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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어.
장마철이라고 또 비가 올 모양인지, 빗방울은 시간이 갈수록 굵어져가네.
난 주방에 서 있어. 아직도 내게는 어설프게만 보이는 앞치마를 질끈 두르고 말이야.
싱크대 옆에 조리대에는 여러 가지 인스턴트 음식이 정말 난잡하게도 흐트러져있지.
인스턴트 육개장, 시래깃국, 북엇국. 이 세 종류가 선택을 바라며 놓여져 있고,
그것 말고도 마트에서 사온 듯한 파는 밑반찬들도 정말 손댈 틈 없이 조리대에 들어서 있어.
사실.. 난 요리를 못하거든.
“오빠 오려면 한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나는 주방에서 고개를 90도 각도로 꺾어 돌려서 식탁쪽 벽에 걸린 시계를 초조하게 바라봐.
초침은 부지런하게 돌아가고, 시침과 분침은 지금 시각이 6시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어.
나는 어지러운 조리대에 놓인 육개장, 시래깃국, 북엇국 세 종류의 인스턴트 국거리를 마냥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 무턱대고 그 중의 하나를 손으로 집었어.
질끈 감은 눈에 힘을 서서히 빼고 샛눈으로 내 손에 집힌 국을 빠끔히 바라봤지. 빙고, 시래깃국이었어.
국거리가 결정되고 나서는 육개장과 북엇국은 다음을 기약하고 냉장고에 넣어놓았고,
조리대에 여기저기 놓인 밑반찬들을 랩을 벗기거나 포장을 뜯어서 찬장에 있던 그릇에 옮겨 담았어.
최대한 내가 만든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사실 오빠도 알 법해. 근데 모르는 척 해주는 걸지도 몰라.
아마도 말이지. 죄다 널린 인스턴트 식품들을 둘러보면서 내 얼굴에는 저절로 인상이 깊게 패여.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스턴트 식품을 먹이는 건 나도 싫단 말이야. 하지만 어쩌겠어? 난 겨우 22살이라구.
요리를 쫌 못하더라도 당연한 거잖아? 원래는 아직 학생이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자기변명을 속으로 늘어 놓으며 한숨을 땅이 꺼져라 쉬어댔는데,
마치 속에 무거운 쇳덩이가 자리하고 있는 느낌이었어. 너무 답답했지.
그런데 그런 내 느낌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시간은 나 모르게 빠르게 흘러가는 듯 했고..
내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쇠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현관문에서 나면서 오빠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왔어.
우산을 안 가지고 와서 그런지, 겉 양복에 빗물이 잔뜩 묻어 가지고 말이야.
“민서야 나 왔다. 저녁…하고 있었어? 왜 그래, 벨을 눌러도 대답도 없고.”
오빠가 머리카락에 묻은 빗물을 손으로 살살 털면서 주방에 들어섰어.
오빠의 모습이 눈에 띄자마자 오빠를 반기기는커녕, 내 머리 속에는 오빠의 눈에도 띄일 법한
인스턴트 포장지들이었어. 나는 허둥지둥 조리대에 있던 포장지들을 쓰레기통에 밀어넣었지.
이때까지 그래도 오빠는 내가 한 거라고 매일 저녁을 먹었을 텐데, 인스턴트 음식들이라니..
오빠가 어떻게 생각할지, 내 나름대로 짐작하자 아찔함이 머리를 스쳤어. 자신에게 등 돌려서
허둥지둥 조리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정신없이 쓸어내라는 내 모습을 보고는 오빠는 웃었어.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즐거워서 웃는 것 같은 것에 가까운 웃음이었지.
“야야, 윤민서, 오늘 밥하기 귀찮았구나? 인스턴트 음식이라니~ 쯧. 오늘만 이 오빠가 봐 준다!
이야, 그래도 시래깃국 맛있겠는데~ 나 간단하게 씻고 올게, 밥 먹자.”
