간답게 사회에서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라는 믿음을 주어 자녀를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들어갈 때 아이는 비로소 네발로 기던 짐승의 본성을 버리고, 두 발로 걷는 법을 배우며 인간의 언어로 옹알이를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일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살 수 있는 존재로 재창조하는 것, 즉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게 하여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로부터 벗어나 오직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만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렇게 재창조된 이는 눈이 보입니다.
우리는 흔히 육신의 눈이 안 보이는 것을 큰 비극으로 여기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짜 실명은 영혼의 시력이 마비된 상태입니다.
이런 자매님을 생각해 봅니다.
남편의 외도로 평생을 배신감 속에 살다 암에 걸린 아내가 있습니다.
세상은 그녀를 불쌍하다 하고 남편을 나쁘다고 말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녀 역시 깊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남편보다 구원받기 더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인다고 말하는 바리사이들처럼.
왜 남편이 미워 죽겠을까요?
그것은 아내 안에도 남편이 탐닉하는 그 '음란의 욕구'가 여전히 행복을 줄 것이라는 오류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죄를 짓는 것도 간음이라 하셨습니다.
내 안에 그 욕구가 살아있기에, 그것을 마음껏 행하는 상대방을 보며 화가 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주인이 되고 창조주가 되며 심판관이 되려는 '삼구(三求)'의 욕망이 곧 고통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 그것이 진짜 눈먼 상태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믿으면 이 욕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런 죄를 짓는 사람 때문에 내가 화가 나거나 암에 걸리는 일이 없습니다.
제가 외도하는 남편을 둔 어떤 자매에게 매일 성체조배 한 시간을 시켰습니다.
성체조배하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과 성체가 하나가 됩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자매는 1년 동안 성체조배를 하고 나니 밉던 남편이 ‘불쌍해’ 보이더랍니다.
눈이 뜨인 것입니다.
재창조된 것입니다. 여러분, 아기가 걷지 못하고 네발로 기어 다니는 게 화가 납니까?
불쌍해 보여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새로 태어난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그 욕구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 욕구가 더는 행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급한 본성이 쫓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불쌍해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사제인데, 사제직을 하다 예쁜 여자를 만나 옷을 벗고 그 여인과 혼인하는 신부를 보면 어떤 마음일까요?
부러울까요? 화가 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불쌍해 보일 뿐입니다.
결혼에서 오는 기쁨보다는 사제로 사는 기쁨이 언제나 더 큼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제라는 정체성을 가지면 거기서 오는 행복 때문에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이들은 불쌍해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유다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율법으로 남을 심판하는 삼구의 욕망을 추구하면서도 자신들은 눈이 보인다고 자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보인다.' 하고 말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요한 9,41) 하느님이 되려는 욕망을 품고 살면서도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모른 채 인간의 욕구에 갇혀 있는 것, 그 교만이 그들을 영원한 어둠 속에 가둡니다.
교부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라고 단언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질 때, 비로소 사랑만이 우리 삶의 유일한 욕망이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새 창조의 핵심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곧 사랑입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전해주는 것만큼 큰 사랑은 없습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보듯, 진짜 태양 빛을 본 사람은 다시 동굴로 돌아가 동료들을 빛으로 인도합니다.
만약 이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다면, 이미 '보이는 사람'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사제의 직무에 대해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되고, 또한 다른 사람을
하느님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부르심을 받은 '사제의 백성'으로서의 소명입니다.
이를 위해 그분이 당신의 손으로 빚은 진흙을 우리 눈에 바르시도록 허락합시다.
우리의 비참함과 나약함이라는 진흙이, 주님의 손길 안에서 진짜 눈이 될 수 있음을 믿고 실로암으로 나아갑시다.
