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424
12월1일 [대림 제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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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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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JskX9hhqxvc
[의정부교구 장세훈 시몬(퇴계원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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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안에 불가능이 없음을 저는 굳게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은 인간적인 면으로나 신앙적인 면에서 참으로 귀감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의 말투, 행동 하나 하나가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갸륵하고 기특했던지 엄청난 강도의 극찬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청하는 바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자신의 아들이나 딸, 가족이 아니라 거느리고 있던 종의 치유를 간곡히 청했습니다.
당시 사람들 머릿속에 종은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가축처럼 시장에서 매매가 될 정도였으니 그들의 처지가 어떤 정도였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자신의 종을 살려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인간미가 철철 넘쳐흐르는 사람,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향해 지니고 있었던 겸손의 덕은 또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참 신앙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 믿음, 사랑, 겸손의 덕을 완벽히 지니고 있었던 백인대장을 바라보며, 그 무엇 한 가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제 모습을 부끄러워합니다.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을 적당히가 아니라 최상급 칭찬을 하십니다. 굳은 믿음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 그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에게 큰 귀감이요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폭풍 칭찬의 이유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그가 지니고 있었던 예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 절대적인 신뢰심이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믿습니다.
주님 안에 불가능이 없음을 굳게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과 눈물, 기막힌 사연들을 잘 알고 계심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주님, 당신만을 믿습니다. 당신만을 신뢰합니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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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JneVrxFvVM?si=6e69hXtjgP1MLrF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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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만으로? 마귀도 성경박사였습니다>
1858년, 프랑스 루르드의 본당 신부였던 페라마일 신부는 거구에 천둥 같은 목소리를 가진, 율법과 교회법에 정통한 엄격한 사제였습니다. 반면 그 앞에 서 있는 14살 소녀 베르나데트는 천식으로 숨을 헐떡였고, 글을 읽을 줄도 몰랐으며, 교리 반에서 낙제한 둔재였습니다.
신부는 소녀를 다그쳤습니다. "이 거짓말쟁이야! 그 부인이 너에게 진흙탕 물을 마시라고 했다고?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으라고 했다고? 하느님은 질서의 하느님이시다. 그런 비이성적인 명령을 내리실 리가 없어!" 신부의 책상 위에는 수많은 신학 서적과 법전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그 방대한 '지식'으로 소녀의 체험을 난도질했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데트는 신학적으로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단지 그 부인이 "가서 씻으라"고 했기에 흙탕물을 파서 얼굴에 발랐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기에 무릎이 까지도록 기도했을 뿐입니다. 그녀에게는 지식이 아니라 '순종'만 있었습니다.
3월 25일, 부인이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 때, 베르나데트는 그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주문처럼 되뇌며 사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부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원죄 없는 잉태다(Immaculate Conception)'라고요!"
그 순간, 거인 같던 페라마일 신부는 감전된 듯 얼어붙었습니다. '원죄 없는 잉태'. 그것은 불과 4년 전 교황 비오 9세가 반포한, 라틴어를 모르는 무식한 시골 소녀는 결코 알 수 없는 최신 교리 용어였습니다. 신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너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맑은 눈으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신부님. 신부님은 교리를 아시지만, 저는 그분을 압니다. 그분은 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고, 저는 그분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날, 신학 박사였던 신부는 무릎을 꿇고 울었습니다. 그가 책상 위에서 수십 년간 연구했던 하느님은 침묵하셨지만, 글도 모르는 소녀가 진흙탕 속에서 '순종'으로 파낸 샘물은 기적이 되어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흔히 "성경을 많이 알면 믿음이 좋아진다"고 착각합니다. 개신교 형제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치며 말씀 연구에 몰두하고, 우리 가톨릭 신자들도 성경 공부 수료증이 믿음의 보증수표인 양 여깁니다. 물론 말씀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아는 것'과 그분을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할 때 사탄을 보십시오. 그는 시편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하며 예수님과