오빠는 빗물을 털어서 물이 묻은 손으로 장난스럽게 내 머리를 비비적거리고는 방으로 들어갔어.
나는 앞머리가 바람에 날리도록 한숨을 쉬어내고는 저녁 상을 마저 준비했어. 오빠도 잘 넘어가 줬는데,
내 마음은 왜 아직도 돌처럼 무겁기만 한지 나도 잘 모를 일이야.
“오늘 하루종일 민서 표정이 왜 그럴까, 걱정 있어?”
저녁을 먹는 내내 뭔가에 정신이 팔려 보였던 내 모습을 봐 오던 오빠가 자기 전 샤워를 하고 나오면서
또 화장대 앞에 멍하게 앉아있는 나를 톡톡 건드렸어.
“어.. 아니야… 흐음…”
“아니라면서 세상 근심 다 짊어진 거 같네 서진우 마누라가?”
오빠가 샤워 가운을 입고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다가 수건을 내려놓고 내 뒤로 와서 나를 품 안에 안아주었어.
왠지, 든든하다.. 이렇게 진우오빠 품 속에 안겨 있을 때면. 오빠는 항상 이렇게 나를 품어주곤 했어.
내가 신경질을 내던, 화를 내던.. 7살이나 많아서 그런지, 내 모든 걸 품어주고 다녔고,
오빠는 불평 같은 건 한번도 한 적이 없는 사람이야.
“아.. 모르겠어.. 정작 힘들고 근심 짊어지는 건 오빠일 텐데…”
“서진우는 예쁜 마누라를 두고 일 잘~ 해서 근심 없어요 아가씨~”
오빠는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늘려 말하고는 나를 더 꼭 안아줬어.
그리고는 그래도 심드렁한 무거운 표정을 거두지 못하는 날 한번 바라보고는 볼에 쪽- 소리 나게 입 맞춰 주었지.
“민서가, 오빠가 요즘 애정표현을 안 해줘서 삐졌나?”
“그런 거 아냐~ 아냐 정말. 나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조차도 뭔지 모를 무거움에 계속 심각해보였던 얼굴을 거두면서 나는 좀 오버스럽게 히- 하고 웃었어.
일부러 목소리 톤도 평소보다 좀 올려가면서. 정말 오빠는 회사에서 일하느라 힘들고 지칠 텐데,
집에까지 와서 분위기 다운된 마누라 때문에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 내가 오빠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집에서 오빠가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해주는 정도니까.
그게, 22살 윤민서가 29살 서진우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라고 생각해.
“오빠, 우리 자자~ 나 오랜만에! 오빠 팔베개 하고 자고 싶어~ 응?”
“나, 참 민서 너, 심드렁 했다가 한 순간에 다시 업 됐다가. 어디다 장단을 맞춰줘야 되나?
그리고 아가씨야- 지금 겨우 9시 반 밖에 안 됐거든?”
“그래도 자자! 내일도 오빠는 회사를 가야 하니까 오늘은 일찍 자는 거야. 자, 빨리 빨리.”
나는 어이없어서 픽, 하고 웃어보이는 오빠를 향해 베시시 웃고는 오빠의 팔을 잡아당겨서 침대로 갔지.
내가 힘이 세서 오빠가 끌려오는 게 아니라, 오빠가 그냥 내가 이끄는 대로 쉽게 따라와 줘서.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오빠의 손을 놓고, 침대 한쪽으로 올라가서 오빠가 올라올 자리를 마련해 놓고, 이불을 팡팡- 손바닥으로 쳤어.
그 바람에 폭신폭신하게 보이던 이불에는 내 손자국이 무자비하게 남겨졌지.
먼지라도 안 날렸으면 다행이건만. 아하하.. 오빠는 훈훈한 웃음을 지으면서 못 이기는 척 침대로 올라왔고,
나는 오빠의 왼쪽 팔을 쭉 펴서 팔을 베고 누웠어. 똑바로 누웠다가
곧바로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오빠 품을 파고 들었지.
