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사건이 끝나고 퇴마사들은 오랜만에 그들 나름대로의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현암의 준후에게 기공술을 가르치다가 제주도에 은신하고 있던 박신부의 소포를 받고선 주악산으로 떠났고 승희는 혼자 퇴마사들의 아지트에서 혼자서 염력을 자유자재로 이용하기 위해 혈도를 외우고, 총기를 연구하고 있었다.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개인적 시간이라고는 하지만 모두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진 않았다.
"정말 지겹군....나 혼자 집 지키는 신세잖아...."
혼자만의 시간으로 무료해진 승희는 염력으로 물건을 허공에 띄우다가 그만 둬 버렸다. 자신혼자 거의 한 달이나 이 아지트에 있으면서 승희는 외출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박신부와 현암이 떠나면서 남겨준 숙제가 워낙 방대했기 때문이었다. 한의사 못지 않게 인체의 혈도를 일일이 다 알아야 했고 여러 가지 의학상식에도 능통해야 했다. 심지어 준후까지 자신을 학생취급하며 부적과 술법에 대한 숙제를 남겨주고 갔다. 공부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설사 외출을 한다해도 혼자 거리를 방황하고 싶진 않았다.
"백호씨라도 불러볼까....아니야...흠.....연희언니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연희언니 지금 뭐 할까? 정말.....심심할 때 연락 한번 해볼 친구조차 없다니.....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아니야! 현승희! 언제부터 그렇게 한가했어? 지금 다른 사람들은 밖에서 죽도록 고생하고 있는데 말이야..."
승희는 거울을 보며 자신을 다그쳤다. 잠시라도 딴 생각을 한 것이 현암과 신부님 그리고 준후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이 지루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모두들 올 기미도 안 보이는데...... 잠시 시내구경이나 나가볼까?"
밖은 오늘따라 유난히 술렁거렸다. 막 끝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에 연이어 새해를 기대하고 있는 연말의 분위기가 사람들을 거리고 끌어내고 있었다. 바람도 매섭고 다른 사람들처럼 연인과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승희는 나름대로 만족했다. 한참 거리를 걷다가 승희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미약하지만 영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뭐야......단순한 점집 이잖아? 분위기는 좀 색다르긴 해도......"
고풍스럽고 모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는 곳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역술인이나 무당이 있는 동양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약간의 영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모두가 승희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한번 들어가 볼까?"
승희에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신중함이 더 앞섰다. 시간도 꽤 흐르고 있었고 남은 숙제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점이라면 차라리 준후한테 토정비결이나 보는 게 낫지......"
- 날 그런 꼬마한테 비교하는 겁니까?
승희는 흠칫 했다. 방금 분명히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것도 마음속으로......성난큰곰의 대화방식과 흡사했다. 승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맞은편에 있는 점집에서 들리는 듯 했다.
"역시 저기 있는 점쟁이도 보통사람이 아닌가?"
- 그렇게 궁금하다면 한번 들어와 보는 게 어때요? 당신은 아름다우니 그냥 봐드리죠."
승희는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2 ## 암시
승희는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실내에는 외관과는 다르게 온갖 신기한 장식품들과 화려한 샹들리에 진귀한 것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승희는 전혀 그런 것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꽤 긴 복도를 걸으며 마음속으로 울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언제 나타날지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긴 커튼 너머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승희는 조심스럽게 커튼을 열었다. 말쑥한 차림의 찰랑거리는 금발의 남자가 탁자에 타롯카드를 펼쳐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남자가 먼저 말을 건넸다. 손을 내저으면 맞은편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날......알고있나요?"
"오랜 전부터 당신이 올 거라는 건 알고있었습니다."
그는 펼쳐놓은 카드를 다시 유연한 손눌림으로 섞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설마 그 카드가 알려줬다는 건 아니겠죠?"
"하하! 이건 그냥 제 장난감에 불과해요. 하지만 이걸로도 얼마든지 알 수 있죠. 이것도 보통 녀석은 아니니까요."
"밖에서부터 느꼈지만 당신이야말로 보통사람은 아닌 것 같군요."