논쟁했습니다. 사탄은 성경 박사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에게는 결정적인 하나가 없었습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말씀은 알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을 실천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성경 지식만 있고 순종이 없는 신앙은, 자칫하면 마귀의 신앙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여기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 증인들이 있습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를 보십시오. 그는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예비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추운 겨울날 벌거벗은 거지를 보았을 때, 교리를 따지는 대신 자신의 붉은 망토를 반으로 잘라 덮어주었습니다. 그 사랑의 순종을 행한 날 밤, 그는 꿈속에서 자신이 덮어준 망토를 입으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공부해서 예수님을 안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천주의 성 요한(John of God)은 거리의 병자들을 자신의 등에 업어 날랐습니다. 어느 날 밤, 위독한 환자를 업고 가는데 너무 무거워 쓰러질 뻔했습니다. 그때 환자가 그를 일으켜 세우며 빛나는 얼굴로 변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요한아, 네가 나를 업어 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너를 업어주겠다." 그는 환자들의 고름을 닦아주는 손끝에서, 책상머리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모두 이런 식입니다. 말씀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말씀만 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는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명령에 죽고 사는 '순종의 세계'를 몸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저도 상관 밑에 있고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그는 자신이 황제의 권위에 순종할 때 자신에게도 권위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하느님의 권위에 절대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단박에 알아본 것입니다. 순종해 본 사람만이 권위를 알아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부의 경험으로는 고기가 없었지만,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라며 자기 생각을 꺾고 순종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듯한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연회장은 몰랐지만, 말씀대로 물을 떠다 나른 하인들은 그 기적의 출처를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종종 "믿음이 부족해서 실천을 못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순서가 틀렸습니다.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백 번 통독해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울리는 징과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도로시 데이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 빵을 나눔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빵을 나누는 순종을 할 때 비로소 빵이신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나병 환자가 끔찍하게 싫었지만, 그들을 껴안으라는 내면의 소리에 순종하여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쓴맛이 단맛으로 변했다"고 고백합니다. 혐오를 이기고 순종했을 때, 그는 나병 환자 안에서 달콤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 성경 공부를 더 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사랑의 실천을 하나 정하십시오. 내 자존심을 꺾고 배우자에게 사과하는 순종, 내 시간을 쪼개어 힘든 이를 돕는 순종. 그 순종의 현장에서 여러분은 베르나데트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복잡한 신학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사랑을 실천했을 때 그분이 제 곁에 계시다는 것을 저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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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휴가 중에 동창 신부님들과 바다낚시를 했습니다. 선장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10월 비가 많이 왔고, 파도가 거칠었는데 신부님들이 오셔서 그런지 오늘은 날씨가 맑고, 파도가 잔잔합니다.” 선장님 말처럼 날이 좋았고, 파도가 잔잔했습니다. 배에는 ‘어군 탐지기’가 있어서 물고기들이 있는 곳으로 배를 몰았습니다. 선장님은 물고기를 잡는 요령을 알려주었지만, 초보자인 저에게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동창 신부님이 순발력이 있어서 우리는 6마리나 잡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가자미 한 마리를 잡았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옆구리에 바늘이 걸린 것이니 운이 좋았다고 하였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것은 손의 감각이 중요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것은 줄을 끌어올리는 감각이 중요했습니다. 물고기를 잡았어도 끌어올리는 데 소홀하면 물고기는 미끼를 뱉어 버린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더 깊은 곳으로 가라’라는 말씀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물을 배 오른쪽으로 던져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이미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피곤함이, 마음에는 허무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믿음의 시작입니다. ‘깊은 곳’은 단순한 물리적 깊이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의 깊이, 하느님과의 관계의 깊이입니다. 얕은 곳에서는 고기가 잡히지 않듯, 얕은 신앙에서는 참된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믿음은 계산이 아니라 순명이고, 확실함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인간의 한계 끝에서 말씀 하나에 의지하여 다시 그물을 내리는 것이 바로 신앙의 용기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우리를 자주 깊은 곳으로 이끕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내면의 영역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소음과 욕망이 사라진 고요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납니다. 