“아~ 좋다. 베개보다 훨씬 좋아. 포근해.”
“그렇게 좋아? 나는 내일 아침이면 팔이 저려서 큰일날 거 같은데, 이거.”
“내가 주물러 주면 되지? 윤민서표 특별 안마. 에헤헷.”
오빠는.. 뭐랄까, 정말 예쁘고 따듯한 미소를 입에 가득 머금고는 날 팔베개를 해준 상태에서
자기도 살짝 몸을 내쪽으로 돌려 나를 안아줬어. 얼떨결에 또 안겨서 오빠 얼굴은 이제 못 보게 됐지만,
오빠가 날 안고 좋아하는 목소리와 오빠의 숨결은 그대로 내게 전해졌지.
“우리 민서, 오랜만에 또 안아보는 것 같다.”
“거짓말.. 아까도 방금 전에도 안아줘놓구선.”
“아하하, 그런가?”
오빠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사이, 장난스러웠던 내 얼굴 표정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어.
분명히 난 행복했고, 오빠 품에 있는 게 좋았는데도, 얼굴에서 지워진 웃음은 돌아올 줄 몰랐고.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일까 생각을 하는 사이에, 내 입에선,
“오빠… 나 사랑해? 오빤…. 지금 행복해..?”
이런 건조한 질문이 튀어나왔고, 오빠의 웃음도 잠시, 거짓말처럼 멈췄어.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다음 날, 오빠는 평소와는 달리 약간 굳은 얼굴로 회사로 향했어.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를 냉대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평소와 같은 배웅인사를 하는데도 뭔가 달라 보였지.
오빠를 보내고 나서, ‘저 사람이 갑자기 왜 저럴까’ 생각을 하다가 그 이유를 뒤늦게 알아챘어.
오빠는 내게 그런 말을 듣는 게 좋지 않다고 전에 말한 적이 있어. 사귈 때도 그랬고, 결혼을 약속하기 전에도 그랬어.
“나는 이제 모든 것에 신중해야만 하는 나이가 됐고, 넌 아직 젊고, 하고 싶은 게 많은 여자니까,
나랑 있으면서 언젠가 후회하고 내 곁을 떠날 것 같아서..”
라고 오빠는 말했지. 드라마에나 나올 듯할 대사를 그때 들을 줄은 나도 몰랐어.
하지만 오빠는 불안하다고 했고, 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그때마다 호언장담을 했었지.
그런데 어제 무심코 내가 던진 질문에, 그 장담이 깨져버린 거야.
“하아… 내가 미쳤지… 미쳤어 미쳤어, 오빠 들어오면 잘못했다고 빌어야겠다.”
오빠가 항상 나를 감싸주고 이해해줘서, 오빠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까라는 생각은
거의 한번도 해보고 산 적이 없어서 그런 망발이 나왔나 봐. 나는 미쳤어 미쳤어를 반복하면서 복잡한 마음에
머리를 이리저리 헝클어트렸어. 순식간에 내 머리는 꼭 며칠 감지 않은 것과 귀신의 머리처럼 정말 엉망으로
가닥가닥이 꼬여있었고, 나는 입으로 푸우- 소리를 내면서 힘없이 소파에 드러누웠어.
그리고 또 내 하루는 지루하게 흘러가고 있었지. 오빠가 없는, 나 혼자뿐인 텅 빈 집에서.
TV도 셀 수 없이 채널을 바꿔가며 봤던 거 재방송 또 보고, 예능 프로든 시사든 관심 두지도 않고
멍-하게 TV를 보다가, 지겨워서 컴퓨터에 매달려서 인터넷도 하고.
하지만 인터넷으로 게임 같은 건 하지도 않는 내가 즐길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고,
난 급기야 만화책을 빌려다 보거나 영화를 빌려다 봤어. 그래도 시간은 정말 거북이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 느린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갔고 지루하다고 몸을 골백번은 비틀었을 때에야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 됐지.