우리가 이 정체성의 걸음을 뗄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바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림자에 연연하지 않고, 이 위대한 진리를 온 세상에 전하는 빛의 자녀, 진정한 실로암이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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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5. 사순 제4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7:05 추가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우리는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이제 밤이 올 터인데 그때에는 아무도 일하지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9,1-5)”
“그 사람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제 눈을 뜨게 해 주셨는데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신다니, 그것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해 주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0-3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1)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머리글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요한 1,9-10).”
‘눈먼 사람’의 눈을 고쳐 주신 일에 초점을 맞추면,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증언이고,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4-6).”
예수님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마태 4,16)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생명의 빛’으로 오신 분이고,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원상복구하시는 분입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2)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라는 제자들의 질문에서, ‘저 사람입니까?’는, 장애인에 대한 나쁜 편견을 드러낸 말입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습니다.
<나쁜 편견은 그 자체가 죄입니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나쁜 편견을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라는 말씀은, 눈먼 상태로 태어나게 된 원인을 설명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런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자비가(섭리가) 작용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려고 그 사람을 눈먼 채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낮 동안’이라는 말과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을 뜻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지상에 있는 동안 ‘세상의 빛’으로서 일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영원히 빛이신 분입니다(묵시 21,23).>
3) 30절-33절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고백이고 증언인데,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4)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에서 ‘우리는 잘 본다.’ 라는 말은, “우리는 죄가 없다.
우리는 의인이다.
우리는 구원받는다.” 라고 자만심에 빠져 있는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라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믿고 회개해서 완전히 깨끗해진 사람들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묵시 22,14).
<회개는,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자비를(구원을)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먼지처럼 사라질 존재일 뿐입니다(야고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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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5. 사순 제4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10:10 추가
■ 실로암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눈먼이가 낫는 기적이 일어난 곳은 실로암이었습니다. 세상의 연못 같은 곳이었습니다. 복음에서는 못 이미지이지만 그 못은 지금 우리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상징할지 고민하고 묵상해봤습니다. 여러 곳이 있을 겁니다. 저는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안에 살아 있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말씀을 그대로 말씀 그자체가 물입니다. 그 물은 영생수입니다. 생명수입니다. 정화수입니다. 드러운 영혼을 맑게 해 주는 정화수입니다. 그 물로 자꾸 영혼을 씻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또 하면 언젠가는 탁한 영혼이 맑은 영혼으로 변화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복음에 눈먼이가 눈을 뜬 것처럼 우리의 탁한 영안도 뜨일 것입니다. 그때 비로서 우리는 아름다운 천국을 마음에 담을 수 있고 또 동경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견물생심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인가를 봐야 마음이 동할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을 사모하고 동경을 하려면 천국이 얼마나 좋은지 그걸 봐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걸 그냥 상상만 한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걸 실제로 보여주는 곳이 성경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 됩니다. 그 말씀을 보게 되면 그 길을 알려주십니다. 그 길을 그냥 알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다. 직접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길 끝에 바로 천국이 있을 겁니다. 그 천국을 보게 되면 천국을 동경하게 될 것입니다. 그걸 보지 않고 천국을 가겠다는 건 허황된 소설 같은 말입니다. 성경 속에 그 길을 알려주시지만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힘든 가시밭길 같은 길입니다. 좁은 길입니다. 아무도 잘 걷고 싶지 않은 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고통의 길이지만 그 길 끝에는 이 세상 그 어떤 길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천국이 있고 하느님과 예수님, 아름다운 성모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바로 우리는 그 아름다운 곳에 가기 위해 오늘도 실로암으로 가야 합니다. 그 실로암은 바로 또 다른 실로암입니다. 바로 우리는 전례인 미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인 영생수가 나오는 실로암입니다. 바로 하느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성당 성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실로암에 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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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5. 사순 제4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07:00 추가
