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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치는 탐욕의 나무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뱀이 나무를 먹게 함
하나님이 지으신 것 중에 가장 지혜로운 존재인 뱀이 여자에게 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도록 하였습니다.
여자는 그 나무를 보았고. 그것을 먹고, 그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하고, 전 인류 안으로 죄가 들어온 사건이 되어(원죄, 죄의 유전)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나게 된 원인을 제공하게 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선악과 죄의 기원
최초의 여자와 남자가 선악과를 먹은 것을 바울은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온 것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죄는 모든 사람의 죄가 되어 결국 모든 사람이 사망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죄의 원리는 곧 바로 은혜의 원리와 연결되어, 한 사람이(예수 그리스도) 순종함으로 우리가 그 순종의 대가로 생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설명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고, 조직신학이 말하는 인간론, 죄론, 구원론의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창세기 3장의 이야기의 진의와 본질은 꼭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인간론, 인죄론, 원죄, 죄의 전가, 죄의 유전 등을 설명하기 위한 본문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조주의의 한계와 극복
교조주의라고 하는 교리주의 자들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자신들이 믿는 신앙교리, 신앙고백서의 틀을 가지고 해석하려는 것입니다.
이천년의 교회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신앙고백서와 교리 집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무엇이며, 타교단, 타종교와 어떻게 다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증서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마스터 키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경전이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 성경의 원 역사(창세기1~11장)의 해석은 그렇게 교리집을(조직신학)근거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헤르만 바빙크의 구원론을 아무리 읽어도, 창세기 3장의 이야기는 해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은
조직신학의 구원론을 설명하는 본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문자는(성경계시) 원래 논설문이나, 논문집이 아니라,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도 그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 문자, 그림언어입니다.
그림을 소리로 이해할 수 있나요?
여러분 화가가 그린 그림의 진의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지만 그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인간이 장사하기 위하여 변질시킨 문자로 읽으면 그 문자를 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상관없이 읽고,
상관없이 해석하고, 자기 마음대로 적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는 소리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전달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설교를 듣고, 묵상을 하고, 성경을 공부하실 때 그 소리에만(장사하는 말) 치중하면
아무리 듣고, 아무리 공부해도 하나님의 그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받지 못하게 됩니다.
말씀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받지 못하는 이유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공부를 하는데도 성경을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받지 못할까요?
그들의 연구와 공부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정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을 정직하게 돌아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직하지 않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본능적으로 악한 인간
여러분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의 마음을 정직하게 보는 것이 글러먹었습니다.
아주 고약하고, 못돼 먹은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변호사처럼 대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검사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도무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의 마음에 대해서 정직하지 않고, 이것저것으로 핑계되고, 가리고, 포장하는 데는 아주 탁월합니다.
얼마나 포장을 잘하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 앞에서도 자기 포장하는 기술은 뛰어납니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를 찾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고, 이 껍데기에만 치중하면서 세상의 노예로, 자기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면서 스스로 왕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상태를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 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상실된 마음으로 사는 자들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두어야 하는데, 자기 마음에 대하여 정직하지 못하니까?
그 마음의 상태가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상실,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됨, 버려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각설하고 다시 창세기 3장으로 가겠습니다.
창세기 3장의 한글성경을 원문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창 3:6 여자가(잇샤) 그 나무를(에츠) 본즉(라아)
먹음(마아칼)직도(토브) 하고 보암(아인)직도(타아와)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사칼) 탐스럽기도 한(하마드) 나무인지라(에츠)
여자가(없음) 그 열매를(페리) 따(라카흐)먹고(아칼)
자기와 함께(임) 있는 남편에게도(이쉬) 주매(나탄) 그도 먹은지라(아칼)
7 이에 그들의 눈이(아인) 밝아져(파카흐)
자기들이 벗은 줄을(에롬) 알고(야다)
무화과나무(테엔) 잎을(알라) 엮어(타파르) 치마로(하고르) 삼았더라(아사)
여자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씨를 받아야 할 여자(잇샤)가 그 나무를 보니까?
어떻게 보였습니까?
① 먹음 직도 하고
② 보암 직도 하고
③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라고 합니다.
이것을 원문으로 보면 “먹음직도”는 “마아칼 토브”이고 “보암직도”는 “아인 타아와”이며,“지혜롭게 할 만큼은 ”샤칼“이고,”탐스럽기도 한“은 ”하마드“입니다.
① 먹음직한 나무(마아칼 토브)
”먹음직도“는 ”마아칼 토브“입니다.