“오늘은 직접 밥 해 줘야지… 잘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요리는 못해도 할 줄 아는 건 꼭 하나 있었다. 밥.
하지만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잖아. 반찬도 먹고 국도 먹어야지.
그런데 내가 그런 건 할 줄 몰라서 다 인스턴트로 때워왔지만! 오늘만큼은 오빠한테 사과하는 의미에서
내가 다 직접 해 봐야지라는 마음으로 빈둥빈둥할 때 인터넷 지식인 뒤져서 다 알아놨지롱.
시계가 6시를 칼같이 가리키자 마자,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손으로 대충 머리를 쓸어내려 단정하게 하고,
탁자에 있던 지갑을 집어 들었어.
“으이쌰- 마트가자!!”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렇게 목 높여 소리치면서.
“오늘의 메뉴는!! 흠.. 볶음밥이니까, 당근, 양파, 햄, 계란 그리고…”
마트에서 카트를 끌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혼잣말을 궁시렁거리면서 볶음밥을 할 재료를 찾아 다녔어.
매일 인스턴트 식품쯤은 편의점 가도 사니까, 마트에 나온 건 실로 오랜만이라서,
신기한 거 구경하는 것 마냥 카트에 반쯤 매달려서 요리조리 굴러다녔지.
볶음밥을 할 재료를 잔뜩 담고, 또 나온 김에 간식거리들을 잔뜩 사서, 양 손에 무거운 짐을 잔뜩 들고 낑낑대고,
손이 아파서 혼자 중얼중얼 인상을 살짝 쓰며 집으로 가는 도중에도 난 흥이 났어.
잘 안 부르던 콧노래까지 불러가면서 집에 도착했지. 열쇠로 문이 철컥- 소리 나게 연 다음에는, 문이 안 닫히게
받침으로 받쳐놓고, 집안에 들어섰어. 너무 어둡더라. 너무 썰렁하더라.
잠깐 나갔다 온 것 뿐인데도 내 기분엔, 몇 년 동안, 아니 몇 개월동안 집이 비워져 있던 것처럼 느껴졌어.
그리고 나갔다 오면서 느끼지 않았던 돌덩이 같은 느낌도 다시 마음 속에 무겁게 자리 잡았지.
“아유- 정말.. 못쓰겠다 윤민서! 집에 오면 마음이 편해야지 도대체-”
“뭘 그렇게 중얼거려?”
일부러 마음을 고쳐먹으려고 과장되게 팔을 걷어 부친 나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장거리들을 다시 으쌰- 하며 들려는데, 나 밖에 없었는데 목소리가 들려와서
뒷목에 소름이 돋을 만큼 깜짝 놀랬어.
“엄마! 아흐~ 놀랬잖아! 언제 왔어?”
날 놀래킨 범인은 진우오빠였어. 오빠는 좀 피곤해 보이는 안색이었고, 지금 막 집에 들어온 듯 내 뒤에 서 있었지.
이상한 느낌에 거실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니까 세상에 7시를 가리키는 거야.
내가 집 앞에 있는 마트 다녀오는데 한시간이나 걸렸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 있었지.
“들어가자… 이것들은 다 뭐야?”
“아… 저녁 해주려구. 볶음밥! 어때?”
“생각 없어… 피곤해. 쉬고 싶다.”
내가 씩- 웃으며 볶음밥이 어떠냐고 물어봐도 생각 없다며 무심히 봉지들만 들고 들어가는 오빠.
오빠가 피곤하겠다 라기보다는 오빠가 어제 내가 한 말로 삐져 있구나,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심드렁하고 무관심해 보이는 오빠의 모습이 서운하게만 다가왔지.