요한 9,1-41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상선벌악”(賞善罰惡)은 천주교의 기본교리이자, 사회에서 ‘정의’의 개념을 구성하는 기본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얼핏보기에 너무나 당연해보이는 이 문장을 역으로 뒤집으면 현재의 상황을 죄에 속박하는 ‘족쇄’가 되지요. 지금 내가 고통과 시련을 겪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거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자기성찰’의 과정에서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죄’가 무엇인지 모르겠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고통과 시련을 온전히 받아들여도 그것을 이겨내기가 힘든데,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매여 있으면 마음 속에 ‘억울함’이 생기고 하느님을 원망하게 되어 눈앞에 닥친 어려움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얻을 곳마저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이를 보고 안쓰러운 마음이 든 나머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현재 겪는 고통이 과거에 저지른 죄 때문에 받는 벌이라는 유다인들의 사고방식을 바로잡으십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유다인들의 심판 논리에 따르면 지금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다시 담을 수 없는 과거에 있기에 내 앞에 끝없는 절망만 남게 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내가 겪는 고통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실 것이니, 나를 위한 그분의 선한 뜻과 계획이 무엇일지를 기대하며, 구원에 대한 희망 속에서 지금 이 시간을 기쁘게 보낼 수 있게 되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처럼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의 섭리대로 되기를 희망하며, 그분의 뜻인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내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를 하느님의 선한 뜻이 실현되는 ‘하느님 나라’로 만들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이’를 특별한 방식으로 치유하신 것이 그를 그런 특별한 소명에로 초대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분께서 다른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모습은 그의 경우처럼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분의 손길이 닿은 것 만으로, 어떤 사람은 그분의 한 마디 말씀만으로,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 스친 것만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건강해졌지요. 하지만 오늘은 치유의 과정이 여간 복잡하지 않습니다. 땅바닥에 침을 뱉고 그것으로 흙을 개어 진흙으로 만드십니다. 그 진흙을 그의 눈에 바르시고는, 그 상태로 ‘실로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연못을 찾아가 그 물로 눈에 묻은 진흙을 씻어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예수님이 누군지도 몰랐던 그가 군말없이 그분께서 시키신대로 따랐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순명의 결과 앞을 보게 되어 자기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실로암’이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파견된 이’라는 뜻이라는 점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에 순명하여 세상을 제대로 보게 된 그 사람을 당신을 증거하는 사도로 세상에 파견하신 겁니다. 그 과정에서 그의 믿음이 점점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 그는 자신이 입은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가 눈을 뜬 것을 함께 기뻐해주기는 커녕 마치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소란을 피웁니다. 바리사이들은 그에게 정말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본 것이 맞느냐고 의심하고, ‘왜 하필이면’ 안식일에 눈을 떴느냐고 따집니다. 누가 당신에게 그런 짓을 했느냐고 캐묻고,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한 것은 율법을 거스르는 큰 죄인데,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고 동조를 강요합니다. 심지어 그의 부모는 그런 종교 지도자들의 압박에 부담을 느껴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모습까지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담대하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있는 그대로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되돌아보며, ‘예’할 것은 ‘예’라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솔직하게 답변하지요. 그러는 과정에서 그의 마음 속에는 자신에게 그런 놀라운 일을 행하신 주님을 만나뵙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자리잡게 됩니다.
다행히 그의 바람은 곧 이루어집니다. 자신에게 치유의 은총을 베푸신 예수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거룩하신 분이라고 증언했다는 이유로 회당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쫓겨난 그 자리에서 그토록 뵙고자 했던 그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분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예수님이야 말로 세상을 구원하실 주님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고백하지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심으로써,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는’ 심판을 완성하십니다. 태생적 장애로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주님의 참모습을 알아보는 영적 눈을 뜨게 된 그와,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뻔히 보이는 엄연한 진실에 눈감아 버린 바리사이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이 극명한 차이를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가 보고싶은 대로만 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제대로 보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그러려니’하고 살아간다면‘눈 뜬 장님’이 되고 말지요. 그러니 믿음 안에서 삶과 세상을 항상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꼭 봐야할 중요한 것을 올바르게 식별하는 눈을, 언제 어디서든 주님의 현존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을 뜨게 해 주시기를 기도 중에 간절히 청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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