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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손공린(孫公隣) (1989, 11,14~1966,3,30)
2018년 8월15일 제73회 광복절 경축기념식장에서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을 받게 됩니다.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어쩌면 지금 아버지께서는 지구에서 가장 멀리 200억 광년 멀리 떨어져 있는 별, 퀘이사, 또는 대한민국 이 지상에서 가장 먼 거리 7천3백만 광년 떨어진 에리다누스 (Eridanus constellation)은하, 희미한 안갯속 아스라한 천공(天空), 그 어디쯤에서 우리들을 내려다보시고 계실 아버지! 아, 아버지. 오늘은 아버지께 가슴에 애 돌아 흐르는 벅찬 감정으로 삼가 편지를 씁니다.
생각나시지요?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요?
그날! 기미년, 1919년 3월 1일! 낮 12시 종로 탑골공원 ᅟᅳ
그날, 아버지께서 열아홉 살 피 끓는 젊은 나이에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되찾고자 목이 터져라 "조선 독립만세! 조선 독립만세!"를 외치시며 두 손에 움켜쥐신 태극기 흔들며 물밀듯 뜨겁고 숨찬 함성으로 종로 대한문 적선동 체부동 남대문 일대를 누비시며 비밀리에 인쇄된 독립신문 가슴에 안고 가가호호 뿌리시며 15일간 숨어 독립만세 운동을 하시다가 그 해 3월 15일 왜경에 체포당하셔서 3번의 상고 끝에 1919년 5월 6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언도를 받으시고 차디찬 감옥 서대문형무소 감방에서 봄여름 가을 겨울 긴 날들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아버지 그때, 물 한 모금 밥 한 그릇 제대로 드시지도 못하시면서 햇빛 내려 쪼이는 거리를 숨차게 뛰어다니셨습니다. 얼마나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셨을까요? 15일간 밤이면 밤마다 어둡고 음습한 곳에 숨어 다니시며 날이 새면 다시 거리를 뛰어다니시며 "조선 독립만세!"를 외치시며 허기와 목마름 달래셨을
아버지 아버지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면 하도 서러워 가슴이 메어지고 뜨거운 눈물만이 거침없이 흐르기만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옥고를 치르신 뒤에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으로 러시아로 망명하시어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되찾고자 쉴 틈 없이 독립운동에 생애를 다 바치셨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의 해방이 되고도 이 나라의 건국 초기.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초지일관으로 나라사랑 민족 사랑에 모든 열정을 다 바치셨던 자랑스러운 아버지 십니다.
아버지! 이제 이 땅에서 멀고 먼 천공에서 내려오셔서 아버지께서 바치셨던 독립운동사 99년 만에 뒤늦게나마 대한민국 정부에서 나라와 민족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애족장'! 훈장을 이 자식 놈이 대리로 받아 아버지 가슴에 달아드리겠습니다.
2018년 8월 15일, 제 73회 광복절 경축식장으로 어서 오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너르신 아버지의 따뜻한 가슴에 영예로운 건국훈장 '애족장'을 달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다음 해 3,1절엔 기미년 3월 1일 숨차게 뛰어다니셨을 그 거리를 이 자식 놈이 아버지의 노고를 기리며 다시 뛰어다녀보겠습니다 그날 아버지께서 얼마나 힘드셨는지를 생각하며 그 길을 뛰어다녀 보겠습니다.
탑골공원에서 대한문 적선동 체부동 남대문 가는 길 신작로를 태극기 흔들며 숨차게 숨차게 뛰어 보겠습니다.
아버지 이 자식 놈 내려다보시며 빙그레 웃어주세요
사랑합니다 아버지 아버지 ᅟᅳ
♥
이 자료는 아버지께서 1922년 10월, 러시아 베르츠네우스크 에서 열린 <코민테른 극동 민족대회> 5일차 회의에서 조선 대표단의 대의원 자격의 일원으로 참석하여 열띤 발언도 하시고 대의원 자격 심사위원으로 선출되시기도 했던 아버지에 관한 자료입니다.
'코민테른 극동 민족대회'는 이동휘, 조봉암, 김규식 홍범도 등과 함께 조선 대표단 대의원으로 참석하셨는데, 1919년 3.1독립 운동에 학생 주동 세력으로 독립만세운동을 하시다가 검거되어 1년의 옥고를 치르시고 출옥하시자 일제 감시자 리스트에 올라 일경의 끈질긴 미행 감시로 일상이 자유롭지 못하여 러시아로 망명하여 1920년대 민족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시기에 열혈 나이 20세! 서울 중앙학교 학생신분이셨으며 최연소자로 참가하여 활동을 하셨습니다.