오빠도 이런 날이 있을 텐데 하고 이해해주는 마음이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나는 내 서운한 마음만 앞세워서
방으로 들어가려는 오빠의 앞을 척- 하고 가로 막았어. 오빠는 ‘왜 그래’ 라는 물음을 담은 표정으로 날 쳐다봤고,
그 표정마저 피곤해 보여서 나도 본의 아니게 인상을 써버렸어.
“오빠 왜 그래?”
“하아… 내가 뭘, 민서야.”
“아니, 어제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미안한데! 그래서 오빠 기분 풀어줄려구 내가 저녁 하려고
다 준비해 왔는데, 이게 뭐야! 남자가 쪼잔하게, 좀 풀면 안되나?”
“후우, 나 피곤하니까, 비켜줄래? 얘기는 나중에 하자.”
오빠는 연이어 한숨을 푹푹 쉬면서 내 옆을 비켜갔어. 난 뭔지 모를 배신감에 휩싸였지.
솔직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오빠가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나보다 라고 충분히 생각을 돌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옹고집처럼 저 사람이 어제 일로 삐져서 그러는 거다라고만 생각했어.
그러니까 불쾌감이 더 상승했고, 나는 오빠의 등 뒤에다 대고 소리를 빽- 질러버렸지.
“쫌!! 나 좀 배려해 주면 안되냐? 맨날 사람들하고 어울리다가 들어오면서!
맨날 집에 혼자 있는 내 생각은 어쩜 그렇게 안 해줄 수가 있어? 내가 얼마나 외로운 지 알기나 해?!”
사실, 내가 한 말은 내가 하면서도 납득이 안 가는 말이었어.
오빠는 이미 충분하게 나를 배려해 주고 있었는데, 그리고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노는 것만도 아닌데,
순식간에 열이 받친 나는 오빠를 무슨 맨날 나를 눈곱만큼도 배려 안 해주고 놀다가 들어오는
나쁜 놈으로 만들어 버렸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 입으려고 넥타이를 끄르던 오빠의 손길이 뚝 멈췄어.
그리고 오빠는 전에 없는 화난 표정으로 나를 돌아 보았지. 오빠의 눈빛에는, 멀리 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딱 봐도 내가 한심하다는 표정, 그리고 기가 차다는 표정이 어려있었어.
“하, 내가 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도대체 모르겠다 윤민서. 미안한데, 나도 사람이거든?
항상 니 기분만 맞춰서 살아 줄 수 있는 로봇이 아니라고. 내가 널 외롭게 만들었니?”
“나,나도! 친구들처럼 학교 다니면서!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살고 싶어! 감옥처럼 집에 있기 싫단 말이야!!”
“…니가 내린 선택이잖아. 결혼하면 대학 안 가도 된다고, 집에 있겠다고. 니가 한 선택이잖아.”
난 할 말이 없었어. 다 사실이었거든.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결혼을 했을 때, 오빠가 대학을 계속 다니라고 권유했어도,
안 가도 된다고 괜찮다고 우기던 게 난데. 난 정말 상관 없었어. 대학을 계속 다니던 말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내가 부렸어도, 난 결국 오빠한테서 위로를 듣고 싶었던 것 뿐인데….
난 비평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 오빠한테서 위로를 듣고 싶었어.
그렇게만 된다면 내 마음 속에 있던 무거운 돌덩이 같은 마음도 사라질 거라고 믿었지.
외로움 따위, 오빠 말 한마디면 다 괜찮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어느 새 내 눈가엔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어. 난 아무 잘못이 없는 오빠를 독기서린 눈으로 노려보고는
내가 사온 재료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쾅 닫았지. 문도 걸어 잠갔어.
작은 방은 거의 쓴 적이 없어서 냉랭하고 침대도 없었지만, 그런 건 상관 없었어.