"그러는 당신도 만만치 않아요. 지금 제 목걸이가 붉게 빛나고 있군요. 이렇게 밝은 광채를 빛낸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보랏빛이어야 할 자수정이 붉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가 목걸이를 승희에게 내밀자 자수정이 더욱 더 반응하며 붉은 광채를 내뿜었다.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당신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 칼만 휘두르고 다니는 남자는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요."
승희는 그의 말에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이 남자가 어떻게 현암까지 알고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남자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싸워왔던 적들 중에 한 사람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혹시 블랙써클에 아직도 남아있는 사람이 있는 걸까? 이 자에겐 범상치 않은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만약 이 자와 싸워야 할 상황에 놓인다면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무엇 보단 혼자였고 염력을 응용해서 사람의 혈도를 건드리는 건 아직 수련이 부족한 승희에겐 무리였다. 세크메트의 눈을 만져보았지만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승희는 서서히 긴장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어떻게 내 주위의 사람들까지 알고 있는 거죠?"
"난 당신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고 비슷한 운명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당연히 관심이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 하나 알아내는 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죠."
"비슷한 힘?"
"당신의 마음은 아무리 알려해도 벽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군요. 나 역시 그렇습니다."
".....!"
"당신과 나에게 투시력은 서로에게 무용지물입니다. 계속 나에게 말을 걸면서 마음을 읽거내는건 오히려 당신의 체력소모만 부추길 것 같군요."
승희는 한 숨을 내쉬였다. 마음도 읽을 수 없다면 그냥 믿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자신에게 나쁜 의도는 없는 거 같았고, 웬지 모르지만 저 남자를 믿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저 남자의 말투는 여전히 귀에 거슬렸다. 처음 보는 사람이 마치 자신에 대해 다 알고 있는 듯 말하는 게 불쾌했다. 거만한 표정으로 카드를 섞고 있는 게 밉살스러워 보였다. 순간 승희는 발끈해 버려서 있는 대로 나오는 말을 퍼부어 버렸다.
"당신 도대체 누구죠? 왜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고선 알지 못할 얘기만 하는 거예요? 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다면 난 왜 당신이 생판 남처럼 느껴지는 거죠?" 난 당신 난생 처음 만난다구요!"
"처음....만난다구요? 훗... 역시 내 암시가 녹슬지 않고 그대로 남겨져 있군요."
그는 고개를 떨구며 쓴웃음을 지었다.
## 3 ## 대자재천의 화신
"처음....만난다구요? 훗... 역시 내 암시가 녹슬지 않고 그대로 남겨져 있군요."
그는 고개를 떨구며 쓴웃음을 지었다. 승희는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자기를 알고있었다는 투로 말하는 남자가 점점 수수께끼처럼 느껴졌다.
"암시라니? 무슨 말이죠? 혼자 중얼거리지만 말고 알아듣게 얘기해요!"
"당신은 알 필요 없습니다.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니까."
"누구 맘대로! 난 가겠어!"
승희가 자리를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승희가 방을 나서기 위해 커텐을 열자 커텐이 다시 거칠게 닫혔다. 승희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커텐에 염력을 집중했다. 아까는 단순한 천으로 만들어진 커텐 같았지만 승희가 염력을 집중할수록 더욱 커텐은 더욱 거세게 저항했다. 자신의 힘이 아니 다른 힘도 작용하고 있는 듯 했다.
"무슨 짓이죠?"
"쓸데없는 체력소모는 그만 두라고 말했을텐데? 그 얇은 커텐 하나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면서 그러는 건 무모한 짓이지."
"당장 그만둬요!"
승희가 빽 소리를 지르며 남자의 뒤에 있던 도자기를 날렸다. 남자가 앉아있는 채로 고개만 까닥거리며 가볍게 도자기를 피하자 승희는 커텐에 집중했던 염력을 풀고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 힘을 집중시켰다. 아직 염력이 완전하지 않은 승희에겐 무거운 샹들리는 아직 무리였지만 승희가 온 힘을 집중시키자 조금씩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승희는 조금씩 움직이는 샹들리를 보면서 남자의 정수리에 떨어질 샹들리를 상상했다. 승희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샹들리에 집중시켰던 힘을 거두기로 했다. 승희가 샹들리에 점점 힘을 빼는 동시에 이상하게도 남자의 정수리를 향해 돌진해왔다. 승희는 안돼! 하고는 귀를 막고는 눈을 감았다. 몇 초 후 무언가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와 유리가 깨지는 소리대신 폭음이 들렸다. 그리고 승희의 눈앞엔 피가 철철 흐르는 머리대신 화려한 빛을 내며 공중으로 떨어지는 유리조각들이 보였다. 그 순간이 승희에겐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승희의 눈이 크게 떠지면서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어...어떻게...."