이 대회가 끝나고, 러시아에서 조국의 독립운동 활동을 하시다가 다음 해인 1923년 조봉암 선생 등과 모스크바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속성과정을 수료하시면서 조소앙, 이동녕, 김규식, 여운형, 장덕수, 송진우,신익희,지청천 장군, 박시창 장군 등과 함께 러시아에서 중국지역에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적으로 활동을 하셨습니다. 코민테른 극동 민족대회 5일간 활동하신 회의록은 러시아 정부의 협력으로 입수되어 현재 국가기록원과 국사편찬위원회에 한국사 관련 소중한 사료로 분류, 한국사 기록물로 편찬된 서고 자료로 이곳에 별첨으로 공개하겠습니다.
2년여간에 걸친 자료조사로 발견된 회의록을 읽으면서 이곳에서 발견된 5차 회의 석상에서 아버지의 발언 내용을 읽으니 마치 살아계신 아버지의 숨찬 음성을 듣는 듯하여 복받쳐 오르는 감격으로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나라사랑 민족 사랑에 대한 숭고한 아버지의 젊은 날의 모습이 너무 존경스럽고 감동스럽기만 합니다.
조국을 떠나 중국으로 러시아로 불철주야 발이 닳도록 뛰어다니셨을 아버지의 숨찬 젊음 20대!
이역만리 러시아의 혹독한 동토에서 따뜻한 잠 한 숨 못 주무시고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챙겨드시지 못하시고 얼마나 춥고 배고셨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집니다.
아버지! 아, 아버지 그 무엇을 위해 추구하셨기에 그 많은 날들 그토록 고생을 하셨습니까?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바치셨던 독립운동을 위한 피끓는 투쟁으로 나라사랑 민족사랑에 평생을 바쳐오신 아버지의 생애를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하고 머리가 숙여집니다.
2018년 제73회 광복절 대한민국 정부수립 70주년 경축식전에서 아버지의 나라사랑에 대한 노고에 보답하고자 아버지의 독립운동사 99년만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뒤늦게나마 서훈하는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아버지께서 아낌없이 바치셨던 애국 애족사랑에 대한 깊으신 정신을 우리 모두 계승하여 대한민국의 영원한 번영과 발전에 자손만대 기리기리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사의 유산으로 남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아버지의 유족들 모두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집안 형제 혈연의 아버지시라기 보다는 우리 민족의 위대하신 애국선열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바위 보다 넓으신 아버지의 무한한 도량과 깊고 깊으신 나라사랑의 불꽃같은 유지를 자손만대
기리기리 가슴에 새기며 세사를 살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코민테른 극동민족대회
조선대표자단 면모
입력 1998.12.05. 09:49 수정 1998.12.05. 09:49 페이스북
(서울=연합) 金台植 기자 = 흔히 공산주의 인터내셔널로 불리는 코민테른이 1922년 초 모스크바에서 개최한 극동민족대회는 한국 독립운동사나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발달사에서 일대 획을 긋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코민테른은 당시 국제공산주의자들이 파시즘과 제국주의 아래 신음하고 있는 약소국가를 끌어들어 궁극적인 세계 공산화를 이루기 위해 만든 국제조직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조선대표단이 몇명이었는지, 또 어떤 단체에서 대표를 파견했는지, 대회기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등 어느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게 없 었었다.
이는 무엇보다 모스크바에 있는 옛 코민테른 공문서가 오랜 냉전체제 때문에 서방학자들의 접근이 불가능했던데다 그나마 공개된 영어판 코민테른 공문서에는 거의 모든 인명이 본명이 아닌 가명으로 사용됐기 때문이었다.
60∼70년대 다소 우파 입장에서 공산주의 운동사를 썼던 스칼라피노와 이정식은 10명의 조선대표단 명단을 작성했으며 김준엽과 김창순은 12명을, 서대숙은 일본 관헌 문헌 분석을 통해 28명을 밝혔다.
또 90년대 들어서도 한국외대 반병률 교수가 26명을, 권희영 교수는 36명을 추정했으나 그나마 잘못된 이름이 많았다.
그러나 성균관대 임경석 박사는 러시아 유학기간 동안 입수한 방대한 양의 코민테른 자료 분석을 통해 김규식 대표를 비롯한 극동민족대회 조선대표단이 모두 56명이었으며 그 소속은 물론 신원까지 완전히 밝혔다.
대표단은 국내외 각 단체별로 선발됐다.
상하이지역에서는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6명)을 비롯한 9개 단체에서 모두 16명을 선발했고 국내에서는 조선노동대회(6명)와 조선공제단(3명) 등 4개 단체 13명이 뽑혔다.
서간도 지역에서는 대한광복군총영(2명), 대한독립단(2명) 등 4개 단체 대표 7명이 모스크바로 갔으며 러시아 극동지역 이르쿠츠크의 각 단체도 극동민족대회에 대표를 보냈다.