깊은 곳으로 나아가라는 예수님의 초대는 우리 안의 두려움과 상처, 그리고 한계를 마주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그 깊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다시 옛 직업으로 돌아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져라.” 그리고 놀랍게도 그물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오른쪽’은 성경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구원, 선택과 영광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순히 방향을 바꾸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삶의 시선을 바꾸라고 하신 것입니다. 실패의 왼편에서 희망의 오른편으로, 절망의 시선에서 부활의 시선으로, 인간의 계산에서 하느님의 섭리로 시선을 옮기라는 말씀입니다. ‘깊은 곳’은 인간의 내면을 향한 탐구를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삶은 늘 표면에 머물 뿐입니다. 또한 ‘오른쪽으로 던지라’는 말은 삶의 방향을 회복하라는 초대입니다. 올바름, 정의, 사랑의 방향으로 우리의 그물을 던질 때 비로소 삶의 그물은 찢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두 말씀은 ‘깊이를 향한 신앙의 여정’과 ‘방향을 향한 인간의 회심’을 동시에 가리킵니다. 깊은 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오른쪽에서 우리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깊이는 믿음의 근원이고, 오른쪽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로마의 백인대장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의 종이 아팠을 때입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백인대장의 청을 들어주시기로 했습니다. 종을 사랑하는 백인대장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백인대장은 종을 치유하기 위해서 오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어부가 아니었지만, 백인대장은 이미 깊은 곳으로 가고 있었고,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질 줄 알았습니다. 백인대장의 굳센 믿음이 깊은 곳이었고, 아픈 종을 아끼는 백인대장의 사랑이 오른편이었습니다.
우리는 어제부터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백인대장의 굳센 믿음과 백인대장의 사랑으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려주었듯이,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청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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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대장, 로마 군대의 지휘관인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다가와 도움을 청합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픈 종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어디로든 가게 하고 무엇이든 하게 만드니까요. 그의 간청에 예수님께서는 몸소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나라의 군인이 가질 법한 태도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이가 낫기를 바라는 겸손한 이의 간절함만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예수님께서 그동안 해 오신 일들을 들어 알고 있는 듯, 이미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드러
냅니다.
백인대장은 인간 세상, 특히 군대에서 볼 수 있는 윗사람이 명령하면 아랫사람은 그대로 복종하는 ‘상명하복’의 질서에 익숙해서인지, 예수님의 신적 권한을 절대적으로 믿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방인의 믿음에 감탄하십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겸손과 진실한 믿음 앞에서 감탄하시는 인간적인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공간으로 들어가시는 것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자 하심을 뜻합니다. 세리 마태오나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사람 안으로, 그의 삶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집에 들어가시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 안에는 확실히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도 미사 때마다 성체를 모시기 전에 백인대장의 고백으로 드리는 기도(“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를 정성을 다하여 드리면서 주님께서 우리 삶 안으로,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열린 마음과 믿음으로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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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5-11: 한 말씀만 하소서.
오늘 복음은 가파르나움의 로마 백인대장이 주님께 나아와 종의 치유를 청하는 장면을 전한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오히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10절) 하실 만큼 위대한 믿음을 드러냈다.
백인대장은 단순히 종의 치유를 청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힘과 권위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 이 고백은 하느님의 창조 행위와도 연결된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창세 1,3 이하). 하느님의 말씀은 곧 행위이며, 능력이다. 백인대장은 이 능력이 예수님의 말씀 안에 충만히 깃들어 있음을 알아본 것이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두고 “그는 기적 자체보다도 말씀의 힘을 더 믿었다. 그래서 보지 않고도 믿은 자가 된 것이다.”(Homiliae in Matthaeum, Homilia 26,2)라고 말한다. 즉, 눈으로 확인하려는 요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말씀의 능력을 신뢰한 것이다.
또한 그는 겸손히 고백한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8절) 이는 단순히 외적인 겸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서 자기 비참을 자각하는 참된 겸손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하느님은 교만한 자를 멀리하시지만, 겸손한 자 안에 친히 거처하신다.”(Sermones 62,1). 백인대장은 바로 이 겸손 속에서 예수님을 자신의 집이 아니라, 마음에 모셨던 것이다.