혼자 있고 싶었으니까. 무릎을 세우고 손으로 잡아 앉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려니까 눈물이 주룩주룩
수도꼭지를 튼 것마냥 흘러내렸지. 방 밖으로 들리던 말던, 눈물이 쉬지 않고 나오니까
나는 큰 소리를 내면서 그냥 울어버렸어. 그리고 어느 샌가 그 차가운 방에서 그냥 쭈그려서 잠이 들었지.
“아으… 졸려어...”
나는 꼭 잠자리에서 깨면 비몽사몽으로 누운 채로 잠자리에 몸을 비비적댔어.
잠과 포근함에서 깨기 싫은 내 일종의 습관 같은 거였지. 다른 때 같으면 5분이고 10분이고
그렇게 침대보가 구겨져 흐트러질 정도로 온 몸을 비비적거렸을 텐데, 오늘은 잠시 그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어.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나는 것 같은 느낌에 난 눈을 번쩍 뜨고는 발딱 일어나 주위를 홱 둘러봤어.
난 어제 작은 방에서 그냥 잔 거 같은데, 내가 안방 침대 위에 있는 거야!
“…문도 걸어 잠갔었는데… 나, 참…뭐가 이쁘다고…”
난 혼이 빠진 것처럼 그렇게 중얼거렸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써가면서.
내가 내 모습을 봤다면 아마 정신 나간 미친 여자쯤으로 보지 않았을까 생각해.
얼마나 침대에 비비적거리며 잤는지 머리는 다 헝클어져서 이리 저리 떠다니고,
울다 자서 퉁퉁 부어 뜨기도 힘든 눈, 게다가 잠자고 일어난 사람의 기본 옵션인 눈곱에 침 흘린 자국까지.
다행히도 진우오빠는 방에 없었어. 그리고 조용한 걸로 보아서 집에 있는지 조차 의문이 들 정도였지.
어쨌든 나는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가서 욕실로 향했어. 치약을 묻힌 칫솔을 입에 물고 이를 닦으면서도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이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지. 그것 때문에 하마터면 치약거품을 삼킬 뻔 했지만..
“방에도 없고… 아침부터 어디-”
세수를 하고 가뿐한 느낌으로 나온 나는 목에 두른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대충 훔쳐가면서 거실을 둘러보다가
중얼거림을 멈췄어. 오빠는 방에서 자지 않았지만 거실의 소파에서 조용하게 자고 있었던 거야.
“미련하게, 이불도 안 가져다 덮고 자냐?”
오빠는 덩치도 알맞게 크고, 키도 컸어. 그런 사람이 소파에 누워서 자고 있으니 당연히 편하게 잘 리가 없잖아.
오히려 소파가 작아보였지. 오빠는 새우처럼 약간 몸을 옆으로 구부린 채 피곤함을 얼굴에 가득 담고
숨소리만 새근새근 내면서 자고 있었어. 소파 바로 앞에 있던 테이블에는 캔 맥주 5개 정도가 찌그러져 있었고.
“어쭈… 술까지 마시고, 밤에 안주도 없이. 속 버리게…씨…”
나는 온갖 말로 투덜거리면서 안방에 침대의 이불을 질질 끌어다가 오빠의 몸에 휙 덮어줬어.
이불이 무거워서 그런지 잘 안 덮어져서 결국에는 손으로 다시 잘 덮어줬어야 했지만 말이야.
이불을 덮어주면서 오빠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나는 약간 찡그려진 듯한 오빠의 얼굴에 속이 상했어.
자는 사람이 알 리가 있겠냐 만은 ‘으이구-’ 하면서 타박을 주고는 캔 맥주들을 치우기 시작했지.
캔 맥주들을 한꺼번에 손으로 끌어 안으면서, 맥주 알루미늄 재질이 부딪치는 가벼운 소리가 달갑게 들리진 않았어.
오히려 맥주 캔들이 오빠를 대변해서 나를 질타하는 것 같은 환청에 시달렸지. 뭐.. 아주 잠깐 동안.