"위에서부터 그런 살기가 느껴지는데 못알아 챌 리가 있겠습니까?"
"저 샹들리.... 당신이 파괴한 건가요? 난 분명 힘을 거뒀는데...."
"왜 도중에 힘을 거둔거죠? 날 너무 과소평가하는군요."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죠?"
"현승희...당신과 비슷한 사람입니다."
승희는 자신의 이름을 입밖으로 꺼낸 적도 없지만 이젠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라서 투시력도 갖고 있는 걸까? 설사 투시력이 있다해도 아까 투시력은 서로에게 무용지물이라고 말했었다. 승희는 정말 웃기는 남자라고 생각하며 약간 비꼬는 식으로 남자의 말을 받아쳤다.
"그럼 당신이 내 잃어버린 쌍둥이 오빠라도 된다는 말이예요?"
승희는 팔짱을 낀 채 코웃음을 치며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암튼 난 당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인데 당신은 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군요. 매우 불쾌한데 내가 당신 이름정도는 알아야하는 거 아닌가요?"
"내 이름은 케빈입니다. 그리고 보시는 바와 같이 혼혈아구요."
"그렇군요. 난 머리만 번쩍번쩍 화려하길래 양키흉내나 내는 양아치 괴짜 점쟁인줄 알았죠."
"여전히 경계하고 있군요."
"그러면 친한 척 해야 하는 건가요? 아까부터 모를 말만 하고 당신은 내 이름은 물론이고 내 주위사람까지 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헛소리나 하곤....내 힘이 당신에겐 전혀 통하지도 않고......그만 하죠."
승희는 점점 감정이 격해지고 있었다. 도대체 자신이 이 남자와 입씨름을 벌이고 있어야 하는지 영문조차 모르고 있었다. 아무생각 없이 이 곳에 덥썩 들어온 자신이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격해진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거리는 자신이 참을 수가 없었다. 승희의 자존심이 소리 없이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흥분하고 있군요."
잠시동안 얼음처럼 냉랭했던 케빈의 얼굴에 있는 입가에 조금씩 조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그것마저도 승희에겐 매우 끔찍했다. 투시력이 무용지물이라는 건 거짓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케빈은 승희의 정곡을 쑤셔대고 있었다.
"정말 잘~알 아시네요. 여기에 더 있다간은 흥분을 넘어서서 폭발할지도 모를 거 같으니까 이만 날 보내시죠!'
"같은 말을 계속 하게 만들지 말아요. 당신을 쉽게 보내려면 당신을 불러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잘못 말하고 있군요. 난 당신이 불러서 여기 온 게 아니예요. 그저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잠시 들른 거 뿐 이예요. 그리고 지금 그 호기심이 정말 쓸데없는 거란 갈 확실하게 알았으니까 그만 돌아가겠어요."
"난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려는게 아니예요. 잠시 날 믿어보는 게 어떻겠어요?"
"아까는 당신을 조금은 믿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당신은 너무나도 수상해요. 내 투시력과 당신의 투시력은 성질이 너무나도 비슷하고 염력조차... 아니 당신의 염력은 너무 파괴적이예요."
"파괴적이라....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시바(Shiva)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시바(Shiva) 인도신화에 나오는 파괴의 신 그 시바 말인가요?"
"그 시바가 불교에 수용되면서 대자재천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승희는 저 남자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하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케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다음 케빈은 지금까지 한 말중에서 가장 황당한 말을 내뱉었다.
"내가 바로 대자재천의 화신이었습니다."
남자의 갈색 빛 눈동자가 승희의 힘에 반응했던 자수정과 같이 붉은 보랏빛을 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