대림은 주님을 맞이하는 기다림의 시기이다. 백인대장의 태도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주님을 맞이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우리는 미사 전 성체성사에서 같은 고백을 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이 기도는 바로 오늘 복음의 고백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것은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친히 오셔서 영혼을 치유하시는 사건임을 믿는 고백이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하늘나라의 보편성을 선포하신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11절). 이스라엘이라는 혈연적·민족적 울타리를 넘어, 믿음으로 응답하는 모든 이가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는 구원의 보편성을 드러내신 말씀이다. 교회 헌장도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 누구든지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따라 선을 실천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16항).
따라서, 우리 또한 대림 시기에 자기 혈통이나 형식적 신앙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백인대장의 믿음과 겸손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영적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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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시는 당신처럼>
마태오 8,5-11(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오시는 당신처럼>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마태오 8,7)
믿음이 오시어
믿음이 스미시니
믿음을 모시고
믿음이 되어
오시는 믿음처럼
믿음이 가다
희망이 오시어
희망이 스미시니
희망을 모시고
희망이 되어
오시는 희망처럼
희망이 가다
사랑이 오시어
사랑이 스미시니
사랑을 모시고
사랑이 되어
오시는 사랑처럼
사랑이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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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탄절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신 날.>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5-11)
1) 이 이야기는 치유 기적을 전하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이방인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다고 신앙을 고백했다는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는 백인대장의 말은, “예수님께서 ‘병마’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떠날 것이고, 그러면 병자가 낫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병마를 지배하시는 주님’으로 믿는 것은 곧 ‘하느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백인대장의 믿음이 ‘올바른 믿음’이라고 칭찬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는다고 고백한 것은 그 백인대장이 최초라는 것을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토마스 사도의 경우는, 예수님을 향해서 직접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했다는 점에서 최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요한 20,28)
대림시기가 시작되자마자 이 이야기를 읽는 것은, 성탄절에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다시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성탄절은 ‘나중에’ 메시아가 되시고 하느님이 되실 아기가 태어난 날이 아니라, ‘한처음’부터 하느님이시고 메시아이신 분이 인간의 아기로 태어나신 날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 가운데로 오신 날입니다.>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의 머리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2) 백인대장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3-14)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는 약속은 ‘하느님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약속입니다. <만일에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 즉 신성 모독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은 ‘같은 일’이고,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이 믿음은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신 분’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믿음입니다.>
3) “예수님이 하느님이신 분이라면, 처음부터 하느님으로 오셔서 인간들을 곧바로 구원하시지 왜 아기로 태어나셔서 사람들과 똑같이 사셨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15-16ㄱ.19-20)
하느님이신 분이 인간의 아기로 오신 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음을 뜻하는데, 그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간들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보잘것없는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메시아’이시고, ‘나를’ 하느님 나라로 데려가실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성탄절을 경축하는 이유이고, 대림시기를 지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4) 11절의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이방인의 구원’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나라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지 않는 나라이고, 어떤 차별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백인대장의 이야기’는 유대인이든지 이방이든지 누구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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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의 믿음에 달려있다>
오래전의 일이다.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한국성체대회가 거행되던 날,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었고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파견 강복이 있기 직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추기경님께서 “거기 뭐 나타났어요?” 하셨고, 그 말씀에 자극받아 참가자 모두가 환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나도 태양을 보았다. 그야말로 성체 모양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런 현상에 부정적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성호경을 그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였다.
그때 추기경님께서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하셨다.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으셨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마태13,58).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셨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살아있는 말씀이 힘을 내느냐 못 내느냐는 그 말씀을 듣는 이에게 달렸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실행하면 능력의 혜택을 입게 된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는 것은, 못할 것이 없다. 믿고 실천하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된다.
오늘 복음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을 유다인이 아닌 한 이방인 백인대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 활동을 많이 하고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 성직자나 수도자도 믿음을 자신할 수는 없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많을지 모르나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에는 소홀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기 희망한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히브11,1. 6)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길 기도한다.
“오 하느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불어 넣어주신 그 믿음으로
오 하느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성 아우구스티노).