그렇게 거실을 좀 치우고 흠- 하는 나름 심각한 표정과 함께 두 손을 허리에 얹은 나는
아침을 뭘 하면 좋을까 라는 전형적인 주부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어.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었지. 22살에 아줌마라니.. 하지만 몇 번을 말했듯이, 후회는 없어.
난 22살의 주부가 될 각오를 할 정도로 오빠를 아주 많이 사랑하니까.
“아… 볶음밥!”
이렇게 이런 저런 잡생각에 휘말려 다니던 내가 짧은 순간에 생각해 낸 거였어.
물론 어제 사 놓은 재료들이 생각나서. 원래는 어제 저녁에 내 솜씨로 만든 볶음밥을 오빠랑 둘이 먹고서
서로 화나 오해를 풀려고 그랬던 건데, 일이 이상하게 꼬였단 말이야.
내가 볶음밥을 하자고 결심한 시간이 아침 8시 였고, 현재 시간은 9시 반이야.
이 한시간 반 동안을 나는 재료를 꺼내서 씻고, 모양새 예쁘게 써는 데에 시간을 다 보내고 있었지.
양파를 벗기고 썰 때는 눈이 따끔따끔해서 한동안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눈물을 줄줄 흘렸고,
계란을 폭착폭착 스크램블 식으로 만들 때는 성급하게 계란을 프라이팬에 휘휘 젓다가 손을 데어서
프라이팬을 떨어트리기도 했어. 참 요란하다. 그치?
지금은 당근을 써는 중이야. 당근은 단단해서, 칼로 써는 데도 턱-턱- 하는 소리가 나고
왠지 이 모든 걸 처음 하는 나로서는 당근을 써는 것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어.
“……하아……민서…? 뭐하냐 지금…?”
당근을 힘겹게 썰고 있는 내 등 뒤로 잠에서 막 깬 듯한 오빠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어.
숙취때문인지 끄응- 하는 신음소리도 같이. 나는 오빠가 일어난 걸 보고 싶어서
당근은 계속 썰면서 고개를 뒤로 돌려서 오빠를 봤어. 아무래도 소파에서 잔 게 힘들었는지
오빠는 일어나서 몸을 이리저리 휘휘 돌리고 있었지.
아무래도 어제 싸운 것 때문에 말을 붙이기가 좀 쑥스럽고 힘들었어.
“아…아침…볶음밥 할려고…아읏..!”
무모하게 내가 무슨 주부경력이 화려한 다른 여자들처럼 계속 재료를 썰면서 한눈팔고 얘기를 하려던 게,
그만 당근을 계속 썰다가 손을 옮기는 걸 깜박해서 칼이 내 손끝을 살짝 베고 지나갔어.
나는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찡- 하는 아픔에 손에서 칼을 떨어트리고 고개를 황급히 앞으로 돌렸지.
살짝 베인 살에서 송글송글 짙은 빨간색의 핏방울들이 순식간에 나와서 떨어지고 있었어.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나는 그저 피가 나는 손가락을 꾹 움켜잡고 그대로 서 있었지.
그 때 발소리가 저벅저벅 들리더니 오빠가 내 팔을 잡고 내 몸을 휙 돌려서는 거실로 성큼성큼 나를 끌고 갔어.
“칼에 손이 베였으면 빨리 치료할 생각을 해야 할 거 아냐. 앉아.”
“어…응…”
오빠는 나보다도 더 능숙하게 거실 캐비닛에서 약 상자를 찾았어.
오빠가 밑에 휴지를 받쳐놓고 상처에 알코올을 부을 때는 엄청나게 밀려오는 쓰라림에
저절로 내 얼굴이 오만상으로 찡그려지고 입에서도 “쓰읏-” 하는 소리가 새 나왔어도
나는 불평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있었지. 지은 죄가 있는 만큼.
“많이 아파?”
“어…? 어, 아니 괜찮아, 정말로. 별 거 아냐. 나 하나도 안 아퍼.”