”마아칼“은 ”음식, 양식, 열매“라는 뜻이고,”토브“는 ”선, 좋음“ 등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진행되는 것을 ”토브“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먹음직은“ 먹기에 좋은, 먹기에 선한 그런 뜻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이란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께서 애시당초 먹기에 좋은, 혹은 먹도록 의도한 나무라는 뜻입니다.
② 보암직한 나무(아인 타아와)
”보암직도“는 ”아인 타아와“입니다.
”아인“은 ”눈“을 의미하고, ”타아와“는”욕구, 욕망“을 의미합니다.
”타아와“가 사용된 용례를 보면
민 11:4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민 11:34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35 백성이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진행하여 하세롯에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시 10:3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눈으로 보는 욕망
"아인 타아와"는 눈으로 보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내 마음과 세상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중요한 인식, 해석 장치가 눈입니다.
그래서 그 눈을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눈이 밝아야 온 몸이 밝다는 것도 이런 사상이 내포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인 타아와“는 ”보는 것으로 나타는 욕망“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우리의 욕망,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나무입니다.
혹은 우리의 욕망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거울이라는 것입니다.
③ 지혜롭게 하는 탐욕의 나무 (샤칼 하마드)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는 ”샤칼 하마드“입니다.
”샤칼“은 ”지혜롭다“이고 ”하마드“는 ”몹시 바라다, 탐내다“입니다.
”샤칼“이 사용된 부분을 보면
수 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삼상 18:5 다윗이 사울의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구원을 설명하는 지혜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거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 구원을 아는 지혜입니다.
여호수아서의 율법을 통한 형통은 곧 그 율법이 우리를 구원의 지혜로 이끈다는 측면에서의 형통과 번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탐욕이라는 욕망
”하마드“는 ”몹시 바라다, 갈망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곳을 보면 탐심과 탐욕과 관련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출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찌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찌니라
수 7:21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르치는 탐욕의 나무
이렇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우리를 지혜롭게 하는 탐욕의 나무입니다.
십계명의 제 1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곧 탐심임으로,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긴다는 것은 우리의 탐심으로 하나님을 욕망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다른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내 욕망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 탐심인 것입니다.
욕구와 요구와 욕망
이 이야기를 현대 정신분석 철학자인 라캉의 욕망이론을 차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본성적으로 일어나는 욕구와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타자의 요구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일어나는 변질된 욕망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하였습니다.(상대적 박탈감)
욕망의 삭제?
결국 진리는 우리의 욕망을 삭제합니다.
그러면 그 욕망의 삭제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옛 자아의 죽음, 육욕적 자기 사랑의 해체, 목배임, 자기 깨어짐, 자기 부인 등으로 설명했는데, 이것의 본질이 무엇이겠습니까?
욕망의 자유란?
그 삭제는 기복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이용하여 내 욕망이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또한 염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금욕적 욕망의 거세도 아닙니다.
비진리는 우리를 이 욕망에 대하여 어떠한 만족과 자유를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를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욕망의 자유란 무엇이겠습니까?
”금욕적으로 사는 것“ 입니까?
아니면 ”마음대로 사는 것“ 입니까?
사람의 욕망이 자유와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그 욕망을 금욕하는 것이나, 충족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욕망 자체는 끝이 없는 무저갱입니다.
그래서 그 욕망 자체를 삭제하거나 충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유와 안식의 유일한 길은 그 욕망의 충족이나, 삭제가 아니라 우리의 영 안으로(프뉴마) 하나님의 진리의 영(프뉴마)이 가득할 때 우리의 욕망이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진리의 말로 가득하면 우리의 욕망은 진리로 자유 합니다.
그것은 욕망이 충족되었기 때문이 아니고, 혹은 거세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영이 진리로(영, 말, 생명)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욕망을 보여주는 거울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가 바로 선악과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의 기능은 그 나무를 바라보는 여자의 욕망을 폭로하고, 설명하기 위한 나무라는 것입니다.
마치 거울을 보면 우리의 모습이 보이는 것처럼 선악과를 보면 여자의 욕망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곧 바로 한 행동이 7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내 욕망을 보는 거울
이렇게 선악과는 성도로서의 여자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거울이며, 우리의 또 다른 자아입니다.
그렇게 자아의 욕망이 폭로되는 그 현장에 누가 오시는 것입니까?
여자의 진짜 남편 예수가 오시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을 자신의 율법적 수고로 치마를 만드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율법으로 간음하는 여자입니다.
요 8: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이 여자가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 아시지요?
간음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정결한 신부로 삼아주신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나무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며, 과정입니다.
이 인생의 과정 속에 언약으로 주어진 선악과를 통해 생명나무를 알아먹고, 그 생명을 담고,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성도님 되시길 바랍니다.
벤아담 성서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