“주 하느님, 어서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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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메시아께서 오시어 이루실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마태 8,7)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중풍으로 괴로워하는 종을 위해 도움을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 선뜻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 말씀은 당시 상황 안에서는 친히 백인대장 집까지 가셔서 고쳐주시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만, 성자께서 세상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기 위해 강생의 채비를 차리실 때 하신 말씀으로도 들립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과 맺은 사랑의 계약에서 점점 멀어지고, 인류는 어둠의 세력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리며 희망과 절망, 인내와 포기 사이에서 지쳐가는 중이었지요. 인간의 몸을 취해 오신 성자의 육화는, 그런 인류를 바라보시던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자비와 연민이 솟구쳐, 재고 따지고 할 것 없이 선뜻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려는 순간에 하신 말씀일 겁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주님의 거룩한 탄생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 백인대장이 대답합니다. 놀라운 겸손과 믿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과, 그분 말씀의 효력을 추호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을 통해 발설된 이 말씀에서 우리는 강생하시려는 성자께 바치는 지상 피조물의 응답을 듣습니다. 주님을 맞이할 땅과 공기와 햇살과 모든 피조물의 겸손어린 합창입니다.
백인대장은 알고 있었을까요? '내가 가서 고쳐 주겠다'는 말씀과 본인이 이야기한 "한 말씀"이 같은 존재, 같은 의미라는 것을요. 주님의 의지와 말씀, 실행은 하나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마태 8,10) 예수님의 기쁨이 전달됩니다. 이방인의 믿음이 우리 주님의 영을 신명나게 들썩입니다.ㅜ이로써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든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도 하늘 나라의 잔칫상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믿음의 수혜자인 동시에 계승자이기도 합니다.
제1독서는 더럽혀진 예루살렘의 치유와 회복을 노래합니다. "주님께서는 ... 시온의 딸들의 오물을 씻어 내시고 예루살렘의 피를 닦아 내신 뒤에"(이사 4,4) 주님께서는 먼저 상처 입고 버려진 예루살렘을 품으십니다. 닦아 주고 어루만져 정결하게 하십니다. "정녕 주님의 영광이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지붕과 초막이 되어 ...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어 주리라."(이사 4,5-6)
"덮어 준다"고 하십니다. 뜨거운 햇살과 더위, 폭우와 비를 막아주는 보호막이 되어 주시겠다는 말씀이지요. 이와 더불어 그간 쌓인 예루살렘의 죄와 반역을 낱낱이 들춰내어 수치와 치욕을 안기시기보다, 당신 눈에서도 세상 눈에서도 가려 주시겠다는 뜻도 될 것입니다. 당신도 따져 묻지 않고 세상도 추궁하지 않도록 덮어 주시는 자비일 겁니다.
우리 중 누구도 완전무결한 이는 없습니다. 저마다 존재 어디엔가 죄로 병들고 약함에 허물어진 구석을 안고 살아가는 중이지요.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선뜻 "내가 가서 고쳐 주마" 하며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한 말씀"으로 우리는 나았습니다.
"우리 구세주 오시리니 이제 두려워하지 마라."(입당송) 사실 우리는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을 지금 여기서 체험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우리의 죄와 수치와 약함을 씻어내 주시고 닦아 주시고 덮어 주시는 손길로 완성됩니다. 그러니 지금 초라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죄인에 불과하지만 희망하며 주님을 기다립시다. 지금 우리의 고통스런 실존이 그분을 부른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그분을 부릅시다. 초라하고 작은 우리의 겸손과 믿음이 그분을 또 다시 불러내릴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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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우리는 대림의 첫 월요일을 맞이했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합니다. 곧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묵상하며, 동시에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과 ‘다시 오심’은 둘 다 거룩하고 신비로운 변형이 일어나는 구원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의 만남을 우리는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에게서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으로 누워있는 종은 백인대장의 ‘집’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자격이 없는 이방인의 지붕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당혹스런 일을 벌이십니다. 지금까지는 당신을 찾아오거나 당신께 데려온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먼저 발 벗고 나서십니다. 그의 ‘집’, 곧 주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 이방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나서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마태오 8,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찾아 나서기도 전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인류의 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마치 자캐오에게 “오늘은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하시며, 모든 이들이 매국노의 ‘집’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침 뱉고 피해가던 그 ‘집’으로 들어오셨듯이 말입니다.