이들 조선대표단 56명은 대다수가 20∼30대였으며 최고령자는 당시 55세였던 고려혁명군 대표 홍범도, 최연소자는 20세였던 이재곤과 손공린이었다.
대표단 단장을 맡은 것으로 밝혀진 김규식(金奎植.1877∼1952)과 여운형(呂運亨.1885∼1947),홍범도(홍범도(洪範圖).1869∼1943)는 잘 알려진 인물.
일반에는 비교적 생소하지만 우리나라 초기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김단야(金丹冶.1900∼1937?)와 임원근(林元根.1900∼1963)은 박헌영과 함께 조선공산당 `트로이카'였으며 투옥과 석방을 되풀이하며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연해주지역 한인 이주민 2세인 한명세(韓明世.1885∼1936?)는 러시아 이름이 한안드레이 아부라모비치로 1904년 러일전쟁때 러시아 군대로 복무했고 러시아 혁명에도 적극 참여해 각종 고위직을 지내다가 1936년경 스탈린 대숙청때 처형됐다.
김재봉(金在鳳.1890-1944)은 경북 안동 유생 출신으로 한학을 공부했으며 3.1운동에 투신했고 기자생활을 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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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상에, 세상에~
훌륭하신 아버지의 아드님 손흥국 선생님도 훌륭하십니다.
그 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으셨을가? 생각하니 눈물이 납니다. 그 어린 나이에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그리 크셨을가요?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박영숙 부원장님께서 격려를 해 주시니 너무 고맙습니다. 아버지께서는 1945년 해방후 혼탁한 국내정세에서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셔서 각계각 파벌의 정치조직을 한 곳에 응집하셔서 김구선생 이승만세력 또 다른 정파를 한곳에서 조정절충시키면서 대한민국 건국에도 많은 공헌을 하신 분으로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전쟁고아 미망인 또는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 재산을 다 바치면서 대학 후원회 사회사업을 하신 참 좋은분이셨습니다 정작 가족을 위해서는 재산 하나 남겨주시지 않으신 분으로 어릴적에는 원망도 많이 했지만 뒤늦게 생각하니 아버지의 크신 뜻을 이해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서라도 축하드립니다. 가문의 영광이십니다.
기쁜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독립유공자의 아드님이신 선생님을 뵙게 되어 영광이예요. 이제라도 국가가 선생님의 숭고하신 뜻을 기리게 되어 기쁩니다. 손공린 선생님께선 은하계 어디쯤이 아닌 손홍국 선생님의 가슴 속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계시네요. 감사합니다. 73회 경축식을 눈여겨 보아야겠습니다.
김명옥 선생님의 격려에도 감사합니다. 서울국립박물관에서 진행될 광복절 행사에 초대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내가 사는 이곳 고양시문예회관에서 거행되는 광복절경축식에서 서훈 받기로 자청했습니다 국가와 국민의 이름으로 서훈하는 애족장 서훈을 굳이 사람많고 복잡한 곳에서 받기 보다는 나의 거주지 고양시가 주관하는 행사에서 받는 것이 더욱 편안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나중에 훈장도 가족들과 상의해서 독립기념관에 기증할 생각입니다
천혜동산의 가족이므로 천혜동산 모든분들과 기쁨과 사랑을 공유하는 마음 참으로 행복합니다 더운날 모든분들 건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학교때 3.1운동 하신분들을 들었는데 가까운분의 가족이 이렇게 훌륭한 분의 자손이라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정말 어린나이에 독립운동하시며 어렵고 힘든 큰일을 하여 현재의 우리들이 평안하게 지내게 됨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8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됨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희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시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번 광복절은 정말 뜻깊겠네요. 아버님도 훌륭하시고 손선생님 또한 훌륭하신 분이네요. 블로그를 다시 열게 되어 더욱 반갑습니다. 선생님 항상 건강하시고 주님의 은혜안에서 축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옥희 선생님 어려운 수술후에 건강은 어떠신지 염려했습니다
댁내 모두 건안하시지요?
격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조국광복에 헌신하긴 아버지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은 대한민국 건국에 밑거름이 되었으며 귀감으로 후세에 영원한 국가기록으로 기억될 수 있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폭염에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경축식행사에 혹시라도 카메라에 비춰질까 눈을 떼지 못하고 보다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거주지에서 받으신다니 다행입니다. 저희 시 아버님께서도 가난한 어르신들 고아, 과부, 정신병자, 나환자들을 돌봐주셨는데 손 선생님의 부친님께서도 착한 마음으로 소외된 사람을 돌봐주셨다니 우리는 인연인것 같습니다. 건강하시고 시원해지면 광주 오세요.