내가 인상 쓰는 걸 봤는지 오빠는 자기 인상도 살짝 구기면서 나한테 아프냐고 물어봤어.
계속 먼저 말 걸어주는 게 내 딴에는 고마워서, 계속 안 아프다는 말만 허둥지둥 반복했지.
내가 생각해도 내 이런 반응이 조금은 오버다 싶고 웃겼지만, 오빠도 그렇게 생각했나 봐.
나를 잠깐 한번 바라보던 오빠의 입가에도 피식- 하고 옅은 웃음이 지나갔거든.
오빠가 웃었다! 기회는 이때 뿐이다 하고 내가 마음속으로 수천 번 용기를 내서 겨우 입을 열었어
“…오빠… 미안… 어제 미안해…”
“됐어. 어제 나도 그렇게 말 하는 게 아니었다. 괜찮아.”
“내가…어려서……오빠보다 많이 어려서……미안…해…”
오빠의 다 이해한다는 그 부드러운 음성에 고개를 푹 숙인 내 얼굴에는
화끈화끈 열기가 돌면서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어. 동시에 내가 오빠보다 많이 어려서,
오빠가 많이 힘들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어서 마지막 말을 하면서는 우는 것 때문에 들키지 않으려고
말을 잇기가 힘들었어.
오빠는 응급처치를 다 하고 상자를 닫고 나서,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들었어.
그리고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포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 내 눈물은 멈추기는커녕 더 펑펑 쏟아졌어.
“으이구 울보야, 윤민서 아주 그냥. 미안한 짓은 앞으로 안 하면 되는 거야.
이렇게 배우면서 살면 되지. 뭐가 문제야? 뚝해.”
“으허엉- 오빠… 흐엉… 미안…흐끕…해…허엉-”
오빠는 눈물이 흐르는 내 볼을 자기 손으로 훔쳐주다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눈물의 양에
손으로는 감당이 안 됐는지, 화장실에서 수건을 가져와 내게 내밀었어. 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마음 같아선 손수건을 착- 빼주고 싶은데, 있는 건 수건 밖에 없네. 자.”
라고 말하면서. 나는 그 상황이 또 웃겨서 울다가 반쯤 웃는 기괴한 얼굴표정과 소리를 냈지.
어정쩡한 울음과 웃음의 중간 소리. 오빠도 어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돌리면서 손으로 입을 반쯤 가리고 웃었어.
그리고는 나와 눈높이를 맞춰 주었지.
“오빠가, 자취를 많이 해 봐서, 볶음밥 정도는 할 줄 알거든? 볶음밥 하는 거 가르쳐 줄게. 어때?”
“…흐끕…좋아…흐끕…”
나는 눈물범벅에 딸꾹질을 해대면서 오빠의 제안에 좋다고 대답하고는 웃었어.
눈물을 펑펑 쏟아내던 얼굴로 웃었으니까 좀 많이 웃겼을 꺼야.
오빠는 “괴물~” 하면서 박장대소를 했고, 나는 그런 오빠를 또 퍽- 소리 나게 한대 때렸지.
오빠와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일곱 개의 계단이 존재하고 있어.
오빠는 그 계단의 맨 위에 서 있고, 나는 계단의 맨 아래쪽에 서 있지.
보이지 않는 이 계단은 우리 사이의 나이와 세월의 차이를 말해주고,
어쩌면 서로 이해 못할 정도로 멀게 보이기도 해. 하지만 괜찮을 거야.
내가 오빠를 좀 더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오빠가 지금까지 내게 고맙게 그래왔던 것처럼 나를 이해해 주고 감싸 주면,
우리 사이를 멀게 하는 일곱 개의 계단은 훌쩍 뛰어 넘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첫댓글 잘보고가요~~~~~~~
잘 보셨다니 기쁘네요 ^ㅡ^
오옷!!!진짜재밌어요-일상적이기도하구요.잘보고갑니다~^0^
감사합니다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