오시어, 우리를 고쳐주시고 새롭게 탄생시키시고 변형시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실 자격이 없는 저희 ‘마음의 집’에 들어오시겠다고 하십니다.
마치 묵시록의 말씀에서처럼 말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록 3,20)
그러니 오늘 제 마음이 기뻐 설렙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시어 제 마음에 ‘당신의 집’을 지으신 까닭입니다. 지금 이 시간, 바로 여기에, 당신 몸과 피로 하늘나라의 잔칫상을 차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오 8,11)
또한 당혹스럽고 놀라운 것은 백인대장의 말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오 8,8)
그렇습니다. 그는 진정한 참된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필시 그는 이미 이 구원을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이방인의 처지였지만, 바로 그 속에서 이미 자비와 사랑의 위력을 알기에 믿음의 굳셈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이 구원을 이루는 힘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권능으로부터 진정한 참된 힘이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말씀의 힘에 승복하고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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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당신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은 머리 위에 계시되 속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유를 주시니, 당신께 온전히 속한 자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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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대림절의 모범>
교회는 대림절 첫 복음으로 백인대장의 종을 주님께서 치유해주신 얘기를 택했고, 복음 환호성은 “주 하느님, 어서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입니다.
이 복음 환호성에 비추어 오늘 복음을 보면 백인대장은 주님께서 어서 오시어 구원해주시기를 바라고, 그래서 마침내 구원을 받는 대림 시기 우리의 모범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오늘 복음에서는 가파르나움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가파르나움까지 찾아오신 것은 오시기를 당시 백인대장이나 지금의 우리가 바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고 청하지 않아도 주님은 오실 분이라는 말입니다.
엄마는 꼭 와달라고 해야 집 떠나있는 자식을 찾아가는 분이 아닙니다. 청하지 않아도 그리고 청하기도 전에 찾아가시는데 주님도 그러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종이 아프다는 백인대장의 말에 청하기도 전에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하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주님 오시기를 바라고, 초대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은 그러지 않으면 안 오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야 구원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바라야 하는 이유는 바라지 않는 우리가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초대하고 기다려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라지도 청하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데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주님께서 오셨는지도 모를 것이고, 알더라도 주님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청하지 않고, 청하기도 전에 주님이 오시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사랑이고, 바라고 청하고 기다리는 것은 우리 구원의 도리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우리 구원의 도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고자 한다면 다른 데서 구원을 찾지 않음은 물론, 하느님은 전능하실 뿐 아니라 사랑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믿고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잃지 않으며, 마침내 찾아오셨을 때 그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으로 모셔드려야겠습니다.
구원이 오지만 구원을 모셔드리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사랑께서 찾아오시지만 그 사랑을 갈망하고 기다리고 모셔드리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백인대장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그의 겸손이고 그의 갈망은 모실 자격이 충분하며 그래서 그의 겸손과 갈망은 대림절의 모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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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ㄴ)
<구원의 확실한 보증인 믿음과 사랑!>
오늘 복음(마태 8,5-11)은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한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다가와 도움을 청합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마태 8,6)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마태 8,7) 하시자, 백인대장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태 8,8-9)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이어서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 라고 말씀하십니다.
백인대장은 백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는 로마 군대 지휘관입니다. 그가 로마의 군대 장수였기 때문에 유다인들에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 백인대장이 병든 자기 종에게 사랑을 드러냅니다. 종의 불쌍한 처지를 치유자이신 예수님께 알립니다.
'백인대장의 믿음과 사랑'을 봅니다. 그리고 이 '믿음과 사랑(삶)'이 '이제와 영원한 구원의 절대적 보증'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사랑이신 하느님 앞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겸손한 고백이 큰 기적을 만들어 낸다는 것도.
우리는 매일 미사를 드릴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받아모시기 바로 직전에 백인대장의 기도를 바치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정신을 바짝차리고 이 기도를 잘 바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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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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